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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심연의 이치

2023.10.31 15:2410.31

 


심연의 이치

 

김은수는 멋쟁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거나 대단히 아름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자신이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12살 때 찾아 간 타로 카드 가게에서 훨씬 더 커지게 되었다. 그저 괜히 길을 걷다 호기심에 찾아간 곳이었다. 타로 카드를 보던 사람은 김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굉장한 일을 하시는 사람이 될 거에요.”

말하는 목소리는 그냥 어린이들에게 “차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하거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는 덕담을 해 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은수는 그렇다고 해도 타로 카드 가게에 찾아 온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엄청난 말을 해 주는 경우는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딱히 티를 낸 적은 없지만 김은수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남들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학창 시절을 지나는 동안 그런 믿음이 흔들릴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김은수는 한국 학교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인 성적으로 본다면 자신이 별로 대단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매번 시험칠 때 마다 명백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친구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다거나, 주목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나이가 들 수록 잘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김은수의 믿음은 더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 학교가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사악한 곳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런 기준에서 높은 순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 만큼 더 훌륭한 사람은 뜻일 수 있다. 마찬 가지로 이런 왜곡된 곳에서 누가 친구들에게 인기 있고 주목 받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 만큼 그도 나쁜 인간이라는 의미일 수 밖에 없다. 지금 뛰어 나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진정을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김은수는 아직 자신이 미래에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되어 모두가 우러러 볼 날이 올 기회는 충분히 열려 있는 것 같았다.

김은수는 자신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평범한 삶의 시각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결국 세상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을 깊게 이해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만약 어릴 적부터 칭찬만 받고 자랐고, 초등학교 때부터 인기 있는 자리에만 있었던 사람이라고 있다고 해 보자. 그런 사람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런 특수한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위에 서 있으면 결국 세상을 망가뜨릴 뿐이다. 그에 비해 김은수는 자신이야 말로 많은 사람들의 위에 서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복합적인 이유로 그 사실로부터 어떤 분노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또 그 분노감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이며 그것이 자신을 위대한 미래로 이끌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어른이 된 후, 김은수는 그 분노가 조금씩 커지며 점점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김은수는 몇 안 되는 친구를 만나 다른 학창 시절 같은 반 아이들의 소식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소식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들을 수록 세상은 완전히 꼬여 있었다.

세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버젓이 유명한 회사의 정규직으로 취업해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항상 친절한 척 하며 남을 돕는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던 너무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친구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취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가 하면, 학창 시절에 김은수보다도 공부를 못했던 친구나 반에 있는 지 없는 지 모를 정도로 심심하던 친구가 정규직으로 취직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항상 수업 시간에 교사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던 밥맛 떨어지는 노예 같은 친구는 공무원이 되었다고 했고, 지저분한 소리에 가십거리만 줄기차게 떠들고 다니면서 친구들과 잡담하는 것만 좋아했던 친구는 변호사가 되었다고 했다. 김은수는 그런 아이들의 연봉을 알아 보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알아 보니, 싫어 하던 아이들 중에 자기 보다 연봉이 많은 사람들이 많았고, 정규직인 친구들도 너무나 많은 것 같았다.

김은수는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그 아이들이 비록 돈을 많이 벌지만, 인생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 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예를 들면,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는 기업에서 부당한 대접을 너무 많이 받다가 스트레스 때문에 곧 병에 걸릴 것이라고 말하는 일이 많았다. 공무원이 된 친구는 이 잘못된 사회와 잘못된 나라에 기생해서 사는 한심한 인간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했다. 변호사가 된 친구는 아마도 불륜 소동에 휘말리거나 횡령이나 사기에 휘말릴 것이 뻔하다고도 말했다.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그런 이야기를 서너 시간 신나게 떠들고 나면, 그나마 자신의 분노가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망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에 비해 김은수 자신의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김은수는 자신의 비정규직 직장이 곧 정규직으로, 최소한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 닥친 불경기에 도리어 실업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면서 허둥대다 보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조건이 나쁜 직장에 취업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다시 살펴 보니 친구들 사이의 연봉 순위는 자신이 이제 꼴지로 밀려 난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김은수의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들어 주던 친구가 그 즈음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면서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친구와는 헤어져야겠다. 김은수는 분노하며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한 없이 들으며,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말 밖에 못하던 멍청한 애가, 녹음된 소리만 반복하는 인형 같기만 하던 애도 저렇게 일이 잘 풀리는데. 왜 나는 이렇지?

김은수는 모든 것이 경쟁의 대상이 되고, 모든 것을 남과 비교하며 등수를 매기는 한국 사회의 구조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생겼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김은수는 이 썩어 빠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삶의 다른 방향을 찾는 것이 더 우월한 태도라는 생각에 이끌리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누가 연봉이 더 높니, 낮니를 따지며 겨루고, 누구 직장이 더 좋고 나쁘고를 끊임 없이 따지며 아웅다웅한다. 그렇지만 그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짓인가? 그렇게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구정물 속에 뒹구는 벌레들과 다름 없다. 그런 돈을 따지는 세상, 경쟁의 구정물에서 나와서, 정신의 수양을 중시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느끼고자 하는 현대 사회 이전에 펼쳐졌던 참다운 인간의 삶으로 돌아 가는 것이 진정으로 멋진 인생 아닌가?

그래서 김은수는 산 속에 들어 가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소박하게 사는 삶을 탐구하기로 했다. 그런 삶에 대한 책도 읽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그런 클럽에 가입하고 보니, 그 쪽도 김은수를 떠받들어 주지는 않았다. 김은수는 그들이 자신을 초보라고 무시하고, 산이나 자연에 대해 잘 모른다고 얕본다고 느꼈다. “왜 나를 가르치려고 들까?” 몇 달 간의 세월이 흐르자, 김은수는 그들 모두가 성격이 꼬인 사람들이라고 싫어하게 되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소박하게 사는 삶을 지향하는 클럽 사람들은 사실 사회의 경쟁에서 실패한 인간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실패해서 괴로우니까 인생의 정상적인 목표가 아닌 다른 종목에서는 자신이 이겼다는 느낌이라도 조금 느껴 보기 위해, 괜히 이런 클럽을 만들고, 그 클럽에 뒤늦게 가입한 신입생들에게 잘난 척하고 텃새를 부리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만 가득가득 모여 있는 집단에 자기가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무렵 떠돌이 행성 스타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었다.

우주에는 지구, 화성, 금성 처럼 커다란 별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평범한 행성들이 있다. 지구, 화성, 금성은 태양이라는 별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러나 우주의 행성들 중에는 꼭 어떤 별 주위를 돌지 않는 것도 있다. 대신 커다란 돌덩어리나 얼음 처럼 생긴 것이 묶인 데 없이 그저 망망한 은하의 텅빈 공간을 이리저리 떠돈다. 이런 행성을 떠돌이 행성이라고 하는데 그 숫자는 무척 많은 편이다. 별 주위를 도는 행성이 되려면 별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태양 같은 커다란 덩치의 별이 생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조그마한 덩어리가 생기다가 그냥 멈춰버린 후 조그마한 행성 같은 모양이 되어, 떠돌아 다니는 떠돌이 행성은 자주 나타난다.

스타벅은 태양계 근처에 가까이 다가온 떠돌이 행성이라고 해서 주목을 받았다. 혹시 그런 행성이 태양계에 문득 들어 왔다가 지구와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지구와 부딪히지 않는다고 해도 지구를 중력으로 약간 끌어 당기는 바람에 지구가 태양에 조금만 가까워져도 큰 문제다. 세상은 너무 뜨거워져서 모두가 타 죽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스타벅을 연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스타벅에 우주선을 보내기도 했다. 나아가 우주선을 착륙시키기도 했다.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출발했는지 알 수 없는 그 떠돌이 행성을 파헤치며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타벅에서 덜컥, 아주 미미하긴 하지만 생물이 발견되어 버렸다.

스타벅은 떠돌이 행성이라 주위에 태양 같이 열을 줄 수 있는 별이 없다. 당연히 굉장히 추운 곳이다. 모든 것은 다 얼어 붙어 있다. 그 온도는 영하 250도에 가깝다. 겉면만 보면 거대한 얼음덩어리 같아 보인다. 도저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 같다.

그렇지만 스타벅도 행성은 행성인 만큼, 지구처럼 화산도 있고 온천도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은 없지만 땅에서 나오는 온천의 열기는 있다. 그래서 그런 온천 근처에는 따뜻한 지역이 생긴다. 이런 곳에서는 생명체가 살 수 있다. 스타벅에서는 실제로 그런 곳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다. 그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된 외계 생명체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 같은 크기였고, 하는 행동도 그냥 열기를 이용해 먼지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았다가 하면서 사는 것이 전부인 생명체일 뿐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분명히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지구의 생명체와는 아주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신기했다. 사람들은 대단히 놀랐다. 어쩌면 우주에는 이런 식으로 수십억년 동안 은하를 떠돌아 다니는 행성에 저마다 생명체가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닐까?

그 정도로 이야기가 진전되었을 때, 김은수는 자신의 인생에 마침내 아주 큰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고 생각했다. 정천교라는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은수에게 처음 접촉한 정천교 회원들은 김은수를 가입시킬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냥 김은수에게 푸닥거리 비슷한 정천교의 의식을 치르게 하고 의식 비용을 받아서 정천교의 살림에 보탠다는 계획 정도를 갖고 있었다. 김은수에게 불행이 벌어질 수 있는데, 정천교의 의식을 치르면 그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잘 구슬리면 김은수는 돈을 쓸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은수를 얼마 되지 않아 정천교 회원들에게 “지금 굉장히 특별한 수십억년의 인연으로 우리가 마침내 이렇게 만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김은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오랫동안 김은수가 너무나 듣고 싶은 말이었다.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하잘 것 없고, 나야 말로 대단히 뛰어난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이며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 학교 다닐 때 친구라고 했던 그 많은 인간들은 그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

김은수는 정천교 활동을 열심히 했다. 정천교에 대해 알아 보니, 교주가 갖고 있던 사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정천교는 곧 하늘에서 심판의 손이 나타나 세상을 모두 멸망하게 만들고 사람들은 전부 다 죽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김은수는 공포를 느꼈다. 두려웠다. 세상이 끝장나고 모두가 죽는다니! 그렇지만 그 공포와 두려움은 구원의 다른 모습이었다. 세상이 종말한다는 이야기는 곧 돈, 직장, 연봉, 정규직 따위는 모두 무의미해진다는 뜻이었다. 자신 보다 앞서 있던 그 모든 다른 사람들이 앞서 있다는 것은 사실 전혀 앞서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 곧 전부 다 죽을테니까. 이 마당에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엄청난 종말이 온다는 사실 뿐이다. 그리고 나는 정천교에 들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대비하고 있다. 그에 비해 멍청한 세상 사람들은 남들과 비교하며 조금 더 앞서면 기뻐하고 조금 뒤쳐지면 괴로워한다. 너무나 유치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높은 경지에 올라 와 있다. 나는 이 모든 세상이 다 망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으니까. 결국 내가 가장 대단하다.

덕택에 김은수는 정천교 활동에 열심히 빠져들었다. 드디어 삶을 완성하는 길을 찾았다고 기뻐했다. 모아 두었던 저축을 정천교에 사용했고, 삶의 많은 시간을 정천교에 밀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과학자들은 지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스타벅 행성과 비슷한 곳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꼭 조사할 만한 곳이 있었다. 바로 목성에 딸려 있는 위성인 유로파라는 곳이었다. 유로파는 예전부터 외계생명체가 있을 법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 지역이었다. 이제 스타벅이라는 곳에서 외계생명체를 찾아낸 만큼, 유로파에 생명체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유로파의 얼음층을 뚫고 그 아래에 기계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로 외계 생명체를 찾아냈다. 유로파에서 찾아낸 생명체들 중에는 스타벅에서 발견한 미생물보다는 훨씬 더 큰, 큼지막한 생물도 있었다.

유로파는 얼음 덩어리 행성이다. 그런데 그 얼음 아래 깊숙한 곳이 유로파 내부에서 나오는 열기에 녹아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몇 백 미터, 몇 십 킬로미터나 되는 얼음층을 뚫고 들어 가면 대단히 깊고 넓은 바닷물이 꽉 차 있는 지역이 나타난다. 그 물 속에는 헤엄치며 사는 여러 생물들이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문어, 오징어, 호랑나비를 섞어 놓은 듯한 모양의 생물이었다. 과학자들은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그 유로파 생물은 진화를 통해 탄생한 지 5억 년간 살아 온 동물이라고 추측했다.

그 유로파 생물은 몇 가지 재미난 특성을 갖고 있었다. 우선 지능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지구에서도 문어는 지능이 꽤 높은 동물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유로파 생물은 지구의 문어 보다 더 지능이 높다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강아지 지능 정도는 되지 않겠냐는 의견도 많이 나왔다. 몇몇 과학자들은 사람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로파 생물이 비행접시와 레이저총을 갖고 있는 발전한 종족은 아닌 것 같았다. 유로파 생물은 복잡한 기계나 장치를 갖고 있지 못했다. 기계나 장치는 커녕 변변한 집, 둥지를 짓는 기술도 없는 것 같았다. 과학자들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문명을 발전시키려면 불을 피우고, 불을 이용해 청동기, 철기 같은 금속 도구들을 개발해야 한다. 그래야 강력한 무기를 만들고 단결된 조직을 만들어 사회를 발전시키고 문화를 키워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물 속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다. 불을 피울 수 없다면 쇳물을 녹여 청동기, 철기 같은 금속 도구를 만들 수도 없다. 때문에 유로파 생물은 결코 지구인과 같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없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유로파 생물은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큰 문제였다. 유로파 생물은 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발달한 두뇌를 이용해 숫자를 헤아리고 어느 정도의 수학을 이해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정도가 한계였다. 유로파 생물은 얼음 층 아래의 바다에서 산다. 고개를 들어도 밤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사는 세상 바깥에 더 넓은 우주가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다. 하늘이 있고 하늘 위에는 천상세계가 있다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유로파 생물들에게 유로파 가장 겉면인 얼음층은 날아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신비의 천상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튼튼한 바닥일 뿐이었다. 이래서야, 사람이 밤하늘을 관찰하다가 행성과 별이 움직이는 원리나 천상의 이치 같은 것을 연구하게 되는 일을 유로파 생물은 할 수가 없다. 차갑고 두꺼운 얼음벽으로 모든 것이 차단된 유로파 생물들은 5억 년 동안 자신들의 작은 땅이, 온 우주의 전부라고, 세상에 생긴 그 모든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인지 유로파 생물은 다른 이상한 특징들도 갖고 있었다. 안정된 환경 때문인지 유로파 생물은 죽음이나 늙음 없이 영생 불사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절대 안 죽는 생물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고를 당하지 않고 누가 괴롭히지 않으면 몇 천 년 씩 자라날 수 있는 아름드리 나무처럼 오래 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생물이었다. 서로 대화, 소통, 사냥, 짝짓기 등을 거의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특징이었다. 몸이 퇴화된 것도 아닌데 서로 대화하거나 교류하지 않았다. 유로파 생물들은 대단히 복잡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신체 부위를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여러 마리가 엉켜 어울리면 서로 온통 신경망을 연결하여 방대한 정신 활동을 같이 할 수 있어 보이는 흔적도 있었다. 그런데 유로파 생물들은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입도 있고 귀도 있는데 서로 한 마디 대화도 하지 않고, 수 십 년의 인생을 사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시간이 흐른 후 과학자들은 유로파 생물을 몇 마리 잡아서 지구로 데려와서 정밀하게 관찰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도 유로파 생물 한 마리가 잡혀 와서 아쿠아리움 한 곳에 전시되었다. 처음에는 과학 연구용 특수 시설에서 관리되며 가끔 유로파 생물을 촬영한 영상 자료만 인터넷과 방송으로 공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나라에서 유로파 생물을 사람들에게 전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도 아쿠아리움 사업을 따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 김은수는 정천교 활동에서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정천교 내부에도 야비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김은수 자신 보다 앞서 나가거나 위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은수는 자신은 뒤쳐졌고, 무시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김은수는 그 분노 속에서 정천교에서 말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것이 꼭 찾아 올 이유가 없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괴로운 생각이었다.

만약 세상이 모두 망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꽤 긴 세월 동안 믿으며 삶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밀어 넣은 자신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사람으로 떨어지게 되는가? 반드시 세상은 망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 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게 내가 뭐랬냐’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친구들을 향해 이렇게 다 망할 세상에서 조금 남보다 앞서 있는 모습을 자랑하려고 부질없이 아둥바둥한 거냐고 비웃으며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내 우월함을 내보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위대한 멸망의 예언이 결국 그저 조잡한 사기꾼의 헛소리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혼란에 빠진 김은수는 견딜 수가 없어서 예전에 친구들을 만나 다른 친구들의 정보를 알기 위해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던 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친구 없이 혼자였다. 그 사이에 거리가 바뀌어 있었다. 친구와 이야기하던 가게는 사라지고, 그곳에는 거대한 아쿠아리움 시설이 들어 서 있었다.

유로파 생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다.

김은수는 아쿠아리움으로 걸어 들어 가 보았다.

그리고 물 속에서 여러 개의 다리를 너울거리는 다른 세상의 생물을 넋 놓고 한참 바라 보았다. 물로 가득찬 유리관 옆에는 비상 밸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밸브 옆에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유로파 생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구의 환경과 직접 접촉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항상 유리관, 유리병, 밀폐 상자 속에 들어 있었고 지구 과학자들은 기계를 이용해 유로파 생물을 관찰했다. 혹시라도 지구 생물과 유로파 생물이 접촉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예상 밖의 문제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절대 유로파 생물을 지구에 노출시키지 않기로 모두가 협의했다고 되어 있었다. 비상 밸브는 그야말로 최악의 비상 사태를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일 뿐으로, 절대 유로파 생물이 지구와 닿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경고가 다시 또 이어졌다.

김은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김은수는 분노의 손을 뻗어 비상 밸브를 돌렸다.

물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곧 유로파 생물은 꿈틀거리는 다리를 밸브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재난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로파 생물이 바깥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유로파 생물이 기이한 신체 기관을 이용해 온 세상에 보내는 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신호는 생각이 되어 머리 속에 온통 쏟아져 들어 왔다.

그 생물은 쓸데 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거나 별을 관찰하고 공상하며 우주를 이해하겠다는 오만에 빠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우러러 볼 것이 없는 물 속에 살던 그들은 끝없이 자신들의 마음을 관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내면에 대한 그들의 성찰은 몇 억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다. 지구인들이 불이나 청동기나 전기나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등기부등본이나 야간 할증 따위의 제도를 고안해 해내느라 애쓰고 있을 동안, 그들은 영원과 태초에 관한 너무나 거대하고 깊은 생각을 완성했다.

그때 지구의 땅에 발을 딛고 공기를 들이 마시고 있던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모두 유로파 생물이 세상에 퍼뜨린 그 깊은 생각에 온통 휘말렸다. 그것은 작은 좁쌀이 폭포의 물살에 휘말린 것과 같았다. 생쥐의 작은 두뇌로는 사람이 어떻게 음악을 작곡하는 지 상상 할 수 없다. 생쥐는 피리로 연주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의 힘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소리를 따라 물 속으로까지 넋 놓고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품어 주는 가장 중요하고도 높은 근원인 깊고 깊은 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물 속으로 들어 가야만 한다는 격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모든 일을 멈추고, 모든 다른 사소하고 잡다하고 상관 없는 생각들도 멈추고, 물을 향해 걸어 들어 가려고 나섰다. 유로파의 생물은 더 깊은 수조를 향해 기어 갔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가까운 강물 속으로, 호수 속으로, 바다 속으로 깊이, 또 깊이 계속해서 멈춤 없이 걸어 들어갔다. 거리 마다 길목 마다 물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 가득찼다. 물가에는 그 뒤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사람들은 물을 향해 밀려들고 또 밀려들었다.

김은수는 들떠서 누구 보다 빠른 발걸음을 옮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너무 들떠 정신이 없던 까닭에 한강을 향해 걷던 중, 지나가던 자동차에 치이는 바람에 중도에서 멈추게 되었다.

엉덩이 뼈 골절이었다.


- 2023년, 서울시청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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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인공지능 때문에 인류 멸망한 이야기 2023.09.01
곽재식 해탈의 길 2023.10.02
곽재식 심연의 이치 2023.10.31
곽재식 제호 2023.12.02
곽재식 나비 혁명 2024.01.02
곽재식 너 때문이거든 2024.02.03
곽재식 하찮은 묵시록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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