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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2012년 거울에 연재 되었다가 출간으로 삭제 되었던 글을, 출판사와의 계약 종료에 의해 다시 재공개하는 것입니다.)

은하수 풍경의 효과적 공유

곽재식

1.

미영의 얼굴색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미영의 그 얼굴을 보고 양식이 말했다.

“얼굴 빨개졌네요.”

“뭐? 내가 뭘?”

미영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분명하게 할 수는 없었다. 미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에 나타난 숫자를 여러 번 다시 새로 고쳐 가면서 다른 자료로 전환해서 보았다. 미영을 보던 경리부장은 측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자료로 돌려 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장님. 그거 확실한 거고요. 그게 G581E 행성 거래국 결정 가격입니다. 다행히 거래 중단 조치 때문에 아주 가격이 바닥으로 내려앉지는 않았어요.”

“지금, 바닥이냐 아니냐가 문제예요? 하루아침에 집값이 4분의 1이 됐는데.”

미영은 그 붉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서는 미영이 화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던 양식이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미영에게 분명히 들리는 크기로 혼잣말을, 그렇지만 정말로 혼자 있었다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을 말을 했다.

“그러게, 30% 올랐을 때 팔아야 한다고 보는 사람마다 그랬는데. 33%까지만 채우겠다고 그렇게 혼자 고집을 부리더니. 이게 뭐야.”

미영은 그 말을 듣고 양식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미영은 이제 누가 봐도 화를 내는 말투로 말을 했다.

“김 이사. 참 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지금 회사 재산이 이렇게 크게 날아갔는데, 뭐 우리가 망한 게 고소해서 즐겁다는 거야, 뭐야.”

양식은 미영이 그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에 놀랐다. 게다가, 돈 날린 자기 회사 사장에게 너무 심한 말투로 말했나 후회되어 양심의 가책도 조금 느꼈다. 그래서 양식은 정말 작은 목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작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의 내용은

“고소하긴요. 저라고 이 회사 망하는 거 보고 싶겠어요. 저도 여기 투자한 돈이 얼만데요. 그런데, 상황이 그렇잖아요. 이거 처음부터 말리는 사람 많았어요. 여기 G581E 행성에는 아파트가 빈집만 수천만 채 있는 덴데, 거기서 어떻게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 생각을 하냐고. 다들 그랬잖아요. 그런데 투자했다가 요행 30% 올랐으면 그쯤 해서 팔아야지. 그거 3% 더 남기려고 버티다가 이게 뭐야. 돈만 다 날렸잖아요.”

였다. 당연히 미영은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때는 확실한 방법론이 있었다니까.”

미영은 ‘확실한 방법론’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하다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곧 미영은 다시 양식에게 따졌다.

“그런데 어쩌냐고. 김 이사는 맨날 ‘이건 우리 사업의 진정한 목표가 아니잖아요’ 이런 소리만 계속 하면서 돈 벌 궁리는 뭘 했어? 그러면 우리는 뭐 먹고 사는데.”

“아무리 그래도 부동산 투기는 정말 아니죠.”

미영은 양식의 대답을 듣지도 않았다. 미영이 다시 말했다.

“나라고 무슨 회사를 장난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요. 여기 무슨 애들 모여서 회사 놀이, 사무실 놀이 장난하는 데인가?”

양식은 아무리 애들이 할 놀이가 없어도 의사 놀이, 선생님 놀이도 아니고 회사 사무실 놀이를 할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영의 휘몰아치는 분노와 거기에 이어진 회한과 신세 한탄이 뒤섞여, 사무실 가운데에는 작은 수류탄 투척 훈련장이 생긴 듯한 감흥이 퍼져 나갔다.

미영의 열기가 서서히 식으면서 소리치는 말들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양식이 미영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일단 이날의 사건은 맺어졌다. 사실 죄송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번 달 월급은 부동산 투자 수익금으로 댄다는 미영의 꺾인 희망은 계속해서 미련으로 남아 있었다. 미영은 이번 달도 적자를 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곳저곳 인터넷을 뒤져 아무 일거리나 잡아냈다.

“이거 하자.”

양식은 미영을 쳐다보았다. 양식은 ‘이건 우리 사업 분야하고 맞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런 일은 우리 회사가 할 일이 아닌데’ 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분위기 때문에 차마 말을 할 수는 없어 그냥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영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양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양식이 말하지 않고 미영이 혼자 상상해서 생각하니, 괜히 그 생각이 더 와 닿아서, 미영 스스로도 이게 뭐하는 짓인지 싶었다.

2.

미영과 양식이 일거리를 찾아 우주선을 타고 날아간 곳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무풍 행성이었다. 강물과 공기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사막 지역이 많고 바람이 거의 전혀 불지 않는 곳이 넓어서 붙은 이름이었다. 행성에 접근하면서, 행성 안내 프로그램이 밝은 안내 로봇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이 행성에 대한 소개 내용을 우주선 화면에 보여 주었다. 미영과 양식 두 사람은 말없이 그 안내 로봇이 나오는 화면만 볼 뿐, 서로 대화가 없었다.

“저희 행성은 건조하면서도 바람이 없는 천혜의 자연 환경을 잘 살려서 수많은 수집품들을 보관한 박물관, 미술관이 많이 건설되어 있습니다.”

화면의 안내 로봇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찾아 가는 곳도 그런 미술관 중 하나였다. 무풍 행성의 한 미술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같이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먹하게 그림들을 구경했다. 미영은 인상파 기법으로 그린 우주 전함의 군인들 그림을 눈여겨보았고, 양식은 비잔틴 모자이크 그림 느낌을 넣었지만 수묵화로 그린 화성의 계곡 그림을 좀 더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림들을 구경하면서는 양식이 점차 한 마디, 두 마디 미영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미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가, 약속한 장소에서 미술관의 제2실 관리부장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관의 관리부장을 만난 장소는 ‘고미술 전시실’의 마지막 회랑 구석에 있는 〈안드로메다 전도〉라는 가로 길이가 12미터짜리 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나선형 모습을 멀리서 본 모습을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이었다. 미술관 관리 부장이 미영에게 말했다.

“사장님께 부탁 드릴 일이, 바로 이 그림 그린 화가를 찾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듣고 미영이 물었다.

“그린 사람을 모르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그 화가라는 사람이 저희 미술관에 몰래 들어와서 그림을 하나 훔쳐서 냅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훔쳤다고요?”

“예. 저희 미술관에 그림을 판매한 화가라서 미술관 평생 출입권이 발급되어 있는데, 그걸 이용해서 미술관 소장품 저장고에 들어가서 그림을 훔쳐 갔습니다.”

양식이 끼어들어 관리부장에게 말했다.

“절도 사건이면 경찰에서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런 쪽 일에 전문은 아니…….”

양식은 계속 말을 하려다가 미영의 눈치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관리부장은 두 사람 사이의 눈치를 모르고 그냥 대답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화가를 붙잡아 달라는 것은 아니고요. 손해액이 크지는 않거든요. 어차피 귀한 그림은 금고에 보관되어 있어서 그 화가가 손도 못 댔으니까. 그냥 보험사에서 보험금 타려면 ‘분실한 물건을 되찾기 위해 성실하게 찾아봤다’는 점을 증명해야 되는 게 있어서, 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장소에 여러분들이 한번 찾아가서 살펴보시기만 하고 확인서만 한 장씩 써 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 정도라면 저희도 못 할 게 없죠.”

미영이 말했다. 관리 부장이 덧붙였다.

“두세 군데 정도 둘러보고 오시면 되는데요. 이게…… 비공식적인 말씀입니다만, 저희 미술관 관장님의 형님이 보험회사 사장입니다. 그래서 그쪽에 잘못 보이면 안 되어서 좀 까다롭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두세 군데 다 돌아보시고, 이게 적어도 이번 주말까지는 확인서 만드는 걸 다 끝내야 됩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연락 드린 겁니다. 대우주 고속 항해 잘 되는 우주선 갖고 계시다고 들어서요.”

양식은 딴전을 피우듯이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모습을 붓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있었다. 미영이 물었다.

“맨 먼저 가야 하는 곳이 어딥니까?”

3.

화가를 찾아 처음으로 미영과 양식이 간 곳은 화가와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는 어느 핵융합 연료 공장 주인의 저택이었다. 공장주라는 그 저택의 주인은 얼핏 겉모습만 봐서는 마흔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저택 사람들은 그 주인을 “마님”이라고 불렀다. 마님은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을 했음에도 오히려 더 어려 보이는 효과를 내도록 치장하고 있었다.

그 저택은 지구에서 멀지 않은 화성 근처 소행성대에 있는 R80이라는 소행성에 있었는데, 소행성 전체가 모두 마님의 저택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미영은 저택 입구에 우주선을 착륙시켰다. 미영이 말했다.

“돈이 많으면 하늘 파랗고 바다 넓고 풀밭에 꽃 핀 그런 데다가 집 짓고 살고 싶지 않나. 왜 이런 삭막한 소행성을 집으로 개조해서 살지? 건물 밖으로 나가면 공기도 없어지고 중력도 낮은데.”

양식은 미영과 서먹함을 없앨 기회라고 생각하고 반갑게 대답했다.

“돈 쓰는 유행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중세 때는 소 많고 돼지 많은 넓은 농장이 앞에 펼쳐진 집에서 사는 게 부자들 모습이었지만, 20세기 말에는 도심 아파트에 집들이 수백 채씩 쌓여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다가 한구석 차지하고 땅바닥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데 사는 게 부유한 거였잖아요. 요즘은 또 이렇게 행성 하나를 통째로 집으로 개조하는 게 유행이다 보니까.”

저택의 마님은 좀체로 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화가의 소식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있는지 오히려 되물어 보는 것이 몇 가지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미영과 양식이 요리조리 돌려 물어본 끝에, 마님이라는 사람은 화가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이 마님은 젊은 시절 텔레비전 방송국의 출연자였다. 노래를 부르거나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고, 작은 대담 프로그램 하나를 진행했는데, 꽤 유명한 사람들을 잘 섭외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특히 대담 쇼 중간에 나오는 코미디 시간이 인기가 많아서 진행자가 여러 명 바뀌는 동안에도 적당한 인기를 오래 유지했다.

마님은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화가가 대학생일 때 그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바람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 마님이 말하기로, 화가는 그때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던 소위 재능 넘치는 젊은 화가로, 달 기지 주변에서는 꽤 유명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달에서 보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주 긴 유행이었기 때문에, 달에 유명한 미술 대학들이 많이 있었고, 화가도 바로 그런 달에 있는 미술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화가를 ‘천재 같다’고들 한 이유는, 그가 그다지 힘들게 노력을 하거나 대단한 수련을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물감과 붓을 사용하는 재주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화가는 보통 사람이 자기 손가락 끝을 움직이고 자기 혀를 움직여 말을 하듯이, 생각하는 그대로 붓끝을 움직이고 원하는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손을 움직이고 손에 쥐여 있는 붓이 움직이고 붓의 털에 달린 물감이 발라진다는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직접 움직이는 몸동작에서 저절로 그림에 색상이 입혀진다는 느낌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감각이 있었다.

화가는 아주 어릴 때 받은 유전자 조사와 뇌세포 측정 결과, 그림 그리는 데 재주가 있다는 결과를 받은 적이 있었다. 화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화성의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돈을 모아 어릴 적부터 화가에게 좋은 미술 교육을 받도록 했다. 화가의 부모는 다행스럽게도 전쟁 공채에 투자했다가 돈을 많이 벌어서 어느 정도 살림이 넉넉해졌는데, 그런 후에도 돈을 아껴서 화가가 미술 교육을 잘 받을 수 있도록 광산 일을 그만두지 않고 검소하게 지냈다.

화가는 무난히 명문 미술 대학에 합격했고, 화제가 되는 그림을 그때부터 그려 내기 시작했다. 화가는 대학생 시절 이례적으로 명성을 빨리 얻었는데, 그 때문에 대학생 치고는 꽤 넉넉할 정도로 돈을 모으기도 했다. 곧 대학생인 화가는 달, 화성 지역에서 재기 발랄한 천재 화가로 이름을 얻었고, 특히 외모 또한 훤칠하게 잘생긴 편이었기 때문에 잡지 기사나 뉴스 같은 곳에 소개될 때마다 화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다.

화가는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고, 자신의 팬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동경과 사랑을 마음껏 즐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화가는 더 좋은 그림들을 많이 그렸고, 더 많은 돈을 벌었다. 태양계 최고 수준의 화가들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을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얼마든지 더 오래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높여 갈 수 있는 젊은 나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화가는 충분히 부유한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었다. 집안도 넉넉했고, 건강하고 잘생긴 모습의 젊은 남자가 뛰어난 재능까지 갖고 있었으니, 그때 유행하던 표현대로, ‘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내려다보고 질투를 느낄 만한’ 사람이었다고 할 만했다.

화가가 마님이 진행하는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대담 프로그램의 내용 자체는 별 대단한 것이 없었다. 진행자인 마님이 좋아하는 영화배우나 감명 깊게 읽은 책 같은 것을 물어보면 출연자인 화가가 대답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중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과목은 당연히 미술이실 테고, 싫어했던 과목은요?” 하고 물으면, 화가는 “수학이요. 어휴, 수학은 정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서요.” 하고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고, 진행 요원의 신호에 따라 관객들이 같이 웃어 주는 식이었다.

사실 화가는 수학을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았고, 수학 성적은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화가는 잘생겼고, 부잣집 아들이고, 공부도 잘한다는 식으로 너무 추켜세워 올려 주기만 하는 것이 싫어서, 나름대로 평범하고 다 같이 공감할 만한 내용을 말하기 위해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다. 화가는 방송을 준비하면서 왔다갔다 하는 영화배우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너무 똑똑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망하기만 기다리는 사람들 생긴다고. 그래서 허술한 면, 모자란 면도 보이는 게 좋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때 화가가 생각한 것이 ‘수학은 너무 어렵고, 적성에 안 맞고, 싫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그림을 열정과 광기에 가까운 영감을 불어넣어 만들어 내는 화가에게 수학의 세계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기에, 보고 듣는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느껴질 것 같기도 했다. ‘수학만은 견딜 수 없었다’는 내용으로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 보이면서 친근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화가의 이야기에 연결되는 재미난 농담을 옆에 서 있던 코미디언들이 몇 마디 거들어 주기도 해서 나쁘지 않은 우스운 말로 연결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화가와 진행자였던 이 저택의 마님은 만났고, 마님이 방송 끝나고 자기 의상의 색채에 대해 봐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어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울려 다니면서 신나게 놀았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 두 사람의 방탕은 달 기지 근처에서는 소문난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뜬소문으로 도는 온갖 쾌락과 방종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는 일에 도전했고, 그러던 끝에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상상한 이야기 속의 쾌락과 방종의 한계를 넘어서서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뜬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주기까지 했다. 그러던 끝에 화가가 상상을 넘어서는 방탕함과 어처구니없는 깊이로 오락 추구에 도전하자 마님은 배신감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 향락에 빠져드는 길을 보여 준 사람은 마님 자신이었지만, 그곳에 깊숙이 들어가서 나오기 어려울 만큼 나뒹굴도록 끌어들인 사람은 화가였던 것 같다고 마님은 이야기했다.

나중에 미영과 양식이 조사해 온 이야기를 다 들은 미술관의 관리부장은 “그래도 그 무렵쯤. 대학을 중퇴하고 나오던 때 전후해서가 그 양반 최전성기 아닌가 싶습니다. 제일 비싸게 팔린 그림도 그때 나왔고요.”라고 말했다.

화가는 이미 보통의 미술대학 학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고, 좀 더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서는 학교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해 준 다른 ‘예술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화가의 부모는 그래도 대학은 졸업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면서 화가와 조금 불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화가는 부모를 설득했다. 화가는 이미 부모보다 자신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 밑바탕에서부터 믿고 있었다. 그런 화가를 보고, 부모들조차 그 믿음에 자연히 끌려들었다. 부모는 탐탁잖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부모들도 화가의 결정이 결국은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가는 얼마 안 있어 부모와 연락을 끊고 더 먼 곳,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떠나갔다. 이유는 화가의 결혼 때문이었다. 화가의 부모에게는 화가가 어릴 때부터 내심 마음에 두고 있던 화가의 배필감이 있었다. 부모는 화가가 자신들처럼 피로를 참고 모멸감을 견디고 통장 잔고와 대출금에 초조해하는 인생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지표로서, 좋은 결혼을 이룩하기를 바랐다. 부모가 목표로 삼은 배필은 두 사람이 일하고 있던 화성 광산 주인의 딸이었다. 화가 역시 어릴 때부터 부모의 그런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화가는 광산 주인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화가는 명성을 얻고 부유해지면서 그런 생각을 싫어하게 되었다. 정략 결혼이라니. 화가는 누구보다 멋지게, 도전적으로 살고 있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에 그런 케케묵은 단어가 끼어드는 것이 역겹게 느껴졌다. 자기가 그린 모든 그림에 ‘정략 결혼한 사람의 그림’이라는 워터마크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화가의 부모는 부모대로, 화가가 방송 진행자와 어울려 다니며 별별 일들로 화제 거리가 된다는 소문을 얼핏 듣고 속으로 꽤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다 화가와 방송 진행자가 헤어진 후에, 겨우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고 안심하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광산 주인의 딸 이야기를 화가에게 꺼냈던 것이다.

하지만, 방송 진행자와 헤어진 순간이 광산 주인의 딸과 결혼하는 바람을 잡기에 좋은 때라는 부모의 판단은 극히 잘못된 것이었다. 화가의 마음속은 방송 진행자에게 이별 당한 후에, 남녀 관계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화가는 정략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부모가 매우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겨우 단초만 살짝 선보였는데도, 그것을 자신의 사랑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패배의 무거운 상징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화가는 부모에게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고, 그 미묘할 것도 없지만 미묘하다고들 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부모는 억울한 마음에 화를 내는 화가를 꾸짖었다. 결국 화가는 자신이 살던 행성과 자신이 살던 태양계와 자신이 살던 은하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화가는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가는 이민 우주선을 탔다.

화가의 그림 중에 가장 비싼 값에 팔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안드로메다 전도〉는 바로 이 시기에 그린 것이다. 화가는 마지막으로 마님을 다시 찾아가 같이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같이 떠나자고 청했다. 그러면서 마님에게 선물로 준 것이 바로 〈안드로메다 전도〉라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보통 수백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어서 그것이 은은한 빛을 뿜는 은하계의 모습을 그릴 때에는 캔버스에 유화로 그리는 것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광원 설정과 확산 효과를 활용해 그리는 것이 표현이 정확하고 더 아름답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화가는 물감을 이용해서 붓으로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은은히 퍼져 나오는 빛과 수백억 개의 별들이 모인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화가는 그렇게 그리면서도 여느 컴퓨터 그래픽 계산보다도 오히려 더 그럴듯한 모습을 만들어 냈다. 당시에는 캔버스에 물감 질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컴퓨터 그래픽 그림보다 더욱 선명하고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기교도 관심을 끌었거니와, 커다란 그림에 가득 차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모습이 물감으로 표현된 그 운치가 압도적인 면도 있었다.

마님은 화가의 제안을 거절했다. 화가는 혼자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떠났고, 마님은 〈안드로메다 전도〉를 후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다. 마님이 화가를 떠난 것도, 화가의 마지막 제안을 마님이 거절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화가가 자초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마님은 방송은 그만두었지만 여러 가지로 자신의 특기를 살려 재산을 모으기 위해 힘을 기울였고, 얼마 전에는 소행성 전체를 차지하는 저택을 사들일 밑천을 마련할 수 있었다.

4.

미영과 양식이 화성 근처 소행성을 떠나 찾아간 곳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행성에 있는 대도시 몇 곳이었다.

미영과 양식이 안드로메다 은하계에서 찾는 사람은 지금 오리고기집 사장이 되어 있는 한 중년 남자였다. 미술관 관리부장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머물던 시절에 어울리던 사람들이 많기는 했는데, 그때 가까이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에 지금 연락처가 분명히 잡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양식은 유난히 열심히 일해서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기 전에 오리고기집 사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미영과 양식은 그 오리고기집을 찾아갔다. 그곳은 19세기 터키 식으로 꾸민 커피가게 모양에 물담배를 피우며 반쯤 드러누워 있을 수 있는 푹신한 바닥이 훌륭한 곳이었는데, 동시에 지구의 오리 맛과 똑같다는 인조 오리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가게였다.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사장이 아니라, 고대 인도식 복장을 입고 일하고 있던 그 가게의 종업원이었다.

“사장님은 지금 본점에 가셨거든요.”

“그러면 여기가 본점이 아니라 분점이에요?”

“예, 저희 본점은 ‘아름다운꽃별’에 있습니다.”

“언제 오시는데요?”

“아름다운꽃별에 가셨으니까 빨리 오시기는 힘들 거고요.”

“빨리는 못 오신다고요?”

“예. 아름다운꽃별에는 공간 도약 우주선은 못 들어가니까요. 급하시면, 직접 그쪽으로 찾아가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두 사람은 지도에서 ‘아름다운꽃별’이라는 이름을 붙인 행성을 찾아보고 얼핏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그 행성에 왜 공간 도약 우주선이 못 들어간다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겼다. 양식은 미영에게 거기까지 가 볼지 말지 사장으로서 결정해 달라고 물었다. 미영은 일단 화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더 알아낸 것이 없으니까 가 봐야겠다고 했다. 양식은 아름다운꽃별에 대해 조사해 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꽃별이 빛나는 점으로 우주선 화면에 나타났을 때, 양식이 말했다.

“저 행성에 공간 도약 우주선이 못 들어가는 건, 무슨 위험한 장애물이나 이상한 현상이 있어서 그런 거는 아니고요. 그냥 저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공간 도약 우주선이 들어오는 걸 금지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네요.”

“왜? 왜 못 들어오게 하지?”

“무슨 정치적인 이념. 신념. 그런 거 같은데요.”

“공간 도약 우주선이 못 들어오면 자기들은 어떻게 왔다갔다 하려고?”

아름다운꽃별 사람들이 쓰는 방식은 20세기 지구에서 사용하던 것 같은 구식 로켓이었다. 거대한 탑과 같은 크기로 굉장한 빛과 열을 내뿜으면서 날아 올라가던 미사일 모양의 우주선들을 이용해서 이 행성 사람들은 가까운 우주 공간을 돌아다녔다. 이 행성에서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가면, 커다란 우주정거장이 하나 있어서 그곳에서 다른 행성에서 오는 공간 도약 우주선을 갈아타게 되어 있었다.

미영은 옛 20세기 우주왕복선 모양의 우주선이 날아온 것을 보고 놀랐다.

“저런 걸 타고 다닌다고? 저런 걸 타고 다니니까 한 번 들어가면 빨리 못 나오지.”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두 사람은 우주왕복선 모양의 구식 우주선을 타고 아름다운꽃별 행성으로 날아 들어갔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구조와 설계로 되어 있는 구식 우주선이 너무 낯설어서 우주선이 갑자기 뻥 터지면서 산산조각이 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두 사람은 둘 다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계속 서로에게 “괜찮을 거예요. 여기 사람들은 항상 이거 타고 다니잖아요.” 등의 말을 나누었다.

아름다운꽃별에 착륙한 뒤에 다시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미영과 양식은 오리고기집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미영은 오리고기집 주인에게 화가를 아냐고 묻고, 그 화가가 그림을 훔쳤다고 이야기하자 오리고기집 주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걔가 그렇게까지 됐나요?”

양식은 오리고기집 주인에게 화가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었다.

오리고기집 주인이 설명한 이야기의 요점은 화가가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와서는 정치인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주인 자신은 화가가 주변에 거느리고 있던 비서진 중에 한 명의 부하였다고 소개했다. 미영이 물었다.

“정치를 하려고 했다고요? 무슨 계기가 있었어요?”

“뭔 계기가 있었겠어요. 그냥 욕심이지. 사람이 지금 갖고 있는 건, 그걸 갖고 있다고 생각을 잘 안 하잖아요.”

“예?”

“우리 같이 보통 사람들이 걔 나이 때 바라는 건, 학점 좀 잘 따 보자. 연애 좀 해 보자. 졸업하고 나면 밥 안 굶고 집세 걱정 안 하고 살 만한 직장 좀 얻어 보자. 그런 정도잖아요. 그런데 걔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 말을 듣고 양식은 미영을 바라보았다. 대학 시절 미영 역시 ‘우리가 고민하는 정도의 문제’는 고민하지 않고 살던 사람이었기에 양식은 미영이 기분 나빠 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영의 표정이나 반응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다만, 미영은 양식이 그렇게 쳐다보는 눈을 보고도 아무 눈짓도,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화가에 관한 이야기를 그저 계속했다.

“그런데 그 화가는 학교는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 연애도 좀 심하게 많이 했지, 평생 먹고살 걱정 안 할 만큼 돈은 벌었지. 그렇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 자기 신세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는 비참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것만 내가 해내면 이 비참한 신세에서 벗어날 텐데’ 그런 생각을 한다고요. 세상이 썩었기 때문에 자기보다 훨씬 못한 다른 사람들이 잔꾀나 운으로 더 잘 산다는 생각 해 본 적 있어요? 똑같죠 뭐. 걔도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정치를 하기로 했다고요?”

“그런 거죠. 먹는 걱정 없을 만큼 돈 모은 사람들은 좋은 동네에서 좋은 우주선 타고 다니면서 사는 인생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고. 좋은 동네에서 좋은 우주선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OR급 보육 로봇을 사서 장만해 놓고 아이들 키우는 데 걱정 없이 살면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고. 애들 키우는 거 보육 로봇한테 맡겨 놓은 사람들은 안 아프고 오래 젊게 살 수 있게 유전자 시술 받는 사람들 세상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거고. 뭐 그런 거죠. 그런 이야기 들어 봤죠? 하기야, 이 은하계에서 진짜 부자들은 일부러 이름 날리려고 전쟁 난 항성계에 자기 우주선 타고 가서 전투하는 걸 고상한 취미로 삼기도 한다잖아요. 절대 죽을 걱정 없게 방어 기능 끝내주게 좋은 우주선 장만해가지고.”

미영은 계속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리고기집 주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인제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 없는 사람이면 그런 생각 하나 봐요. 그냥 그렇게 저렇게 살면서 시간 끌다가 죽는다…… 그러면 너무 심심하고 허무하다. 뭔가 보람찬 일 멋있는 일 없을까? 이런 거요. 걔는 그런 생각 한 거죠. 이 사회를 한 단계 더 발전한 세상, 한 단계 더 멋진 세상으로 바꾸는 영웅이 되자. 그래서 다들 역사책을 보면서 그 이름을 외우는 사람이 되자. 그런 걸 정말 간절하게 하고 싶어 한 거죠. 가끔 정치인들 중에는 되게 유명한 사람들 많고 하니까. 자기가 그 사람들보다 못할 게 뭐냐고 생각한 거죠. 정치인들 방송이나 화면 같은 데서 보면 되게 멍청해 보이잖아요. 진짜 한심해 보이고.”

“그림은 더 이상 아무리 더 그려 봤자 더 얻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겁니까?”

“걔가 그런 생각까지 했는지는 모르겠고. 하여간 그래서 걔가 여기로 찾아온 거죠.”

미영이 물었다.

“도약 항법 반대 운동으로 정치 인생을 시작하려고 아름다운꽃별에 왔다면, 도대체 언제 도약 항법 반대 운동에는 관심이 생겼던 걸까요?”

그 말에 가게 주인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가게 주인이 말했다.

“관심이 있었기는. 여기 반대 운동 하러 온 사람 중에 관심 있어서 온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요? 맨날 여기저기 방탕하게 싸돌아다니면서 살던 걔가 도약 항법 반대 운동에 무슨 관심은 관심이 있었겠어요.

뻔하죠. 걔도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정치인으로 등장해 보려고 적색거성당이나 성운당 같은 데 연락해 봤겠지. 행성 의원으로 공천해 달라고 줄도 대고 돈도 집어 주고 했겠죠. 그런데 어디 그런 데가 만만한가. 그 양반보다 먼저 줄 선 별별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쌓여 있다고요.”

“그래도 나름대로 유명한 화가였잖아요.”

“지구 근처에서나 유명하지 뭘. 아니 뭐 안드로메다에서 유명한 화가라고 해도, 혹시 총리 자리 정도 차지하고 있는 사람 눈에 띄게 유명해 보이면 모를까. 그런데 정치인들 중에 미술에 그렇게 깊게 관심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니까 정치인 되려고 그 양반이 여기 저기 정치자금도 많이 대고 기부도 엄청 하고 다녔는데 잘 안 됐어요. 그러다 보면 괜히 돈만 대 주고 아무 자리도 이름도 못 얻고 이용만 당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고요. 몇 군데 다니면서 몇 번 그렇게 하다 보면 차라리 여기 같이 도약 항법 반대 운동 단체 같은 데 찾아가는 게 낫겠다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가게 주인은 도약 항법 반대 운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도약 항법 반대 운동은 몇 십 년간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 온 꽤 특색이 강한 시민 단체들의 활동이었다. 이 도약 항법 반대 운동의 시작에 대해서 별별 긴 설명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정확히 따지자면, 한 TV 방송국에서 ‘알기 쉽게 배우는 최신 과학’이라는 제목의 교육 프로그램에 아주 인기 있던 가수가 출연했던 것에 발판을 두고 있었다. 이 교육 프로그램에서 ‘M이론 금지 협약’을 소개했던 것이다.

‘M이론 금지 협약’은 현대 물리학의 한 분야인 M이론의 일부인 제5차 국소 특이점 전역화 텐서 방정식에 대해서 다 같이 연구하지 말자고 맹세하는 협약이었다. 그 이유는 그 분야에서 해답이 나오면, 그 해답을 도약 항법의 이론과 결합시켜서 우주를 멸망시키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도약 항법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묘한 기술을 사용해서 M이론에서 추론되는 지점에 공간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그것이 만유인력 상수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주의 모든 별들의 중력이 다 바뀌어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행성들의 궤도는 엉망이 되고, 온 우주의 모든 행성들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져서 모든 문명이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힘들도 손상되기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우주 전체가 몽땅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바로 ‘우주 종말’과 같은 뜻으로 흔히 쓰이는 말인 ‘초끈 붕괴 현상’이었다.

초끈 붕괴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이런 기술을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고 은하계들의 모든 정부는 뜻을 모았다. 한번에 우주 전체를 파괴해 버릴 수 있는 기술이 미치광이나 협박범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모든 학자들은 그 분야만큼은 연구하지 않겠다고 다들 맹세하고 모든 나라와 단체들이 이런 분야에는 연구 시설과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이 협약에 참여했다.

도약 항법 반대 운동은 바로 그 초끈 붕괴 현상을 일으킬 위험에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과 동물 보호 반대주의자들이 손을 잡으면서 탄생했다. 도약 항법 반대 운동은 인간들은 모두 M이론의 문제의 부분을 연구하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외계인들까지 그 맹세를 지키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연히 도약 항법을 써서 한 우주선이 어느 은하계의 외계 행성에 도착했는데, 그 외계 행성에서 수백만 년 전부터 살아온 외계인들이 이미 M이론을 모두 익힌 상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계인들은 인간의 우주선을 보고 도약 항법까지 알게 될 것이고, 두 지식을 결합해서 곧 온 우주를 몽땅 없애는 기술을 얻게 될 것이다.

외계인들이 온 우주를 없애 버릴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면, 외계인들은 다른 기술이 아무리 부족하고 우주선이 없고 군사력이 약하더라도, 여차하면 우주를 없애 버리겠다고 겁을 주면서 지구인들을 협박할 수 있다. 그 외계인들은 협박으로 지구인들에게 막대한 재물과 기술을 달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서 점점 부강해져서 마침내 지구인들을 노예로 부릴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외계인들은 우연히 실수로 우주를 없애 버리는 장치를 작동시킬지도 모르고, 혹은 어느 날 외계인 사회에 갑자기 ‘이 세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고통이다’ 따위의 사상이 유행하는 바람에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온 세상 자체를 다 없애 버리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장치를 작동시킬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최대한 도약 항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더 이상 새로운 외계 행성을 개척하는 일도 아예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 도약 항법 반대 운동의 뼈대였다. 그 사람들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미탐사 행성을 관찰하는 변경의 기지 행성에 자신들의 둥지를 틀었다. 도약 항법 반대 운동가들은 그 행성의 이름을 ‘아름다운꽃별’로 고쳐 짓고, 마침내 행성 전체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사람들은 근처에서는 공간 도약 항법을 아무도 사용하지 못 하도록 했고, 꼭 우주와 땅을 오갈 필요가 있을 때는 20세기 방식의 로켓을 사용했다.

도약 항법 반대 운동가들은 큰 주류 정치 세력으로 자라나지는 못했다. 일단 도약 항법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초끈 붕괴 현상에 대해,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추측하는 것일 뿐이지, 정말로 그런 것이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약 정말로 초끈 붕괴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우주 곳곳에 있는 외계인들의 문명들 중에서 인간이 개발한 도약 항법 기술 없이도 스스로 초끈 붕괴를 일으킬 방법을 찾아낸 외계인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런 기술을 갖고 있었다면, 우주의 역사가 벌써 100억 년이 훌쩍 넘어가니 그 긴긴 세월 동안 어느 한 외계 문명이라도 반대 운동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수로라도 한 번 그 기술을 시도해서 벌써 이 우주를 없앴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초끈 붕괴 현상이란 사실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서 M이론 금지 협약이 있는 것뿐이지, 정말로 M이론이 완성되고 도약 항법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초끈 붕괴 현상을 일으켜서 우주를 멸망시킨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던 가게 주인은 이 이야기에 반대했다. 오랫동안 아름다운꽃별에 자리를 잡고 살던 사람인 만큼, 스스로도 어느 정도 도약 항법 반대 운동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 사실 그런지 아닌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거든요. 학자들은 초끈 붕괴 현상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하는데, 만약에 초끈 붕괴 현상을 일으키면 우주가 없어질 거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우주가 없어진 다음에 어쩌다가 새로운 우주가 태어날 수도 있는 거죠. 우주 자체가 없어진 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생기기 전에 있던 우주는 초끈 붕괴 현상으로 망한 것일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우주도 나중에 누가 초끈 붕괴 현상을 일으키면 그때 없어지는 거겠죠.

비상행동대책위원장 하시는 로베스피에르 교수님 같은 분은 아예 그러더라고요. 우주의 수명이라는 것이 우주가 생겨나서 별과 행성이 생겨나는 것이 시작이고, 그러다가 그 행성에서 생물이 생겨나고 문명이 생겨나면 어느 정도 늙어서 죽을 때가 된 거고, 그러다가 그 생명체들이 시간이 흘러 기술이 발전해서 초끈 붕괴 현상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실수나 고의로 초끈 붕괴 현상을 정말로 일으키게 돼서 우주가 소멸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우주가 생겨났다 종말했다 하는 게 우주의 수명 주기라는 거거든요.

주류 학자들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도약 항법 없이 사회가 유지가 안 되니까, 그냥 정부 편, 기업 편 든다고 ‘아닐 거다’ ‘초끈 붕괴 현상은 없다’ ‘그러니까 도약 항법 많이 써도 된다’ 그러지만, 어떻게 아냐고요?”

미영은 가게 주인이 갑자기 사회 문제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고, 말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어떤 일에 그 화가가 끼어든 건가요?”

가게 주인은 미영이 만들어 보여 주는 미소 지은 얼굴을 보고서야, 다시 화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화가는 선전 홍보 자료 제작 일에서 처음 자리를 잡았다. 화가는 자기 재산을 털어 다른 운동가들과 고용한 비서진들을 먹여살리면서 조금씩 이 행성에서도 유명 인사가 되어 갔다. 화가는 야심 찬 정치 사업들 몇 개를 밀고 나갔다. 이 행성에서 발사되는 구형 로켓에 실리는 연료 중에는 그때 화가가 돈을 들여 사다 놓은 것이 아직까지 꽤 있었다. 그렇게 해서 화가는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한 행성에서 행성 의원 자리를 곧 얻을 수 있을 듯하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여기는 ‘다 같이 함께 생각하고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거대한 정치인을 무너뜨린다’ 어쩌고 하면서 일단 받아 주고 말할 기회도 주고 자리도 막 내주고 그러는 데거든요. 그래서 참 별별 어중이떠중이들이 어떻게 여기 발판으로 삼아서 이름 한번 얻어 볼까 그러면서 모인다고요. 말이 좋아서 아름다운꽃별이지. 여기 이 행성은 헛바람 든 정치인 지망생들 중에 실패한 쓰레기들이 휘휘 돌다가 채여서 고이는 수채 구멍 같은 데지 뭐.

특히 정말로 무슨 뜻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때 걔 같은 애는 완전히 생각을 잘못하고 여기 온 거라고 봐야죠.”

화가는 곧 안 있어 행성 의원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행성 의원은커녕, 아름다운꽃별에 있는 지역 지부의 운동가 지역 대표 선거에서도 떨어졌다

화가는 첫 번째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떨어지면서도 어떻게든 강렬한 모습을 남겨야 그것으로 인기를 얻어서 다음에는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는 선거에서 떨어진 후에 기자들 앞에서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면서 “선거에 져서 오히려 정말 기쁩니다!” 하고 말하면서 다시 또 크게 웃었다. 의아해하면서 왜 졌는데 웃는지 묻는 기자들에게 화가는 대답했다. 물론 그 기자들은 실제로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지만, 화가의 비서들에게 그렇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어 달라고 돈을 받은 상태였다. 화가는 뭐라고 얼토당토않은 역설적인 명대사를 꾸며 대면서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고 나서 화가는 두 번째 선거에서도 패배했고, 화가는 다시 또 소리 내어 웃는 행동을 했다. 화가는 그리고 세 번째 선거에서도 패배했는데, 그러고 나니, 화가는 재산을 다 날려 먹게 되어, 기자들에게 줄 돈이 없어서 웃어 줄 곳이 없게 되었다.

화가가 거느리고 다니던 비서들은 그러자 가볍게 흩어졌다. 다른 자리를 찾지 못 해 끝까지 남아 있던 한 비서의 부하에게 화가는 정치인처럼 웃으면서 지금 재정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그 부하라는 사람이 바로 지금 이 오리고기집 주인이었다.

“걔가 또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거야. 그래서 제가 그랬죠. ‘후보님, 이제 더 이상 그런 표정 짓고 다니실 필요 없습니다.’ 파산했거든요. 그러니까 걔 표정이 진짜 이상해지더라고요.”

5.

미영과 양식은 오리고기집 주인과 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아름다운꽃별의 여러 재미없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과, 여러 재미있지만 친해지기 싫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던 끝에, 두 사람은 화가가 돈을 다 날린 후에 어디로 갔는지 사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양식은 아름다운꽃별을 떠나는 로켓 안에서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이거 또 항상 흔한 그런 똑같은 이야기 아닌가. 어떤 준수한 수재가 있었다. 그런데 건방져서 오만하다. 게다가 사회가 만만치 않다. 수재는 실패하고 망한다. 끝. 불행하게 망한 가능성 있었던 똘똘한 사람들 이야기야 맨날 널리고 널린 거지. 비슷한 이야기 우리 일하러 다니면서도 똑같은 몇 번 본 거 같고.”

그러자 미영도 혼잣말처럼 말했다.

“망하는 이야기는 절대 똑같은 게 없지. 화장터에 쌓인 잿가루 보면, 다 그냥 똑같은 탄소에 칼슘 덩어리지만, 그렇게 되기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하나하나가 다 어떻게든 더 살아 보고 뭐든 조금 더 해 보려고 그렇게 애탔던 목숨들 아닌가.”

양식은 미영을 돌아보았다. 미영의 표정이 양식이 목소리를 듣고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더 굳어 있었다. 양식은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화가의 행방을 좇는 일에만 더 집중했다.

파산한 화가는 일단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림 몇 장을 팔아서 양식이라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가는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퍼지 클러스터링 파(派)의 영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높은 장벽과 같았다.

화가는 처음에 무슨 신분을 숨기고 백성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임금인 양, 자기 정체를 숨기고 평범한 지역의 아마추어 회화 거래상을 찾아갔다. 화가는 아마추어 회화 거래상의 놀라는 모습과, 그 놀라움이 일화가 되어 주변에 알려져서 자신이 다시 화젯거리가 되고 화가의 명성을 높이게 되는 줄거리를 상상했다.

그런데 거래상은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어떤 범함수를 쓴 겁니까?” 하고 물었다. 화가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대답을 하고 나서야, 거래상은 “그러면 이걸 그냥 생으로 손 그림으로 그리신 거예요?” 하고 물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거래상은 자기는 그런 그림은 사지 않겠다고 했다.

화가는 이 지경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화가가 아름다운꽃별로 가겠다고 결심을 했을 즈음 처음으로 퍼지 클러스터링 파가 주목을 받았고, 꽤 인기를 얻은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 못했던 것이다.

퍼지 클러스터링 파는 지극히 한심한 사고로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손상된 사건 때문에 발생했다.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과장이라고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문화재 당국은 그 유명한 그림의 초고해상도 이미지 파일 한 장도 제대로 보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 손상되자 정확하게 그 그림이 어떤 붓질로 어떤 종이에 그려져 있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대한 돈을 받고, 겸재 정선의 수십 대를 내려온 수제자나 다름없다고 자칭하는 한 화가가 그 복원도를 다시 그리게 되었다.

그런데, 퍼지 클러스터링 파의 창시자는 그 복원도가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창시자는 몇 차례의 회화 공모전에서 낙방하고, 결국 직업 화가로서 삶은 포기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창시자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로 일거리를 찾아 경찰에서 범죄자 몽타주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창시자는 일을 하면서, 컴퓨터로 사진을 분석하고 그 사진을 다양한 변환 이론과 처리 기법을 이용해서 자신이 그리는 몽타주 그림과 자연스럽게 합성하는 방식들에 매우 익숙해졌다.

창시자는 목격자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여러 가지 사진을 분석한 컴퓨터 영상과 다양한 이론으로 합성해서 더 늙은 사람, 더 젊은 사람, 더 험상 굳은 사람, 안경 쓴 모습, 더운 날에 본 모습 같은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일에 밝았다.

창시자는 그런 일을 하면서 얻은 재주로 〈인왕제색도〉를 복원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들을 컴퓨터로 분석해서 그 기법의 특징과 구도, 소재 표현의 요소를 다양한 수치로 표현한다. 이렇게 만들어 낸 표현을 위한 수치들을 몇 가지 분석 이론에 의해 알려진 기법으로 결합하면,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 패턴이 컴퓨터에 기억된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것을 이용해서 실제 인왕산을 찍은 사진을 그 방식대로 변환하도록 처리하면, 겸재 정선이 살아 있다면 인왕산을 보고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 추산한 결과가 나오고 그것을 그림으로 뽑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창시자는 표현자들을 분석하면서 퍼지 클러스터링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퍼지 클러스터링은 그때 창시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기법상의 특징을 추출할 수 있는 계산 이론이었다. 그리고 과연 창시자가 컴퓨터로 뽑아낸 〈인왕제색도〉는 자칭 ‘겸재 정선의 수제자’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고 훨씬 더 진짜 겸재 정선 그림 같았다.

〈인왕제색도〉로 유명해진 창시자는 이제 다양한 그림들을 만들어 냈다. 창시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법으로 그린 20세기 영화 속 유명한 장면들이나, 고흐의 특색을 그대로 살려서 그린 달의 뒷면 풍경화 같은 그림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장난 정도로 여기던 사람들도, 창시자가 여러 사람들의 기법을 섞어서 전혀 새로운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창시자가 한번 물꼬를 트자, 이 분야에 재능을 가진 진짜 천재들이 우주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림을 분석하고 표현하는 프로그램에 온갖 이론들이 다 적용되기 시작했다. 패턴 인식과 유전자 알고리듬의 발전된 성과들은 가장 먼저 이식되었고, 온갖 인공지능 기술의 다양한 분야들이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의 요소로 끼어들었다. 곧이어, 다른 화가의 기법을 가져와서 그림을 만들어 내는 수준을 넘어서서, 프로그램에 쓰이는 이론과 수치들을 조합하여 전혀 새로운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그림들은 정말 충격적이었고,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퍼지 클러스터링 파 이전의 화가들은 퍼지 클러스터링 파 이후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멸시했다. 나중에는 서로 다른 분야라고 설명하려고 들었다. 이전 시기의 화가들은 직접 붓을 들어 손으로 그린 그림에는 전혀 다른 ‘맛’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자 붓을 이용해서 컴퓨터와 연결된 로봇 팔이 물감을 찍어 표현하는 그림이 이미 정착되어 있던 상태였고, 전자 붓으로 그린 그림과 이전 시기 화가들이 직접 그린 그림은 눈으로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전 시기의 화가들이 마지막까지 매달린 것은 추상적인 표현을 그림으로 나타낸 추상화만은, 순수한 인간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에 컴퓨터가 따라올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현대 화가들은 컴퓨터를 사용해서 훨씬 더 광범위한 세계를 계산하여 그림으로 나타냈다. ‘물감이 튀는 모양과 거친 붓의 갈라짐이 깊은 절망감을 나타낸다’는 정도의 평을 내세워서 그림을 팔아 보려고 하던 이전 시기의 화가들은, 현대 화가들이 11차원 공간을 컴퓨터 속에서 표현한 뒤에 그것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의 음파에 맞추는 느낌으로 캔버스에 그려 내는 감격적인 추상화 작품과 비교해 보면서, 자기 그림들의 초라함을 표현할 방법만 궁리해야 했다.

이전 시기의 화가들은 대부분 현대 화가들이 그리는 그림을 평하는 평론가로 직업을 바꾸어 살아남았다. 평론에 재주가 없던 화가들 중에는 그나마 ‘그래도 직접 손맛이 있는 그림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라는 식으로 동네 골목의 불량식품 파는 오래된 포장마차 같은 느낌으로 살아남아 보려고 하는 정도였다.

현대 화가들의 그림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정치인 생활을 청산한 화가가 다시 그림을 붙잡으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퍼지 클러스터링 파가 이룩한 회화 격변은 꼭대기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이 시대의 전문 화가들은 결과물인 그림 자체를 굳이 볼 필요도 없이, 그 그림을 만들어 내는 프로그램에 기입한 자료만 보면서 서로 재주를 겨루고 있었다. 화가들은 프로그램에 어떤 이론을 어떤 방식으로 적용했는지 그 기법과 수치들을 기록해 두었다. 그 자료만 보면 실제 그 실행 결과인 만들어진 그림 자체는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어떤 것이 어떤 느낌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지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 화가들은 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 그림은 그 프로그램을 실행시킨 뒤에 어떤 사진을 입력하거나 소재를 입력해서 적용을 마쳐야 캔버스에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전문 화가들은 그 실물을 보기 전에 프로그램에 적힌 이론과 수치만 보고도 어떤 것이 아름다운 그림인지, 어떤 것이 도전적인 예술인지 알아보고 서로 감탄하고 서로 비평했다.

마치 악보가 정착된 뒤의 전문 음악가들이 실제로 오케스트라를 데려와서 노래를 연주해 보지 않더라도, 악보에 그려진 음표들을 보고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서로 음악을 평가하고 음악의 아름다움을 논쟁할 수 있었듯이, 이제는 전문 화가들도 그림이 실제로 그려지기 전에, 그림을 만들어 내는 프로그램의 부호와 표기만을 보고도 모든 것을 상상하고 겨룰 수 있었다.

이런 판국에 〈안드로메다 전도〉를 그리는 것이 자기 재주의 최대였던 화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화가는 우울하게 지내면서 우울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불행한 행동들을 모조리 골라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결심을 굳게 하고 한번 스스로도 현대 미술을 배워 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화가는 남이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예제대로 그대로 실행해 풍경 사진 몇 개를 옛날 그림체로 바꾸어 보는 정도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 결과는 화가 자신이 보든, 누가 보든 비웃음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졸작이었다.

양식은 이 화가가 이후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면서 주변에 해를 끼쳤다든가, 혹은 사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범죄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변했나 싶었다.

그러나 화가는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우울하게 지내던 시기의 바닥을 한 번 치고 돌아온 화가는 끝까지 어떻게든 다시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마지막 잔고까지 다 써 버린 화가는 빈민 구제 기관들과 파산자 재활 시설을 전전하면서 다시 그림을 그려 보려고 했다. 혹은 화가는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 보려고도 했다.

화가는 메모장에다가 ‘화가로서 내 삶은 어제까지 한 번 다 살았고 오늘부터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새로운 인생이다. 나는 인생을 두 번 산다’라고 쓰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고도 했다. 메모장에 그렇게 쓴 것이 세 번, 네 번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한 것이 없었다. 화가의 몰골은 점점 더 초라해져 갔고, 가난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새 늙어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번화한 도시 뒷골목들을 걸인처럼 헤매던 화가는 마침내 먹고살 길을 찾아 무풍 행성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화가는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 말하고, 미술관에서 자리를 얻었다. 그 미술관에는 비록 구석이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지만, 화가의 그림이 하나둘은 있었다. 화가는 미술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내가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는 일을 하면서 미술관에서 돈을 받았다.

남는 시간이 되면 화가는 미술관 뒤에 있는 시장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그 길거리에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묘기로 행인들에게 보여 주면서, 약장수나 길거리 악사들과 함께 구색을 맞추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사실 척추 신경 접속 장치를 이용해서 몸의 신경과 컴퓨터를 연결하면, 컴퓨터가 사람의 팔과 손을 움직이게 해서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들도 그림을 잘 그리는 것처럼 손을 놀릴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재주꾼들은 컴퓨터와 접속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수영복을 입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방탕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지내며 늙어 간 화가는 결코 그런 모습으로 그림을 그려서 큰 인기를 끌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길거리의 묘기 부리는 사람으로도 화가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화가는 어떻게든 더 기회를 찾아 보려고 노력했다. 화가는 다시 돈을 벌어서 자립을 하고, 그렇게 되고 나면 떠나간 부모님을 찾아가 오래간만에 명절을 같이 보낸다는 계획도 세웠다. 정작 부모가 화가를 찾아 무풍 행성에 왔을 때는 화가는 부끄러워서 숨어 다니기만 했지만, 화가의 계획은 진심이었다.

화가는 모임이나 강연 같은 곳에도 자주 나갔다. 화가는 꽤 성공한 듯했지만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시 삶의 활력을 찾고 새로운 도전 정신을 불어 넣기 위해 모이는 모임들에 참석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의식 전환’, ‘심리 강화’ 강사의 강연을 듣기도 했다. 결국 정말로 화가의 삶을 돕는 데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지만, 그래도 강연에서 강사가 하라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솔깃한 말들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후련하고 뭔가 새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몇 시간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화가는 꽤 오랫동안 모은 돈을 그런 강연을 듣기 위해 모두 털어서 지불해야 했고, 그 후 ‘돈 가치는 하는 일이었다’고 계속 스스로 납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얼마간이 지나고, 화가가 자신의 부모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무렵, 이 망한 화가의 이야기는 기사가 되어 몇몇 곳에 알려지기도 했다. 화가는 다시 희망을 갖고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지면 미술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면 다시 살림이 점점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가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찾아온 것은 그를 측은히 여기는 관광객들이 아니었다. 비슷한 신세로 일거리를 찾는 다른 망한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화가보다 훨씬 더 설명을 재밌게 하고, 더 젊고 더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도 여럿 있었다. 화가는 어쩔 수 없이 미술관에서 해고되었다. 화가는 이 일을 잃으면 안 된다고 간청하기도 했고, 그렇다면 당분간 보수를 받지 않고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더 잘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미술관 인사과장에게 절박한 화가의 모습은 꼭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한 병자 같아 보였고, 인사과장은 이 화가를 쫓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위험한 사고가 발생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미술관 일을 잃은 화가는 길거리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그 일은 밥값도 채 되지 못했다. 화가는 사는 곳을 옮기고 집세 보증금을 받아서 그 돈을 까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날이 갈수록 화가는 자기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가가 온 힘을 다해 사흘 나흘 동안 무풍 행성의 해가 지는 풍경을 그리고 나면, 그것과 꼭 같은 그림이지만 어쩔 수 없던 결점들을 모두 해결한 더 완벽한 그림을 현대 화가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몇 시간 만에 만들어 냈다. 현대 화가가 아닌 다른 거리의 재주꾼들조차도 이제 화가보다는 재주가 좋아 보였다. 화가는 자기가 그릴 수 있는 자기만의 재주가 나타나는 그림이란 이제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절망하게 되었다.

화가는 더 어두워진다기보다 이제 점점 괴팍스럽게 변해 갔다. 그러다가 화가는 한번 자기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던 한 관광객 어린이와 크게 싸우게 되었다. 무풍 행성의 미술관을 찾는 어린이들 중에는, 옛날 왕궁의 귀부인들이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던 것을 흉내 내는 것을 즐거운 재미거리로 여기는 경우가 있었다. 길거리 화가들에게는 이런 어린이들이 가장 돈이 되는 고객이었다. 열 살짜리 아이 하나가 화가가 그린 길 건너 사냥용품점 아가씨의 초상화를 좋아해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고, 주위의 다른 길거리 화가들은 화가가 운 좋게 오늘 하루는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생각이 꼬였는지 아이와 몇 마디 농담을 나누다가 괴상하게도 점차 아이와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경찰에게 같이 끌려가는 것으로 끝이 난 그날 뒤로, 화가는 더욱 괴상한 습관을 갖게 되었다.

화가는 얼굴을 모두 가리는 색안경과 마스크를 썼고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화가는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말도 몇 마디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살아갔다. 매일 길거리 화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색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쓴 채 깃을 세운 옷을 입은 채로 하루에 한 번씩은 미술관에 찾아가 자기 그림이 있는 곳에 들렀다. 그런 날이 몇 백 개, 몇 천 개씩 반복되어 지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화가는 갑자기 미술관의 그림을 훔쳐 갔던 것이다.

6.

화가가 그림을 훔친 날은 화가가 병든 사람처럼 온몸을 두꺼운 옷과 모자로 감싸고 다니며 지낸 지 몇 년이 넘게 지난 날이었다. 그러니 미술관 관리부장은 화가가 돈은 다 떨어졌는데, 도저히 돈을 벌 곳을 찾지 못해서 그림을 훔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영은 관리부장의 생각에 반대했다.

“훔친 그림을 돈으로 바꾸려면 장물아비를 알아야 하는데, 화가가 장물아비를 알지는 못 했을 거 같거든요. 그리고 설령 아는 사람이 어떻게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 상태로 장물아비들과 그림을 잘 거래할 수 있는 예리한 재주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모르는 일 아닙니까.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누가 꼬드겨서 그림만 훔쳐다 주면 뒷일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그런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관리부장은 쉽게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영과 양식이 찾아다녀 본 결과,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길거리를 출입하는 사람들 중에 그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미영과 양식은 커피가게 주인에게 알아 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화가 주변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차력 시범을 보이던 사람들 몇몇에게 좀 더 많은 일들을 물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마침내 무풍 행성에서 화가가 사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미술관 관리부장에게 찾아갔고, 미술관 관리부장은 “그러면, 마지막으로 화가 집에 가 보고, 지금까지 가 본 데서 알게 된 내용들을 정리해서 보험회사에 보고하면 되겠네요.”라고 했다.

미영과 양식은 관리부장과 함께 화가가 사는 곳이라는 지역을 찾아 갔다. 그곳은 미술관에서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었다. 그 산에는 옛날에 지은 천문대 자리들이 있었다. 무풍 행성은 날씨가 항상 좋았기 때문에 하늘의 별을 보기 좋아서 천문대를 짓기에 유리했던 것이다. 사실 진지한 천체 관측은 대부분 우주 공간에 띄워 놓은 망원경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에서 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용 천문대로 산 위에 몇 십 개가 건설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지구의 호텔 회사가 투자한 관광용 천문대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안드로메다 은하계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는 일을 매우 자주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별을 잘 보고 싶으면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땅에 있는 천문대에 간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는 천문대는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 천문대 건물 중에 한 채가 부서져서 버려지다시피 되자, 그 버려진 천문대에 집 없는 떠돌이 한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렇게 집 없는 사람이 들어오고 나니, 관광객들은 더 그 주변에 가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천문대는 더욱더 버려지게 되어서, 지금 산 위에 있는 천문대들은 모두 집 없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촌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산의 오르막을 오를 때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러니, 미영과 양식, 관리부장이 화가가 사는 천문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밤이 되어 있었다. 낙서와 악취로 둘러싸인 버려진 천문대에 들어서니, 천문대의 뻥 뚫린 열린 천장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볼 때 보이는 모양처럼, 그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 한 끄트머리에 지구가 붙어 있을 은하수의 모습이 작은 찌그러진 소용돌이 모양으로 보였다.

그리고 세 사람은 거울 앞에서 쓰러져 죽어 있는 화가의 모습을 보았다. 화가 옆에는 카페인 제제나 각성 효과가 있는 약물들의 병이 뒹굴고 있었다. 쓰러진 화가 앞에는 화가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있었다. 관리부장이 말했다.

“이게 없어진 그림이네요. 그런데 이 양반이 그림을 망쳐 놨네.”

화가가 미술관에서 훔쳐 갔던 그림은 젊은 시절의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그런데 그 위에 다시 그림을 덧칠해서 나이든 지금 자신의 모습도 옆에 그렸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모습이 점차 늙은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 것처럼 그려 놓았다.

이것은 옛날 램브란트의 기법을 사용하되 두 가지 대상을 양자 컴퓨터를 이용해서 분석한 다중 프랙탈 이론으로 합성했을 때 만들어지는 그림과 비슷해 보인다고 관리부장이 말했다. 하지만 수준은 형편없다고 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그렇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림을 화가가 자기 나름대로의 솜씨로는 최선을 다해서 이해한 대로 조악하게 직접 붓을 손으로 들고 그려 낸 그림이었다.

“누가 찾아와서 그림을 다시 되찾아 가고 화가를 붙잡아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전에 그림을 다 완성하려고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계속 그림만 그린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과로로 사망했나 봅니다. 원래 몸도 워낙에 약한 상태였던 것 같고.”

미영은 그림을 보았다.

“아무도 못 그리고 자기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몇 년 동안 그렇게 살았던 걸까요? 점점 더 이상하게 늙어 가고 말라 가는 자기 모습을 아무한테도 안 보여 주면서, 얼굴을 가리고 계속 몇 년씩 지내면, 그 얼굴은 아무도 보지도 못하고 사진도 못 찍을 거고. 그러면 자기밖에 볼 수 없는 자기 얼굴은 그야말로 자기 말고는 아무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아무도 못 그리고 자기만 그릴 수 있는 자기만의 그림이라는 이 그림을 그리려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렇게 산 건지.”

미영의 이야기를 듣고, 양식은 미영의 얼굴을 보았다. 미영은 그대로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림에는, 젊은 시절의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늙고 병든 모습으로, 죽을 힘을 다해 젊은 시절의 웃는 표정을 흉내 내어 웃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있었다.

— 2012년, 여의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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