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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하늘 강아지 이야기


1.
인영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전화기에서 천문학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보았다.

화면에는 검은 밤하늘에 유성이 떨어지는 모양이 나왔다. 곧 여러 유성이 연달아 떨어지는 모양이 이어졌다. 그 모습은 불꽃놀이 같기도 했고 네온사인 같기도 했다.

"오늘밤, 최대의 유성우!"

화면에는 "오늘밤"이라는 말이 굵은 글씨로 크게 나와 있었다. 인영은 그 날짜와 시각을 보고 전화기의 날짜를 보고 오늘 날짜가 맞는지 확인했다. 인영은 전화기로 "유성우"에 관한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보기도 했다. 신문 기사에서도 오늘 유성이 많이 떨어져 멋질 거라고 나왔다.

인영은 전화기를 책상 앞에 있는 건반 옆에 내려 놓았다. 별다른 기능이 없어 보이는 구식 전자 키보드였다. 전화기를 바로 연결할 수도 없어서 복잡한 낡은 케이블 몇 개를 연달 연결한 뒤에야 전화기에 연결 되었다.

인영이 건반 연습 프로그램을 실행하자 화면에는 악보와 가사가 나왔다.

"아름다운 그대의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인영은 악보에 따라 건반을 눌렀고, 노래도 맞춰 불렀다.

"아름다운 그대의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인영은 가사를 바꾸어 불러 보았다.

"아름다운 금희의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다시 원래의 가사로 한번 불렀다.

"아름다운 그대의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인영은 다음 부분은 가사 대신 도레미파 같은 계이름과 C, A마이너 하고 화음의 이름을 부르며 연주했다. 건반의 어느 부분을 눌러야 하는 지를 외우기 위해 입으로도 눌러야 할 곳을 소리 낸다. 몇 번씩 연습하면서 잘 틀리는 곳을 틀리지 않기 위해 그런 부분은 손가락으로 어디를 눌러야할 지를 그때그때 입으로 발음하면서 연주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어떨때에는 화음을 이야기하다가 어떨 때에는 계이름을 대기도 하는 것이 엉망으로 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인영은 엉터리로 손가락을 놀리느라 손가락이 엉키는 부분에서 또 실수가 생긴 것을 알았다. 인영은 그 부분을 반복해서 다시 연주해 보았다. 인영은 전화기 화면에 표시되는 표준 방법대로 손가락을 움직여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미 엉터리로 손가락을 움직인 것이 너무 뿌리 깊게 굳어 있어서 이제 와서 표준 방법으로 고치면 더 헷갈리기만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인영은 엉터리 방법 대로 다시 연습해 본다. 다시 연습할 때는 자연스럽게 들렸다.

인영은 또 처음으로 돌아 가서 연주를 계속한다. 자주 틀리는 부분은 또 약간 틀렸고 손가락이 엉키는 부분은 또 불안했다. 오히려 저 번에 잘 연주했던 부분 중에서도 살짝 박자가 어긋난 부분이 생길 정도였다. 그렇지만 중간에 멈추거나 끊기는 것 없이 인영은 연주를 마쳤다. 인영은 전화기 옆에 있는 메모지에 볼펜으로 선을 긋는다. 그 선은 메모지에 미리 그려 놓은 동그라미를 지운다. 메모지에는 동그라미가 오십 개가 그려져 있었고, 이제 그 중에 사십 개 위에 지웠다는 표시가 있었다.

메모지에 표시를 한 인영은 전화 걸었다. 신호가 가지만 상대는 받지를 않았다. 인영은 받지 않는 것을 예상한다는 듯이 건반 연주를 연습한다. 그런데 계속 신호를 보내던 전화에서 이번에는 전화 받는 소리가 문득 들렸다. 인영은 갑작스럽게 전화가 걸린 것을 보고 놀라서 전화를 붙잡는다. 그러다가 전화를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워 들어야 했다.

"야, 오래간만이다. 잘 지내?"

인영이 말했다. 전화 상대편에서는 뭐라고 화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인영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니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냐. 진짜 진짜 꼭 급하게 필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러지."
"내가 그 가게 지점, 본점 다들 진짜 며칠 전부터 계속 연락해 보고 대기 명단에 이름도 올리고 그랬거든, 그런데 절대 자리가 안 난다는 거야."
"아니, 이럴 때 수를 내 주는 게, 바로 너 아니냐. 네가 마지막 희망이야."
"그건 알 지. 방법이 없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방법이 없으니까 너한테 연락하잖아. 내가 진짜 지난 주 내내 어떻게든 한 자리 예약 해 보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단 말이야.."
“정말 위기야. 큰 위기야. 이거 꼭 필요하다니까. 금희랑 정말 불안해. 아니야. 진짜 위기야.”

인영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을 머뭇거렸다.

“깨질 것 같은 분위기로 가고 있단 말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건 아닌데 확실해. 어. 완전 그래. 어떻게 분위기를 못 뒤집으면 깨질 것 같아. 이번이 기회야. 정말 딱 마지막 남은 기회야. 네가 그랬잖아. 항상 나중에 나중에 되돌아 보면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 같은 게 한번은 있었기 마련이라고. 내 생각에 나는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잠시 전화기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기 저편에서 다시 점점 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인영이 다시 말했다.

"어, 알지. 야, 그래도 너 그때 아버지 쓰러지셨을 때 누가 달려 갔어? 내가 그때 너희 아버지 업고 몇 백미터를 달렸냐면... 알았어 알았어. 너희 아버지 쓰러졌을 때 이야기 다시 또 안 할게. 앞으로 영원히, 절대 안 할게. 이번만 좀 도와줘. 무슨 수 좀 내줘.."
"그렇지. 맞아."
"어."
"내 생각에 오늘 저녁이 정말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 오늘 뭔가 계기를 마련 못하면 더 이상은 정말 없을 것 같거든. 오늘 저녁이 정말 마지막으로 흐름을 바꿔볼 기회 같아."

계속 이어지던 인영의 말은 한참 멈춘다. 인영은 말없이 계속 전화만 잡고 있었다. 조금 더 기대 앉았다가, 눈을 돌려 천장을 보다가 할 뿐 말은 없었다.

곧 전화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인영이 대답했다.

"야, 진짜 고맙다. 정말, 정말 고맙다."

인영은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는 듯한 동작을 했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살펴 본다. 컴퓨터 화면에는 사람처럼 표현한 좀 얼빠진 모습의 개 모양이 보였다. 개는 빛이 나는 것 같은 노랑색이고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개 모양 위에는 조그마한 네모 모양이 있고, 거기에는 "세부 렌더링 및 재질 배정 완료"라고 적혀 있었다.
인영은 컴퓨터 앞에 가서 이메일을 썼다.

"방금 완성된 자료 보내드렸습니다. 3D 프린터로 출력 완료되는대로 배송지로 긴급 배송해 주시고, 문자 메시지로 연락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서 인영의 건반 연습과 노래 연습은 오후 시간이 늦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깊게 집 안까지 들어 왔다. 이제 곧 모두 어두워지고 오늘은 끝이 날 것이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밝은 게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껴보라는 것 같았다. 붉은 빛이 방 안에 가득 차자 인영은 창 바깥을 내다 본다. 인영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날씨가 얼마나 맑은 지, 구름이 없는 지 살펴 본다. 구름이 적지는 않았다. 하늘의 절반 정도는 구름이 채우고 있었다. 인영은 다시 전화기를 확인해 보았다.

"오늘밤, 최대의 유성우!"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한참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인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집을 나서 기 나서기 직전에 다시 방 안으로 들어 가더니, 한 번 빠르게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어떤 식으로 연주해야 하는 지 후다닥 간추려 보았다.

막 큰 길로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길을 헐렁한 편이었다. 듣기 좋은 노래와 함께 운전한다면 흥이라도 날만했다. 그렇지만 인영은 전화기에 자기가 스스로 녹음해 둔 것을 틀었다. 연습하면서 그 노래의 코드와 계이름을 섞어서 발음하며 녹음해 놓은 그것이었다. 인영은 운전하면서 그것을 틈틈히 따라 불렀다. 비열한 서울 시내의 운전자들이 급작스럽게 위협할 때에는 노래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사이 사이에서, 끼어들기의 괴로움과 짧은 신호의 한심함, 그 틈틈으로 인영은 노래를 계속 불렀다.

곧 이른 봄의 짧은 해는 져버렸고, 세상은 퍼렇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복잡한 저녁 시간대에 쏟아져 나온 차들은 사방을 갑갑하게 매웠다. 인영은 시계를 살펴 보았다. 시간으로는 느긋해 보인다. 인영은 몇 겹으로 둘러쌓여 갇힌 차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 재생으로 노래를 들으며 따라 했다.

금희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햇빛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빛 없이도 모든 형체를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은 남아 있었다. 인영은 거리에 금희의 모습이 보이는 지 살폈다. 보이지 않았다. 잠깐 차를 멈추고 전화를 확인해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도착했으면 대답해."

금희가 보낸 것이었다. 인영이 대답했다.

"도착했어."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기다리고 있어. 금방 나갈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내려와."

인영은 자동차로 금희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아파트 단지를 빙빙 여러 차례 돌았다. 인영은 아파트를 돌면서 혼자서 말했다. 어떤 말은 몇 번 반복해 보기도 하고, 어떤 말은 말투를 바꿔 가면서 다시 말해 보기도 했다.

"오늘은 거의 하나도 안춥다. 진짜 봄이다, 봄이야."
"어, 너 오늘 뭐야? 왜이렇게 멋있어?"
"오다가 보니까 여기 빵집 크게 하나 새로 생겼더라?"
"잠깐만 너 좀 그냥 가만 있어봐. 너 좀 보고 있게."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차 옆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영은 놀라서 급히 차를 세웠다. 문을 두드린 것은 금희였다.

"어, 너?"

금희는 차 문을 열려고 했다. 인영은 다급히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금희는 바로 옆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너, 어떻게 거기서 나와?"
"네가 또 아파트 빙빙 돌고 있을 줄 알고 놀래켜 주려고 일부러 후문 쪽으로 나왔지."
"아아, 이 쪽이 후문이야? 그런데 후문이 더 크네. 이쪽으로 빠지는 길 하고도 가깝고. 이쪽길에서 만나는 게 더 편할 뻔 했다. 그렇지 않냐?"

인영은 금희를 곁눈질로 보려고 했다. 금희는 의자를 약간 눕힌 채로 기대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인영에게 금희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근데 내가 조금 일찍 왔는데 너도 일찍 나왔네? 별로 바쁜 일 없었나봐?"

금희는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가는 동안 말 안 시키면 안 될까? 나 지금 너무 피곤해. 피곤해서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 조금만 좀 쉬자. 응?"
"어, 그래? 왜? 어제 회사 일이 많았어?"
"말 좀 안 시키면 안 되냐고."
"아, 맞다. 미안."

금희는 다시 몸을 자리에 기댔다. 고개를 창쪽으로 돌리더니 눈을 감았다. 금희는 그대로 말했다.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근데 정말 너무 피곤해. 너도 내가 네 차 안에서 제일 잘 자는 거 알잖아. 히터 약간 따뜻하게 틀어 놓으면, 정말 너 운전할 때 이 차 안에서 잠 자는 게 진짜 제일 쉽게 제일 잘 잘 수 있어."

금희는 곧 잠든 것 처럼 말을 멈추었다. 인영은 손을 뻗어 히터의 온도를 조금 더 높였다.

금희와 인영을 태운 차는 다시 도심으로 파고 들어 갔다. 전조등을 켠 차들이 가득한 밤거리는 다들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강변의 도로 하나가 의외로 잘 뚫려 있어 기분 좋게 속력을 높일 수 있는 때도 있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있을 때, 잠들어 있던 금희는 깨어 났다.

"벌써 도착했어?"
"너는 진짜 신기한 게 깊이 자는 것 같다가도 딱 도착하면 바로 일어 나더라."
"너 아직도 주차할 때 조금 힘들면 되게 헤매잖아. 차가 주차를 잘 못해서 헤매는 그 움직임이 아주 잠을 부드럽게 잘 깨워줘."
"무슨 내가 주차할 때 그렇게 헤메는데?"
"그렇다니까. 그런데 이게 잠 깨는데는 정말 좋아. 알람소리처럼 막 갑작스럽고 싫게 깨우는 느낌이 아니고, 정말정말 부드럽게. 그니까 자연스럽게 저절로 잠을 살살살 없애 주는 느낌이야."

금희는 웃어 보였다. 인영의 얼굴에 그 웃음이 그대로 비치는 것 같이 인영도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앉은 식당에는 사람이 자리마다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자리는 편안했고 탁자들이 너무 가까이 있지도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웃음 소리는 귀에 들렸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유럽 어느 나라 말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그 사이에 끼어 들어서 좋아 한다고 말하거나, 오늘은 재미 있는 날이었다고 말 하는 소리가 퍼지는 것을 섞으며 흘러 다니고 있었다.

“여기 언제 예약했어? 여기 갑자기 인기 많아져서 자리 구하기 진짜 어렵다던데.”
“내가 수를 좀 썼지.”
“무슨 수를 썼는데?”
“그건 비밀이고.”
“왜 비밀인데? 야, 빨리 말해 봐. 여기 자리 어떻게 예약했어?”
“내가 수완이 있고 기술이 좋은 사람이잖아.”

인영의 말을 듣고 금희는 눈을 찌푸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웃고 있었다.

“너, 한 사흘 밤 밤새도록 번호표 받는데서 기다렸지?”
“내가 아무 할 일 없이 식당 예약에만 목숨 건 사람이냐. 밤 새도록 기다리게?”
“그러면 무슨 수를 쓰는데? 여기 아까 앞에 보니까 지금도 가게를 뱅뱅 돌도록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같던데.”
“그렇게 미련한 사람은 아니고.”
“그거 아니면 또 누구 아는 사람 중에 어떻게 여기에 닿는 사람 붙잡고 일주일 내내 들들 볶고 빌고 또 빌었겠지.”

인영은 금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금희는 메뉴를 넘겨다 보면서 이어서 중얼거렸다.

“연어 요리는 확실히 맛 있는 게 많네.”
“너 연어 요리 좋아하잖아.”
“그런데 뭘 이렇게 대단한 걸 해 냈다고 보여 주려고 힘 쓰고 공 들이고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사람이 공 들인만큼 그만큼 반응이 좋기를 바라기 마련인데, 어디 그렇게 자기가 생각한 만큼 상대방도 꼭 맞게 좋아하기가 쉽나. 괜히 ‘내가 이렇게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만큼 상대방은 못 알아주네.’ 그렇게 실망하기 쉽고, 그러면 괜히 침울해 지기도 쉽고 그런 거잖아. 그리고 자꾸 그러면 상대방은 어떻겠어? 좋은 걸 봐도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아, 얼마나 좋은 척을 해야, 준비한 제가 실망을 안 할까’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단...”

금희의 목소리는 점차 속삭이는 것처럼 변하고 있었다. 인영에게는 처음처럼 잘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야, 이건 진짜 맛있겠다. 이거 먹자.”
“나 여기 메뉴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그거 고를 줄 알았다.”
“너도 이거 먹어.”
“아니야. 내 거는 그거 말고 네가 두번째로 먹고 싶은 거 골라 봐.”
“내가 두번째로 고를 것 같은 게 뭔지는 못 맞추겠어?”
“그건 어렵지.”
“그러면 첫번째로 고를 것 같은 걸 네가 짐작했다는 걸 어떻게 내가 믿어?”

금희는 턱을 들어 흘겨 보는 모양을 해 보였다. 인영은 또 웃었다. 두 사람은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서른 네 문장 정도를 더 말했고, 세 번 정도 더 웃었다.

음식이 나왔을 때, 금희는 가방에서 포장한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네가 딱 보니까 오늘 밤을 중시해서 지나치게 공을 들여서 좋은 식당 예약할 것 같아서, 나도 뭔가 어울리는 걸 준비했지.”
“이게 뭔데?”

인영은 포장한 것을 집어 들었다. 인영은 뜯어 봐도 되냐고 물어 보았고, 금희는 그러라고 했다. 포장되어 있던 것은 숟가락, 젓가락이었다.

“모양 산뜻하다. 멋있네. 이거 어디서 샀어?”
“이제부터 이게 우리 특별 만찬용 수저인 거야. 잘 닦아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우리 만날 때, ‘오늘 우리 전용 특별 만찬용 수저로 먹자’, 그러면 이거 둘 다 갖고 나와서 먹는거야.”

금희는 자기 것도 있다며 들어 보였다. 인영이 말했다.

“그런데 오늘 먹는 게 치즈랑 연어랑 버터랑 이런 거 섞여 나오는 음식인데 이런 완전 한국식 숟가락 젓가락이랑 좀 안 어울리지 않아?”
“쌀이잖아. 떠 먹으면 어울리지. 더 어울릴 게 뭐가 있어?”

금희는 웃어 보였다.

음식이 나오자 금희는 기뻐했다. 인영도 같이 즐거워 했다. 금희는 먼저 한 숟가락을 떠 먹어 보고 무척 맛있다고 말했고, 인영은 금희가 먹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 지, 얼마나 맛있다고 하는 지 지켜 보았다. 인영도 뒤이어 먹어 보고 맛있다고 했다. 금희는 이래서 요즘 여기가 이렇게 인기가 있구나 하고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음식 맛에 대해 좀 더 이야기했고, 지금껏 먹어 본 것 중에 어디 보다 더 나은 지, 어떤 점은 어디서 두 사람이 먹었던 때보다는 조금 못한 지를 이야기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음식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점점 드문드문해졌다. 그러다가 인영에게 전화가 왔고, 인영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끝나고 나서는 뭐라고 메시지를 타이핑해서 이곳저곳에 보냈다. 그동안 금희도 전화기를 꺼냈고 게임을 시작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음식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은 나와 있던 음식을 다 먹었다. 마지막 한 숟가락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인영은 금희가 게임을 끝내기를 기다리며 창 바깥을 보았다.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구름이 모여들어 하늘은 희뿌옇게 도시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인영은 그 모습을 답답하게 쳐다 보았다. 보고 있으니, 허연 구름 사이로 가끔 구름이 없는 작은 틈새가 보였고 그 너머로 조그맣게 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금희는 게임을 그만 두고 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었다. 인영이 금희에게 말했다.

“식으니까 좀 맛 없지?”
“아니야. 그래도 이 자체가 너무 맛있어서 괜찮아. 확실히 음식은 좋다.”

가게를 나온 두 사람은 거리를 같이 걸었다. 처음에는 대화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금희가 인영에게 말했다.

“구름 껴서 실망스러워?”
“어?”

인영은 걸음을 잠깐 멈추고 자신을 쳐다 보는 금희의 눈을 보았다. 인영은 잠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금희가 다시 말했다.

“오늘 비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구름은 끼나 보네.”
“아직 유성 떨어지는 시간이 되려면 많이 남았으니까 그 사이에 구름이 조금만 걷혀도 사이사이로는 보일 수도 있겠지.”
“구름 걷혔으면 좋겠다.”

금희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걷혀라, 하고 딱 바라는 게 있으면, 구름이 확 걷히고 그런 거면 얼마나 좋아.”

인영은 두 발자국 앞서 걸어 나간 금희를 따라잡았다. 인영은 미리 가 보았던 한 블럭 앞의 건물 쪽을 보았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 노래하고 그러고 놀까?”
“노래? 너 노래 별로 못하잖아.”

금희는 다시 웃었다. 웃음소리는 하나도 내고 있지 않지만 웃음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별로 못하지만 완전 못하는 건 아니지.”
“그래. 노래하고, 춤도 추고.”

인영은 금희를 상가 건물 2층으로 안내했다.

늦은 저녁 건물 복도에는 영업을 마친 가게가 많아 드문드문 캄캄하게 길이 어두운 곳이 있었다. 고요한 두 사람이 걷는 발소리만 어둠 속에서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계속 그렇게 어둡게 퍼지는가 싶더니, 곧 동굴처럼 새까만 복도 끝에 따뜻한 빛이 보였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악기 소리가 섞여서 장난스러운 소음으로 변해 나오고 있었다.

“음악 학원이야? 너 여기 다녀?”
“아니, 다니는 거는 아닌데. 안 다니는 사람이라도 여기서 한 시간 씩 연습하는 곳을 빌릴 수가 있어.”

가게 문을 여니 소리는 조금 더 크게 들렸다. 옛날 노래를 연습하는 어느 노인의 색소폰 소리가 들렸고, 박자를 계속 놓치고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어떤 아이의 드럼 소리도 들렸다. 그러면 뒤이어서 “아니지 아니지 그게 아니라니까”하는 학원 강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 여러 소리 사이사이에 대단히 능숙한 솜씨로 기타를 치는 소리도 들렸고, 조금 먼 곳에 있는 방에서는 사랑 노래를 연습하는 어떤 높은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인영은 한 시간 동안 피아노가 있는 방을 빌려 달라고 했다. “왼쪽으로 들어 가시면 5번 방이에요.” 안내 해 주는 것이 음악 소리에 묻혀 제대로 안들린 것 같은 데도 인영은 쉽게 방을 찾아 갔다. 금희가 따라 들어 가 보니, 피아노 한 대가 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가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들어 가서 방문을 닫자 이상할 정도로 바깥 소리가 딱 끊기는 것 같았다. 온갖 뒤섞인 악기의 소리가 그저 웅웅대는 것처럼 들렸다. 물 속에 들어 온 것 같기도 했다. 바깥은 이미 늦어 가는 밤인데,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에 문을 꼭 닫고 들어 와 있으니, 이 방이 바다 깊은 곳으로 갑자기 가라앉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금희는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방 안의 불빛이 아주 밝다고 생각했다. 인영도 말은 안 했지만 방 안이 눈부실 정도로 너무 밝다고 생각했다.

“너 키보드 연주하는 거 거의 다 까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거의 다 까먹었으니까, 100% 다 까먹은 거는 아니지.”

인영은 기억하고 있는 몇 가지 곡조를 피아노로 연주했다. 금희는 어느 노래의 어느 대목에서 나오는 연주인지 다 알고 있었다. 몇 대목은 좋아하는 곡이어서 흥얼흥얼 따라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러면서 몇 번 같이 웃었다. 얼마 후 인영은 노래 한 곡 전체를 연주했다. 이번에는 연주에 맞춰 노래도 같이 불렀다.

"아름다운 그대의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얼마나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숨기지 못하고 저절로 드러나는 그 얼굴이
얼마나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지”

노래가 어려워지는 부분에서는 목소리가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인영은 멈추지 않았다. 금희도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노래 끝까지 인영은 한 군데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인영은 틀리는 지 어떤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자 인영은 금희를 보았다.

“금희야.”
“다시 또 불러줘.”
“어? 금희야?”
“아니, 나를 다시 불러 달라는 게 아니고 노래를 다시 불러 달라고.”
“아, 아.”

인영은 한 번 더 같은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는 연주가 두 군데 틀렸지만, 아까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금희는 노래를 잘 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다른 노래와 그 가수의 웃긴 점에 대해서 두 사람은 잠깐 잡담을 나누었다.

둘은 다른 노래의 몇 소절을 같이 불러 보기도 했고, 우스꽝스럽게 가사를 바꿔 부르며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흥얼거려 보기도 했다. 금희와 인영은 번갈아 가며 웃었고, 한 번은 크게 소리를 내며 같이 웃기도 했다.

삼십분 정도가 지나자, 인영은 목을 켁켁거렸다. 인영은 팔을 늘어 뜨렸다. 금희는 아예 피아노 건반을 덮고 그 위에 엎드렸다.

“아, 진짜 오늘 왜이러지? 너무 피곤해.”

인영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냥 다른 사람들 연습하는 거 들어 볼까. 그래서 누가누가 제일 못하나 들어 보면 어때. 다 섞여 있지만. 그래도 잘 들으면 하나씩 하나씩 구분해서 들을수 있지 않을까?”
“응.”

금희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섞여 있던 여러 소리는 조금씩 나뉘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듣자니 아까 노래 연습을 하던 목소리가 썩 솜씨가 좋게 들렸다. 어쩌면 가수가 되려고 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한 시간이 채 못되어 두 사람은 음악 학원을 나왔다. 학원 출입구 옆에 있는 작은 창문 밖으로 보니 구름은 더 짙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밤하늘이 보일 작은 틈도 없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훨씬 더 느려져 있었다. 그런데 나오는 길은 금희가 인영의 손을 잡아 끌었다.

통로의 가장 어두운 곳에 도달했을 때, 금희는 인영을 끌어 안았다. 인영은 가만히 멈추었다. 금희의 머리카락이 인영의 얼굴 옆으로 와 닿았다. 계속 실내에 있었던 것 같은데도 금희의 얼굴은 조금 차가웠다. 금희는 고개를 돌려 인영에게 입을 맞추었다.

“깜깜한데 너 얼굴은 보여.”
“그런데 여기 누가 갑자기 나타나면?”
“누가? 음악 학원에서 연습하는 사람?”
“걔네들은 아직 실력이 모자라잖아. 연습을 많이 해야 돼서 당분간 나올 리가 없을 거야.”

금희와 인영이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밤이 더 깊어 있었고 날씨는 더 흐려져 있었다.

인영이 먼저 말했다.

“그냥 포기할까?”

금희가 대답했다.

“아니야. 새벽 아니고 저녁에 유성 쏟아지는 거 볼 수 있는 게 드문 일이라면서. 한 두 시간 기다리다 보면 구름이 좀 더 걷힐 수도 있잖아. 나도 유성 보고 싶어. 하늘 강아지, 날아다니는 거.”

금희는 대화가 끊어져서 심심하고 할 말이 없을 때가 될 때마다 벌써 수십 번은 더 같이 이야기했던 지난 기억을 생각했다. 둘이 같이 너무 많이 했던 이야기라서 일부러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인영이 같은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2.
학교 다닐 적, 밤 늦도록 실험이 이어지고 나면 금희와 인영은 비슷한 시간에 실험실 건물을 나서게 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면 두 사람은 같이 걸어 갈 때도 있었다.

멍청한 실험실 선배 이야기나, 아무리 지원서를 써서 내도 끝없이 떨어지기만 하는 취직 이야기까지 서로 투덜거리며 같이 할 이야기는 많았다. 투덜거리는 도중에 가끔 똑같은 처지를 알고 웃을 때도 있었고, 어떤 추운 겨울에는 이런 모양으로 체조를 하면서 걸어가면 좀 덜 춥다면서 같이 괴상한 동작을 하며 버스 정류장이 있는 언덕길을 같이 오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밤, 너무 밤이 깊어서 아무도 인적이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심야 버스가 오기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인적이 온 학교에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아무리 심야 버스라고 해도 버스가 과연 오기는 할 것인가 의심스러울 것처럼 어둡기만한 밤이었다. 텅텅 비어 있는 학교의 정류장 언덕에 멍하니 있다 보면, 세상에 버스라는 것이 실은 없는 것 아닐까 하는 환상까지 머릿속으로 슬금슬금 들어 오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밤하늘에 별은 많았다. 어느 날이든 올려다 보면 항상 보이는 밝은 별들이 뚜렷하게 보였고, 평소에 보이지 않던 어두운 작은 별들도 그 텅 비고 캄캄한 세상 덕택에 여기 있다고 빛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하늘 한쪽에 유성이 지나치고 가는 것이 보였다.

“어, 유성이다.”

금희가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인영이 말했다.

“진짜네.”

인영이 다시 말했다.

“아, 아깝네. 소원 빌어야 되는데.”
“소원?”
“그런 거 있잖아. 유성 떨어지는 동안에 소원 빌면 이뤄진다.”

금희가 물었다.

“그런 거 믿어?”
“믿지는 않아도 뭐든 빌어서 안 좋을 게 있나?”
“’빌어먹을’ 이런 말은 안 좋은 느낌이잖아.”
“어, 저기 또 유성이다.”

이번에는 인영이 하늘 한쪽을 가리켰다.

“오늘 유성 떨어지는 날인가? 유성우 오는 날, 그런 거 있잖아.”
“그러면 유성 또 떨어질 수도 있겠네.”
“그러면 소원 빌 거 미리 준비해 놔야겠다.”
“정말로 소원 빌 거야?”

인영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희는 웃었다.

“유성에 소원 비는 거 어디서 건너 온 풍습인지 모르겠어. 원래 유성은 좀 안 좋은 의미였단 말이야.”
“아, 그러니까 무슨 재난의 징조 이런 거였나?”
“비슷한거지. 옛날에는 유성을 천구라고 불렀는데.”
“천?구? 특이한 이름이네. 영구, 준구, 병구 이런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천구는 좀 특이하네.”
“그게 아니고, 하늘의 개라는 한자로, 옛날에 중국에서부터 유성을 천구라고 했단 말이야.”
“아, 그러니까 유성이 하늘을 날아 다니는 강아지, 하늘 세상에 사는 개란 말이야?”
“그런 뜻으로 한 말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일본에서는 천구가 이상한 괴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정말로 유성을 자세히 보면 꼬리도 있고 발도 있는 개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는 전설도 있었던 것 같고 그렇긴한데.”
“그런데 개가 뭐 그렇게 안 좋은 의미일 게 있나?”
“’개같네’ 이러면 좀 안 좋은 느낌이잖아.”
“넌 꼭 욕으로 뭔가 설명을 하네.”
“하여튼 고려시대 때는 천구에 사람을 제물로 바칠 거라는 헛소문이 돌아서 사람들이 막 도망치고 그랬던 적 있고 그랬데. 확실히 안 좋은 느낌이잖아.”
“에이, 뭘. 천구, 하늘 강아지. 내 생각에는 그대로 그냥 좋은 느낌인데.”
“어, 또 유성!”
“아, 소원 비는 거 또 깜빡했네. 진짜 이제 소원 미리 생각해 놔야지.”

인영은 금희를 보면서 무엇인가 생각했다. 금희가 인영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미리 준비해도 유성이 떨어지는 그 짧은 시간에 소원을 빌 수가 있을까?”
“엄청 빨리 말하면 되지.”
“유성이 우주에 있는 돌덩이나 쇳덩이 같은 게 지구로 떨어지면서 불타는 거 잖아. 그러니까 떨어지면서 불타는 게 아주 순간이라고. 소원을 빌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좀 빛이 보이는 거는 사실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잔상이 남는 거야. 진짜 유성이 그렇게 오래 진하게 보이는 게 아니고, 내 눈에, 내 생각에 워낙 밤하늘이 컴컴하니까 잠깐 빛나는 빛이 잔상으로 크게 오래 남는 것처럼 보이는 거니까.”

금희는 말을 멈추었다. 조용해졌다. 바람 부는 공기가 밤하늘과 두 사람 사이를 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인영이 다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만큼 진짜 초고속으로 빨리 소원 말하면 되잖아.”

금희는 인영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잠시 말 없이 있더니 인영이 다시 말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 말은 좀 불리한 것 아니냐? 한국 말은 말이 길잖아. ‘제가 갑부가 되게 해 주십시오’ 너무 길잖아. 그렇게 치면 외국어로 소원 비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겠다. 진짜 짧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라 말로 소원을 빌면 정말정말 짧은 그 유성 떨어지는 순간에도 소원을 빌 수가 있을건데.”
“그거 아이디어 괜찮네. 아예 네가 언어를 하나 만들면 어때? 그래서 막 한 음절로 말해도 온갖 뜻을 다 담고 있는 말을 만들어서 그 언어로 소원을 빌면 되잖아.”
“좋네.”

인영은 일부러 과장해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 만드는 소원 빌기 전용 언어로 ‘뾱’ 이라고 말하면, 그 말뜻은 한국어로는 사실 ‘많은 돈이 나한테 생기면 좋겠다’라는 뜻인 걸로 하고. 이제 유성이 떨어지면, ‘뾱’이라고만 말하면 그 소원을 비는 게 되는 걸로 하자.”
“뾱이 어떻게 해서 ‘많은 돈이 나한테 생기면 좋겠다’가 되는데?”
“ㅂ은 돈, ‘ㅛ’는 나, ‘ㄱ’은 생기면 좋겠다라는 뜻이라고 치고.”
“그러면 ‘뵥’이잖아. 아까는 ‘뾱’이라면서?”
“’뵥’은 그냥 돈이 생기면 좋겠다, ‘뾱’은 많은 돈이 생기면 좋겠다.”

금희는 ‘뵥’, ‘뾱’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금희는 다시 인영을 보았다.

“그 소원 빌기 전용 언어에 다른 말은 또 뭐 없어?”

인영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어디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지 또 찾는 것 같았다.

“숑- 뭐 이런 것도 있고.”
“숑은 뭔데?”

인영은 대답을 하기 전에 잠깐 멈추었다. 인영이 말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네가 알아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 유성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숑-”

인영이 말했다. 유성 둘이 연달아 더 떨어졌다.

“숑- 숑-”

밤하늘을 보며 기다리고 있으니, 유성은 다시 더 떨어졌다. 금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쑝- 쑝- 쑝-”

인영은 금희를 돌아 보았다. 금희는 인영을 보고 있었다.

인영은 금희의 그 얼굴을 바라 보았다. 유성이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눈동자에 빛이 반짝거리며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쑝은 무슨 말인데?”

금희가 대답했다.

“내가 너를 많이많이 좋아하는 마음을 네가 알아 줬으면 좋겠다.”

금희도, 인영도 그 후로 평생 유성우에 대한 소식만 보면 그날 밤을 생각했다.


3.
인영이 몇 주일 전에 새벽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유성우가 있다는 소식을 천문학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일기예보를 보면서 몇 시가 될 지, 정말로 유성우를 잘 볼 수 있을 지 하루하루 지나갈 때 마다 따져 보았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며 길을 걷던 금희와 인영은 창 바깥이 잘 보이는 커피 가게의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밤하늘이 잘 보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흐린 하늘은 계속 흐린 그대로였다. 몇 시까지만 기다려 보자, 그렇게 서로 말하고는 앉아 기다렸지만 둘 다 지쳐 있었다.

시간을 봐서는 이미 유성이 쏟아지고 있을 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직장 사람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은 인영은 전화기를 들고 거기에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인영은 창 바깥을 보고 있다가 잠시 금희의 표정을 넘겨다 보았다. 전화기를 보고 있는 금희의 얼굴은 어떨 때는 밝아지기도 했고, 어떨 때는 어두워지기도 했다.

오랫 동안 말 없이 있다가 인영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주 사업 홍보를 위해서 일부러 유성을 만들어 주는 걸 해 보면 어떨까? 우주선을 띄운 다음에 일부러 거기서 유성처럼 보일만할 걸 떨어뜨리는 거야. 탈 때 밝게 보이게 마그네슘 같은 거 섞어서. 어떻게 성분을 잘 조절하면 정말로 오래오래 불 타는 그런 걸 떨어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정말로 3초, 4초 동안 불타서 소원을 다 빌 수 있을 만큼 오래 빛나는 유성을 만들어 보는 거야. 오래 오래 사라지지 않는 유성. 잔상이 아니라 정말로 오래 오래 타면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버티고 또 버티는 유성. 안 타고 남으며 버티는 물질을 개발해서 우주선에서 떨어 뜨리는 거야. 우주선에서 만들어 주는 유성은 정말로 여러분의 소원을 끝까지 들어 드립니다. 이런 식으로.”

금희는 고개를 돌려 인영을 쳐다 보았다. 얼마 후 이번에는 인영에게 어디선가 연락이 왔다.

“아, 잠깐만 전화 통화 좀 하고 올게.”

인영은 전화기를 들고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인영은 건물 옆 길가에서 배달원을 만났다. 배달원은 사람이 쓰고 입을 수 있는 인형탈과 인형옷을 건네 주었다. 전해 준 3차원 모델 자료를 받아서 3차원 프린터로 출력해 주는 업체에서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인영은 그것을 받아 들고 가서, 옆 건물에서 뒤집어썼다. 그러고 나오는 사이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소리 없이 거리에 온통 퍼져서 세상 끝까지 하얀 얼음이 하늘을 날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인영은 강아지 모양의 인형처럼 되었다. 강아지는 날개가 달려 있고 꼬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모양이 달려 있었다. 하늘 강아지 모양이었다.

인영은 그 하늘 강아지 모양으로 걸어 나와, 다시 커피 가게 쪽으로 갔다. 유리 안에 전화기를 보고 있는 금희의 모습이 보였다. 금희는 웃고 있었다. 금희는 어디인가에서 연락을 받아 전화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인영은 금희의 그 얼굴을 바라 보았다. 유성이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눈동자에 빛이 반짝거리며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인영은 창문을 두드렸다. 금희는 창바깥을 보았다. 금희는 하늘 강아지 모양을 보고 놀랐다. 인영이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금희는 내리고 있던 눈이 함박눈이 된 것을 보고도 놀랐다. 하얗게 덩어리진 눈송이는 거리 불빛에 반짝거리며 계속 사방에서 내리고 있었다. 금희는 하늘 강아지 모양을 말 없이 지켜 보았다. 아주 조금씩 표정이 변하는 것 같았지만 잘 알아 보기는 어려웠다.

금희는 가게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인영 앞에 금희는 섰다. 인영은 고개를 가까이 해서 금희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런데 금희는 인형 탈 때문에 뭐라고 말하는 지가 들리지 않았다. 금희는 얼굴을 하늘 강아지 인형탈 옆으로 바짝 붙였다. 금희의 귀에 인영의 목소리가 답답하게 갇혀 들렸다.

“계속 기다렸는데 결국 진짜 하늘 강아지는 하나도, 잠깐도, 못 보네. 그래도.”

그 뒷부분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신에 이렇게 하늘 강아지 모양 인형을 쓴 자신이 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고 금희는 생각했다. 인영은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런지 어떤지는 웃고 있는 모습의 인형탈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둘은 잠시 같이 걸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번쩍하더니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그리고 천둥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한 큰 소리가 들렸다.

놀란 금희와 인영은 뒤를 돌아다 보았다. 뒤를 보니, 보도 한 가운데에 덜 타고 남은 유성의 잔해가 지상까지 떨어져 블록을 깨고 한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주먹 만한 크기의 운석이었다.

금희와 인영은 사흘 뒤에 헤어졌다.

그날 떨어진 그 운석은 국립과천과학관 전시실에 지금까지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 2019년, 명동에서

 

댓글 2
  • 너울 19.02.28 18:55 댓글

    금희란 이름이 자주 눈에 띄네요. 악마 변호사 마금희, 말버릇과 자세의 우아함에서 송진혁과 금희...

  • 너울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19.02.28 19:18 댓글

    저는 옛날 오페라 가수 이름에서 등장인물 이름을 따올 때가 많습니다. 인영이나 금희도 그런 사례인데, 다른 이야기에 나온 금희가 인상적일 떄가 몇 번 있어서 아무래도 기억에 잘 남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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