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곽재식 모살기(謀殺記)

2010.11.27 01:0511.27

 1.
 고구려의 상부(相夫)가 즉위 하던 임자(壬子)년 (서기 292년) 겨울, 깊은 밤에 어느 남자가 궤짝 하나를 들고 성문을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 도성에는 조의(皂衣) 벼슬을 사는 우랑(于郞)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우랑은 성문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랑은 궤짝을 들고 성문을 들어가려는 남자를 막아섰다.
 우랑이 말했다.
 "해가 지고 성문이 닫히고 나면 함부로 지나다닐 수가 없다. 이 깊은 밤에 어찌 몰래 들어오려 하느냐?"
 과연 높은 성벽으로 둘러 쌓인 통로에는, 안쪽 성문이 닫히기 전에 미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여럿이 밤이 지나가고 성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리저리 성벽에 기대어 땅에 앉아 잠을 자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궤짝을 든 남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우랑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였다.
 "지금 귀하신 분께서 병이 나서 몹시 위급하십니다. 저는 지금 급히 약재를 들고 가는 길이니, 꼭 즉시 성문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부디 문을 열어 주십시오."
 우랑이 쳐다보니, 궤짝을 든 남자는 체격이 훌륭하고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었다. 우랑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한 손으로 가린채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이윽고 우랑은 웃으며 남자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를 속이려는 말을 하려 거든, 약재를 캐는 사람이나 의원인 척 해서는 안될 것이다. 차라리, 네가 성상(聖上)께서 기르시는 백마가 병들어 치료하러 간다든가, 또는 선대에서 남기신 낙타가 새끼를 낳으려 하기에 그것을 돌보려고 간다고 했다면 더욱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았겠는가?"
 그 말을 듣고 궤짝을 든 남자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까? 성상께서 어머니로 모시고 계시는 소태후(小太后)께서 위중하여 급히 약을 찾으시기에 저는 이와 같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어찌 지금 제가 속이려고 거짓을 말한다고 하십니까? 훗날 이 일로 공께서 소태후로부터 죄를 받는 것이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우랑이 답하였다.
 "너는 손이 두껍고 얼굴에 검댕을 칠하고 있으니, 이는 섬세하게 침을 쓰고 약을 가리는 의원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너는 쇳물을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뜨겁고 거친일을 하는 자의 모습에 가까우니, 아마도 너는 금은(金銀)을 다루는 자 임에 틀림이 없다."
 말을 끝내자마자 우랑은 궤짝을 강제로 열어보았다. 과연 궤짝 안에는 금으로 만든 개구리가 들어 있었다. 우랑이 다시 말했다.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시기 전에, 소태후께서는 그 위세가 높은 후궁이셨으니, 높은 권세로 갖은 사치를 부리고 사셨다. 그리하여 예전의 소태후께서 넓은 물속에서 목욕을 하며 노닐 때에는 재물을 풀어 사방 몇십리의 사람들을 모두 멀리 떠나게 하여, 홀로 고요히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도성에서 살던 사람으로 누가 모르는 자가 있느냐?
 그러나,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시고 난 후에는 소태후께서 성상의 친어머니가 아니시므로 그 힘이 크게 줄게 되었다. 때문에 소태후께서는 이제 옛날과 같이 지내실 수 없게 되셨으니, 아마도 소태후께서는 필시 이제 재물이 궁하여 좋은 보물과 귀한 음식을 그리워 하실 것이다.
 너는 바로 그러한 소태후께 몰래 뇌물을 바치고자, 깊은 밤에 몰래 금은을 숨겨서 들고 들어 가는 것이 아니냐?"
 그러자 궤짝을 든 사나이가 따졌다.
 "공께서 내가 소태후를 위해 성문 안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감히 막아서서 멈추게 하십니까? 공께서는 감히 소태후께서 노하시는 것을 보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우랑은 이렇게 말하며 그 사나이를 돌려 보냈다.
 "오직 성문이 닫히기 전에 명을 받아 미리 아뢴자만이 성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 졸본에 도읍을 정한 때부터 줄곧 내려오는 법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동트기가 무섭게, 우랑은 그의 윗자리에 있던 동부(東部) 대형(大兄)으로부터 찾아 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랑은 이에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른 아침 대형의 커다란 집에 도착하여 그의 방으로 들어서면서 보니, 대형은 이제야 막 자리에서 일어난 듯, 하인들이 흰 잠옷을 입은 그의 옆에 달라 붙어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하인들은 대형의 수염을 가위로 손질하고, 또 대형이 옷을 걸치기 쉽도록 돕고 있었다.
 "너는 어제밤에도 소태후의 사람이 성문을 지나는 것을 막았다고 들었다. 왜 그랬느냐?"
 대형이 묻자, 우랑이 답하였다.
 "밤이 되어 내성문(內城門)과 외성문(外城門)이 닫히고 나면, 누구도 내성문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으며, 오직 성문이 닫히기 전에 명을 받아 미리 아뢴자만이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 졸본에 도읍을 정한 때부터 줄곧 내려오는 법인 줄로 압니다."
 우랑의 답을 듣자, 대형은 한숨을 쉬었다.
 "소태후의 부하들과 그 무리들은 우리와 같은 편의 사람들이므로, 우리가 문을 드나드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모르더냐?"
 "깊은 밤 몰래 성문을 드나드는 무리라 한다면, 도적이거나 혹은 몰래 높은 벼슬아치를 만나 금은보화를 바치고 사람을 꾀어 속임수를 부리는 자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기실 이 또한 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태후의 부하라 하는 분들은 조정의 높은 대신이요, 온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즉, 우리와 같은 편의 사람들이라면, 더우기 뇌물을 바치는 자들과 만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와 같은 분들이 장차 도적떼 따위와 어울린다는 소문을 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대형은 우랑의 답을 듣고 다시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와 같이 뜻을 어기기를 벌써 여러 번이다. 이미 소태후의 중신 중에서는 화를 내어 우리를 꾸짖고자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을 것이 틀림 없다. 너의 고집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어, 소태후의 중신에게 죄를 받아, 같이 문을 지키던 너의 부하들은 모두 매를 맞고, 너를 부리고 있는 나까지 자리를 잃고 길바닥에서 구걸을 하며 생계를 잇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장차 네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너의 고집 때문이니, 너는 더 이상 화가 미치지 않도록 이곳에서 떠나서 먼 곳으로 가도록 하라."
 대형이 말을 이었다.
 "도성(都城)에서 동북으로 2천리를 가면 단로성(檀盧城)이라는 성이 있다. 그 곳은 얼마전까지 숙신족의 무리가 일으키는 난리로 끝없이 싸움이 많던 곳이었다. 그러던 곳이, 이제 선대의 아우이자, 성상께서 숙부로 모시는 안국군(安國君)께서 세우신 높은 공 덕분으로 우뚝한 성벽이 새롭게 세워지고 촌락에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얻은 성에서 제도와 예의를 알고 법과 활 쏘는 것을 아는 자들을 찾는 것이 많다. 더군다나 그곳으로 이번에 소태후께서 행차하신다 하니, 여러 나라의 일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에게 그 곳 단로성의 중항(中巷)에서 길도적을 막는 일을 주려한다. 그러니, 너는 바삐 이곳 도성에서 몸을 피하여, 멀리 단로성 중항에 가서 몸을 숨기고 있도록 하라."
 대형이 말을 끝내자, 우랑이 엎드려 머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저는 지난 스무 해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밤 일곱 구역의 성문과 네 거리를 돌며 일했습니다. 또한 그 동안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는 소금 한 줌, 수수 한 되를 함부로 받아 본 적이 없이, 오직 제 맡은 바와 법을 지키는 일만 맡아 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몰래 밤에 성문을 드나드는 일을 돕지 않았다고 하기로, 어찌 하루 아침에 자리에서 쫓아  2천리 밖의 험한 땅으로 보내실 수 있습니까?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대형 나리를 모시는 마음은 지금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오늘부터 매일 그 백 배를 더할 수 있으니, 부디 저를 그와 같이 내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대형은 그 말을 듣더니, 가만히 우랑을 쳐다보았다. 그때 한 하인이 가위로 대형의 수염 끝을 다듬어 잘랐다. 그러자 대형은 잘린 수염 끝을 집어 들고는 우랑에게 보여 주었다.
 "털은 가늘고 약한 것이고, 늙은이의 털 끝은 더욱 힘이 없어, 힘없는 아녀자의 손에 있는 두  치 가위 끝이 한 번 떠는 소리에 이렇게 잘려 나갈 뿐이다."
 우랑은 잘린 수염 조각을 쳐다보았다. 대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자네는 이 작은 수염 끝트머리라 한 들, 한번 잘려나가면 다시 붙일 수 있겠는가?"
 대형의 그 말을 듣고, 우랑은 더 이상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줄 알게 되었다. 우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 갔다.
 우랑은 처의 집에서 장인과 함께 지내며 데릴사위로 살고 있었다. 우랑이 처에게 도성을 떠나 동북쪽 끝에 있는 단로성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우랑의 처는 이렇게 말했다.
 "본시 공께서는 인물도 좋지 않고, 부모도 별볼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공께서 이 집으로 장가 드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제가 공께서 벼슬을 살고 계시고, 젊은 시절 나랏님께서 보실 때에 활을 잘 쏘고 예와 법을 잘 읽어 상을 얻은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열여덟 나이에 공께서 장가 드실 때에는 저는 홀로 생각하기로, 곧 공께서 벼슬이 높아져서는 고을을 다스리게 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마침내 성을 하나 얻게 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랬다면 저또한 후왕(侯王)의 비빈(妃嬪)이라 불리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20년 동안 고작 조의라는 자리에 머물러 계실 뿐입니다. 그러니 살림살이는 모두 제 아버지께서 기르시는 소와 말에 기대고 있으며, 공께서 조정에서 받는 것으로는 비단옷 한 벌 해 입는 것 조차 너무나 어렵습니다. 제가 날마다 속이 타고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기가 어찌 쉽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공께서는 그나마 있던 자리에서도 쫓겨나, 변경의 작은 길목을 문지기 따위로 가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저는 한 평생을 헛되이 산 듯 할 뿐입니다. 공께서는 저와 자식들의 사는 꼴을 이와 같이 망쳐버린 죄를 어찌 빌 것입니까?
 이제, 공과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자식들 또한 그런 곳에서 살 수는 없을 터이니, 저는 제 아버지께 말하여, 이제 공을 이 집에서 나가게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랑은 집에서도 쫓겨 나게 되어, 오직 혼자 몸으로 단로성으로 떠나기에 이르렀다. 우랑이 짐을 챙기니, 오직 말 잔등 위에 얹을 부대 하나에 관복과 가다가 먹을 말린 고기를 좀 넣었을 뿐으로, 집에서 무엇하나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없었다.
 "20년 지낸 곳을 떠나고자 하는데, 스승도 없고, 벗도 없고, 처도 없고, 자식도 없고, 오직 길바닥에 혼자 서서 비루먹은 말 한 마리에 보따리 하나 뿐이로구나."
 우랑은 쓸쓸히 말을 몰아 집을 나섰다.
 우랑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러나 어찌 이 불쌍한 사람이 알 수 있었겠는가. 곧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이 날의 우랑이 괴로워하며 쓸쓸해 했던 일은 그저 봄날 낮잠을 자던 소한마리가 등에 붙은 파리에 잠깐 간지러워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2.
 우랑이 단로성에 도착해서 처음 의아하게 본 것은 그 성문의 모습이었다. 성문을 지날 때에 보니, 성문의 옆 벽에는 물건을 넣어 둘 수 있는 구멍이 여러개가 있었는데, 그 구멍에는 흙을 빚어 만든 조그마한 사람 모양의 인형들이 하나씩 있었다. 인형은 긴 곤봉을 든 장군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마다 곤봉을 움직이는 모양이나 손과 발을 움직이는 정도가 조금씩 달랐다. 그리하여 성벽에 있는 많은 구멍에 수백, 수천가지 모습의 장군 인형이 가득 놓여 있는 셈이었다.
 이때, 우랑의 옆으로 황소가 끄는 수레가 지나갔다. 그 수레는 성문을 지나다말고 잠시 멈추었는데, 곧 수레에 씌운 휘장 안에서 호화롭게 장식한 한 고귀해 보이는 여자가 수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그 여자는 공손히 인형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들며 말하기로,
 "안국군의 덕으로 오늘도 무사히 길을 다녀 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랑은 그제서야 구멍에 넣어둔 인형들이 모두 단로성을 다스리는 안국군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랑은 여자를 붙잡고 길을 물어 보았다.
 "중항이라 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랑을 쳐다 보았다.
 "공께서는 타지에서 온 분인듯 한데, 안국군의 소상을 향해 인사를 올릴 때에는 이처럼 함부로 방해를 하는 것은 예절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안국군께서 이곳의 숙신족 도적떼들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성문 밖을 나서서 우물에서 물을 한 동이 길어오는 길이라 하여도, 숙신족 화살에 뱃가죽이 뚫릴 것을 두려워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이 모두 안국군의 덕이니, 공께서도 은혜를 아는 사람이거든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안국군의 흙인형에 예를 갖추어 똑바로 인사를 올리십시오."
 우랑이 머뭇거리고 있으니,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 길로 바로 가면 물건들을 파는 가게와 장사꾼들이 많은 곳이 중항 이라는 곳입니다."
 하고는 돌아섰다.
 우랑은 다시 한 번 안국군의 인형들을 보았다.
 "연고는 알 수 없으나 인형의 모습이 무서운 듯한 점이 있다. 한 사람의 모습을 수백, 수천의 형상으로 꾸몄으니, 몇 백개의 눈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인가."
 우랑은 곧 발걸음을 옮겨 중항이라 하는 곳으로 가 보았다. 중항의 길가에는 여러 장사꾼들이 많은 물건들을 팔고 있어 왁자한 소리가 가득하였으며, 또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혼잡한 형상이 요란하였다. 가게에는 숙신족의 짐승 잡는 자들이 잡아온 곰과 사슴 따위의 고기와 가죽들이 많이 널려 있었다.
 이러한 자들은 길가에 짐승의 머리를 잘라 놓은 것들을 가득 가득 올려 놓고 팔고 있었다. 그 짐승 머리들을 보니, 들개, 너구리에서부터, 늑대와 호랑이의 머리까지 왠갖 짐승들의 얼굴이 줄줄이 나뒹굴고 있었으므로, 그 모양이 자뭇 섬뜩하였다.
 개중에서도 가장 많은 짐승은 족제비와 담비의 무리들로, 수백 수천마리의 족제비 가죽이 높다란 더미를 이루어 사람의 키높이로 군데 군데 쌓여 있었다. 가죽 끝에 달린 족제비 머리가 말라 붙어 수천개씩 굴러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그 많은 검은 입속에서 저마다 가느다란 죽은 울음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오는 듯 하였다.
 거리에는 온통 비린내가 가득하고 동물들의 붉은 고기와 가죽 사이로 파리들이 어지러이 날고 있었다. 거리의 길바닥에는 겨울인데에도 들쥐들이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들쥐들의 숫자가 워낙에 많으니, 혼잡스럽게 사람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발걸음 사이 사이를 지나다니는 쥐들이 적지 않았다.
 우랑은 두리번 거리며 길을 걷다가 잘못하여, 지나가는 쥐를 밟게 되었다. 우랑은 쥐가 밟혀 물컹하는 느낌에 놀라 움찔하여 걸음을 두서너발 뒤로 물렀다. 그러다 잘못하여 우랑은 한 장사꾼이 장난감과 장신구를 늘어 놓은 곳으로 넘어지게 되었다.
 우랑이 장사꾼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쥐 때문에 놀라서 넘어졌습니다."
 장사꾼이 웃으며 답하였다.
 "이곳에는 쥐가 많으니, 타지에서 온 분이라면 놀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랑이 일어나서 옷을 털고, 흐트러진 장사하는 물건들을 가지런히 하며, 다시 물었다.
 "계절이 아직도 쌀쌀한 날씨이건만, 어찌 이리 길가에 쥐가 많습니까?"
 그러자, 장사꾼이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안국군께서 이곳에서 숙신족 도적떼들을 몰아내시고, 고구려 깃발을 높이 세우셨을 때, 처음으로 고치신 것이 숙신족의 장례 지내는 풍속입니다.
 숙신족에게는 추잡하고 사악한 풍습이 있으니, 가을, 겨울에 부모가 죽으면 부모를 장사지낸다면서, 그 시체를 담비나 족제비 따위의 짐승이 뜯어 먹도록 하여 시체의 살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숙신족들은 이것이 죽은 부모의 피와 살이 산과 들의 살아 있는 것들에게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 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시체를 족제비가 뜯어 먹게 한다는 것은 개돼지만도 못한 미치광이의 풍속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구려 사람들이 와서 처음 그러한 풍속을 보았을 때 역겨워서 토하는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며, 화가 난 남자들 중에는 제 부모의 시체에 족제비를 풀어 놓는 숙신족을 활로 쏘아 죽이려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안국군께서는 이곳에서 사람의 도리를 바로 세우고, 예의와 제도를 바로 하고자, 이렇게 부모의 시체를 족제비가 뜯어 먹게 하는 풍습을 철저히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숙신족들은 천성이 교활하고 영악하면서도,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둔하여, 그후에도 몰래몰래 부모 시체를 살그머니 족제비가 뜯어 먹도록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부모의 시체를 족제비가 뜯어 먹지 못하도록 막았다하여, 울고 불며 슬퍼하는 자까지 있었다고 하니, 어찌 그런 따위를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안국군이 보다 못하여, 천가지 군졸 중의 제일이라 하는 양맥병(梁貊兵)과 숙신병(肅愼兵) 군사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 군사의 법제와 무장의 규율로 시체를 족제비에게 주는 풍속을 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양맥병과 숙신병의 병사들이 아예 이 고장 주변의 족제비와 담비를 모조리 잡아 죽여 버려 그 씨를 말려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리 사악한 숙신족이라 할 지언정 부모의 시체를 족제비에게 먹이려 하여도 먹일 수가 없어서, 마침내 나쁜 풍속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족제비와 담비가 모두 없어져 버렸으므로, 족제비와 담비의 먹이인 쥐들을 잡아 먹는 짐승들이 없어진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쥐들이 늘어나, 성벽과 담장, 길거리와 집 처마 마다 들쥐떼들이 바글바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들쥐떼가 많다 한들, 이것이 모두 안국군께서 숙신족의 처참한 일을 막고자 하느라 생긴 일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쥐가 많은 것을 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아낙네와 어린아이들도 이제 쥐떼들이 오가는 것에 익숙해져서 놀라지 않습니다."
 장사꾼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우랑은 오락가락하는 쥐떼 때문에 자꾸만 놀랐다.
 그리하여 우랑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는데, 장사꾼이 이야기를 마칠 무렵, 갑자기 왜인지 반대편으로 홱 손을 뻗어 우랑의 건너편에 있던 한 여자의 머리채를 대뜸 잡아 챘다.
 "살려주십시오."
 여자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장사꾼은 잡은 여자의 머리채를 끌고 당기더니, 다리를 뻗어 여자의 치마자락을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우랑이 놀라서 쳐다보니, 여자는 16, 17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람으로, 얼굴이 누른 편이고 머리칼이 거칠며 황토빛의 두터운 옷을 입고 있어서 옷차림이 여느 사람과 달랐다. 장사꾼이 여자에게 소리쳤다.
 "굴을 파고 살며 짐승을 잡아 뜯어 먹는 것 밖에 모르는 숙신족의 천한 여자가 왜 바둑돌을 만지작거리고 있는가? 숙신족은 도적떼의 무리였던 자들이 많으니, 이는 필시 네가 부모가 도적질 하던 것을 보고 바둑돌을 훔치려 하던 것이 아닌가?"
 여자가 울먹이며,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바둑돌을 훔치려 하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바둑돌을 한 두 알이라 할 지언정 사려 하였습니다."
 장사꾼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이제껏 아는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는 숙신족의 부녀자가 바둑을 둘 줄 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너는 바둑을 둘 줄 아느냐?"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를 뿐 말이 없었다. 장사꾼이 다시 소리 질렀다.
 "바른대로 말하라. 너는 바둑을 둘 줄 아느냐?"
 장사꾼이 몇 차례 머리채를 잡아 당기고 발길질을 하며 다그치자, 그제서야 여자가 답하였다.
 "저는 바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장사꾼이 말하였다.
 "네가 바둑을 둘 줄도 모르면서, 바둑알을 손에 들고 들여다 보았으니, 이는 반드시 훔치려한 것이다. 숙신족 도적을 잡으면 매를 치고 머리칼을 잘라버려야 하니, 너는 다리가 꺾일 때까지 맞을 것이다."
 그러자, 숙신족 여자가 계속 울부짖었다.
 "저는 훔치려던 것이 아니라, 사려 하던 것입니다. 저는 훔치려던 것이 아니라, 사려 하던 것입니다."
 우랑은 울며 소리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입을 손으로 가린채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던 우랑은 마침내 손을 뻗어 장사꾼을 말리면서, 가로 막았다.
 "그 여자는 도둑이 아닙니다."
 장사꾼이 어리둥절하여 우랑을 쳐다 보았다. 우랑이 다시 장사꾼에게 말했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 할 때는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므로, 반드시 좌우의 사람들을 둘러보게 되지, 물건만을 바라보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장께서 이 여자는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자의 모양은 도둑이 하는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더우기 선대에 을파소(乙巴素)가 만든 제도에 따르면 물건을 훔친자에게 죄를 줄 때에는 반드시 선인이나 조의 벼슬을 하는 사람에게 알린 뒤에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이며, 벌할 때에도 죽이거나 때리는 것이 아니라, 벌금으로 훔친 재물의 10배를 물게 하는 것으로 법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침 저는 도성에서 이곳으로 새로 온 조의 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여자의 말을 먼저 듣고자 합니다."
 우랑은 품속에서 조의의 자리를 나타내는 도장을 꺼내어 보였다. 그러자 장사꾼은 틀어쥐고 있던 숙신족 여자의 머리칼을 놓아 주었다. 우랑이 숙신족 여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바둑을 둘 줄도 모른다고 하면서 어찌 바둑돌을 보고 있었습니까?"
 숙신족 여자는 한참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흐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답을 바로 하지 못했으므로, 우랑이 몇 번 고쳐 여자에게 고쳐 물었다. 숙신족 여자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답하였다.
 "저는 어미때 부터 고구려 사람의 베짜는 곳에서 일을 하며 살았는데, 양맥병 군사 나리들께서 족제비를 잡아 없애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동안 때때로 부지런히 족제비를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잡은 족제비들을 팔아 조그마한 귀고리를 하나 사려 하였습니다. 저와 같은 미천한 숙신족의 부녀자가 감히 고구려의 귀한 물건을 갖고 싶어 한 것이 죄라면 죄겠으나, 어찌 훔칠 것을 생각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같은 족제비 가죽이라 하여도 고구려 사람이 파는 물건과 숙신족 사람이 파는 물건을 값을 다르게 쳐 주는 까닭으로, 저는 귀고리 한 쪽 값의 반의 반도 안되는 값 밖에 받지 못하였습니다. 실망하여 돌아가려하는 길에, 이 바둑돌이라는 물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둑돌이라 하는 것은 값은 비싸지 않은데 윤택이 나고 색이 고운 것이 귀에 달면 귀고리처럼 아름다울 것 같기에, 색깔을 따라 몇 개를 사려 하였던 것입니다."
 우랑이 숙신족 여자를 달래 일으켰다.
 "그러면, 그대는 바둑돌을 귀고리로 쓰기 위해 사려고 한 것입니까?"
 숙신족 여자가 다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배운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는 숙신족의 아낙이라,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자가 바둑돌을 사면 매를 맞는 줄은 몰랐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우랑이 다시 여자를 일으켰다.
 "어찌, 바둑을 둘 줄 모른다고 바둑돌을 살 수 없겠습니까. 제가 이곳에 처음 온 날 이와 같이 억울하게 욕을 보셨으니, 이는 제가 못난 탓입니다. 제가 죄를 빌고자 바둑돌을 사 드릴 것이니, 사양 말고 받으십시오."
 그리고는 우랑이 바둑돌을 사서 장사꾼에 포장해 달라고 하였다. 숙신족 여자는 깜짝 놀라서 우랑을 쳐다 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숙신족의 말로 고맙다고 말하였다. 우랑이 다시 물었다.
 "무어라 한 것입니까?"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답하기를,
 "이는 숙신족의 말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릴적 익힌 천한 숙신족의 말을 이제껏 잊지 못하여, 무심코 말하였습니다."
 우랑이 그 말을 듣고 기쁘게 웃으며, 다시 숙신족의 고맙다는 말을 따라 하였다. 여자도 기뻐하며, 숙신족의 말로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장사꾼이 바둑돌을 우랑에게 주자, 우랑은 그 바둑돌을 숙신족 여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런데 여자는 몸을 떨고 있었으므로, 바둑돌을 제대로 쥐지 못하고 바닥에 흘리게 되었다. 여자가 다시 깜짝 놀라서는,
 "귀한 분이 주신 귀한 물건을 떨어뜨리다니, 용서하십시오. 들쥐들이 밟기 전에 주워 깨끗이 닦겠습니다."
 하고는 엎드려 바닥을 더듬어 바둑돌을 주우려 하였다. 그러나 바둑돌은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가서 길 한 복판으로 갔다. 숙신족 여자는 바둑돌을 주우려고 엎드린채로 기어서 길 가운데 쪽으로 갔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비단으로 치장한 수레 한 대가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레는 금은으로 만든 장식을 달아 놓은 소 두 마리가 끌고 있는 요란한 것이었다. 또한 수레 앞뒤에 귀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 넷과 갑옷을 입은 병사 여럿이 같이 가고 있었다. 이 수레가 지나가려는 길에 숙신족 여자가 바둑돌을 주우러 가고 있었으니, 수레와 함께 지나가던 병사들은 놀란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이윽고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한 병졸이 업드린 숙신족 여자를 걷어 차 버렸다.
 숙신족 여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여자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여자는 누운채 손을 뻗어 바닥에 있는 떨어진 바둑돌을 쥐려고 하였다. 그러자, 병졸은 날카로운 못이 삐죽삐죽 튀어 나온 철로 된 신발로 숙신족 여자의 손을 짓밟아 꿰뚫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우랑은 주먹으로 병졸의 목을 때렸다. 병졸은 뒤로 넘어졌다. 숙신족 여자는 밟히지 않고 몸을 구하여 간신히 비틀거리며 기어서 길가로 피하였다. 숙신족 여자는 몸을 달달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병졸이 넘어진 것을 보고, 그 병졸을 거느린 한 갑옷을 입은 벼슬아치 갑사(甲士)가 달려왔다. 갑사는 넘어진 병졸과 병졸을 넘어뜨린 우랑을 보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누구이기에 감히 소태후 마마의 수레를 이끄는 병사를 넘어뜨리는가?"
 우랑이 갑사를 노려 보았다.
 "저는 이곳 중항을 돌보고 있는 자로 조정의 조의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조정의 신하 된 자로 소태후 마마의 행차를 알아 보지 못하고 길을 지체하게 한 것은 죄가 가볍지 않다 할 것입니다. 하오나, 저 병졸이 죄 없는 여자를 말도 없이 갑자기 때리고 또 못이 달린 신으로 밟아 손을 짓이기려 하므로, 이곳을 돌보는 조정의 관리로서 멈추도록 한 것입니다."
 우랑의 말이 끝나자 갑사는 바로 칼을 빼들었다. 갑사가 칼을 겨눈 채로 말했다.
 "그대는 조정의 관리라는 자로 어찌 아는 것이 없소? 조정의 벼슬을 하는 사람이 수레를 타고 지나갈 때에는 숙신족들은 모두 팔다리와 무릎을 모두 땅에 붙이고 고개를 숙이며 지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아야만 하는 것을 모르시오? 이를 어기는 것은 감히 고구려 군사와 맞서고자 하는 것이며, 조정의 뜻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이오.
 저 여자는 옷차림과 더러운 냄새로 보건데 반드시 숙신족임에 틀림이 없는데, 눈이 빠지고 귀가 멀었는지, 감히 고구려 고관의 수레가 지나가는 데 길을 막고 있지 않았소? 어찌 내가 엄히 벌하지 않겠소?"
 우랑이 답하였다.
 "조정의 제도라 하는 것은 개국때에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少室)씨가 함께 만든 법과 후에 을파소가 만든 법이 있고, 의식과 예절이라 하는 것에는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죽을 때에 만들어진 것과 두노(杜魯)가 반정(反正)을 할 때에 세운 것이 있습니다.
 저는 미약한 재주로 조정의 벼슬 자리에 오른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나라에 세워져 있는 이러한 제도들을 익히는 것을 하루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숙신족이라면 수레가 지나갈 때에는 엎드려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와 비슷한 것 조차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갑사가 다시 말했다.
 "안국군께서 이곳에서 숙신족 도적떼들을 몰아낸 후에, 고구려 군사들의 위엄을 보이고자 엎드린 숙신족 도적떼들의 앞에서 항복을 받은 것을 너는 모르느냐? 그 후로 고구려의 관리가 길을 나설 때에는 응당 숙신족이라면 반드시 몸을 엎드려 예를 표하는 것이 오랜 습속임을 너는 모르는가?"
 갑사가 금방이라도 칼을 휘두를 듯이 다가서자, 우랑도 지지 않고 맞섰다.
 "비록 지역 마다 풍속이 다를 수는 있다고 하나, 어찌 조정의 이름을 빌어 죄를 묻고 벌을 주면서 제도에도 없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랑이 거기까지 말하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도성에서 온 저 자는 바보인가?"
 "20년 동안 조정의 관리였다는 자가 어찌 이토록 앞뒤를 따질 줄을 모르는가?"
 비웃는 소리가 좌우에서 들려오자, 우랑은 갑사를 노려보며 똑똑히 다시 말했다.
 "저는 중항의 조의이니, 제가 수레의 행차를 늦게 한 것을 직접 빌고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하지만, 까닭 없이 길 위의 아녀자를 걷어찬 것은 공의 잘못이며, 공께서는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하지 마십시오."
 "답답하구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저 숙신족이 방금 고구려 수레가 오는 줄도 모르고 앞에서 오락가락 거리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가 벌을 준 것 아니냐. 그 벌이 잘못된 것이라한다면, 너는 지금 안국군을 욕 하는 것인가?"
 수레가 멈춘채로 소란한 시간이 한참 흘렀다. 그러자, 수레 안에 있던 소태후라는 여인이 잠깐 휘장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밖을 보았다.
 소태후의 하얀 얼굴이 나타나자, 갑자기 그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동안이지만 일시에 거리가 온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하였다. 먼지투성이 소란스러운 거리에 어울리지 않도록 그 귀한 얼굴은 몹시 곱고 작은 어긋난 티끌조차 없이 맑게 아름다웠다. 소태후는 가만히 아랫사람인 궁녀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이윽고 소태후가 불렀던 궁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행렬을 이끄는 소사자(小使者) 관직을 맡은 장수에게 말했다.
 "소태후 마마께서 길이 늦어지는 까닭을 물으시며 힘겹다 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소사자가 소리쳤다.
 "저 따위 한심한 천한 관리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저 자와 숙신족을 붙잡아 혈옥(穴獄)에 가두라."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갑사는 즉시 칼날을 밀어 넣어 우랑의 허벅지를 찔렀다. 우랑의 허벅지에는 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곧 우랑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주먹을 휘둘러 갑사의 얼굴을 때렸다. 갑사의 입술과 코가 터지며 핏방울이 날렸다. 갑사가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멍청한 녀석이 수박치기 솜씨는 좋은 스승에게 배웠구나."
 하고는, 우랑의 발을 밟았다. 그러자 갑사의 신발에 달려 있는 못이 우랑의 발을 찔렀다. 우랑은 힘을 잃고 쓰러졌다.
 우랑이 소리 쳤다.
 "어찌 나에게 칼질을 하고, 옥에 가두려 한단 말이오? 활을 들지 않은 사람에게 칼을 댈 때에는 서로 다른 날짜를 가려, 세 번에 걸쳐 죄를 말해 주어야 하오. 그런데 대체 내 죄는 무엇이기에 이와 같은 짓을 하는 것이오?"
 우랑이 그렇게 소리치는 동안 갑사는 말없이 우랑을 줄로 묶었다. 묶인 우랑을 갑사가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 소사자가 말하였다.
 "저 놈은 사악한 숙신족과 결탁하여 고구려 조정을 위협하고 안국군을 욕되게 하였으니, 필시 숙신족의 첩자이거나, 숙신족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간특한 무리임에 틀림 없다. 혈옥에 가두어 그 죄를 반드시 따져 밝혀야 한다."
 곧 사람들이 흩어지고, 우랑과 갑사는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점차 희미해졌으며, 수레가 지나가고나니 흙먼지도 점차 가라앉았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고 웅성거리는 소리만 길가에 가득하였다. 수레바퀴 자국과 발자국이 어지럽게난 진흙 길바닥에는 핏방울들의 자국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다시 길 위를 가로 지르며 오가던 들쥐 몇마리가 문득 멈추어서서, 진흙에 뒤섞인 핏방울을 핥아 먹었다.
 
 3.
 우랑은 칼에 찔린 다리를 절며 성 한켠으로 끌려 갔다. 우랑이 갈 때에 끌고가는 병졸들이, 걸음을 옮기며 외치기를,
 "숙신족 도적떼와 내통하여 고구려 군사를 넘기려하였다"
 라고 길게 소리지르며 다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사람들마다 우랑을 손가락질하고 욕하였다. 또 어린아이들은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우랑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았다. 우랑은 갑옷이나 투구가 없었으므로 어린 아이들이 던지는 돌멩이 때문에 끌려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상처가 생겼다.
 또한, 한 늙은 여자가 있어서 갑자기 길을 가는 우랑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할퀴더니, 울부짖으면서.
 "내 아들이 숙신족 도적들과 싸우다가 죽었다. 내 아들을 살려내어라. 내 아들을 살려내어라 이 간악한 역적놈아."
 라고 하고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아들을 살려내라는 늙은 여자는 우랑을 붙들고 소리를 바락바락 내어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 병졸들이 떼어 내려 했으나, 무서운 힘으로 우랑을 붙잡고 악을 쓰고 있으니 떼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늙은 여자가 스스로 소리지르며 울다가 힘이 다해 졸도할 때가 되어서야 우랑은 벗어날 수 있었다.
 우랑을 끌고 가던 병졸 중 하나가 우랑을 쳐다보고는 이를 갈며 말하기를,
 "너도 고구려 조정의 덕으로 밥을 먹는 놈으로, 숙신족 도적떼들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와 부모를 잃은 자식이 슬퍼하는 것을 안다면, 어찌 숙신족과 내통할 수 있었겠느냐? 네 놈은 참으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 마땅한 크나큰 죄를 지었다."
 하였다. 우랑은 온통 가득한 상처가 아프고 힘이 다하여 말할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병졸의 그 말을 듣자 억울하고 원통하여 답하기를,
 "나는 숙신족의 땅에는 발을 디뎌본 적도 없다. 내가 어찌 숙신족 도적과 내통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니, 병졸이 노하여 소리치기를,
 "이 놈이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없이 거짓말만을 입에 올릴 뿐인가. 숙신족과 싸우다가 죽은 군사들의 어미들이 흘린 피눈물을 생각하면 너 따위 사특한 역적을 살려둘 수 있겠느냐."
 하고는 도끼를 뽑아 들고 우랑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병졸이 말려서 간신히 도끼를 거두었다.
 우랑이 혈옥이라하는 곳에 도착하자, 우랑에게 처음 칼을 찔렀던 갑사가 나타났다. 병졸 둘이 강제로 우랑을 무릎 꿇게 한 후에, 갑사가 우랑에게 말했다.
 "너는 숙신족 도적과 내통하는 죄를 지었으니, 숙신족 사는 곳과 같이 더러운 땅굴 속에서 지내는 옥에 가두어 놓을 것이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죄를 묻고 안국군께서 직접 처결하시리라."
 그리고 병졸들은 우랑을 어떤 구덩이 같은 곳에 던져 넣었다. 구덩이는 매우 깊어서, 우랑은 한참이나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으며, 그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온몸이 부스러지는 듯이 아파왔다. 우랑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웅크리고 뒤척였으나, 약한 뼈가 몇마디 부러진 듯, 몸을 웅크리고 뒤척일 때마다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아파서 앓는 소리를 내며 뒹굴며 보니, 우랑이 떨어진 곳은 사람 키의 두세배 쯤이 되는 널찍한 흙구덩이였다. 흙벽은 단단하여 흙먼지가 날렸다. 구덩이 속에도 어김 없이 들쥐들이 어지럽게 오가고 있었는데, 바닥에는 더러운 물이 고여 질척거렸다. 그리고 구덩이 위로는 빼꼼히 파란 하늘이 올려다 보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우랑이 답답해 하는 동안 우랑을 지키느라 땅위의 구덩이 옆에 서 있는 병사들의 말소리만 나직하게 들려왔다.
 "여기가 숙신족들을 가둘 때에 사용하는 혈옥이다. 숙신족은 집을 지을 줄을 몰라서 흙구멍을 파고 그 안에서 산다고 한다. 그러니 숙신족에게 붙어 조정의 군사를 죽이려한 네놈에게는, 마치 그 흙구덩이 속이 아내가 가슴으로 안아주는 따뜻한 품과 같지 않겠는가?"
 병사들이 이윽고 낄낄거리고 웃었다. 우랑이 바닥에 누워서 보니, 구덩이 입구로는 아무것도 없는 파란 하늘만 보이고 주변에서 병사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마치 그 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하였다.
 우랑이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를 멎게 하려고 애쓰며 한참 누워 있자니, 문득 혈옥 안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랑이 올려다보니, 혈옥의 입구를 커다란 나무 덮개로 덮는 듯 하였다. 곧 다시 병사들이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하늘쪽에서 들려왔다.
 "이 나무 덮개를 닫으면 혈옥 안은 깜깜해지므로, 너는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말할 사람도 없이 그 까만 방 속에 혼자 처박혀 있게 된다.
 옴쭉 달싹하기 힘든 좁디좁은 혈옥에서 빛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이 있으면, 잠깐 사이에 하루가 지나가는 지, 한 달이 지나가는지도 알 수가 없으므로, 세월이 흐르는 것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놈은 하루 사이에 굶어 죽기도 하고, 어떤 놈은 열흘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어 늙어버리기도 했다."
 이내 나무 덮개가 완전히 덮여서 혈옥 안은 깜깜해 졌다. 고개를 숙여도 자기 팔다리가 보이지 않고, 눈 앞에 손등을 가져 와도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랑이 놀라고 겁을 먹어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로 혈옥 밖에서 희미하게 병사가 하던 말을 마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너는 깜깜한 곳에서 혼자 조용히 처박혀 죽을 때를 두려워하는 심경이 또 어떠하겠느냐? 그 축축한 흙바닥에 누워서 지금것 살아온 날들과 목이 잘려 죽은 후에 썩어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덜덜 떨며 천가지 생각 만가지 걱정을 끝도 없이 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섭겠느냐? 이것이 수 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려 싸운 싸움을 욕보인 네가 저지른 추한 죄의 값인 것이다."
 우랑은 캄캄한 닫힌 혈옥 속에 하루인지, 며칠인지 모를 시간 동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빛도 보지 못한채 갇혀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문득 갑자기 혈옥의 나무 덮개가 걷히면서 달빛이 쏟아졌다. 밤이었던 것이다. 곧 사다리가 하나 내려오고, 사다리를 타고 몽둥이를 든 덩치가 큰 역사(力士) 한 명이 내려 왔다. 우랑은 눈이 부시고 갑자기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에 귀가 멍멍하여 정신을 못차리고 놀라서 웅크리고 있는데, 역사가 다짜고짜 우랑의 멱살을 쥐고 물었다.
 "네 놈의 모든 죄를 알고 왔다. 바른대로 말하라. 숙신족 도적떼 중의 누구와 흉한 일을 도모했는가? 숙신족 도적떼들이 성안으로 들이치는 때는 언제이며, 그 때 네 놈이 맡은 일은 무엇인가?"
 소리라는 것을 너무 오랫만에 들어보기 때문에, 우랑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대신, 우랑은 지친 목소리를 짜내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쥐들이 계속 팔다리 위로 지나다니면서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니 도무지 한 숨도 잘 수가 없었소. 잠을 자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 제정신을 갖겠소? 혈옥을 닫아 놓으면 보이지가 않으니 쥐를 잡을 수도 없고 쫓을 수도 없었소."
 역사는 그 말을 듣고 우랑을 내팽개쳤다.
 "네 놈은 도성의 귀한 집안의 출신으로 벼슬살이를 일찍 시작하여 오만방자한 것인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스스로 죄를 고하고 살려달라고 눈물을 줄줄 흘려야 마땅하건만, 너는 잠을 못잤다고 말하고 있느냐?"
 엎어진 우랑이 몸을 뒤집어 역사쪽을 향하고는 다시 말했다.
 "나는 20년 동안 조정의 벼슬을 지내면서 조정에 흠이 될 일은 작은 것도 범한 것이 없소. 하물며 숙신족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 온 것은 그 날이 첫 날일 뿐이오. 숙신족 도적떼와 내통하여 고구려군을 배반했다니, 어찌 내가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소?"
 그 말을 듣자, 역사가 노하여 소리쳤다.
 "나는 너와 같은 자들을 특히 가장 싫어 한다.
 고고한 말투로 곧고 바르게 산다고 떠들며, 여러나라의 어려운 글귀를 구해 읽고 부지런히 조상의 제사를 치르면서 학식을 높이고 인품을 닦는 척 하면서, 실상 뒤로는 온갖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하며, 세상에 남기는 일이라고는 오직 앉아서 밥만 먹고 사는 놈들이 바로 네 놈과 같은 것들이 아니냐?
 네 놈과 같은 따위는 그런 추잡한 짓을 하면서도 스스로 추잡한 짓을 하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오히려 더 우아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더욱 더러운 짓이지 않은가. 너와 같은 놈 때문에 바로 이 나라가 북으로는 숙신과 말갈에 시달리고 서로는 한족과 선비족에게 시달릴 뿐, 태평한 날이 없는 것이다."
 역사는 곧 품속에서 날카로운 쇠붙이들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말하니, 네 놈과 내통한 숙신족의 도적떼가 누구인지 말하라. 내가 힘을 쓰기 시작하면, 너는 끓는 쇳물 속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녹아내려서, 네 어미가 어떤 놈이랑 바람이 났는지도 실토하게 될 것이다."
 우랑이 잠시 입술에 고인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곧 다시 답했다.
 "나의 어미는 내가 어릴 때 죽었으니, 어찌 간통을 하겠는가?
 혹시 내 어미가 바람이 났다면 네놈의 아비랑 바람이 났겠구나. 듣자하니 어떤 못난 영감이 젊을 때 사모하던 여인을 잊지 못했으나, 사람이 비루하여 평생에 말을 못하다가, 여인이 죽고나서야 밤마다 그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백골을 붙들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자식을 같이 낳자고 속삭이는 미친짓을 한다고 하니, 그 정신나간 놈이 바로 네 놈의 아비인가?"
 우랑이 욕하는 것을 듣고 역사가 다시 소리쳤다.
 "네 놈은 죄를 물으며 형신을 하는 것을 고작 매질을 하고, 주리를 트는 것만 생각을 하느냐?
 나는 이곳에서 짐승과 같은 숙신족의 도적떼들과 싸우면서 온갖 것을 다 보았다. 칼날로 갈라낸 사람의 뱃가죽이 몇이며, 도끼로 찍어낸 사람의 목이 몇인줄 아느냐? 엉켜서 흐르는 피와 고름이며, 터져 썩는 내장과 힘줄들이 갈라지는 처참한 꼴을 하루에도 수십, 수백을 지켜본 것이 몇 번인 줄 아느냐? 부러져 튀는 뼛조각을 아이들이 놀며 꺾는 삘기처럼 생각하고, 온몸에 튀기는 핏방울을 미인이 이른 아침 길을 거닐 때 이슬을 맞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을 꿈이 나 꿀 수 있겠느냐?
 숙신족과 싸우는 가운데에 익힌 솜씨에 당하다보면, 네 놈은 없던 일도 지어내서 말하게 될 것이다. 죄수들 중에는 옳은 정신을 잃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저 눈만 깜빡깜빡해대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도 못하는 가운데, 단지 온몸을 굽신거리며 '예, 그 말이 맞습니다. 부디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라고만 외치는 자들도 있는 것을 아느냐?
 며느리가 아침을 차려 왔다고 올려도 그저 '예, 그 말이 맞습니다. 부지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하고 소리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갓난아기가 우는 소리를 내는 곳을 향하여 무수히 절을 하며 '예, 그 말이 맞습니다. 부디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하고 소리지르는 실성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느냐?"
 역사가 우랑을 죽일 기세로 대어 들자, 우랑은 품속에서 조의의 자리를 나타내는 도장을 꺼내어 보였다.
 "조의의 인장을 바치며 이야기하는 것이니, 정식으로 조정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나에게 손을 대기전에 우선 소사자에게 알리시오.
비록 억울한 누명이라고 하나, 죄를 묻기 위해 형신을 한다하면 어쩔 수 없소.
 그러나, 을파소 때의 법에 나와 있기로, 죄인을 가두는 옥의 제도는 엄히 나타나 있소. 땅에 구덩이를 파서 사람을 떨어 뜨려 넣고, 햇빛이 들지 않게 막아두는 혈옥이라는 것은 제도에 없는 일이며, 그러므로 이곳에서 형신을 하는 것은 조정의 제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오. 따라서, 그대는 조정의 제도에 맞는 옥을 갖추고 그 곳에 옮긴 후에야 나를 형신할 수 있소."
 역사는 그 말을 듣자, 금방이라도 우랑을 쳐 죽이려하던 기세를 참아 누그러 뜨렸다. 역사는 우랑이 내어 놓은 도장을 한참 쳐다보더니, 우랑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네 놈이 한 말을 알린 후에, 곧 다시 돌아오겠다. 내가 반드시 네 놈이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져 눈물을 흘리며 빌도록 만들테다."
 역사는 도장을 주워 들고 사다리를 타고 혈옥 밖으로 나갔다. 역사가 나가자 사다리도 다시 올라가고 다시 나무 덮개가 닫혔다.
 혈옥 안은 다시 깜깜해져서, 두 사람이 서로 욕을 퍼부으며 죽이려들던 기세는 그새 아무 흔적도 없이 검은 허공으로 사라진 듯 하였다. 아무 소리 없는 혈옥 안에는 겨우 우랑의 헐떡이는 숨소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시 아무 빛도, 말도, 기척도 없이 죽을 때를 기다리는 캄캄한 먼지만 천천히 가라 앉고 있었다. 지치고 다친 우랑은 마침내 기운을 잃기에 이르렀다.
 두번째로 혈옥의 덮개가 열렸을 때는 낮이 었다. 아침 햇빛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마구 몰려 왔다. 우랑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우랑의 모습을 보니, 마치 진흙탕에 버려져 더럽혀진 고깃덩이처럼 혈옥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꼴이었다. 혈옥을 오가는 들쥐들이 우랑의 옷을 갉아 먹고 머리카락을 뜯고 있었다. 혈옥 위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더니, 사다리를 타고 흰옷을 입고 작은 고깔 모양의 관을 쓴 한 노인이 내려왔다.
 노인은 학자 였는지, 품 속에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책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책을 보면서 그는 침을 우랑의 얼굴과 배에 여러 곳에 꽂고, 호리병에서 죽과 같은 약을 따라내어 우랑의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 곧이어 노인은 찬물을 끼얹으며 우랑의 얼굴을 손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침으로 찔러대면서 노인이 치료하자, 이윽고 우랑은 정신을 차렸다.
 우랑이 간신히 힘을 내어 소리를 내었다.
 "물이 있습니까?"
 노인이 물이 담긴 병을 건내어 주었다. 우랑이 그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신 우랑이 노인에게 말했다.
 "정신을 잃어 죽는 줄 알았으나, 어르신의 덕으로 다시 깨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우랑의 얼굴을 후려쳤다.
 "닥치라. 나도 네 놈이 어떤 짓을 한 놈인 줄은 알고 있다.
 아직도 성밖의 숲속에는 숙신족 도적떼들과 싸우다 죽은 시체들이 채 썩지를 않고 널려 있는데, 네 놈은 어찌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자로, 그와 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모두가 네 녀석의 근처에도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너 따위의 썩은 목숨을 살리고자 약을 짓고 떠먹이고자 하는 의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의서를 익힌 적이 있어, 내려왔을 뿐이다.
안국군의 큰 뜻을 내가 감히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으나, 어찌 그 분의 도량은 너 따위를 살려두면서, 비를 피할 방을 내어 주고, 목숨을 부지할 약을 주시는 것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숙신족 도적떼들에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너 따위는 당장에 형장으로 끌고가서, 네 놈이 피를 토하며 엉엉 울고 날뛰다가 아파하며 괴로워 하다가 목숨을 끊기도록 해야 마땅하다."
 노인은 우랑이 깨어난 것을 보자 서둘러 다시 사다리를 올라 혈옥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우랑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인이 혈옥 바깥으로 나오자, 노인의 제자인 듯 보이는 젊은 사람 두 서넛이 노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혈옥 안을 다시 돌아 보았다. 이때 들쥐 한마리가 조르르 지나갔으므로, 우랑이 놀라 움찔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노인이 좌우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들쥐를 보는 저 모습을 보면 저 놈의 흉악한 마음을 알 수 있다.
 무릇 아름다고 못난 것은 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비단벌레는 징그러운 벌레이지만 좋은 장식을 꾸밀 수 있는 것을 알기에 아녀자들이 도리어 더욱 귀하게 여기고, 소의 뼈로 국을 끓일 때에는 뼈에서 흘러내리는 죽은 짐승의 물이라 할 지언정 몸에 좋은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 약한 노인들도 앞다투어 핥아 먹는다.
 그런데, 지금 단로성에 쥐가 많은 것은, 안국군께서 숙신족의 역겨운 풍속을 막으라고 하시기에, 족제비와 담비를 모두 잡아 없앴기 때문아닌가? 이제 저 들쥐들은 부모의 시체를 족제비에게 먹이는 숙신족들의 짐승만도 못한 짓거리를 금하게 했다는 증표가 아닌가? 또한 들쥐가 갑자기 많아진 것이야 말로 바로 이 땅을 효도와 예의를 아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표시하 깃발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들쥐들이야말로 아직 세상에 고귀한 뜻이 남아 있음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저 놈은 저 쥐를 다만 더럽게 여겨 피할 뿐이니, 저 놈은 역시 고구려인의 몸뚱아리를 갖고 있으나 핏줄마다 숙신족의 도적 피가 흐르는 놈이 틀림없다."
 다시 혈옥의 덮개가 덮힐 때에 노인이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이와 같이 쥐들의 아름다움을 알고, 사악한 자들이란 작은 몸짓에서부터 그 추한 뜻이 베어 나옴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우랑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깜깜한 가운데에서도 소리를 질렀다.
 "노인장, 혈옥의 제도는 법에 없는 것이라 하여, 옮겨 줄 것을 조의의 인장을 걸고 말하였건만, 어찌 되었는지 아십니까?"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몇차례 우랑이 더 소리치자, 다른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대신 들려 왔다.
 "부분노(扶芬奴)의 제도에 보면, 무기와 진지는 지역에 따라 풍토를 가려서 달리 세우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제도에 따라, 굴을 파고 지내는 숙신족들이 사는 이곳에서는 혈옥의 제도도 옳은 것으로 본다고 한다."
 우랑이 소리질렀다.
 "부분노의 제도라는 것은 병졸을 다스리고 군사를 움직이는 제도인데, 그것을 왜 죄를 묻고 벌을 주는 일에 가져다 쓰는 것입니까? 또한 숙신족들이 굴을 파고 산다고는 하나, 햇빛도 들지 않게 하고, 물도 주지 않고 밥도 주지 않는 법이 있습니까?"
 우랑이 계속 소리를 질렀으나, 그 후로 답은 돌아 오지 않았다.
 세번째로 혈옥의 덮개가 열렸을 때는 붉은 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놀이나 저녁놀 빛이 었는데, 우랑은 아침인지, 저녁인지 알지 못했다. 아침 새인지, 저녁 새인지 멀리서 구슬피 우는 새소리가 들려오는데, 새소리 사이에 흐느껴 울면서 신음하는 한 여자의 소리도 같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곧, 사다리가 내려오고, 그 사다리를 타고, 처음 중항에서 우랑에게 칼을 휘둘렀던 갑사가 나타났다. 갑사가 우랑에게 말했다.
 "중항의 거리를 그대가 맡았다하고 큰 소리를 치던 당당하던 체구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거적대기를 뒤집어쓴 비루먹은 들개의 꼴이 되었는가? 거리마다 넘치는 쥐떼들을 먹고 사는 들개를 한 마리 잡아다가, 술집 춤꾼들이 뒤집어 쓰는 가면을 하나 머리에 달아 놓고 걸레 조각을 하나 얹어 놓는다면, 지금 네 놈의 꼴과 많이 다르기나 하겠느냐?"
 우랑은 힘이 없어 한참 말을 못하다가, 겨우 한 마디 하였다.
 "거울을 본 지 오래 되었으니 나의 겉가죽이 들개와 같은 줄은 모르겠소. 그러나 그대의 뱃속이 흘린 밥을 주워 먹는 개와 같다는 것은 똑똑히 알고 있소."
 갑사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20년 묵은 조의 어르신이시니 어찌 그 공이 높고, 이룬 바가 많지 않으시겠는가. 네놈이 얼마나 총명하였으면 20년 동안이나 도성에서 무거운 자리를 맡아 일하면서 고작 조의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냐? 네놈이 얼마나 듬직하였기에 처자식에게 쫓겨나 홀로, 2천리 바깥으로 쫓겨 왔겠느냐?
 정녕, 네 놈이 아무리 아둔하며 아무리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 한들, 아직도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느냐?"
 우랑은 힘을 잃었는지, 답을 하기 싫은지 말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갑사가 계속하여 말하였다.
 "숙신족들은 가난하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그동안 항상 고구려인들의 짐을 나르고 빨래를 하며 곡식을 얻어 더부살이를 해 오며 살아왔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은 숫자가 적고 숙신족들은 숫자가 많으므로, 가끔 경계 밖에서 숙신족의 도적떼들이 짜고 쳐들어오면 고구려 사람들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랬던 것을 오직 안국군의 힘으로, 6부(部)와 7락(落)에 흩어져 있는 근방의 숙신족들을 모두 복속시킬 수 있었다. 다만 안국군의 힘으로 이곳 단로성을 빼앗아 높은 요새로 고쳐서 감히 숙신족들이 넘볼 수 없게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숙신족들의 수는 많고 고구려 사람들의 수는 적다. 비록 안국군의 기마단인 숙신병은 빠르고, 안국군의 철갑단인 양맥병은 실수가 없다 하나, 숙신족들은 고구려 사람들의 하인과 집사가 되어 집안 구석구석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내통하여 흉악한 마음을 먹은 바깥의 도적떼들과 난을 일으키면 막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감히 고구려 사람들에게 대들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항시 고구려의 군사들과 조정은 보기만 해도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숙신족들을 다스려, 도적떼들을 막고 난리를 없애기 위해서, 고구려의 수레가 지나가면 숙신족들은 업드려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습속이 있었던 것이다. 숙신족들을 업드리게 하는 습속은 단로성을 지키고, 고구려의 경계를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지, 숙신족을 괴롭히기 위한 어린아이 같은  장난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너는 겨우 이곳에 온 지 하루가 채 못된 놈으로 이러한 까닭을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귀한 습속을 깨뜨렸다. 그래서 네 놈 때문에, 소태후 마마의 수레가 지나가는 앞에서 숙신족을 다스리는 법을 잃게 하였으니, 이것이 숙신족을 도와 도적떼가 생기게 하고 난리가 일어나게 한 일이 아닌가?"
 갑사는 우랑을 보며 다시 웃었다. 우랑은 계속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갑사가 다시 말하였다.
 "지금 저 위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소리가 들려 오느냐? 온몸이 아프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쳐 괴로워 하면서, 곧 죽을까봐 두려워 하는 소리가 들리느냐?"
 갑사의 말에 맞추어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들려오던 여자의 신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갑사가 말을 계속 하였다.
 "저것이 바로 네가 구해주려 하였던 여자가 내는 소리다. 가만히 놓아 두었으면 저 여자는 한 번 걷어 차이고 아파하고 말았을 것이고 일이 잘못되어도 못이 달린 신발에 손을 밟혀 상처가 좀 생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역적으로 몰려서 죽게 되었다.
 물어 보니, 저 여자는 순박하고 겁이 많아서 장사꾼에게 바둑돌을 사는 것 조차 두려워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네 놈이 쓸 데 없이 법이니, 예의니 하면서 말을 늘어 놓으며 따진 덕분으로 이제 역적으로 몰려 처참하게 죽게 된 것이다. 저 여자는 얼마나 무섭겠느냐? 저 여자가 너를 원망하지 않겠느냐?
 애초에 네 놈이 소태후 마마의 수레를 막아서서 큰소리를 친 것이, 저 여자를 위한 것이었느냐? 네 놈은 도성의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처자식에게 쫓겨난 것이 억울하여, 괜히 조정과 관리들에게 원한을 품고 네 놈이 법과 제도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을 자랑해 보고자 싸움을 걸어 본 것이 아니냐? 네 놈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저 여자는 얼마나 더 억울하겠느냐?"
 우랑은 계속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올려다 보아도 오직 붉은 노을진 하늘만 휑하니 보일 뿐이건만, 그 울음소리만은 서럽게 계속 들려왔다. 마치 이번에는 붉은 노을 빛을 타고 그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퍼져 내려오는 듯 하였다.
 갑사가 물었다.
 "너는 나에게 네가 숙신족을 도왔다는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말하겠느냐?"
 우랑이 기침을 몇번 하여 목소리를 고르려 하였다. 갑사가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다. 너는 나에게 네가 스스로 숙신족과 내통했다고 말하겠느냐?"
 우랑은 잠시 침을 삼키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성에서 벼슬을 받은 조정의 관리이므로, 도성에서 죄를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더군다나 묻고자 하는 죄가 역적 모의나 적과 내통했다 하는 것이면, 처벌이 죽이는 것이므로, 조정의 관리는 반드시 성상께서 처결해 주신 다음에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이 아니라 도성으로 옮겨가서 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또, 나의 일은 저 숙신족 여자의 일과 같은 것이므로, 저 숙신족 여자도 같이 도성로 가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은 국초에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少室)씨가 함께 만든 법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것으로, 이것을 어기면, 어긴자를 조정에서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나를 여기서 꺼내어 도성로 보내다오."
 그 말을 듣자, 갑사가 하늘을 보고 웃었다.
 "과연, 고집이 대단한 놈이로구나. 네 놈은 어떻게든 날 이기고 나가보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없다. 내가 지금 여기서 네 놈을 칼로 찔러 죽이고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다' 하고 백번 천번 소리질러 떠들었다고 해도, 아무도 내 수염 끝트머리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네 놈이 조정을 믿느냐? 네가 숙신족의 도적떼와 역적모의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백리 밖에서 잠을 자고 있던 놈도, 천리 밖에서 유녀(遊女)들과 술잔치를 하던 놈도, 나라를 위해서 네 놈이 역적모의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할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백명, 천명이라도 세워 놓을 수 있다. '예, 제 두 눈으로 저 자가 칼을 빼들고 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며, 분명히 기억납니다.' 하고 말할 사람들은 끝없이 있단 말이다.
 네 놈은 벼슬자리에서 쫓겨나 먼 곳으로 왔으니 나라에 불만이 많지 않았느냐? 벌써 네 놈이 오던 길에 머물렀던 술집에서 네 놈이 조정을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을 찾았다. 너는 처에게 버려진 놈 아닌가? 너는 처에게 버려진 뒤에 숙신족 여자와 눈이 맞아, 숙신족 도적떼에게 공을 세우고자 역절질을 한 것이라고 하면 되겠구나. 장사꾼 중에 네가 숙신족 여자가 장신구를 보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는 사람이 있으니, 너는 저 숙신족 여자와 눈이 맞은 것이다.
 네 놈이 조정에 가서 성상의 금관을 붙잡고 사정을 하건, 다섯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귀신을 붙잡고 빌건 간에, 네 놈은 내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다."
 갑사는 실컷 욕을 퍼붓고 돌아서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 하였다. 사다리에 오르기 전에, 갑사는 우랑에게 다시 말하였다.
 "기실, 내 뜻을 말하자면, 지금 내 놈의 목청을 확 잘라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며, 멍청한 헛소리를 떠들면서 네 놈의 허망한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우쭐대는 그 말소리를 못내게 했으면, 참 기분이 좋겠다. 내 칼이 이처럼 크다보니, 목청만 골라서 잘라내지 못하고 네 놈의 모가지를 몽땅 잘라낼까봐 다만 칼을 아낄 뿐이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겠다. 네 놈이 멍청한 벌레먹은 생각으로도 헛소리를 한다고 해도, 네 놈이 네 죄를 네 입으로 말해주면 안국군께서 뜻을 이루시는 데에 공이 될 수 있으니, 살려 두겠다. 너는 네 죄를 네 입으로 말해야 한다. 너와 같이 야비하고 멍청한 벌레 같은 자라 할 지언정, 안국군께서 큰 일을 하시는 데에 쓰기로 하셨으니, 살려두겠다는 말이다."
 혈옥은 닫히고, 어둠과 함께 울부짖는 여자의 소리도 다시 점차 희미해졌다.
 네번째로 혈옥의 덮개가 열리자, 다시 사다리가 내려오고 이번에는 사다리를 타고,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숙신족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숙신족들이 입는 옷과 같은 형상을 한 옷을 입었으나 옷이 정갈하고 귀해 보였으며, 자태가 곱고 화장이 유려하여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여자는 지쳐 죽어가는 우랑 곁에 앉았다. 여자는 우랑을 보듬어 안고, 우랑의 입에 물잔을 가져가 기울였다. 그 안에는 따스하고 달콤한 꿀물이 흘러나왔다. 반쯤 정신을 잃었던 우랑은 먹을 것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마침내, 여자의 품안의 향긋한 내음이 좋았으므로 우랑은 정신이 들어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우랑이 쳐다보자, 고운 여자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랑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여자가 답하였다.
 "저는 본시 숙신족 추장의 딸로, 저희 아버지는 용맹하고 사나운 노(盧)부족의 추장이셨습니다. 노부족은 단로성에서 고구려와 숙신족들이 싸울 때에 마지막까지 싸운 부족이었으므로, 저희 아버지께서도 싸우다 죽을 때까지 고구려인을 죽인 숫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안국군께서는 싸움이 끝난 후에도 덕을 베푸셔서 저를 죽이거나 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비를 잃은 불쌍한 계집이라 하여, 좋은 집과 많은 곡식을 주셔서 이와 같이 잘지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러하니, 옛날 추장의 집에 살면서,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짐승을 잡아 먹고 살던 때보다 도리어 지금 더욱 풍족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안국군께서는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그러하온즉, 안국군께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잘못을 빌면, 필시 안국군께 용서를 구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숙신족 추장의 딸이니 많은 숙신족의 사람들과 이야기하여, 공께서 어찌하여 이곳에 갇히게 되었는지 소상히 들었습니다. 숙신족으로 고구려 수레가 지날 때 마다 엎드려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한 숙신족으로 길에서 여자의 손을 못으로 짓밟으려던 병졸을 꾸짖던 공의 의로운 기백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찌, 공께서 꿋꿋한 뜻을 세우는 것을 모른다 하겠습니까.
 하지만, 숙신족은 본시 산과 들에서 짐승을 잡아 그 피와 살을 발라 먹으며 사는 사나운 족속입니다. 그렇다보니, 지난 싸움에 원한을 갚는다며, 길가는 고구려 병졸을 은밀히 잡아 죽이고, 고구려의 창고와 고구려의 집에 몰래 불을 지르는 도적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즉, 이는 죄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때가 많으며, 성안에 타오르는 불길에 저희 숙신족들도 같이 죽을 때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더우기, 요즈음에는 제 아비의 먼친적이 노부족의 새 추장이 되어, 더욱 그 기세가 등등해져서, 이러한 도적떼들은 더 많아 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고구려의 예법과 습속에 위엄이 무너지면, 무엇으로 도적들을 잡고, 백성들을 지키겠습니까? 비록 공의 뜻은 통쾌하고 높은 것이나, 실상 변방의 6부7락을 다스리며  헤아려야 할 것은 통쾌한 뜻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이와 같이 또다른 일이 많고도 많습니다. 그런즉, 공과 같은 뜻을 잠시 굽혀야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공께서 고구려 수레를 가로 막아 선 것 때문에 숙신족들이 모두 고구려를 업신여기고 도적떼들끼리 서로 힘을 모아 숙신족의 이름을 높이자고 하면서 저마다 활시위를 당기며 일어난다면, 이는 공이 홀로 막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디 공께서는 힘을 다하여 안국군께 용서를 구하고, 안국군께서 도적떼들의 소굴을 벌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여자는 우랑을 품에 안고 한참 말을 하더니, 문득 우랑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춥고 습한 바닥에 오래 있었기 때문입니까? 몸이 몹시 차갑습니다. 부끄러워 마시고 이리와 안기십시오. 몸을 녹여야 합니다."
 여자는 옷섶을 풀어 우랑을 덮어 주었다. 여자의 몸은 뜨거운 온기가 가득하였으므로, 우랑은 참으로 오랫만에 가슴이 덥혀 지는 것을 느꼈다. 따스해지면서 우랑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여자가 그 모습을 보고 측은해 하였다.
 "공께서는 오직 뜻을 꺾지 않고 수십년 똑똑히 살아왔을 뿐인데, 이와 같이 일이 잘못되어 나라에 누를 끼치고 안국군과 같은 분께 해를 입히셨으니 참으로 가련하십니다. 옳은 일을 하며 살았다고 조정의 중신들이 등을 돌리고, 처자식마저 멀리하는 때에, 그저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목숨마저 빼앗기게 되셨으니, 이토록 슬픈 일이 어디있습니까?
 이와 같이 지내시다가 어두운 혈옥 속에서 죽어지시면, 도대체 누가 그 마음을 알아주며, 앞으로 천만년이 지난다한들, 이제 또 무엇을 해보겠습니까? 차라리, 안국군께서 적을 쫓는 것을 도와주시고, 안국군께 용서를 구하여, 이 혈옥 구덩이 밖으로 나오십시오.
 비록 벼슬을 잃고, 재물을 잃고, 처자와 벗들을 잃었다하나, 죽지 않고, 한 몸뚱이 건져 언젠가 또다시 베필이라도 얻는다면, 아직 다시 따뜻해 지는 좋은 날이 채 돌아오지도 않았거니와, 앞으로 봄과 여름날이 또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여자가 우랑을 꼭 껴안고 꿀물과 죽을 계속 먹여주니, 마침내, 우랑은 마음에 맺혔던 것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하였다.
 "내가 어찌 사특한 마음을 갖고 길을 막아섰겠습니까? 다만 이곳의 복잡한 사정과 숙신족의 많은 원한을 몰랐으므로 안국군께 잘못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우랑이 울며 이야기 하자, 여자는 우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같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랑이 다시 여자에게 물었다.
 "제가 뉘우치고, 안국군께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해야 안국군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여자가 답하였다.
 "안국군께서 노부족을 죽여 없애 도적떼들을 뿌리 뽑을 수 있도록, 그 구실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노부족이 단로성 안으로 쳐들어 오려고 할 때 같이 꾀를 꾸몄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우랑이 울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이처럼 혈옥 깊은 곳에 내던져져 있으니, 어찌 내궁(內宮) 깊은 곳에 있는 안국군께 그와 같은 말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여자가 답하였다.
 "공께서는 숙신족을 위해 나서셨던 분이시니, 제가 안국군께 청을 올려 공께서 안국군을 뵈올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우랑이 그 말을 듣고, 감격하여 여자를 끌어안고는 여러 차례 고맙다고 말하며 울었다.
 우랑은 마침내 눈물을 멈추고, 여자를 보며 숙신족의 말로 고맙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자는 알아 듣지 못하고 묻기를,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였다.
 이때 우랑이 보니, 여자가 귀에 금귀고리를 걸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우랑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안색이 바뀌어 여자에게 묻기로,
 "족제비의 가죽을 얼마에 구할 수 있습니까?"
 했더니, 여자가 의아해 하며 답하기로,
 "지금은 족제비가 씨가 말랐으므로 값이 올라 무문전(無文錢)을 주고 사야 합니다만, 왜 갑자기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하였다.
 그 말을 듣자, 우랑이 여자의 팔목을 세게 붙들고 물러 앉으며 여자를 노려 보았다.
 "너는 추장의 딸이 아니며, 숙신족도 아니다. 너는 숙신족의 말을 모르며, 족제비 가죽의 값을 숙신족과 고구려인이 각기 다르게 치는 것을 모르고 있다. 숙신족이라면서 어찌 그것도 모르는가? 너는 어찌 나를 속이려 하느냐?"
 그러자 여자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우랑의 억샌 손이 여자의 팔을 비틀며 곧 목을 졸라 핏줄을 끊어 버릴 뜻 부들부들 떨리며 힘이 들어갔다.
 여자는 파랗게 질려 떨면서 엎드려 말하였다.
 "공께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저는 상항(上巷)에 있는 한 술집의 유녀로, 일을 잃고 쫓겨난 남자나 벼슬을 잃은 어른을 달래어 주는 데 재주가 있어 알려졌습니다. 마침 양맥병의 갑사 나리가 찾아와 저에게 말하기로, 안국군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갑사 나리께서 저에게 숙신족으로 꾸미라고 하셨으며, 또 공께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 지를 하나하나 일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거짓말을 하며 공을 달래어 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듣자하니, 숙신족의 도적은 잔혹하여 살아 있는 사람을 칼로 썰어 죽이면서도 웃고 노래하며 춤춘다 들었습니다. 하오면, 숙신족의 도적과 같이 하신다는 공께서도 그와 같으신 분이십니까? 저는 두려워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습니다. 저는 6부7락에 사는 사람으로 오직 안국군을 위한다는 말만 믿었을 뿐이지, 공께 나쁜 일을 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부디 제 목숨만은 구하여 주십시오."
 여자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업드려서 떨고 있었다. 우랑이 재차 물었다.
 "나는 그 갑사에게 도성의 조정으로 옮겨서 죄를 묻게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가?"

 "갑사가 말하기를 공께서 그 일을 물을 지 모른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답을 이와 같이 일러주었습니다."
 여자가 말을 계속 하였다.
 "죄인은 말에 태우거나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성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 옛 제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로성의 말들은 대부분 숙신병의 기병대에서 싸움에 쓰고 있으니, 함부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 비록 숙신병에서 쓰이지 않는 말이 열 여덟 필이 있기는 하나, 이 말들은 발굽에 편자를 박고 있어서 역시 쓸 수가 없습니다. 말 발굽에 편자를 다 박는 데에 여드레가 걸린다고 하는데, 숙신족과 내통한 죄는 군사의 일과 관련된 죄이므로 앞으로 사흘안에 처결해야 하는 급한 일이므로, 기다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타고 갈 수 있는 말이 없으므로, 도성로 옮겨서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우랑은 힘이 빠져 드러누웠다. 우랑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가소롭구나. 말만 다리가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 없어서 도성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때를 맞춰 일제히 열여덟 필의 말 발굽에 일제히 편자를 다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나를 보고 앞뒤를 모르는 관리라고하나, 이것이 아둔한 바보들의 놀음이 아니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윽고, 우랑이 소리를 내어 껄껄 대고 웃기 시작하였다. 여자는 우랑이 팔을 놓아주자, 옷가지와 음식들을 내팽게 치고 허겁지겁 사다리를 기어 올라 도망 쳤다. 곧 덮개가 닫히고 다시 혈옥 안이 캄캄해 졌다. 그러나, 우랑이 우는 소리와 웃는 한참 동안 길게 흘러 나왔다.
 "아니다. 이러한 바보들이 바보놀음을 하면서 술 취한 여자 하나가 꿀물 한 잔을 올리게 하였거늘, 나는 그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빌고 도와 달라 쩔쩔 매지 않았는가? 이러한 내가 바보스럽지 아니한가? 이것은 잡초가 호미를 보고 살려달라며 애절하게 노래를 불렀다는 따위의 광대들이 하는 우스갯소리 꼭두각시 놀음과 다를 것이 있는가? 나는 과연 더욱 더 바보스럽지 아니한가. 우습기가 끝이 없도다."
 한편 도망친 유녀는 갑사와 혈옥을 지키던 병졸들에게 알렸다.
 "그 자가 마구 웃고 있었습니다."
 갑사는 조바심이 났다. 갑사는 혈옥을 관리하고 있는 소사자에게 말했다.
 "소사자께 아룁니다. 저 죄수가 뜻대로 바라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미치거나 죽어버리면, 다시 비슷한 죄수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서둘러 그 자가 안국군에서 세우신 뜻대로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장 다시 역사를 보내어 그 자를 때리고 아프게 하여 뜻을 이루도록 하라."
 그리하여 곧이어 이튿날 밤, 소사자는 다섯번째로 혈옥의 덮개를 열게 했다. 그리고, 소사자는 형신을 맡은 역사를 내려 보냈다.
 역사는 이번에도 달이 뜬 깊은 밤시간에 혈옥으로 내려 왔다. 역사는 투덜거리며 사다리를 내려오면서, 몽둥이와 쇳덩이들을 꺼냈다. 역사가 사다리를 내려오며 말하였다.
 "네 놈 따위와 같은 죄수들 때문에 나는 항상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혈옥에서 피냄새를 맡아야 하니, 답답하고 갑갑하구나.
 나를 부리는 소사자께서는 겨우 힘들게 일하는 나를 위로해 준답시고, 내 집안에서 지난 겨울 돼지고기 맛을 보지 못했다하며 돼지 고기 몇 근을 줄 뿐이다.  내가 하룻저녁에 없애버리는 사람의 살이 몇십근이건만, 고작 돼지고기 몇 근이라니 어울리지 않는구나."
 역사는 밤마다 늦게 형신을 하는 것을 불평하느라 화가 나서, 그만큼 더 심하게 우랑을 괴롭히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꼿꼿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가 놀라서 우랑을 쳐다보자, 우랑이 역사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나는 안국군의 뜻대로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안국군을 뵙고 내가 숙신족의 노부족과 내통하여 단로성을 불태우려 하였다고 내 죄를 아뢰려고 한다."
 잔뜩 몽둥이며 쇳덩이들을 손에 움켜진 역사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랑이 다시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안국군께 청하는 것이 있다. 나는 비록 단로성과 6부7락의 상황을 모르고 감히 수레가 지나가는 행차를 막았으니 죄가 있으면 있다 할 수 있겠거니와, 나 때문에 같이 잡혀온 숙신족의 여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숙신족의 여자를 먼저 풀어주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나면, 안국군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모두 말씀을 올리겠다."
 우랑이 말을 마치자, 역사는 몽둥이를 들고 말했다.
 "혈옥 깊은 곳에 처박혀 가만히 앉아 있는데에도 기운이 모자라 비실비실 하는 죄인놈이, 감히 안국군께 무슨 청을 걸고 죄를 말하나 마나 떠들고 있느냐? 네 놈이 다시는 긴 말을 주절 거리지 못하도록 얼이 빠지게 해 주겠다."
역사가 우랑을 보고 욕하자, 우랑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러더니 우랑이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안국군께 올릴 말씀은 그러하거니와, 너에게도 할 말이 있다."
 역사가 잠시 멈칫하자 우랑이 말을 계속했다.
 "너의 아내가 지금 간통하고 있다."
 역사가 그 말을 듣자, 격분하여 소리쳤다.
 "역적 놈의 미친 소리가 끝이 없구나."
 우랑이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지금 네가 아내가 간통하는 것을 보러 뛰어가면 너는 죽을 것이오, 아니면 너는 살 것이다."
 역사가 주먹을 쥐고 우랑을 향해 달려 들었다.
 "내가 네 놈을 형신하다가 실수했다고 말하고, 지금 네 놈의 그 더러운 입을 그대로 으깨고, 이 손으로 목청을 뽑아 내겠다."
 우랑은 흔들림 없이 말을 계속했다.
 "지금껏 너만 항상 밤늦은 시간에 이 깊숙한 혈옥을 돌게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히 너를 밤시간 동안에 집에서 떼어 놓으려고 너의 윗 사람인 소사자가 꾸민 일이다. 또한 소사자가 너의 집에서 지난 겨울 동안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 일을 안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집안일을 아는 것을 보니 소사자가 너의 집에 자주 드나든 것이 틀림 없다.
 소사자라는 자가, 늦은 밤시간마다 일부러 너를 집에 오지 못하게 하면서 또한 자신은 너의 집에 자주 드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너의 처가 인물이 못나거나 마음이 굳다면 또 모를까, 너의 처와 간통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역사는 그 말을 듣자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우랑을 쏘아 보았다.
 "만약 나의 처가 정숙하여 마음이 굳을 수도 있을 텐데, 네놈은 어찌 그렇게 간통이라고 혓바닥을 놀려대는가?"
 그러자, 우랑이 답하였다.
 "네 놈의 처와 바람이 안났다면, 네 놈의 딸과 바람이 났겠지. 소사자가 너의 어린 딸과 바람이 난 것이라 하면 기분이 더 좋겠느냐?"
 우랑이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지금 급하게 달려가서 소사자와 네 처가 간통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소사자는 무슨 누명을 씌워서든지 너를 즉시 죽일 것이다.
 지금껏 너를 살려두고 오히려 이와 같이 공을 세우는 일을 준 것을 보면, 이 소사자는 겁이 많고 작은 일에 고민을 많이 하는 자이다. 그런 자가 너와 같이 흉폭한 자의 원한을 산 것을 알게 되면 너의 큰 주먹에 맞아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필시 너를 먼저 죽이려 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겪어 보기로, 6부7락에서 누명을 씌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명을 덮어 쓰는 일이란, 중항 거리 가운데에서 사람 답게 한나절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그러니,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끝없이 많은 죄수를 괴롭힌 너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날개를 뗀 파리를 붙잡는 것 보다 간단한 일이다."
 역사는 그말을 듣자 새끼줄에 묶어 들고 있던 돼지고기를 내던졌다. 역사는 말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기만 했다. 역사의 그 모습을 보고는, 우랑이 다시 말했다.
 "지금 집으로 가면 너는 죽게 된다. 어차피 떨어진 낙엽을 다시 붙일 수 없는 것이고, 빼앗긴 마음을 되찾을 수는 없는 것이지 않은가? 그냥 오늘 밤 아내와 소사자가 마음껏 즐기도록 내버려 두고는, 아내를 내쫓고 새 처를 얻는 것이 어떠한가."
 그러나 역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씩씩거리며 사다리를 올라갔다. 역사는 올라가며 외쳤다.
 "집에 달려가서 보고, 돌아와 네 놈도 곧 죽이겠다."
 다음날, 갑사가 병졸들과 다시 나타나 우랑을 데리고 사다리를 올라갔다. 그리하여 갑사에게 이끌려 우랑은 혈옥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우랑은 참으로 오랫만에 혈옥 밖에 서서 산과 들과 넓은 하늘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여, 한참 동안이나 먼 데의 산을 쳐다 보았다. 넓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빙글빙글 돌며 이곳저곳을 보고는, 또한 대낮에 사방으로 내려 쪼이는 밝은 빛을 한껏 온몸으로 받아 보았다.
 갑사가 우랑에게 말했다.
 "안국군께서 내궁에 13가(加) 들을 모아 놓고, 네 놈이 노부족과 내통하여 난리를 일으키려 했다고 아뢰어 올리는 말을 들을 것이다."
 갑사의 말에 우랑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갑사가 이끄는 데로 따라가면서 주위를 둘러 보니, 혈옥들이 있는 구덩이들의 한 끝에 높은 장대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장대 위에는 잘린 역사의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
 
 4.
 갑사와 병졸들은 곧 우랑을 나무로 된 우리 속에 집어 넣고 가두었다. 우리 안에는 기둥이 하나 있었는데, 병졸들은 우랑을 그 기둥에다 묶었다. 갑사가 말하였다.
 "네 놈이 바른대로 안국군께 네 죄를 아뢰는 것이 아니라, 또 엉뚱한 생각을 품어 13가 앞에서 요망한 말을 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거든 지금 마음을 고쳐 먹고 그만 두도록 하라.
 6부 7락의 원로들을 모아 두고 여러 가지를 같이 의논하면서, 만약 안국군이 하는 일 중에 싫은 것이 있거든 멈추도록 하는 것이 13가의 일이다. 그런데, 철갑단인 양맥병을 모을 때에 그 갑옷을 만드는 재물을 무릇 11가들에게 거두어 들이도록 했다. 이곳은 숙신족과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 곳이니 양맥병의 갑옷을 갖추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13가 중에 누구에게 얼마씩의 갑옷을 거둘 지는 모두 안국군께서 정하시는 것으로 제도가 되어 있다.
 따라서, 13가 중에서 안국군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한 벌의 갑옷도 바치게 하지 않고, 안국군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수백벌의 갑옷을 바치게 한다. 그러면, 안국군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스스로 망하기 전에 자리를 내어 놓고 물러나게 된다. 이 때문에 마침내 옛 13가는 모두 흩어지고, 지금은 새롭게 안국군의 뜻에 맞는 자들만 모여 새로운 13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네놈이 13가들 앞에서 무슨 기믹힌 헛소리를 떠들어 댄다고 한들, 안국군의 뜻을 거슬러 네놈의 말을 들을 원로는 이제 없는 것이다."
 우랑이 묶인 채 비웃으며 말하였다.
 "안국군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어찌 새로운 13가인들 아름답지 않겠소."
 그리고 잠시 후, 우랑이 곧 말을 뒤이었다.
 "다만 내 한가지 다른 청이 있으니, 나 때문에 갇혔던 숙신족의 여자를 한 번 보게 해 주시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그 숙신족의 여자 때문이오. 그러니, 숙신족의 여자가 살아나가고, 내가 죽어 없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녀간의 내밀한 사정을 나눌 것이 있지 않겠소?"
 그러자, 갑사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너는 지금 두 팔이 기둥에 묶이고 온몸이 더럽게 삭아 기운 없이 갇혀 있다. 네가 지금 그 여자를 만난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 여자를 굳이 한 번 보겠다고 하느냐?"
 그러자, 병졸 하나가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갑사에게 말했다.
 "숙신족 놈들의 역겨운 짓거리들 중에 어찌 옳은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병졸이 그렇게 말하고는, 몇 걸음 떨어져 돌아섰다. 곧 풀려난 숙신족 여자가 나타났다.
 숙신족 여자는 묶여 있는 우랑을 보자 우리 앞에 달라 붙어 무엇인가를 파긁어내는 듯이 우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다만 그와 같은 소리를 계속 낼 뿐으로 숙신족 여자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우랑이 보니 묶인 기둥 때문에 잘 볼 수는 없었으나, 여자는 목과 혀를 다쳐서 말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우랑은 그 모습을 보니 처량하여 가슴이 저렸으나, 이내 급히 숙신족의 여자쪽으로 최대한 다가가 귀쪽을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이제 그대를 풀어 주고 원래 일하던 베짜는 곳에 가게 해 줄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곧 숙신족들을 해할 것이니 그대로 있으면 그대는 가장 먼저 죽을 것입니다.
 병졸들이 저에게 하는 말을 듣자하니 안국군은 지금 노부족이라는 자들에게 누명을 씌운 뒤에 그들을 모두 잡아 죽이려고 하는 듯 합니다. 그러니, 이곳을 나가게 되면 그대는 곧장 노부족의 추장을 찾아가 반드시 흩어져 몸을 숨기고 피하라고 하십시오. 곧 안국군의 군사가 노부족을 잡아 죽이러 오게 되면 그대의 말 덕분에 노부족은 몸을 피해 살수 있게 될 것이니, 그대는 노부족의 은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노부족의 추장이 그대를 한동안 먹여 살려 줄 것입니다."
 숙신족의 여자는 계속 정신 없이 울 뿐으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 하였다. 그러므로, 우랑은 계속 다그쳐 말하면서 몇 번이나 그 말을 다시 전하였다. 이윽고, 병졸들이 다시 돌아와 두 사람을 보았다. 갑사가 말하기를,
 "너는 비록 짐승 같은 역적이나 그래도 남자일 것인데, 저 다쳐서 터진 더러운 얼굴을 보고 무슨 남녀간의 정을 생각하느냐?"
 하였다.
 이내, 병졸들이 숙신족 여자를 끌고 갔다. 우랑은 끌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아무 소리 없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우랑을 가둔 우리를 싣고 수레는 내궁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성과 내성의 문이 열리고, 내궁의 본전(本殿)이 나타났다. 안국군이 기거하는 내궁은 도성의 궁궐 못지 않게 건물이 높고 기둥이 굵었다. 무엇보다 기와 마다 새겨진 짐승 얼굴의 무늬가, 도리어 도성의 궁궐 보다도 더 크고 화려하였다.
 우랑이 그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나는 혈옥에 갇혀 있으면서, 안국군이 숙신족과의 싸움에 이겨 백성을 구하고자 어쩔 수 없이 제도를 비틀고 구부렸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다. 하지만, 지금 보니, 내궁을 이와 같이 크게 꾸며 놓았으니, 이것은 안국군 스스로 사치를 좋아하고 뽐내어 보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말을 듣자, 갑사가 칼등으로 우랑을 후려쳤다.
 "감히 안국군을 욕보이는가? 안국군께서 높고 기와가 큰 내궁을 세우신 것은, 땅에 굴을 파고 사는 숙신족들이 이 건물들을 보고 고구려를 우러러 보고, 고구려 군사의 솜씨와 힘에 겁을 집어 먹도록 한 것이다.
 항상 노략질할 틈을 노리는 숙신족의 추장들이 해마다 내궁에 찾아와 인사를 올릴 때마다, 우뚝한 건물 앞에서 위압 당하여 움츠러들지 않는가? 이와 같이 크고 좋은 내궁 본전보다 더 튼튼하게 단로성을 지키는 것이 또 있겠는가?"
 마침내 내궁 안으로 들어서자, 갑사는 물러서며 우랑에게 말하였다.
 "반드시 내가 알려준 대로만, 안국군과 13가 앞에서 아뢰어야 한다. 다른 소리일랑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갑사는 마지막으로 다시 우랑이 할 말을 다시 당부하였다.
 갑사가 멀어지자, 곧이어 숙신병의 말탄 군사들이 나타났다. 숙신병의 기병들은 직접 수레를 끌고, 우랑을 가둔 우리를 안국군과 13가 앞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우랑이 탄 수레가 와서 멈추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랑쪽을 바라 보았다. 바닥에는 나무로 조각을 짜서 넣은 높은 앉을 자리들이 차례로 놓여 있어는데, 그 자리 위에 새하얀 옷을 입은 13가들이 앉아 있었다. 제일 안쪽에는 보다 높은 자리가 있고, 붉고 푸른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안국군이 앉아 있었다.
 13가 중에는 안국군이 손발처럼 부리는 숙신병과 양맥병의 장수 출신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8명이 있어서, 머리에 쓴 관에 꿩의 깃털을 꽂아 조우관(鳥羽冠)으로 꾸미고 있었다. 또 안국군의 부하와 친척 중에 13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4명이 있었으니, 이들은 소골(蘇骨)이라하는 귀한 관모를 쓰고 있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머리를 꾸민 모양이 숙신족의 모양이었다. 곧 그 한 사람은 숙신족 사람으로 13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였다.
 13가 중에, 조우관을 쓴 사람 한 명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지난 날 아뢰던 바와 같이, 다시 아뢰어 여러 가들께 알려 올립니다. 요즈음 숙신족 도적 중에 지난 싸움에 패한 것에 원한을 품고, 또한 죽은 추장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성안 곳곳에 불을 지르고, 귀한 고구려 집안의 자제와 아녀자들을 몰래 붙잡아 가는 흉악한 무리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른 조우관을 쓴 사람이 다시 또 말하였다.
 "지난 날 아뢰던 바와 같이, 다시 아뢰어 여러 가들께 알려 올립니다. 이곳 북변의 6부7락에는 사람이 열 명이면 그 중에 아홉 명은 숙신족이고 하나만 고구려 사람입니다. 이 지방에는 숙신족의 숫자가 워낙에 많으므로 숙신족이 죽은 추장의 원한을 내세워 도적질을 하면, 같은 숙신족끼리는 서로 숨겨주고 서로 도와주는 자들이 많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단로성 싸움에서 그 추장이 죽은 노부족들은 더욱 단단히 다스려야만 위험이 없는 것입니다.
 특히, 노부족은 얼마전에 죽은 추장의 먼 친척을 새로운 추장으로 뽑아 올렸으므로, 그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습니다. 그러니, 머지 않아 노부족의 사람들 중에 옛 싸움에 진 원수를 갚겠다고 도적이 되어 악한 짓을 하는 무리들이 많이 나타나 성안 곳곳에 가득가득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소골을 쓴 사람이 말하였다.
 "지난 날 아뢰던 바와 같이, 다시 아뢰어 여러 가들께 알려 올립니다. 지난번 단로성 싸움에서도 노부족에서 반발하는 자들이 가장 많았고, 또 그 정도도 심했으므로, 그 부족을 없애기 위하여 6백채의 집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 내어 1천리 떨어진 오천(烏川)부로 모두 옮겨 살게 하고, 원래 집은 모조리 태워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노부족은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떠도는 장사꾼이나, 오가는 짐꾼이 되어, 하나둘 각지에서 도리어 모여들었습니다. 하오니, 도리어 왠갖 나쁜 행실을 배워온 자들이 많아 더 다루기는 어려워져 버렸습니다. 6백 집안의 사람들을 옮기고 늘어선 집들을 불꽃으로 이룬 성벽처럼 활활 타도록 모두 태워 없앴는데도, 노부족이 도리어 더 거세어 질 뿐이라면, 또 무슨 방도가 더 있겠습니까?"
 그 말에, 처음 말을 꺼냈던 조우관 쓴 사람이 다시 답하였다.
 "지난 날 아뢰던 바와 같이, 다시 아뢰어 여러 가들께 알려 올립니다. 방법인즉, 노부족의 도적떼들을 일시에 기병대로 습격하여 모두 죽여 없애는 것입니다. 그 숫자는 채 삼, 사백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눈치 채기 전에 급히 숙신병 기병대를 내달려 덮치게 하면 모조리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소골을 쓴 사람이 되물었다.
 "지난 날 아뢰던 바와 같이, 다시 아뢰어 여러 가들께 알려 올립니다. 그러나 어찌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자들을 다만 뜻이 사납다하여 어찌 삼백명 사백명씩을 다 죽여 없앨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지나친 일이 아닙니까?"
 이에, 조우관 쓴 사람이 대답했다.
 "지난 날 아뢰던 바와 같이, 다시 아뢰어 여러 가들께 알려 올립니다.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본시 숙신족의 여자들은 순하며, 남자들은 참을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납고 잔인한 성질만 다스릴 수 있다면, 숙신족들을 부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가장 사나운 노부족을 모두 죽여 없애면, 더이상 다른 숙신족들에게 사나운 습관을 전해줄 사람들이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숙신족들이 모두 크게 겁을 먹고 다시는 잔인한 일을 하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겨우 몇 백명의 사악한 도적떼들을 죽여 없애 버리는 것만으로, 이제 그자들이 원수를 갚는다고 날 뛸 일이 영영 생기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 백성 수천의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곳 수만의 숙신족들을 죽이거나 때리지 않으면서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숙신족 복장을 한 사람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침내 숙신족 복장을 한 사람이 말했다.
 "지난 날 아뢰던 바와 같이, 다시 아뢰어 여러 가들께 알려 올립니다.
 지난 단로성 싸움이 끝나고, 안국군께서 손수 돼지를 잡아 그 고기를 잘라 6부7락의 여러 추장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씀하시기를, '비록 활 시위를 서로 당기며 싸웠으나,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6부7락의 많은 숙신족 추장들은 모두 안국군께 복속하며, 매년 직접 내궁에 찾아와 엎드려 인사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선물을 바치고 그 아들 딸을 보냅니다.
 이는 진실로 안국군께서 아버지와 같은 덕으로 숙신의 부족들을 돌보며 고구려의 풍족한 문물을 나누어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안국군께서 다만 부족의 몇몇 흉한 자들이 저지른 악행을 금할 방법을 구하는 것이 답답하다하여, 다른 까닭도 없이 한 부족 사람들 사백이십육 사람을 모두 죽여 없애려 하신다면, 아버지처럼 안국군을 믿고 따르던 숙신의 여러 추장들은 얼마나 놀라고 어지럽겠습니까? 다른 숙신족들도 곧이어 언제 또 이유 없이 죽을지 모르는 것을 억울하게 여기고, 모두 힘을 모아 단로성으로 쳐들어 온다면, 지난번 보다 몇 배나 큰 난리를 다시 겪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조우관을 쓴 사람 몇몇이 웅성거리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공께서는 스스로 숙신족이라하여, 지금 숙신족이 고구려로 창칼을 들이대면 안국군도 두려워해야 한다고 감히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까?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안국군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천한 핏줄로 귀한 자리에 앉아 있음을 아신다면 더욱 말을 가려해야만 욕을 듣지 않는 법입니다."
 13가들이 함께 모여 떠들고 다투느라 소란스러워졌다. 그 모습을 안국군이 가만히 보고 있더니, 조용히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안국군이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자, 다투던 13가들은 모두 일제히 말을 멈추고 안국군쪽을 향해 머리를 굽혀 숙였다. 시끌벅적하던 것이 갑자기 믿기 어렵도록 일시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해졌다.
 안국군이 말하였다.
 "비록 노부족에 간사한 자들이 많아 도적이 되는 이들이 많다고는 하나, 어찌 그렇다고 아직 죄를 짓기도 전에 노부족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잔인한 짓을 하겠는가? 그러면 어찌 숙신족들이 우리를 믿고 따르겠는가? 그렇듯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하면 죄상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안국군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고 부드러웠으나 또한 힘이 있었다. 13가가 일제히 답하였다.
 "안국군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저와 제 자손의 뜻과도 같습니다."
 곧이어, 안국군이 말하였다.
 "그런데, 이제 숙신족의 도적떼들과 내통한 한 간사한 역적을 잡아 들여, 그 자가 소상히 말할 것이 있다고 한다. 그 자의 말을 들어보고, 노부족의 죄가 분명하면 그 때 노부족을 죽여 없애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 말을 듣자 13가 중에 숙신족의 차림을 하고 있던 사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후 그는 일어나서 안국군 앞에 가더니 무릎을 꿇고 간곡히 말하였다.
 "어찌 이와 같이 일을 몰아 가십니가? 이제는 억울하다고 말 한 번 하지 못하게 막으시고,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죽이려 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본시 천한 숙신족 중에서도 천한 자였으니, 벌레와 같이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작은 짐승을 잡아 겨우 목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굶는 것을 버텨 오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온데, 지금은 안국군께서 내리신 큰 은혜로 하루 아침에 좋은 옷을 입고, 13가의 한 사람이라 하면서 내궁 안에 들어와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니, 저는 이제 곧 녹아 없어져 죽어도 더 아무런 바랄바가 없는 몸입니다.
 그러하온즉, 제가 오직 안국군을 위하여 간곡히 바라는 말씀을 올립니다. 노부족들이 어리석어 옛 원한을 잊지 못하고 그 한둘이 처참한 일을 벌이는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노인과 아이와 여자와 공신까지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발바닥에 부스럼이 생겨 간지러운 것을 견디기 어렵다하여 다리를 잘라내어 버리면 되겠습니까?
 이러한 일을 벌이시오면, 오히려 이는 안국군의 높은 공덕을 스스로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다시 생각하여 돌이켜 보시면, 눈꺼풀 아래에 따가운 것이 돋아 견디기 어렵다고 머리통을 잘라 없애버리는 일과 같음을 영민하신 안국군께서 스스로 모르시겠습니까."
 그가 절절히 말하며 울먹이는 소리를 섞어 아뢰자, 잠시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이 조용하였다. 안국군은 얼마 동안 말한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안국군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먼발치에 서 있는 한 시녀를 쳐다보았다. 시녀는 안국군의 눈을 보자, 곧 고개를 숙여 끄덕였다.
 시녀는 바닥에 엎드려 빠르게 기어서 안국군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내궁에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논할 때에는 엄한 격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계신 분 중에 한 분의 차림새와 관모를 쓴 모양은 고구려의 제도가 아닙니다."
 그러자, 안국군이 말하였다.
 "고구려의 예의가 아니고 고구려의 제도에 어긋나는 행색을 한 자를 어찌 이 엄한 자리에 두겠는가."
 안국군이 말을 마치자, 칼을 찬 갑사 두 명이 걸어와 13가 중에 숙신족의 차림새를 한 사람을 붙잡아 끌고 나가 버렸다.
 이제는 13가 중에 다른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므로, 안국군이 다시 말하였다.
 "숙신족과 내통한 죄인에게 묻겠으니, 너는 이제 네가 지은 죄를 낱낱이 말하라."
 우랑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우랑의 눈에는, 우리에 가리고 거리가 멀어 안국군의 모습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 이내 한 갑사가 우리 속에 갇혀 묶여 있는 우랑을 쿡 찔렀다. 그러자, 우랑이 안국군 쪽을 향하여 힘을 짜내어 크게 말했다.
 "저는 조정의 조의 벼슬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조정에서 벼슬자리가 높아지지 못하고 처자식에게 버림을 받아 쫓겨난 것에 원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라를 배반할 마음을 품었으니, 이때 마침 한 숙신족의 여자와 눈이 맞게 되어 숙신족의 간사한 무리들과 친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노부족의 사람들과 계책을 세우기로 여름이 돌아오면, 몰래 숙신족의 하인들이 힘을 합하여 단로성의 성문을 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 노부족의 사람들이 모두 소잡는 칼과 꼴베는 낫을 들고 달려 들어와 성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울타리 안의 집들을 모두 불태우며, 고구려 사람들의 무덤을 파내어 그 시체들을 모두 짐승에게 먹여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우랑이 말을 마치자, 13가들은 크게 노하여 꾸짖는 소리를 냈다. 개중에는 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안국군이 다시 손을 들어 좌중을 조용하게 한 후에, 말하였다.
 "이와 같이 노부족들의 간특한 죄가 이제 분명히 드러났다. 이제 이 말을 들으면 고구려의 군사들은 병졸마다 모두 분하게 여겨서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할 것이다. 그런즉, 이제 곧 군사가 준비되는 대로 모아 들이닥치면 어렵지 않게 노부족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노부족들을 모두 죽여 없애어, 앞으로 감히 숙신족으로서 고구려의 엄한 법을 거스르려 하는 자가 없도록 하겠다."
 13가들이 열기를 띤 목소리로 일제히 소리쳤다.
 "안국군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저와 제 자손의 뜻과도 같습니다."
 안국군이 다시 우랑 쪽을 향하여 말했다.
 "너는 이제 곧 죽을 목숨이나,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죄를 뉘우치고 해야 할 말을 다 말하였다. 이는 가상한 일인데, 과연 그 까닭이 무엇인가?"
 우랑이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13가 중의 노인이 다그쳐 소리치자, 우랑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하였다.
 "참으로, 가련합니다. 안국군께서는 안국군께서 무슨 죄를 짓는 지 조차 모르고 계십니다. 지금 혈옥에는 억울하게 갇힌 죄수들이 가득가득하며, 죄 없이 죽고 다친 숙신족의 몸뚱이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하니, 바닥 깊숙한 곳에 앉아 있으면, 온통 땅속에서 우는 소리와 아파서 내지르는 소리가 울려퍼지므로, 마치 땅 밑이 스스로 저주로 죽은 귀신이 되어 몸부림치는 듯 합니다.
 이 처참한 마음을 생각하면, 제가 이대로 달려나가 단숨에 안국군의 목을 잘라 죽여 없애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제도에 조의로서, 죄를 지은 자를 칼로 치기 전에는, 서로 다른 날, 세 번 형벌과 그 죄를 말하며 물어 보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나라의 제도를 따르는 벼슬아치로 차마 이곳을 박차고 나갈 수 있다하여도 곧 안국군을 죽일 수는 없으니 그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제가 이곳에 갇혀 곧 죽어질 목숨이라하나, 답답한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치면서, 지금 안국군게 오직 외쳐 한 번 죄를 물어 보기라도 하겠습니다.
 안국군은 마음대로 나라의 제도를 어겨도 된다고 하고 함부로 만든 습속을 조정의 법보다 중하다 하였으니, 억울한 남자들이 많고 괴로워 하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어찌 사형에 해당하는 그 죄를 모른다 하겠습니까."
 우랑이 말을 마치자 듣고 있던 13가들과 갑사, 병졸들은 크게 놀랐다. 개중에는 화를 내며 칼을 뽑고 창을 꺼내들어 우랑을 바로 잡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안국군이 이를 말리며 말하였다.
 "죽기를 앞둔 사악한 자가 미쳐 지껄이는 말에 분하여 날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거슬릴 것이 없으니, 내궁 안에서 피를 보이지 말고, 세워둔 법대로만 처결하라."
 그 말을 듣고, 13가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말하였다.
 "듣고 견디기 어려운 악한 말을 하는 저와 같은 역적을 도리어 너그럽게 세워 놓은 제도 대로 대하실 뿐이니, 어찌 안국군께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13가들이 칭송하여 고개를 연거푸 숙였다. 13가의 말이 끝나자, 곧 병사들이 달려와 우랑을 끌고 나갔다.
 우랑은 다시 혈옥을 향해 실려 갔다. 병사들이 혈옥 안에 우랑을 도로 집어 넣으며 말해 주었다.
 "역적의 죄를 지어 죽기를 앞둔 목숨은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시체와 같은 것이다. 이제, 어차피 너의 목숨은 필요 없는 목숨이니, 나라를 위해 써 없애는 것이 안국군께서 세우신 법이다. 너는 이제 곧 형신을 하는 기술을 시험하다 죽게 되거나, 혹은 의술을 연습하는 침꽂이가 되어 죽게 될 것이다."
 곧 우랑이 갇힌 혈옥의 무거운 덮개가 또 닫혀서, 혈옥 안과 세상을 나누어 갈랐다.
 시일이 얼마간 흐른 후, 역사 둘과 의원 하나가 우랑이 갇힌 혈옥으로 걸어왔다. 병졸들이 물었다.
 "오늘이 저 자가 죽는 날입니까?"
 그러자 의원이 답했다.
 "빠르면 오늘 밤에 죽을 수도 있겠으나, 내일 새벽까지는 살아 남아 버틸지도 모릅니다."
 병졸들이 밤새워 혈옥을 지켜야 하겠다고 투덜거렸다.
 새벽이 밝자, 졸린 잠을 쫓으며 병졸들은 혈옥 곁으로 다가 왔다. 병졸들은 이제야 혈옥 안에 갇힌 죄수를 없애버리고, 귀찮은 혈옥 하나를 없앨 수 있게 되었다고 저마다 안심하는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병졸들은 힘을 모아 혈옥의 덮개를 다시 열었다.
 그런데, 새벽의 햇살이 허옇게 혈옥의 검은 밑바닥을 비추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랑은 온데간데 없이 혈옥 안은 텅비어 있었으니, 오직, 진흙을 뒤집어 쓴 들쥐 하나가 비척거리면서, 바닥을 빌빌거리며 돌고 있을 뿐이었다.
 
 5.
 혈옥 안에 우랑이 없는 것을 알고, 병졸들은 크게 놀라 급히 소사자에게 알리고자 달려갔다. 소사자의 집에 가보니, 소사자는 죽은 역사의 처를 불러들여, 푸지게 고기 요리를 차려 놓고 같이 즐기고 있었다. 즐기는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병졸들을 보고 소사자가 귀찮아 화를 내며 물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이와 같이 깊은 밤에 귀한 일을 방해하는가?"
 그러자, 병졸들이 떨며 말하였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르겠으나, 혈옥에 가두어 두었던 죄수가 없어졌습니다."
 그 말을 듣자 소사자는 크게 놀라, 옷을 차려 입고 집 밖으로 나와 말에 올랐다. 병졸 하나가 소사자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하여 혈옥을 빠져나왔는지는 모르나, 그 죄수는 오래도록 혈옥에 갇혀 있으면서 쇠약해 진 자입니다.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터이니 병사들을 모두 풀어 샅샅히 뒤진다면 숨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소사자가 답하였다.
 "무릇 우리 양맥병은 하나의 실수도 없는 군사라 이름이 높다. 그러므로, 만약 이와 같이 혈옥속에 가두어 두었던 병졸을 놓친 일이 알려진다고 하면, 비록 큰 죄를 얻지는 않을 것이나, 다른 양맥병 군사들보다 매우 못해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면 앞으로 우리의 벼슬이 높아지고 자리가 귀해지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어찌, 안국군께서 직접 이끄시는 철갑단인 양맥병이 쇠약한 죄수하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떠벌릴 수 있겠느냐?
 어차피 죽을 잡다한 죄인 하나를 죽여 없애든 말든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느냐? 이 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덮어 숨기도록 하는 것이 더욱 좋겠다."  
 그러자 병졸이 다시 물었다.
 "하오나 소사자께 다시 여쭙습니다. 혈옥에 있던 죄수가 갑자기 없어졌는데,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숨길 수 있겠습니까?"
 소사자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하였다.
 "우리 양맥병과 숙신병이 서로 더 뛰어난 군사라고 겨루어 다투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형국이다. 그러니 그 죄수를 잃은 것이 숙신병 탓이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안국군 앞으로 죄수를 데려 간 것은 숙신병이 아니었는가? 그러므로, 숙신병의 죄로 뒤집어 씌울 수 있다. 죄수가 안국군을 뵈러 갔을 때, 죄수가 몰래 숙신병 병졸로부터 활을 훔쳐 숨겨 두었다고 하라. 그리고는, 혈옥의 덮개를 열었을 때 죄수가 숙신병 별졸로 부터 빼앗은 활을 쏘아 너희들을 쓰러뜨리고 도망쳤다고 말하면 믿음직스럽게 들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죄수가 높다랗게 지어 놓은 부경으로 도망쳐 올라갔는데, 쫓아가서 부경을 통째로 태워 없앴다고 말하면 된다. 부경 안에는 동물의 고기들이 많이 들어있고, 또한 높게 지어 놓은 부경이 불에 타 무너져 자빠지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죄수가 숨어 있다가 죽었다는 것이 그럴 듯하게 보일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죄수를 놓친 것이 아니라, 숙신병들의 실수로 죄수를 놓쳤는데 양맥병들의 힘으로 죄수를 잡아 죽인 것이 되니, 이것이야 말로, 위험한 액운을 도리어 복으로 바꾸는 기막힌 계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소사자가 화살을 꺼내어 두 병졸들에게 쥐어주며 말하였다.
 "없어진 죄수가 숙신병에게 훔친 활로 너희들을 쏘아 맞추었다고 해야 말이 믿음직스러워 질 것이니, 너희들이 화살에 맞은 상처가 있어야 한다. 서로 스스로 화살을 제 살에 찔러 넣어 상처를 내도록 하라. 내 스스로 상처를 내는 너희들을 불쌍하게 여겨 술값을 넉넉히 쥐어 줄 터이니, 아픈 상처를 싸매고 술을 마셔 아픈 것을 잊도록 하여라."
 그러자, 두 병졸들은 시킨대로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 화살을 찔러 넣어 주었다. 그런 뒤에, 고기를 넣어 놓은 부경을 일부러 불에 태워 무너 뜨렸다. 그리고는 소사자와 함께 죄수가 숙신병의 활을 숨긴 채 도망쳐서 부경에 올라가 숨었으며, 곧 불 태워 죽였다고 알렸다.
 그 소식을 듣고, 우랑과 처음 다투었던 갑사가 불타 무너진 부경의 잿더미 앞에 와 보았다.
 "반드시 내 눈으로 어찌 끝을 맞는지 보고 싶었던 자인데, 이렇게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
 갑사가 잿더미를 뒤적거려 보니, 무너진 부경의 기둥과 벽에 불탄 고기들이 어지럽게 짓이겨져 섞여 있어서 도무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잿더미를 갑사가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상하게 여겨 소사자에게 말하였다.
 "어찌, 죽은 사람의 시체가 짐승의 고기들과 이처럼 어지럽게 섞여 있는데, 사람이 입고 있었던 옷의 탄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불에 탔다고는 하나 옷고름 끝트머리, 천 한자락이 남지 않았겠습니까?"
 갑사가 말하자, 소사자는 자신의 거짓말로 우랑이 없어진 일을 숨긴 것이 탄로날까봐 짐짓 화를 내었다.
 "죄수의 헤어진 옷이라 더욱 잘 탄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말을 듣고 갑사는 더욱 이상히 여겼다.
 "어찌 기운이 없어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던 그 자가, 하필이면 저 높은 부경에 사다리도 없이 기어 올라갈 수 있었겠는가? 의심스럽다. 이 잿더미 속에 정말로 죄수의 시체가 있는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갑사는 소사자가 모르게 잿더미 속의 고기들을 모두 꺼내어 모았다. 그리고 부하 병졸에게 이르기를,
 "너는 저자 거리에 나아가 많은 짐승의 고기를 오랫동안 팔아온 숙신족의 고기 장수들을 데려 와라."
 하였다. 갑사는 숙신족 고기 장수들이 나타나자, 무너진 부경의 잿더미에서 꺼낸 고기들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많은 고기들이 있는데, 너희들은 이 고기들을 모두 한 점씩 맛보아라. 그리고 먹은 것이 어느 짐승의 고기인지 밝혀 말하라. 혹여 이 중에 혹여 이 중에 짐승의 고기가 아니라, 사람의 시체가 있다면, 너희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기 장수들이 불에 탄 고기들을 맛보기 시작하였다. 고기들이 양이 많았으므로, 다 맛을 보고 살펴 보는데 며칠이 걸렸다. 고기 장수들이 갑사에게 말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소와 사슴의 고기로, 사람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갑사가 탄식하였다.
 "소사자와 병졸들이 죄를 덮으려 속임수를 썼구나. 필시 이것은 그들이 죄수를 놓친 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죄수를 놓치자마자 바로 사실대로 말하고 좇았다면, 단로성 구석구석 안국군의 병사가 지켜보지 않는 곳이 없으니 반드시 곧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었다고 거짓으로 숨겼으니, 그 사이에 죄수가 어디까지나 도망쳤을 것인가?"
 갑사는 서둘러 우랑을 가두어 두었던 혈옥에 다시 찾아가 살펴 보려 하였다.
 그런데 혈옥으로 가는 길을 한 병졸이 막아 섰다. 병졸이 길을 막으며 말하기를,
 "어제부터 소태후께서 염지(鹽池) 연못에서 목욕을 하시므로, 사방 팔백보에 사람을 가까이 가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갑사는 초조하였다.
 "그렇다면 언제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병졸이 답하기를,
 "소태후께서는 보름달의 기운이 가득 비친 연못에서 밤새 홀로 몸을 담그면 그 기운으로 살갗이 다시 생기를 얻고, 젊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소태후께서 십삼세 되던 해에 꿈속에서 훤화(萱花)를 만나뵙고 들은 비법입니다. 그러한즉, 달이 이지러져 없어지는 날 아침이 되어서야, 소태후께서 목욕을 그만 둘 것이니, 그 날이 되어서야 안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듣자, 갑사는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 앉았다.
 
 6.
 염지 연못은 소금기가 많은 짠 연못이므로, 그 안에 물고기나 개구리 따위가 사는 것이 없고 다만 매우 맑고 빛이 푸르렀다.
 밤이 깊어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높은 보름달만 떠 있으니, 커다란 달이 온통 연못에 비쳐서 연못 안에 달이 가득한 듯 하였다. 연못 주위로 등불을 밝혀 은은한 빛이 조용하게 새어나오게 하였다. 등불은 모두 붉은 색이 었으며 연못으로 다가 올 수록 차차 어두워지게 하였다. 병졸들이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멀찍이서 지키고 있었으므로, 넓은 연못에 아무 다른 움직임도 없이 오직 가만히 얼어 붙은 것처럼 있었다. 다만, 목욕할 채비를 한 소태후가 걸음을 옮겨 물 속으로 발을 디딜 때마다, 조용한 연못 위에 잔물결이 저 멀리 커다랗게 연못 저편 까지 달빛을 받으며 퍼져 나갔다.
 소태후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치며 연못을 가르며 나아가자, 소태후의 몸 빛깔이 달빛에 비쳐서 연못에 그대로 다시 퍼졌다. 조용한 밤공기 사이로, 소태후가 손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작을 찰랑이는 물소리만 메아리를 만들며 울렸다. 이윽고 소태후가 물에 비친 보름달 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소태후가 멀리 앞을 보니, 연못가에 안국군이 서 있었다. 안국군이 말하였다.
 "태후께서는 성상께서 어머니로 모시는 분이시며, 또한 천하사방의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어찌 이와 같이 깊은 밤에 홀로 몸을 씻으시는 중에, 신하인 저를 부르십니까."
 소태후가 물 속에서부터 안국군을 향해 걸어 나왔다. 소태후의 까만 긴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곱게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으며, 황금으로 만든 꽃 모양의 장식을 머리카락에 꽂아 달빛에 반짝거리는 모습이 극히 아름다웠다.
 "제가 고운 자태를 갖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갗이 거칠어지지 않는 것은, 오직 넓은 물에서 달빛을 받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대의 총애를 받을 때에는 거대한 압록수(鴨綠水)를 온통 막아 놓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여, 오직 하늘의 달을 눈으로 하고, 압록수가 흐르는 바다를 입으로 하여 노닐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옛날의 일이니, 공과 같이 어진 분께서 옛일을 잊지 않으시고 저를 위해 이 연못을 내어 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찌 다시 이렇게 놀 수 있었겠습니까."
 안국군이 고개를 돌리고 말하였다.
 "태후께서는 이와 같이 좋은 물과 고요한 달빛을 홀로 갖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이 너무나 지나치십니다.
 어린 시절 태후께서 궁궐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와 함께 노닐 던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태후께서는 기와가 화려한 집과 진귀한 술과 좋은 옷을 탐내었으니, 저는 땅을 팔고 집을 헐어 태후께서 한 번 웃고 마셔 없애는 놀이를 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태후께서는 저를 도성 제일의 대공(大公)이라 부르며 항상 제 곁에 붙어 봄날 나무에 핀 꽃처럼 따랐습니다. 그 때 도성 사람들 중에 태후와 제가 수레에 앉아 같이 길을 갈 때에 그 보기 좋은 모습은 봄이 지기 전에 도성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구경거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오나, 태후께서는 제 재물이 다하고, 세력이 기울어지고, 부하들이 줄어들자, 곧 세찬 여름비에 꽃이 떨어지 듯이 저를 떠나셨습니다. 그러더니, 얼마지 않아 태후께서는 마침내 형님께서 즉위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때를 엿보시더니, 이윽고 형님께서 우태후(于太后)를 잃고 홀로 되자 형님께로 떠나가 궁궐에서 혼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안국군이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떠나려 하자, 소태후가 만류하며 말하였다.
 "제가 어찌 그 죄를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저는 후회하고 있습니다. 겨우 금붙이 몇 조각과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하인, 하녀 몇 사람을 탐을 내어, 공과 같이 귀한 인연을 모르고 눈이 멀어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가 어릴 때에 어리석어 저지른 멍청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더 따지겠습니까.
 하오나, 날이 가고 달이 갈 수록 공과 함께 지낸 때가 다시 떠오르니, 고쳐 생각하고 돌이켜 꿈꾸어 보니, 제가 추잡한 권세와 비루한 재물을 탐하지 않고, 오직 마음에 담아 좇았던 이는 지난 때의 공 뿐인가 합니다."
 소태후는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소태후는 허리까지 물이 차오는 연못에 서 있었는데, 곧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았다. 그 모습을 안국군이 쳐다보더니, 한번 웃으며 다시 말하였다.
 "그와 같이 듣기 좋은 말로 저를 놀리는 일은 그만하십시오. 태후께서 형님과 혼인하시고 얼마나 기쁘게 즐기고 얼마나 기분좋게 노셨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태후께서 궁궐 밖으로 나와 형님과 함께 수레를 타고 길을 나서셨을 때, 도성 사람들이 한때는 저와 태후가 같이 수레를 타고 지나갔다고 수군거리며 옛일을 이야기하자, 태후께서는 혹여 그것이 형님 귀에 들어가 기분이 상하실까봐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하여 다시는 도성 사람들이 저와 태후의 이야기를 더 하는 일이 없도록 저를 도성 밖으로 멀리 내쫓으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태후께서 형님과 혼인 하신 후에, 저는 상위에 차린 음식이 썩어 없어지도록 그 맛을 모르고, 초저녁에 뜬 별이 신새벽에 질때 까지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애가 타고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태후께서 불편한 일을 당하실까 걱정하여, 감히 태후의 얼굴을 한 번 뵈러 내전(內展) 가까이로 걸음 조차 하지 않고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태후께서는 그런데도 저를 멀리 보내야 겠다고 생각하시고, 곧 태후와 가까운 우씨성을 가진 신하들을 시켜 저를 이곳 머나먼 단로성으로 보내도록 형님을 부추기셨습니다. 마침내 저는 고향에서 몇 천리나 떨어진 이 춥고 거친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태후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것 때문에, 악랄한 숙신족들과 지겹도록 다투고 귀신 같은 도적떼들과 끝도 없이 싸워야 하였습니다. 태후께서는 제가 적들과 싸우다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신 것이 아닙니까?
 이제야 겨우 간사한 적들을 다스려 성을 쌓고 내궁을 세워 간신히 흐르는 화살에 자다가 죽을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태후께서는 저와의 옛 일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셔서 제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셨는데, 마침내 저는 살아 남아 버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태후께서 지금 이렇게 나타나서 태후께서 저를 잊은 적이 없다하시면, 어찌 제가 우습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소태후는 가만히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태후는 오히려 다시 다가 오며 다른 말을 계속하여 꺼냈다.
 "제 얼굴을 보는 것도 폐가 될까 여겨 피하셨다 하셨습니까? 하오면 이제는 비록 그간 늙어 마른 얼굴이오나, 공께서 족할만큼 이 얼굴을 마음껏 보십시오."
 소태후가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숙인 안국군 앞에 섰다. 안국군은 소태후의 얼굴을 보았다. 달빛에 비친 소태후의 얼굴은 달이 뜬 밤에 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의 효험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유난히 뽀얗고 맑아 보였다. 안국군은 한참만에 다시 말하였다.
 "매일 같이 적들과 겨루며 핏물과 뼛조각을 튀기면서 지내던 날들 동안에도, 태후의 이 얼굴을 잊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제야 겨우 오직 도적들을 벌하고 백성들을 지키는 일만 마음에 담고 다른 일들은 다 잊고 묻어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태후께서는 왜 오늘에야 다시 이렇게 오셔서 제 앞에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이십니까?
 태후께서는 부디 돌아가십시오. 이와 같이 제 앞에 그 얼굴을 보이시면 안됩니다. 태후께서는 제 형님의 부인이시며, 또한 저는 형님의 아드님이신 성상께 충성을 바치는 조정의 신하입니다. 저는 태후의 얼굴을 다시 알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부디 더는 제 곁에 나타나지 마시고, 태후께서는 돌아가십시오."
 안국군의 낯빛에 슬픈 기색이 돌았다. 그러자 소태후가 더욱 눈물을 흘리면서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소태후가 물밖으로 걸어 나오니, 소태후의 허리에 짓물러 터진 상처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대가 성상이라 높여 부르는 상부라는 놈은 즉위한 후에, 저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저와 제 친척과 제 벗들이 상부의 친어미를 괴롭혔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자는 저를 원수처럼 미워합니다. 제가 선대의 총애를 받은 태후로, 상부의 어머니뻘이나, 상부는 때문에 오히려 제 어미에게서 아비를 빼앗아 간 것이 저라고 생각하고 저를 더욱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상부는 남자인지라, 아직 제 몸이 이와 같고, 제 얼굴에 주름이 많지 않아, 제 모습이 보기에 나쁘지 않음도 알고 있습니다. 조정을 틀어쥐고 대군과 백관을 거느린 나랏님이 나를 미워하고 또 내 몸을 곱다고 여기고 있으니, 저는 온갖 징그러운 일들과 별별 입에 담기 어려운 난폭한 일들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국군은 소태후의 허리에 난 상처를 보자 깜짝 놀랐다. 소태후의 흰 허리의 짓이겨지고 터진 모양이 눈에 들어오니, 안국군은 어느새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국군이 무릎을 꿇고 상처를 들여다 보며 물었다.
 "어찌하여 그 흰 살갗을 그리도 험하게 다쳤습니까?"
 소태후는 소리내어 울었다.
 "공께서 제가 궁궐로 들어간다 할 때에 '재물은 쓰면 없어지고 높은 자리는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니, 그 따위를 탐하여 깊은 인연을 버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과연 맞았습니다. 제가 탐내는 마음에 높은 자리에 올라 후궁이라 불리우며 기뻐하였으나, 하룻밤 사이에 저를 미워하는 아이가 즉위하여 겉으로는 나라의 어머니라 하면서, 속으로는 오히려 괴로워 울다가 죽어버리기를 바라고 있으니, 어찌 비참하지 않겠습니까?
 공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공께서 저를 붙잡으실 때에 제가 제 발로 떠났던 것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베짱이 한 마리가 비오는 날 저자거리 바닥을 뛰어다니다가 수레 바퀴에 깔려 짓이겨져 죽어버리는 것처럼 제가 죽을 줄을 제가 왜 몰랐던 것입니까. 저는 후회합니다."
 안국군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목소리가 떨려서 몇 번 말을 멈추었다. 간신히 안국군이 다시 말하였다.
 "성상께서 내려주신 은덕으로 벼슬을 사는 신하로서, 성상의 원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태후께서는 비록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신하된 도리를 잊지마시고 말을 가려 하십시오. 만약 태후께서 목숨이 위태롭고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괴로운 일이 있거든, 제가 미약한 힘이나마 힘써 도울 것입니다.
 그런즉, 만약 태후께서 이와 같이 계속 눈물을 보이신다면, 저는 선대의 충신들을 이끌고 나아가 형님의 무덤 앞에 엎드려서, 성상께 충심으로 빌고 말씀드려 태후를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태후께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다하시어도 무서운 말을 고운 입에 올리지 마시고, 흉한 생각을 아름다운 가슴에 담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소태후는 힘을 잃고 앉아 안국군의 다리를 붙잡았다. 소태후가 주저 앉은 채로 안국군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저는 지금 곧 죽어져도 아쉬울 것이 없으나, 옛날 공께서 베푸셨던 정을 갚을 기회도 없이 이와 같이 비참한 일만 당하며 지낸다면, 이는 공께서 슬픈 일이 아닙니까?
 공께서는 임금의 숙부이시니 아버지뻘이라 할 수 있으며, 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엄하게 상부를 벌하려 하신다면 누가 막을 자가 있겠습니까? 상부는 비록 즉위하기는 하였으나, 본시 교만하고 의심이 많은 자이므로,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나라 안의 성주들과 태수들 중에는 상부를 믿지 않고, 오히려 옛 임금의 아우인 공을 더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더우기, 조정의 늙은 신하와 큰 장군들은 모두 공께서 옛부터 사귀시던 벗들입니다. 또 궁궐 안의 어른들도 젊은 상부 보다는 공께서 더 가깝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늘이 노할 나쁜 짓을 하는 상부를 공께서 대신 죄를 묻겠다고 하시면, 어찌 세상이 그 뜻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 성안에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많고, 이들은 하나 같이 공을 높이기를, 불구덩이 속에 앉아 칼날을 씹어 먹으라 명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 입니다. 이제 공께서 이 나라안의 제일이라 하는 숙신병의 기병대와 양맥병의 철갑단을 이끌고 도성로 쳐들어가 대궐을 불태우고 상부를 무릎 꿇고 빌게 하려 하시면,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시면, 저는 공을 새로이 궁궐에서 모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공께서 발을 디딘 마루를 걸레로 닦고, 공께서 침을 뱉은 그릇을 설거지 하는 여자가 된다할지언정, 저는 죽을 때까지 기쁘게 공 곁에서 머물러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태후는 안국군을 붙잡고 울면서, 이와 같이 반란을 일으켜 상부를 자리에서 내쫓아 버릴 것을 빌었다. 그러자 안국군은 이를 굳게 물고 주먹을 움켜 쥐었다.
 "성상께서 어찌 그런 짓을 하셨단 말인가."
 그리고 안국군은 손을 뻗어 소태후의 허리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안국군의 손이 닿자, 소태후는 아픈지 허리를 굽히며 길게 신음하였다. 이에 안국군이 다시 가만히 상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안국군은 놀라 일어섰다. 안국군은 뒷걸음질쳐 물러서서는 소태후를 노려보았다.
 "이곳은 도성에서 2천리가 떨어진 외딴 성이니, 궁궐에서 나와 이곳까지 오는 데에는 기일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런데, 너의 허리에 난 상처는 이제 곧 다친 것 처럼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 허리에 난 상처는 성상께서 너에게 악한 짓을 한 자국이 아니라, 네가 나를 속이려고 일부러 네가 스스로 살을 망치로 찍고 횃불로 지져 상처를 만든 것 아니냐?"
 안국군이 소리치자, 소태후는 눈물을 멈추었다. 그러나, 소태후는 조금도 몸을 떨지 않고 가만히 안국군을 똑바로 볼 뿐이었다. 안국군이 다시 성을 내었다.
 "너는 나를 속여 감히 내 충심을 꺾어 역적질을 하도록 끌어들이려 하였다. 지금 형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성상께서는 너를 싫어하신다고는 하지만, 너는 태후라 불리우고 있으니 옷을 입고 밥을 먹는데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도 너는 욕심을 부려, 도리어 나에게 거짓으로 만든 상처를 보이고 내 옛 정을 불러일으켜, 난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네 작은 한 몸뚱아리를 위하여 재물과 자리를 탐하는 마음 때문에 어찌 너는 이와 같은 짓을 할 수 있느냐?"
 소태후는 같이 소리를 질러 답하였다.
 "내 비록 허리의 상처는 거짓이나, 내가 공의 곁에 있고 싶어하는 것도 거짓이 아니며, 상부가 의심이 많고 나와 공을 싫어하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공께서는 군사가 많고 덕이 많고 따르는 사람이 많으니, 상부는 공을 싫어합니다. 곧 공과 같이 이름이 높은 사람은 죽어 없어지기만 하면 좋겠다고 매일 같이 상부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공께서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신다면, 상부는 반드시 그 허물을 물어 공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시체가 되어 숨이 끊기고 심장이 뛰는 것이 멎으면, 빛나는 칼과 큰 말이 있은 들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 공께서는 저와 함께 도성으로 창칼을 들고 당당히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안국군이 노하여 손을 벌려 소태후의 목을 감싸 졸랐다. 안국군이 목을 조르며 말했다.
 "비록 성상께서 어릴 때에 내가 어린 분을 엄하게 가르치고 또한 힘들게 익히도록 하였으니, 성상께서 나를 친하고 살갑게 대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성상께서는 내 조카이며, 또한 내 형님의 자식이시다. 하물며, 그 신하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우기를 몇 년이 지났건만, 어찌 너 따위의 속임수에 속아 충심을 저버리겠느냐.
 난리를 일으키려는 너의 썩은 마음을 이제 내가 뻔히 알고, 또한 너에 속으면 나는 망해 없어질 것이니, 내가 어찌 이 나라의 군사를 이끄는 사람으로, 너와 같은 간교한 역적을 살려 둘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곧 안국군은 소태후의 목을 조르고 숨통을 끊어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소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리어 그대로 안국군 가까이로 다가와서는, 손을 뻗어 안국군의 머리에 쓴 검을 관을  쓰다듬었다. 곧 소태후는 그대로 안국군을 깊게 품에 안고는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씩씩거리며, 금방이라도 소태후를 목졸라 죽이려 하던 안국군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태후의 긴 숨소리가 안국군의 귀에 들렸으며, 곧 어두운 밤공기에 흘러 울렸으니, 마치 달빛이 가득한 연못에 그 숨소리가 가득해지는 듯 하였다. 안국군의 온몸에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갔으니, 마침내 안국군은 목조르던 손을 풀고, 팔을 늘어 뜨리고는 우뚝 서서 가만히 있었다.
 한참 만에 소태후는 안국군의 곁에서 떨어졌다. 가만히 서 있는 안국군을 앞에 두고, 소태후는 그대로 돌아섰다. 소태후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연못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태후는 물속을 천천히 헤엄쳐서 멀어졌다. 검은 연못 물에는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으며, 소태후의 몸이 물살을 가르고 움직일 때마다, 그 별이 흩어져 좌우로 갈라졌다. 그 모습을 안국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참만에 안국군이 혼잣말로 말하였다.
 "물에는 하백(河伯)이 있어 그 딸들이 몰래 헤엄쳐서 다니며 세상의 임금과 장군들을 홀린다고 하더니, 바로 저것이 하백의 딸이 춤을 추며 웃는 것인가. 내가 내일 죽는 병자에게 의원을 못가게 할 지언정 이 연못에 다른 누가 들어오게 하겠는가? 내가 백채의 집을 허물어 없애더라도 어찌 저 등불을 치우게 하겠는가?"
 마침내 안국군은 발걸음을 돌려 그대로 염지 연못에서 떠나가 돌아갔다.
 그런데 그때, 돌아가는 안국군의 뒤통수에 마치 귀신이 속삭이는 것 처럼, 갑자기 무서운 목소리가 낮게 들려 왔다.
 "안국군께서 저지른 죄를 묻습니다.
 안국군은 마음대로 나라의 제도를 어겨도 된다고 하고 함부로 만든 습속을 조정의 법보다 중하다 하였으니, 억울한 남자들이 많고 괴로워 하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어찌 사형에 해당하는 그 죄를 모른다 하겠습니까."
 안국군이 다시 돌아보았으나,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어두운 가운데 풀섶에 무엇인가 있는 듯도 싶었으나, 한참 살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달빛에 빛나는 소태후의 하얀 몸이 있을 뿐이었으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소태후가 움직일 때 마다 조금씩 들리는 물소리 뿐이었다.
 
 7.
 소태후는 닷새를 더 염지 연못에서 놀고 지낸 후에야 물에서 헤엄치는 것을 멈추었다. 그 동안 안국군은 소태후가 즐기는 것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군사들에게 엄히 지키도록 하였을 뿐, 다시는 소태후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다른 누군가를 보내어 소태후와 편지를 나누지도 않았다.
 소태후가 노는 것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다시 병사들에게도 혈옥에 가는 길의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그러므로 그제서야, 우랑과 처음으로 다투었던 갑사는 우랑을 가두어 두었던 혈옥에 찾아가 볼 수 있었다.
 "혈옥을 지키다가 졸거나 술에 취한 적이 없느냐?"
 갑사가 혈옥을 지켰던 병졸들에게 물었다.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비록 제가 소사자의 명을 받들어 도망친 죄수가 죽었다고 거짓으로 알렸기는 하지만, 어찌 실수가 없다하는 양맥병의 병사로 죄수를 지키다가 잠이 들거나 술을 퍼마시는 따위의 일을 하겠습니까?"
갑사는 텅빈 혈옥 안을 한참 내려다 보았다. 갑사는 보다 자세히 안팎을 살펴 보고자 하였다. 곧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갑사는 병졸들과 함께 혈옥 안으로 내려 갔다. 갑사가 혈옥 안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자니, 병졸이 투덜거렸다.
 "혈옥을 나눈 덮개를 열어 놓은 적이 없으니 죄수놈이 땅으로 꺼지지 않았다면 어디로 갔겠습니까? 또한 사다리나 줄을 가져다 놓은 적이 없으니 죄수놈이 하늘로 솟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밖으로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병졸이 한숨을 쉬며 맞장구 쳤다.
 "땅으로 꺼졌는가, 하늘로 솟았는가, 한다더니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갑사는 그 말을 들으며 가만히 땅을 내려다 보았다. 보이는 것은 울퉁불퉁하며 축축하고 질퍽한 더러운 바닥이 보일 뿐이었다. 갑사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키보다 훨씬 높은 입구로 위쪽이 올려다 보일 뿐이었으니, 예전에 이곳에 갇혀 있던 우랑이 바라보던 좁은 하늘이 갑갑하게 보일 뿐이었다.
 갑사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문득 무엇인가 본 것이 있는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갑사는 곧 발등 위로 지나가는 쥐를 한마리 붙잡아 들었다. 갑사는 그 쥐를 잡아 들고 한쪽 벽에 나 있는 쥐구멍에 쥐를 집어 넣어 보았다. 쥐구멍은 손에 들고 있는 쥐보다 훨씬 더 컸다.
 "이쪽으로 드나드는 쥐들만 더 크기가 클 수가 있겠는가?"
 병졸들이 영문을 몰라 쥐를 들고 있는 갑사를 빤히 쳐다 보았다. 갑사가 하늘을 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갑사가 말하기를,
 "이 혈옥을 도망친 죄수는 땅으로 꺼진 후에 다시 하늘로 솟은 것이다."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놀란 병졸이 물었다. 갑사가 답했다.
 "너희들이 처음으로 덮개를 열었을 때만 해도 죄수는 바깥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다만 숨어 있어서 안 보였던 것 뿐이다. 죄수는 어두운 혈옥 속에 갇혀 있는 동안 부지런히 손으로 바닥을 파헤쳐서 스스로 흙속에 몸을 파묻어 숨었던 것이다. 이곳은 검은 진흙 뻘로 땅이 부드러우니 힘이 없는 다친 사람이라 한들 파기가 어렵지가 않다. 또 거친 자갈돌이 굴러다니는 것이 많으니 이것을 얼굴 쪽에 덮으면 숨쉴 구멍을 만들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서 너희들이 죄수가 없어졌다고 놀라서 뛰어다니며 멀쩡한 부경에 불을 지르고 불탄 사슴고기를 죄수의 시체라고 속일 때에도, 죄수는 그대로 땅속에 숨어서 가만히 빠져 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밤이 깊어지고, 소태후를 위하여 염지 연못 주위에 아무도 사람들을 다니지 못하게 하였을 때, 그 때 죄수는 몰래 다시 흙을 파고 기어 나왔으리라."
 병졸이 다시 물었다.
 "하오나, 혈옥은 깊고 사다리가 없으면 건장하고 날랜 사람도 뛰어 오르기 어렵습니다. 비록 빠져 나올 틈을 찾았다 한들 어찌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갑사가 말했다.
 "단로성에는 쥐가 많으니, 더러운 혈옥 속에는 온통 쥐떼들이다. 이 쪽 벽의 쥐구멍이 넓은 것은 바로 그 죄수가 이 벽에 나 있는 수많은 쥐구멍에 손을 집어 넣고 발을 디뎌 벽을 기어오른 흔적인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갑사는 스스로 쥐구멍에 발을 딛고 벽을 기어올라 혈옥을 올라가 보였다.
 병졸들이 놀라서 사다리를 타고 혈옥 밖으로 나갔다. 갑사가 병졸들에게 말하였다.
 "몇 날 몇 밤을 소태후 때문에 사람들이 오가지 못하였으니, 그 긴긴 날 동안 몰래 기어가고 숨어 들어 죄수가 어떻게 움직여 어디까지 갔을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수상한 자들은 성문에서 굳게 막아 지키니, 아직 성밖으로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 빨리 성문을 닫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죄수와 같은 자가 몰래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보거든 활로 쏘아 죽이라고 한다면, 죄수가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병졸이 말하였다.
 "성에는 여섯개의 문이 있으니, 죄수가 가장 먼저 노릴만한 문은 어느 곳입니까?"
 갑사가 말하기를,
 "안국군께서 소태후를 위하여 염지 연못을 막고 사람을 다니지 못하게 하였으니, 죄수는 숨어서 지나가기 위해 염지 연못이 있는 곳으로 기어 갔을 것이다. 그런즉, 염지 연못이 있는 북쪽의 문으로 가장 먼저 나아가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갑사는 병졸들을 이끌고 북쪽 성문으로 갔다. 갑사가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물었다.
 "혹여 지난 몇 밤 동안 몰래 성문을 빠져나가거나, 들키지 않고 성벽을 기어오르려 하는 자가 없었는가?"
 문지기가 답하였다.
 "그런 이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갑사는 안심하여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인가 떠오르는 바가 있어 문지기에게 갑사는 다시 물었다.
 "혹여 높은 사람이나 귀한 어른을 이야기하면서 깊은 밤에 긴히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 자는 없었는가?"
 그러자, 문지기가 말하였다.
 "간밤에 소태후 마마께서 꼭 바라시는 일이니 급히 성문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한 사나이가 있기는 하였소. 소태후 마마께서는 은밀히 깊은 밤에 재물을 주고 받는 일을 하신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 않소? 나는 때문에 그 사나이를 막는 것은 오히려 양맥병과 안국군에게 화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그저 그 사나이를 지나가게 하였던 것이오."
갑사가 소리쳤다.
 "그 자는 죄수가 틀림없다."
 갑사가 분하여 문지기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 질렀다.
 "도망친 죄수가 행색을 꾸미려고 한다 한들 솜씨가 있었겠느나, 온몸은 헤어지고 며칠동안 진흙 밭에 숨어 있는 더러운 몰골이었을 것이며, 몸을 감추려 해도 혈옥 곁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죄수를 가두는 우리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찌 그 따위 행색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어림 없이 소태후 마마와 같은 귀한 분의 부하라 여기고 문을 열어 주어 도망치게 하였는가?"
 그러자, 문지기가 되려 따졌다.
 "아닌게 아니라 그 사나이야 말로 정말로 우리를 뒤에 끌고 나타났소. 사나이는 그 우리를 족제비와 담비를 가두어 두는 우리라고 하였소.
 안국군께서 말씀하신 뜻을 모두 받들어 모셨으므로, 이곳 일대에는 족제비와 담비는 씨가 말라 없어 졌소. 그런데, 숙신족들은 역겹게도 아직도 부모가 죽으면 그 시체를 담비가 뜯어먹게 해야만 장례를 후하게 잘 지냈다고 간절히 믿고 있는 자들이 많소. 그렇기에, 몰래 족제비와 담비를 숨겨 놓고 우리에 넣어 기르는 자들이 있어서, 숙신족이 장례를 치른다고 하면 족제비와 담비를 데려가 그 시체를 뜯어 먹게 하고 대신에 재물을 받는 일을 하는 자들이 있소.
 이렇게 숙신족이 장례하는 곳에 담비를 빌려 주는 일은 이곳 6부7락의 숙신족들 사이에서는 막대한 이익이 남는 일이오. 그러므로, 재물을 탐내고 귀한 것을 모으려 하는 자라면 이러한 일에 손을 대지 않는 이들이 없소.
 그러니, 몰래 재물을 모으기를 좋아하는 소태후 마마를 들먹이며, 족제비와 담비를 가두었다하는 우리를 끌고 가는 사람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소? 하물며 더럽고 냄새가 나며 옷이 남루한 것은, 숙신족들의 본시 꼬락서니가 다들 그러한 것이니, 그 자가 떨어진 옷을 입고 온몸에 진흙이 묻었다 한들 무슨 의심을 하였겠소?"
 그 말을 듣자 갑사는 힘이 빠져 한탄하였다.
 "네 놈은 해가 지고 나서 외성 문이 닫히고 나면 미리 알린 자들 외에는 성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법도 모르느냐? "
 갑사는 문지기를 놓아주고, 힘없이 터덜터덜 성문 밖으로 걸어 나가 보았다.
 병졸들이 따라 나가 보니, 성문 밖에는 끝없이 넓은 들판이 멀리 펼쳐져 있었으며, 까마득히 멀리서 누런 흙먼지가 피어 올라, 수백리 높은 하늘까지 치솟아 가물가물하게 흩날려 휘몰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들판에는 끝없이 짙푸른 나무만이 빽빽하고 멀리 퍼런 산자락의 봉우리 끝이 아른아른하게 보이는데, 그 봉우리 언저리에 햇볓이 구름 사이로 비치어 멀리 산너머 들판 저편에는 별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나 싶은 망망한 심정이 바람 줄기마다 흩어졌다. 천리를 펼쳐진 수풀과 산골짜기 사이로, 수만그루의 나무와 수억 포기의 풀이 펼쳐져 있는데, 저 까마득히 내다보이는 머나먼 산등성이 어느 한 자락 끝트머리 사이에도, 그 작은 풀한포기 그늘그늘마다 방울씩 이슬이 맺혀 있을 때, 날개를 퍼덕이는 알록달록한 날벌레와 그 날벌레와 다투는 불개미들이 아웅다웅하고 있지 않겠는가?
 병졸 하나가 갑사에게  말했다.
 "이제 벌써 지난 밤에 성 바깥으로 죄수가 나갔습니다.
 땅은 끝이 없이 넓고, 바다는 그 바깥으로 더욱 넓으며, 세상의 골짜기와 마을과 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제 어찌 그 죄수를 찾겠습니까. 저 들판에 어제 소나기가 내리고 그때 처음 떨어진 빗방울이 오늘 어느 개울에 흘러 들어 갔는지 찾으려 한다면,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죄수는 어차피 곧 죽어 없어질 비루한 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죄수가 어느 구석에 숨어 곧 병들어 죽으리라 생각하시고, 나리께서는 그만 잊도록 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갑사는 그대로 성문 밖으로 멀리 걸어 나가려다가, 병졸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갑사는 그대로 돌아 병졸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갑사는 병졸이 걸친 갑옷 위에 손을 얹었다. 갑사가 말하였다.
 "나와 그대는 안국군을 모시고 세상에 물러서지 않는다는 양맥병의 병사가 아닌가? 이른바 양맥병은 실수가 없다 하는 말은 무엇인가? 적이 머리를 내밀때 마다 한 발의 화살로 바로 눈을 꿰뚫는 솜씨를 가진 사람을 주몽이라 칭송하나, 그런 것이 양맥병은 실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양맥병이 실수가 없다는 것은, 비록 한 발의 화살이 빗나가고 또 한 발의 화살이 빗나가더라도 손가락에서 피가나고 팔이 끊어지도록 활을 쏘아 반드시 적의 머리통을 피투성이로 구멍을 뚫어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 곧 도망친 죄수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일, 다음 날, 내 년까지 좇으면, 그 자가 또 무슨 원한을 품어 어떤 나쁜 계책을 꾸미고 있는지 헤아려 볼 수라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을 잊을 망정, 지금 걸음을 멈추고 나를 속여 우롱하고 도망친 죄수를 잊겠는가?"
 갑사는 병졸에게 말을 마치고, 곧장 성문 밖으로 나갔다.
 한편, 안국군은 소태후를 위하여 염지 연못 곁으로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등불과 술과 장신구를 마련해 주느라 오래도록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침내, 13가 중의 한 늙은 자가 안국군에게 말하기를,
 "태후께서는 온 나라의 어머니이시, 귀하게 모시는 것은 곧 효도와 같습니다. 하오나, 안국군을 모시기를 또한 아버지 처럼 여기시는 이곳의 백성들은 또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였다.
 그 말을 듣자, 안국군은 곧 정신을 차리고,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어린 시절 부터 몇 십번, 몇 백번을 더 걸려들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덫에 또 걸려 들었다. 미끼를 본 꿩이 독이 묻은 콩인 줄을 알고도 그 맛을 보고 싶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먹고 죽어버리니, 산속에서 잡혀 죽는 미련한 새와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안국군은 며칠 동안 소태후의 생각에 군사와 성을 돌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
 "내가 오직 많은 험한 옛일을 잊고, 지금 새로이 공덕을 쌓은 것은 다만 이곳 6부7락의 백성들을 위하고, 고구려 사람의 목숨을 지키고자 힘을 쓰는 데만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게을리 하는 일이 없이, 더욱 일을 다그쳐야 마땅하리라."
 안국군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병사들을 추스리고 하나하나 명령을 내려, 숙신족의 새 추장을 잡고, 노부족 남녀들을 잡아 죽이도록 하였다.
 "노부족은 숙신족의 떼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족속으로 온갖 악한 도적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무리들이다. 그런데, 이제 숙신족과 내통한 자가 노부족이 단로성으로 쳐들어올 것을 꾸미고 있다고 실토하였으니, 우리가 그보다 먼저 노부족을 잡아 죽이는 것은 곧 성을 지키는 길이다."
 안국군은 노부족을 죽이려고 보내는 군사들마다 그렇게 격려하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노부족이 있었던 곳에 군사들을 보내어 보면, 노부족은 미리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숲과 산 속 여기저기로 군사들을 보내어 뒤져 보았으나, 가는 곳 마다 항상 노부족은 미리 도망친 듯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마치 우리가 노부족을 죽이러 오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노부족의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다만 텅 빈 집과 말이 없는 마구간이 황량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노부족을 찾아다닌 군사들은 그렇게 말하였다. 그대로 날이 계속 지나갔으니, 한 동안 온갖 곳에 군사를 보내어 보아도 여전히 노부족 무리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안국군은 조바심이 나서, 장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노부족들을 쓸어 없애려 했던 것은, 이들이 옛 원한을 잊지 않고 사악한 책략을 꾸며 온갖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데 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날뛰던 노부족이 이처럼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저 이곳저곳 도망치고 숨어 있을 뿐이니, 이것은 이 자들이 참으로 무서운 계략을 준비하며 크나큰 난리를 일으키려고 몰래 숨어서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자 13가 중의 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던 장수가 말했다.
 "숲이 넓고 산은 깊으므로, 부족 사람들이 미리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린다면 찾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사들을 풀어 일시에 깊숙히 훑어 본다면, 한 두 명의 굼뜬 어린이와 늙은이는 잡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부터 혈옥에 가두고 밤낮으로 하나 둘 다그쳐 물어 간다면, 반드시 다른 부족들이 숨은 곳도 하나하나 이야기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안국군이 답하였다.
 "그 말이 옳다."
 마침내 안국군은 직접 숙신병 기병대들을 이끌고 북쪽의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안국군이 직접 깊이 숲속으로 들어가 본다 할 지라도 노부족 사람들을 찾아 내기란 쉽지 않았다.
 마침내 숲 속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한 개울이 흐르는 곳까지 이르르자, 좌우에서 안국군을 말렸다.
 "이곳은 안국군에 복속되어 있는 숙신족 추장들이 사는 영역의 북쪽 끝입니다. 이곳까지 왔는 데에도 노부족 도적들을 찾아 볼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노부족 도적들이 우리가 이들을 치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오래 전부터 멀리멀리 도망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국군이 고개를 저었다.
 "숙신병의 기병대는 쏟아지는 폭포와 기세를 겨룬다는 날랜 군사들이다. 이들을 풀어 단숨에 노부족을 덮치려 하였는데, 노부족 도적들은 어느 새에 알아채고 도망쳤단 말인가?"
 그런데, 그 때, 마침 개울가 한 곳에서 여자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국군과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다가가 보니, 한 아름다운 여자가 긴 가발을 쓰고, 머리칼에 빛나는 금으로 만든 꽃장식으로 꾸미고, 목욕을 하며 헤엄치고 있었다. 이 여자가 헤엄을 치며 노래를 하는데, 그 노랫말이 다음과 같았다.
 "짝을 잃은 외로운 꾀꼬리가 물에서 놀다가, 배가 고픈데 맛난 먹이가 없으니 제 알을 쪼아 먹으려 하는 구나. 둥지에 오르려거든 북쪽의 가지를 딛고 올라야 하는가?"
 노래를 들은 안국군은 얼굴색이 변하여 급하게 말을 몰아 물속으로 첨벙거리며 뛰어 들어 갔다. 안국군이 헤엄치던 여자의 팔목을 붙들고 끌어 올리자, 여자는 깜짝 놀라 소리지르며 두려워하였다. 안국군이 여자를 보고 성을 내며 물었다.
 "짝을 잃은 외로운 꾀꼬리라고 하는 것은 화희(禾姬)태후와 치희(稚姬)태후의 일을 노래한 황조가(黃鳥歌) 노랫말을 빗댄 것이니, 이는 형님을 잃은 태후를 말하는 것이며, 네가 이와 같이 꾸미고 목욕을 하면서 물에서 논다고 노래했으니, 이는 소태후를 흉내낸 것이다.
 배가 고픈데 맛난 먹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소태후가 옛날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탐내어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제 알을 쪼아 먹으려 한다는 것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소태후의 아들 뻘이 되는 성상께 간악한 마음을 품고 역적질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둥지에 오른다는 것은 역적떼를 모아 궁궐로 치고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북쪽의 가지를 딛고 오른다는 것은 군사를 모으기 위해 북쪽에 있는 바로 나의 힘을 빌리려 한다는 것이 아니냐?
 너는 감히 어찌 이따위 흉칙한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성상께 충심을 바치는 내 마음을 조롱하는 것이냐. 네 놈이야 말로 감히 목이 잘려 죽어 마땅하다."
 노래는 비유로 말하여 소태후가 염지 연못에서 안국군과 역적 모의를 꾸미려했던 것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것을 안국군이 알아 듣고 다그치자, 여자는 더욱 놀라 눈물을 흘리며 손을 모아 빌었다.
 "어찌 제가 옛일에 빗대어 노래를 지을 줄 알며, 높고 귀하신 분들의 큰 일에 대한 일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안국군의 덕을 입어 천한 목숨을 이어가는, 상항에 있는 한 술집의 유녀일 뿐입니다. 어느날 밤에 한 도끼든 사나이가 찾아와 안국군을 돕고 싶거든 이와 같이 하라고 하며 노래를 알려주기에 그 말을 믿고 따라한 것일 뿐입니다.
 그 도끼 든 사나이가 말하기를 노래를 부르다가 귀한 사람이 병졸들을 이끌고 나타나거든, 무슨 말을 전하라 하였기 때문에, 오늘 아침부터 계속 물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국군이 다시 물었다.
 "그 자가 무슨 말을 전하라 하였는가?"
 여자가 답하였다.
 "그 자가 알려준 말인즉,
 '숙신족을 복속시키고 6부7락을 다스린 공이 있어 한 번은 미리 알려 드리오니, 지금 이 길로 멀리 도망친다면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깊은 곳에 숨어서 백만의 군사로 지키고 있는다 한들 죽을 것입니다.'
 였습니다."
 여자가 다시 울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오직 안국군을 애써 모시고자 이것이 안국군께 덕이 되는 줄로만 알고 시키는대로 노래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무서운 뜻이 숨겨져 있는 줄을, 술을 팔고 춤을 추는 것만 아는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더우기, 그날 도끼를 들고 찾아온 사나이가 부경에 올라가 타죽었다고 소문이 난 시체와 비슷한 모습이었으니, 저는 귀신을 본 것인가 싶어 오직 두려운 마음에 죽은 혼백이 시키는 일이요, 안국군의 목숨을 구하는 일인줄로만 알고 이렇게 노래했을 뿐입니다."
 곧 여자는 물속에 주저 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한 두 잔 술에 웃으며 취하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일 뿐이었는데, 지난 며칠 동안 무서운 자들에게 붙들려 영문도 모른채 죽인다 살린다 하는 일을 겪으니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만히 걷는 와중에도 가슴이 두근거려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안국군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여자를 다시 놓아 주고 말을 돌렸다. 여자가 물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안국군은 한참 생각 하였다. 그러더니, 곧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내 속임수에 밝고 간교한 술책에 능한 숙신족들과 싸우면서 온갖 계책을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오늘 이와 같은 모양을 보니 이는 반드시 누군가가 큰 모사를 꾸미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 즉시 급히 단로성으로 돌아가 성문을 굳게 닫고, 숙신병과 양맥병을 모두 불러들여 튼튼히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는 곧 안국군은 힘을 다해 말을 몰아 단로성으로 돌아갔다.
 안국군이 급히 단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한 갑사가 나타나 안국군에게 할 말이 있다며  찾아 왔다.
 갑사가 말하기를,
 "저는 양맥병의 철갑단으로 숙신족과 내통한 역적 조의의 일과 혈옥에서 그 죄수가 도망친 일을 알아보며 6부7락의 산과 들 곳곳을 살피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온데, 이제야 이 죄수가 꾸민 흉한 계략을 알았으니 안국군께서는 지금 급히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안국군은 무릎을 꿇은 갑사를 일으켜 세웠다. 안국군이 말하였다.
 "무슨 계략인 줄은 모르겠으나 겨우 조의 하나 따위가 벌이는 일을 두려워하여 온힘을 다해 쌓아 올린 단로성을 버리고 홀로 몸을 피한다면, 숙신의 온 추장들이 나를 비웃을 것이며, 노부족의 도적떼들은 모두 고구려군을 업신여길 것이다.
 또한 무슨 큰 계책인 줄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든든한 양맥병과 숙신병이 있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면, 삼한(三韓)의 일흔 여덟 나라 군사가 모두 몰려와 덤빈다 한들 어찌 쉽게 패하겠느냐."
 그러더니 안국군은 좌우를 둘러 보며 소리쳤다.
 "나와 함께 죽을 때까지 싸울 충신들이 누구인가?"
 안국군이 말을 마치자, 안국군을 따르던 숙신병의 병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으며 외치기를,
 "제가 마지막까지 안국군과 함께 싸울 것입니다."
 하였다.
 갑사는 다시 엎드려 간청하며 안국군이 길을 가는 것을 말렸으나, 안국군은 웃어 보이며 말을 몰아 그대로 단로성으로 들어 갔다.
 안국군이 단로성에 들어가면서 보니, 단로성 성문 앞에 못보던 깃발이 달려 있었다. 깃발에는 다섯 마리 용이 그려져 있었다. 안국군이 깃발을 보고 말했다.
 "이는 성상께서 쓰시는 조정의 깃발이니, 성상께서 조정의 어사(御史)를 보내신 것인가?"
 안국군은 내궁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안국군이 앉던 내궁의 높은 자리에는 비단으로된 관을 쓰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손에 황금으로 된 화살을 들고, 안국군을 보며 말하였다.
 "죄인 달가(達賈)는 엎드려 스스로 죄를 고하라."
 안국군을 본명인 달가로 부르는 말을 듣자, 안국군을 모시러 나와 옆에서 같이 걷던 시녀가 소리쳤다.
 "더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 어찌 감히 안국군께 말씀을 아뢰면서 이름을 함부로 그대로 입에 올리는가"
 시녀가 분하여 두려움조차 잊고 창칼을 든 병사 사이에 뛰어 들려 하였다. 그러자 안국군이 시녀를 손으로 제지하였다.
 "그만 두어라. 저 분께서는 국상(國相)이신 상루(尙婁) 어르신이시다. 조정의 신료 천명을 거느리시는 나라의 가장 높은 벼슬을 하시는 분께서, 지금 성상께서 내리신 지극히 엄한 명령을 나타내는 황금 화살을 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은가. 어찌 공손히 모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국군이 국상 상루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저는 지금 곧 숙신의 도적떼들을 쫓아 싸움터를 달리다가 돌아온 길이니, 국상께서 오신 행차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싸우는 군사 다운 충심만이 높을 뿐으로, 일을 헤아리는 것은 아둔하여 국상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겠습니다."
 상루가 안국군을 내려다 보고 말했다.
 "너는 소태후께서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소태후를 사모하였는데, 그때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남아 소태후를 빼앗고자 하였다.
 이제 성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아직 성주들과 태수들의 뜻이 모이지 않았다. 그런데 선대의 옛 신하들 중에는 너를 알고 따르는 자들이 많으며, 또한 너를 따르는 백성들이 많고, 무기와 갑옷과 병사들이 많으니, 너는 감히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의 벌을 겁내지 않았다.
 마침내, 너는 이 먼 곳으로 소태후를 꾀어 내어 깊은 밤에 간악한 짓을 하려고 소태후를 크게 다치게 하였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다."
 옛날 임금의 아우였던 귀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상루의 목소리에는 아무 흔들림이 없었다.
 안국군이 억울하여 고개를 쳐들었다.
 "당치 않습니다. 저는 감히 소태후께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없거니와, 제가 소태후를 이곳으로 꾀어 낸 것도 아닙니다. 어느 누가 그런 짓을 보았다고 하는 자가 있습니까?"
 안국군이 말을 마치자, 상루가 호통을 쳤다.
 "너는 아직까지도 네 죄를 스스로 빌지 않고,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거짓만을 고하느냐. 죄를 밝힐 사람이 없지 않도다."
 상루가 말을 마치자, 상루의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온 사람인즉, 바로 지난날 혈옥에서 도망친 우랑이었다.
 우랑은 밝은 날 가까이서 안국군의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으므로,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찬찬히 안국군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나서 우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랑이 말하였다.
 "안국군께서는 지난달 보름밤에 태후께서 목욕을 하고 계시는 염지 연못에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연못가에는 붉은 등불을 밝혔으며, 안국군께서는 검은 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또한 태후께서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황금으로 만든 꽃 모양의 장식을 머리에 꽂고 계셨습니다."
 우랑이 잠시 말을 멈추자, 상루가 두 명의 시녀를 끌고 나오게 하여 물었다.
 "지난 달 보름밤에 달가의 모습과 태후께서 하신 모습이 이 말과 같은가?"
 두 시녀들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것을 듣고 상루가 말하였다.
 "깊은 밤의 행색을 이와 같이 소상히 알고 있으니, 이것은 저 사람이 반드시 그곳에서 정말로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상루가 말을 맺자, 우랑이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때 안국군은 태후와 말을 나누다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고는 칼을 빼어 들고 설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는 제가 제 눈으로 직접 본 일입니다."
 말이 끝나자, 상루가 다시 안국군에게 말했다.
 "이와 같이 내가 태후에게 흉한 짓을 한 것을 직접 본 사람이 있건만, 너는 어찌 아직도 거짓말로 둘러대며, 너의 죄를 뉘우치지 않느냐?"
 안국군이 억울하여 떨었다.
 "저 자가 몰래 그날 밤의 모습을 본 것은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저 자가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태후께 그와 같은 말을 하며, 성상께 맹세한 충신이자, 같은 부모 아래에 태어난 형님의 아우로 그와 같은 일을 지금껏 잠시나마 떠올려 본 적이라도 있겠습니까?"
 안국군은 우랑에게 다가와 우랑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나는 그대를 알지 못하고, 그대를 본 적도 없다. 나는 오직 그동안 6부7락의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추위를 견디고 배고픈 날을 참아 오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하건만, 그대는 도대체 무슨 원한으로 이와 같은 거짓말을 하여 나를 괴롭히려 하는가?
 사람을 죽이는 싸움이 끊이지 않는 날 동안 온갖 해괴한 속임수들이 끝이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니, 나는 그대를 용서해 줄 수 있다. 나는 그대가 지금이라도 이와 같은 거짓말을 멈춘다면, 그대에게 더 죄를 묻지는 않겠다."
 우랑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청하는 안국군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쳐다 보기만 하였다. 우랑은 곧 다시 상루를 향하여 말했다.
 "저 또한 안국군의 공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찌 조정의 엄한 자리 앞에서 거짓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안국군이 태후에게 사악한 짓을 하여 다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안국군이 상루를 향하여 소리쳤다.
 "저 자가 홀로 사사로이 지어낸 헛소리를 어찌 믿겠습니까? 저는 성상께서 숙부로 받들어 주시고 또한 이곳 6부7락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저를 믿고 따릅니다. 어찌 이와같은 제가 마음을 다하여 울부짖는 말은 믿지 않으시고, 대신 저런 자의 잡스런 말 한마디를 믿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우랑이 말했다.
 "안국군께서 태후께 흉한 짓을 하고 다치게 한 것을 본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닙니다."
 우랑이 어둡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마치자, 곧이어, 한 덩치 큰 사람이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온 사람은 숙신족의 옷을 입고 좋은 가죽으로 된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안국군이 알아보고 외쳤다.
 "너는 숙신족, 노부족의 새 추장이 아닌가?"
 걸어 나온 노부족의 추장에게 상루가 물었다.
 "너는 지금 여기 있는 죄인이 태후께 흉한 짓을 하고 다치게 한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노부족의 추장이 답했다.
 "예, 제 두 눈으로 저 자가 칼을 빼들고 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며, 분명히 기억납니다."
 안국군이 땀을 흘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우랑은 계속 말했다.
 "안국군의 짓을 본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숙신족, 단(檀)부족의 추장이 나타나 상루가 묻는 말에 답하였다. 이번에도 숙신족의 추장은 말하기를,
 "예, 제 두 눈으로 저 자가 칼을 빼들고 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며, 분명히 기억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우랑은 네 사람, 다섯 사람의 숙신족 추장들을 더 불러내어, 모두 답하게 하기를,
 "예, 제 두 눈으로 저 자가 칼을 빼들고 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며, 분명히 기억납니다."
 하도록 하였다.
 상루가 안국군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와 같이 네가 죄를 짓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은데, 너는 아직도 거짓만을 말하느냐?"
 안국군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것은 모두 간사한 숙신족들의 거짓말입니다."
 안국군이 마지막으로 걸어 나온 한 추장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이 숙신족 추장은 고구려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안국군이 추장에게 묻기를,
 "지금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냐?"
 라고 하니, 추장이 머뭇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답하기를,
 "예, 제 두 눈으로 저 자가 칼을 빼들고 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며, 분명히 기억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빈틈을 주지 않고 우랑은 재빨리 말을 하였다.
 "하오면, 태후 마마께 직접 여쭈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곧 두 명의 역사가 가마와 같은 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는 곰의 가죽 같은 것을 덮고 소태후가 엎드려 있었다.
 우랑이 말했다.
 "태후의 허리에는 안국군이 흉한 짓을 하다가 낸 상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상루가 손짓하자 소태후를 덮고 있던 곰가죽을 한 역사가 젖혔다. 그러자 소태후의 몸이 드러났다. 소태후의 허리에는 흉칙한 상처가 크게 나서 곪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상루가 말하였다.
 "직접 해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어찌 저 조의가 태후의 허리에난 상처를 알겠는가?"
 안국군은 답답하여 가슴을 치며 다가가 태후를 보았다. 그런데 태후를 자세히 보니, 몸은 형편 없이 말라 있었으며,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곱고 희던 얼굴은 마치 죽기 직전의 늙은이의 거친 얼굴처럼 흉칙하게 망가져 있었다. 소태후는 곰가죽을 덮고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자꾸 빠르게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쉭쉭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국군이 태후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데, 우랑이 태후에게 물었다.
 "안국군은 태후마마를 해하려 하였습니까?"
 그러자 태후가 몸을 굽신거리려고 꿈틀거리면서 답하였다.
 "예, 그 말이 맞습니다. 부디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소태후는 말을 마치고도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침을 흘리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상루가 소태후에게 다시 물었다.
 "저 죄인이 태후마마께 죽여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까?"
 소태후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 그 말이 맞습니다. 부디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마치자 마자 소태후는 눈을 꼭 감고 더 낮게 엎드려 이를 물고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랑이 멍하니 서 있는 안국군에게 물었다.
 "이와 같이 안국군께서 그날 밤에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면, 도대체 안국군께서 그 깊은 밤에 염지 연못에서, 태후마마와 은밀히 나눈 이야기가 그러면 무엇이었습니까?"
 안국군의 눈에, 엎드려 떨고 있는 소태후의 모습이 보였다. 우랑은 소태후를 보고 있는 안국군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 안국군께서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날밤에 소태후와 무슨 이야기를 하였습니까?"
 안국군은 차마 소태후가 역적질을 하자고 부추겼다고 말을 하지는 못했다. 안국군은 물끄러미 실성한 소태후를 쳐다보며 떨고 있다가, 마침내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아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누가 태후를 이와 같은 꼴이 되게 하였습니까?"
 안국군이 답을 하지 않고 계속 울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소태후를 보며 우는 안국군을 좌중의 사람들은 측은한 듯이 쳐다 보았다.
 그 때 안국군의 곁에 우랑이 바짝 다가 왔다. 우랑이 안국군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조의로서 죄를 지은 자를 치기 전에는, 서로 다른 날, 세 번 그 죄를 물어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제가 죄를 묻겠습니다."
 우랑이 다시 숨을 고르고 말을 계속했다.
 "안국군은 마음대로 나라의 제도를 어겨도 된다고 하고 함부로 만든 습속을 조정의 법보다 중하다 하였으니, 억울한 남자들이 많고 괴로워 하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어찌 사형에 해당하는 그 죄를 모른다 하겠습니까."
 안국군은 아무 답이 없이 계속 소태후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곧 우랑은 도끼를 꺼내어 단숨에 안국군의 목을 찍었다.
 임자년(서기 292년) 봄 3월, 이리하여 안국군이 죽게 되었다. 나중에 조정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랑이 세 번 안국군의 죄를 묻고 죽였으니, 조의의 제도를 마침내 지켰다."고 말하였다.
 안국군이 도끼에 찍혀 죽었을 때, 안국군을 받들던 그 부하 중에는 소리를 길게 지르며 날뛰다가 지쳐 기절하는 자들도 있었고, 그 시녀들 중에는 짐승처럼 우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자들도 있었다. 마침내, 내궁 바깥에도 안국군이 죄를 얻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단로성 사람들은 남녀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통곡하며 길바닥을 가득 메우고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백성들이 서로 조문하며 울면서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양맥족과 숙신족들의 환란을 면하지 못하고 모두 죽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살고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를 보고 살다가 또 죽을 것인가?"
 하였다. 온통 성안에 곡소리가 울려퍼지고, 집집마다 슬픈 노래가락이 밤낮으로 울려 퍼졌다.
 후대의 학자들 중에 조선시대의 대신이었던 권근(權近)은 이 일에 대해서, 의외로 이 모든 일의 원인으로 상부의 선대 임금이자 상부의 아버지였던 약로(藥盧) 때에 이미 발단 되었던 일이라는 점을 밝혀 보려 했다. 즉 자신의 저서에서 안국군 달가가 모살된 사건은 이미 상부의 아버지 시절에 벌어졌던 일이 어쩔 수 없이 맺어진 결과일 뿐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이것은 상부의 성격이나 안국군 달가의 실력이나 세력은 사실 진정한 이유가 아니라는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시각으로 생각해 볼 만 하다.
 권근의 논지는 이러하다. 상부의 아버지였던 약로는 영리했고 또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약로는 재위 중에 이른바 "목욕탕에서 사람을 죽인 일"에서 자신의 아우를 살해한 적이 있었다. 바로 약로가 이렇게 인륜을 어기고, 인정이 모자라며, 냉혹한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쁜 일의 원인을 하나둘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나쁜 일이 일어 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약로가 사랑 받고 뛰어난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근은 약로를 매우 혹평하여, 약로가 살아생전 스스로 험한 일을 당하지 않은 것이 요행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실제로, 안국군 달가는 약로가 아끼는 형제였는데, 약로의 아들인 상부에 의해 이와 같이 모살 당하였으며,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상부 조차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권근은 다음과 같이 이 점을 지적했다.
 "선을 쌓는 일이 있고, 악을 쌓는 일이 있다. 한편 재앙이 일어나는 일이 있고, 경사가 일어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다 그 원인을 분류해서 묶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손이 어떤 보답을 받거나,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일은 대부분 선대의 일이 끼친 영향 때문에 생기지 않은 것이 없다."
 
 7.
 상루가 단로성에서 다시 도성로 돌아갈 때, 우랑도 같이 따라 나왔다. 거리에는 그때까지도 계속 곡소리가 가득하였다. 성문 앞에서는 우랑과 처음 다투었던 갑사가 서서 우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사는 힘이 빠진 모습이었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하였다. 갑사는 우랑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가만히 물었다.
 "네가 아무리 안국군께 죄를 주려고 한다한들, 조정의 국상 어르신까지 모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본시 조정에서 안국군을 죽일 생각을 갖고 틈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너는 다만 그 때를 맞추어 한가지 작은 꾀를 내어 준 것이 아닌가?"
 우랑은 답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지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갑사는 다시 우랑에게 물었다.
 "조정에서 꾸민 일이 너의 꾀로 이루어졌으니, 너는 안국군을 죽게한 공으로 큰 상을 타고, 이제 다시 도성로 돌아가 높은 벼슬 자리를 얻고, 또 네 처와 자식을 되찾고는, 억울하게 죽은 안국군의 잘린목을 잊고 날마다 즐거이 웃으며 살 것인가?"
 그렇게 묻자, 우랑이 갑사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조정의 덕을 입어 벼슬 자리를 얻어 조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러면서도 거짓으로 말을 꾸며 올리고, 전해 내려오는 법과 나라의 예의를 스스로 엉키게 하고야 말았소. 이런 나 따위가 어찌 더 이상 조정의 벼슬자리에 있을 수 있겠으며, 이런 짓을 하고 나서 어떻게 나라의 제도를 아는 조의나 선인이라 하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우랑은 그대로 단로성을 떠나갔다.
 우랑은 벼슬 자리를 버리고 성 밖으로 나왔으므로, 가진 것도 없고 먹고 살 방도도 없었다. 그래서 우랑은 그저 들판과 산을 돌아다니며 짐승을 사냥하며 목숨을 부지 하였다. 우랑은 그와 같이 단로성 근처에서 짐승을 잡아 살면서 한동안 숙신족들 사이에 얽혀 살았으며, 오래도록 근처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해에 겨울이 되어 눈이 몹시 많이 오게 되었다. 온통 산과 들이 눈으로 덮였으므로, 우랑은 도저히 짐승을 잡으며 숲 사이에서 살기가 쉽지가 않았다. 우랑은 결국 겨울을 나기 위해, 모아 놓은 짐승가죽을 들고 단로성 안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였다.
 오랫만에 우랑이 단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눈 덮힌 성벽 위에 한 마리 족제비가 있었다. 우랑이 가만히 보니, 족제비는 두 앞발에 얼어죽은 들쥐 두마리를 잡아 짓누르고 기세 좋게 뜯어 먹고 있었다.
 단로성의 성문 안에는 여전히 많은 구멍마다 안국군의 모습대로 빚어 만든 인형들이 있었다. 단로성 안으로 들어보니, 인형의 숫자는 더욱 많아져서, 이제는 성벽 전체에 줄지어 인형을 두는 구멍이 있고, 구멍구멍 마다 안국군 모습대로 만든 인형이 가득 있었다. 해가 질 때를 맞추어 그 인형 앞에 몇몇 사람들이 와서 손을 모으고 빌면서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이 사람들은 인형 앞에다가 음식이나 귀한 물건을 불살라 없애면서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인즉,
 "억울하게 돌아가신 안국군께 비나이다. 부디 제가 바치는 것을 받으시고 원통한 마음을 달래십시오. 다만 그 영험으로 제 자식의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안국군께서는 제가 바치는 것을 받으시고 원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십시오. 다만 그 영험으로 제가 사모하는 사내를 남편으로 얻도록 해 주기를 바랍니다."
 따위의 말 들이었다.
 우랑은 단로성 안의 중항을 따라 걸었다. 눈이 쌓인 길이 몹시 차가웠으므로, 우랑은 발이 시렵고 온몸이 떨렸다. 마침 우랑은 들고 온 가죽을 팔았고, 곧 몸을 녹일 방을 얻고자 하였다. 해가 지면서 차차 장사를 마치는 장사꾼들이 많았다. 그 사이를 기웃거리면서 우랑은 밤 동안 잠을 잘 곳을 찾아 보았다.
 그렇게 길을 살피다가, 우랑은 술집의 바닥에 걸레질을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낡은 숙신족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더러운 걸레를 정성스레 양손에 움켜쥐고 힘써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귀에 매끈하 바둑돌이 하나씩 걸려 있어서, 새로 밝힌 등불에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우랑은 여자 쪽으로 가까이 가서 손짓하며 말하였다.
 "얼굴을 본 것은 너무나 잠깐이라 제가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하나, 그대가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여자는 고개를 돌려 우랑을 보았다. 여자는 우랑을 보자 켁켁 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자는 손으로 자신의 목과 혀를 가리켰으며, 무슨 소리를 내려다가 되지 않아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우랑이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목과 혀를 다친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리고 영영 목소리를 잃은 것입니까?"
 여자는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감싸더니 곧 손으로 귀에 달아 매어 놓은 바둑돌을 가리켰다. 우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여자는 뛰쳐나와 눈이 뒤덮힌 거리 한 가운데에서 우랑 앞에 엎드려 계속 절을 하며 울었다. 차가운 눈밭에 엎드린 여자를 우랑은 계속해서 일으켜 세우려고 하면서, 같이 울기 시작했다. 술집과 주사위 노름을 하는 거리에 눈이 가득 쌓여 있으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덮여 있는데, 그 길 한 가운데에서 더러운 행색의 남자와 더러운 행색의 여자가 같이 부여잡고 소리내어 울며 부둥켜안고 서러운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술집의 주인 여자에게 곁에 있던 여자에게 말했다.
 "미친 숙신족 거지가 쌍으로 눈밭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 이와 같이 이상한 구경거리가 또 없구나."
 술집의 주인 여자가 말하기를,
 "저 숙신족 여자는 비록 온 곳을 알 수 없는 벙어리이나, 마음이 순박하고 시키는 일을 힘든 줄 모르고 잘하므로 내가 아껴 대하였다. 그런데, 저 여자가 꼭 한가지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있으니, 항상 바깥에 나올 때에는 귀에 바둑돌을 매다는 것이다. 누가 바둑돌을 가져 가려하거나, 귀에 매달지 못하게 하면 금방 통곡이라도 할 것처럼 슬퍼하면서, 꼭꼭 바둑돌을 무슨 금은 귀고리라도 되는양 하였다. 그리하여, 혹여나 지나가는 사람 중에 누구에게 그 바둑돌을 보여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언제고 귀에 바둑돌을 달고 지냈던 것이다.
 내가 그런 이상한 짓을 한 것을 보니, 비록 꿋꿋이 일하는 순박한 여자라 할 지언정, 언젠가는 오늘처럼 미친 것이 제대로 도져서 길바닥에서 울고 불며 날뛸 줄 알았다."
 하였다.

-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mirror
댓글 15
  • No Profile
    슴컹크 10.11.27 15:24 댓글 수정 삭제
    선리플 후감상!!
    곽재식님의 새로운 글이 올라와서 무척 반갑네요.
    다 읽고 덧글 달겠습니다~
  • No Profile
    곽재식 10.11.28 00:08 댓글 수정 삭제
    항상 꾸준한 응원 대단히 감사합니다. 덧글 꼭 안 달아 주셔도 되니, 부디 재밌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No Profile
    123 10.11.28 20:30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고있습니다 건필
  • No Profile
    곽재식 10.11.29 09:10 댓글 수정 삭제
    더 재미난 글 많이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Mono 10.12.03 09:57 댓글 수정 삭제
    듀게에서 룽게님 글 보고 따라와서 읽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재미있는 글을 쓸수 있을지..
  • No Profile
    곽재식 10.12.03 13:47 댓글 수정 삭제
    과찬이실 뿐입니다. 듀나게시판이야 10년전부터 계속 들락날락하던 곳이지 항상 좀 과찬해 주셔서 몸둘바 모르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Mono님께서는, 하여간, 지금 당장 키보드 붙잡고 뭐라도 쓰시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써놓고 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말씀 드립니다.
  • No Profile
    쑤우 10.12.06 00:48 댓글 수정 삭제
    "선홍빛 푸가의 향연"이라고 할까요
    핏물을 머금은 곽재식(님)표 대위법에 새삼 감탄하게 되네요
    아끼고 아끼다가 단숨에 읽고 갑니다
    이 시나리오로 칸에 가셔도 손색이 없을 것 같네요
  • No Profile
    곽재식 10.12.06 12:36 댓글 수정 삭제
    이 무슨 과찬의 오션 이란 말입니까... 더 열심히 해보라는 뜻으로 알고, 앞으로 재미난 글 자주 보내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꾸준히 응원해 주시는 점, 오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슴컹크 10.12.06 14:11 댓글 수정 삭제
    칸에 가셔도 된다는 쑤우님의 말씀에 저도 동감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가슴을 아리네요. 감동까지 받고 갑니다.
    이렇게 좋은 글 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곽재식님 짱팬 드림.
  • No Profile
    곽재식 10.12.06 21:25 댓글 수정 삭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날카로운 채찍질로 문제점을 찔러주시는 비평도 매우 기다리고 있으니, 다음 글부터는 나쁜점도 사정없이 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곽재식 10.12.08 08:31 댓글 수정 삭제
    이두 표기일리야 있겠습니까. 맞춤법의 부족함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항상 힘이 되어주시는 응원 다시 한 번 감사 말씀 드립니다.
  • No Profile
    still 10.12.25 03:05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이 처음 읽는 곽재식님의 글입니다.. 저는 글 읽는 게 서툴러서 한번에 못읽고 아껴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문체가 좀 어렵다고 느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읽기 쉽게 잘 다듬어진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깊이있고 짜임새있는 스토리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물들마다의 사연이나 특유의 성격, 비극성 같은 부분도 좋았습니다..ㅠㅠ 특히 마지막 부분은 정말 감동입니다..ㅠㅠ

    뭐라 비평 같은 걸 드리면 좋겠지만 아는 게 없어서 그러긴 힘들고, 그냥 감사한 마음 전달해드리고 싶어서 덧글 답니다.. 앞으로 곽재식 님의 글 잘 읽겠습니다. 위의 어느님 말씀대로 칸에 가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길 빌어요. 응원합니다! ^^
  • No Profile
    곽재식 10.12.28 12:49 댓글 수정 삭제
    힘이 되는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재미난 이야기 더 들려드리기 위해 또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11.02.27 21:54 댓글 수정 삭제
    우와...대단합니다!
  • No Profile
    곽재식 11.03.27 09:39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모살기-지진기 는 3부작 내지는 4부작으로 해서 연결되는 시대의 이야기를 하나나 두 개 정도 너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있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아주 키가 큰 키다리 아저씨2 2012.10.20
곽재식 끝을 앞두고2 2012.08.31
곽재식 다시 한 번만2 2012.07.28
곽재식 고통의 대가2 2012.07.28
곽재식 상담자 (본문 삭제)2 2012.05.25
곽재식 공중부양4 2012.04.28
곽재식 탄생4 2012.03.30
곽재식 열어 보면 안됨9 2012.03.30
곽재식 죽음을 부탁하는 상냥한 방법13 2012.01.28
곽재식 8월과 도로의 끝6 2011.12.30
곽재식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확장판)6 2011.11.25
곽재식 천사의 옆얼굴 (확장판)6 2011.10.29
곽재식 백 번째 통신12 2011.09.30
곽재식 잠시 쉬어 가는 곳4 2011.08.26
곽재식 환승역의 7인8 2011.07.30
곽재식 호숫가에 있는 유령의 집6 2011.06.25
곽재식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27 2011.05.28
곽재식 모살기(謀殺記)15 2010.11.27
곽재식 라만차 영웅전기3 2010.11.27
곽재식 16 2010.05.28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