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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밖으로 도주하기

곽재식

나는 도망쳤다. 도망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제 저녁 내내 고민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갇힌 곳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 있는 지 모르고 있었고, 내가 빠져 나온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도망쳐야 하는 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기는 어려웠다.

몇 가지 가정은 할 수 있었다. 일단 나는 한국인이었고, 이곳은 한국이었다. 나는 한국말을 하고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갇혀 있던 곳에 있었던 나를 감시하던 사람들도 다 황인종이었고 한국말을 했으니 한국인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출입금지” “잠금” “열림” “위험” 같은 말들도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감시자들이 들고 다니는 해괴한 모양의 한국제 전자기기, 좁은 방, 쌀밥과 국이 나오는 식사, 아직도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꽃을 닮은 무늬가 희미하게 새겨진 흰 벽지, 멀리서 들려 오는 지나치게 축제의 한 순간 같은 젊은 목소리의 유행가, 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 모든 가정이 잘못된 것일 가능성은 있다. 사실 이곳은 러시아 한 복판이고 어떤 이유로 나를 속이기 위해 꼭 한국의 건물과 같은 곳을 지어서 나를 그곳에 가두어 놓은 곳일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러시아의 한국계 요원들만 뽑아서 적당한 비율로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를 가르쳐서 사람들을 배치해 놓은 것일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재료와 조미료를 모조리 수입해 와서 음식을 만들고, 한국의 싸구려 일용품을 파는 곳에서만 쉽게 구할 수 있는 중국제 멜라민 식기까지 일일히 구해 온다면, 내가 느낀 한국 분위기를 정확히 느끼게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역시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 첩보물에서 붙잡아 온 상대방 첩보원을 속이기 위해서 그런 커다란 연극을 하는 이야기를 읽은 것이 기억이 났다. 그러면 나는 간첩일까? 어떤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요원일까?

그렇지만 그런 상상은 가능성이 있긴하더라도 매우 낮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도로 공을 들여 내가 꼭 한국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생각해 내기 어려웠다. 그러니 일단은 내가 한국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출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것조차 의심하기 시작하면, 사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가상 현실 기계 속에서 체험하는 꿈일 뿐이라거나, 태양계는 거대한 외계인의 유리관 안에 담긴 채집된 표본일 뿐이라는 상상까지 고려해야 하지 않나. 짧은 틈을 보아 당장 탈출해야 하는 나는 한가하지는 않았다. 상상의 범위를 정하는 것도 신속해야 했다.

이곳이 한국이라면 도망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더 있었다. 우선 이곳은 서울보다 남쪽에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높았다. 서울은 남한 땅의 북쪽에 치우쳐 있는 편이니까, 이곳이 파주나 철원일 가능성 보다는, 성남이나, 수원이나, 청주나, 대전이나, 전주나, 광주나, 대구나, 포항이나, 부산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러니까 대략 북쪽으로 간다고 하면 서울로 가는 방향일 것이다. 서울로 가면, 방송국이라든가, 신문사라든가, 국가인권위원회라든가, 매달릴만한 곳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다가 탈출했고 나를 보호해 달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다가 큰 길을 발견하면 도로 표지판을 보고 훨씬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있는 곳도 서울이었다. 정확한 이름도, 그녀와 내 관계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모습만은 꿈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녀와 내가 나란히 택시 뒷자리에 앉아서 어떤 즐거운 곳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나를 감금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의 뇌에 알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약물을 나에게 투입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내 뇌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내 뇌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어떠한 이유도 모른 채 갇혀 있었고, 나를 감금하고 있는 사람들은 가끔씩 나를 묶어서 옴짝 달싹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곳은 감옥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평범한 감옥은 확실히 아니었다. 나는 강제노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내 뇌에서 뭔가를 알아 내기 위한 것이 분명한 이상한 실험에 동원 되어야 했다. 나는 반복해서 기괴한 모양의 조각을 맞추거나, 음악에 맞춰 단어를 지적하는 것과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지시를 받았다. 그곳의 요원들은 내 모든 행동을 카메라로 관찰하고 있었고, 가끔씩 내 반응에 대해 자기들끼리 어떤 조치를 내려야 할 지 의논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내 두뇌 속에서 기억을 뽑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그들에게 협조하며 뭔가가 점점 기억나는 듯이 하기도 했고, 혹은 반대로 더욱 더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 듯이 하기도 했다.

혹은 완전한 거짓으로 내 기억을 지어내 말해 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나는 그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실 러시아에 사는 한국계 이주민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 거짓말을 간단히 부정했다. 그들은 내가 기억을 해낼 듯 할 때,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기억을 못하거나 가짜 기억을 말하려고 할 때 부정적인 태도였다. 그들은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과 몇 차례 속고 속이는 다툼을 하는 사이에 나는 그들이 내 두뇌 속에서 기억을 찾아 내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나는 내가 사고 같은 것을 당해서 기억을 잃었고, 그 후 이 곳에 붙잡혀 와서 이 사람들이 노리고 있는 기억을 말하도록 강요 당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 사람들이 나를 붙잡은 뒤에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나를 고문하며 괴롭혔는데 그 후유증으로 내가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 후 그들은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식을 포기하고 약물과 뇌 과학에 의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내가 기억을 실토하게 만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절대 정보를 전해주지 않으려는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우선 기억을 잃게 하는 기술을 써서 내가 누구인지, 왜 정보를 전해 주면 안 되는지도 기억 못하게 한 뒤에 그들이 원하는 기억 한 가지만 돌아오게 조치하고 그 상태에서 적당히 유혹해서 얼떨결에 그 정보를 말하도록 하는 수법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절대 말해서 안 되는 기억은 무엇인지 나는 나 혼자라도 애써서 기억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나는 내가 첨단기술에 친숙하다는 생각까지는 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산업스파이 사건에 휘말린 것일 지도 몰랐다. 나는 기술을 훔친 스파이였을까? 아니면 기술을 개발해낸 연구원이었을까? 그렇지만 산업스파이 사건에 이 정도의 특수시설을 운영하고 사람의 인권을 파괴하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혹시 모른다. 내가 알고 있었던 정보가 한 나라를 파멸시킬 수 있는 막강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 같은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정보 부서의 대원들이 상당한 시설과 자원을 투입해서라도 그 무기 기술을 알아내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기술에 대한 내 옛 지식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256M DRAM 따위의 단어 몇 가지 뿐이었다. 그게 내가 연구하던 것이었는지, 뭐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절대 발설하면 안 되는 정보이기 때문에 내 정신 속에서 강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하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녀의 모습 뿐이다. 한가로운 오후, 그녀와 함께 나란히 택시를 타고 차가 많은 서울 거리를 지나고 있는 기억. 그 기억이 다른 모든 기억을 덮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감금된 시설의 복도를 지날 때 오전에 햇빛이 드는 쪽과 오후에 햇빛이 드는 쪽을 구분하여 우선 동쪽과 서쪽을 알아냈고, 그 후 남쪽과 북쪽을 알아냈다. 창문이 거의 없는 시설이었으니 사실은 나를 낮에 잠을 재우고 밤에 깨우면서 전등 불빛을 가짜로 이쪽저쪽에 비추어서 방향을 속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가끔 주어지는 야외 산책 시간에 햇빛 드는 방향을 확인해 보았다. 내가 짐작한 해가 떠 있는 방향과 실제로 하늘에 떠 있는 해의 높이는 같았다. 다행히 그들은 동서남북까지 속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날은 탈출을 결심한 날이 되었다. 나는 잠깐의 야외 산책 시간 동안 다른 구역을 지나는 다른 감금자의 모습을 잠깐 살펴 보았다. 그들은 긴 실험에 견디지 못했는지, 그 감금자의 얼굴에는 표정도 없었고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으며 몸은 완전히 쇠약해 보였다. 나는 여기에 붙잡혀 있다가는 나도 저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내가 의식적으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모든 증거가 갑자기 다 하나의 덩어리로 꼭 맞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맞다. 나도 저렇게 될 것이다. 두려움이 몰려 왔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 해괴한 감금 시설 속에서 그것만은 사실이라는 느낌에 빠졌다.

나는 산책 중에는 경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추운 날씨가 찾아 오면 전신에 두터운 옷과 장갑을 입게 해 주기 때문에 그 속에 무엇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허점이었다. 나는 음식이 너무 맛이 없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난동을 부리고 식판을 뒤엎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젓가락 하나를 빼돌렸다. 그리고 매일밤 자는 척 하면서 그 젓가락 끝트머리를 계속해서 문질러서 뾰족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소매 안에 숨기고 산책 시간을 기다렸다.

겨울 산책 시간, 나는 젓가락 끝으로 경비병의 허벅지를 빠르게 찔러 놀라게 한 뒤에 달려서 그 뒤의 사무실 공간으로 뛰기로 했다. 일단 사무실에 들어서면 나가는 문을 찾지 않고 소화기 찾아 유리창에 던질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나는 깨진 사무실 유리창을 통해 결국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온 힘을 향해 앞으로 달렸다. 달리기 시작하니 온 몸이 아파왔다. 몸 구석구석에, 혈관 마디 마디에 작은 상처가 수천, 수만 개가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들이 나를 심하게 고문했을 가능성을 다시 의심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고문하면 몸이 이렇게 상할 지 여러가지 수법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이 쓰는 수법을 알 수 있다면 나를 붙잡아간 사람들이 어떤 조직의 누구인지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가능한한 빠르게 움직였다. 갈림길이 있으면 서울 방향에 가까울 북쪽을 택했다.

나는 오르막길 보다는 내리막길로, 구부러지고 막힌 길보다는 뚫린 길로, 넓은 길 보다는 좁은 길로, 지하도가 있는 교차로에서는 지하로 들어 가서 뒤를 따르는 사람이 좇기 어려운 길을 택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도망치는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나타날 수 있는 여러가지 거리의 모습을 상상했고, 확률을 따졌을 때 가장 뒤에서 추적해 오기 어려운 길이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골라 두었다. 나는 실제로 달리면서 그 판단을 따라갔고, 아픈 몸으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달리는 것 치고는 꽤 잘 도망쳤다.

잡힐 뻔한 순간은 있었다. 제복을 입은 감금시설의 요원 둘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 온 적도 있었다. 나는 뒷문이 뚫려 있는 상가 건물을 발견해 그 안으로 뛰어 들어 갔고, 그들은 나를 잠깐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틈을 이용해서 나는 상가 안으로 들어 갔다가, 뒷문 중 하나를 골라서 밖으로 나왔다. 어느 뒷문인지 그들이 건물 안에서 알아 내려고 우왕좌왕할 동안 나는 지하철역을 발견했고 나는 지하철에 무임 승차했다. 행운이었던 것은, 무임승차를 하는 데도 역무원이나 다른 승객들이 워낙에 무심한 편이어서 그들이 멀리서 나를 발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하철 내부에서도 부지런히 칸을 이동해서 더 복잡하고 더 몸을 숨기기 좋은 곳으로 이동했다. 세 정거장 쯤이 지나서 다시 재빨리 지하철에서 나와 길로 나왔고, 나는 주택가의 좁은 길 사이로 스며들어 동네 공원까지 걸어 왔다.

그 공원은 동네 주민들이 한가롭게 노는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란 미끄럼틀을 거꾸로 기어 올라가면 내려 오는 아이와 부딛힐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기억을 잃은 사람이 요원들의 추적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는 사건과 같은 세상에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평범한 곳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쉬기로 했다. 벤치에 앉았다. 한번 앉으니 온몸의 아픈 느낌이 다시 몰려 왔다.

그곳에서 나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머물렀다. 이상하게도 허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많은 체력이 소모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거의 그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멈추었다. 그랬다가는 이상한 사람으로 소문이 날 것이고 경찰의 눈길을 끌 지도 모른다. 경찰에게 소식이 가면 결국 나를 감금한 조직의 요원들이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러면 다시 끌려 가고, 갇히고, 영문도 모르는 실험을 당하며, 내 기억을 남들이 헤집으려고 하는 일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나는 끝날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그것은 피해야 한다.

나는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물이라도 마시기로 했다. 목이 마르기도 했다. 나는 누구에게나 물을 나눠 주는 정수기가 있는 은행이나 우체국 건물 같은 곳을 찾아 다니기로 했다.

거리를 뒤지면서 나는 거리 사람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고, 길의 표지판이나 가게 간판의 지명을 보고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해 보기도 했다. 마산 아구찜, 통영 회 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곳은 창원이나 경상남도 근처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말투에 사투리는 없는 편이다. 나는 이내 전주 비빔밥과 청주 해장국이라는 간판도 본다. 이런저런 지명들이 규칙 없이 간판에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지명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기 보다는 대도시일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했다.

마침 나는 은행 건물 하나를 찾았다. 정수기를 보고 물을 먹으려고 했지만, 손님이 은행에 없었다. 은행에 사람들이 붐빌 시간 같았는데도 아무도 없었다. 은행 안에 들어가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 마시면 분명히 내 모습이 눈에 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되겠지. 그렇지만 조금 눈에 뜨이는 정도가 그 정도로 두려워 해야 하는 일일까? 은행 사람들이 고작 물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을 두고 수상하다고 경찰에 연락을 할 것 같단 말인가? 나는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은행에 들어 가서 물을 마시자는 결심을 한다.

그렇지만 막상 은행 문 앞에 들어서서 말끔하게 차려 입은 은행 직원들가 티 없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는 내부를 보니 겁이 났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뭘 도와 주면 되겠냐고 물어 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은행 안에 있는 감시 카메라 망을 이용해서 그 조직의 사람들이 나를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겁이 나서 나는 은행 문 앞에서 망설이게 되었다. 그러다 은행 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으면 그것 자체로 수상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너무 목 마르고, 너무 배고프다. 나는 공중 화장실을 찾아 그곳에서 수돗물이라도 마음껏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나는 당당하게 은행으로 들어 가 평범하게 물 한 잔만을 마시기로 했다. 왜 왔냐고 누가 물으면, 그냥 너무 목이 말라서 물 마시러 왔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를 향해 빠르게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나를 좇아 찾아 온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건장하고 힘이 좋게 생긴 사람 둘과 책상 앞에 앉아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 하나이다. 남녀가 섞여 있다. 옷차림은 하늘색 빛인데, 경찰 제복도 아니고 내가 아는 어떤 군대의 제복도 아니다. 신발도 군화가 아니라 걷고 뛰고 일하기 좋은 운동화 차림이다. 그들은 내쪽으로 오고 있었고,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방향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이 있는 은행이 멀어지고 있었다. 은행 안에는 손님들이 심심풀이 삼아 먹으라고 놓아둔 사탕이 몇 개 놓여 있는 것도 보였다. 그 사탕을 모두 움켜쥐고 한 입에 다 털어 놓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다 포기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쉬워하며 뛴다. 다시 힘을 쓰자 회복되지 못한 몸이 온통 아파 온다. 그들은 내 뒤를 따르는 것 같다. 나를 추적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은행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신기루처럼 빙빙 돌아 다녔다. 맹물과 사탕 몇 개가 있는 은행일 뿐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라비안 나이트 속 사막 오아시스 곁의 성찬처럼 머릿 속에서 맴돈다. 뛰는 것이 심해져서 발자국마다 머리가 웅웅 울렸는데 그때마다 은행의 모습도 여러 가지 환상으로 변하며 머릿 속에서 춤을 추었다.

은행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은행의 지점 명칭에서 나는 이곳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서울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든 걸어서 한 나절이면 갈 수 있겠지.

나는 오늘 밤 동안 그들이 따라 오는 것을 피해 걷고 또 걸어서 인권위원회나 방송사로 달려 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 기억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감금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 놓을 것이다. 그러면 누구든 도와줄 것이다.

나는 근처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 가서, 출입구에서 멀지 않은 동으로 들어 갔다. 적당히 높은 층으로 올라 가기로 한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그 옆 비상 계단에 숨어 잠시 추위를 피한다. 춥기는 마찬 가지지만 바람은 불지 않고 약간의 훈기도 있는 것 같다. 이런 곳에 있다면, 그들도 나를 추적하기는 어렵다. 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 온 것까지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동에, 몇 층에 숨었는지 까지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입구에서 가까운 동 네 개 정도를 한꺼번에 수색하는 방법을 쓸 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 숫자가 좀 더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는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안심하려 했지만 다시 나는 걱정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 조직이 공개적으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강력한 기관일 가능성도 있다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5분에서 15분 사이에 이 아파트 전체를 수색할 인원을 동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생각을 하니 겁이 나서, 창 바깥을 내다 보게 되었다. 겨울 저녁 불빛이 깜빡이는 아파트 앞에는 학원 이름과 세탁소 이름이 빛나고 있다. 붉고 노란 전등이 켜진 자동차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서울 시내 어느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새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보기 시작했는지도 잠시 잊고 한참 그 모습을 본다. 나는 왜 이런 모습을 편안하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겨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그립고 안타까운 것으로 여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을까.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다시 그녀의 기억을 돌이키기 시작한다. 저녁 풍경에 잘 어울리는 그녀는 택시 속에 나와 같이 앉아 있다. 우리는 소곤거리는 것처럼 별 것 아닌 대화를 나눈다. 이 길이 좀 막히네. 여기는 아직도 공사 중이야?

한참 기다려도 경찰이 몰려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안심하고 쉬기로 했다. 은밀하게 사람들을 많이 모으고 건물들을 뒤진다면 조용히 수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가능성까지 대비하기에 나는 너무 피곤했고 배가 고팠다.

나는 이곳 계단에서 밤을 보내려는 생각을 한다. 이 정도면 춥지만 얼어 죽지는 않을 정도다. 만약 이 아파트 주민이 몇 층을 오르내리느라 이 계단에 들어 섰을 때, 계단에 걸터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면 놀라지 않을까? 놀라면 신고하고, 신고하면 나를 좇는 그 자들의 정보망에 닿을 수도 있다. 나는 앉아서 쉬다가 누가 나오면 나도 일어나서 이 아파트 주민인 것처럼 계단을 걸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소리가 밑에서 위로 올라오면 나는 내려 가면서 스쳐 지나가고, 소리가 위에서 밑으로 내려 가는 것 같으면 나는 올라 가면서 지나치면 금방 따돌릴 수 있다. 그러면 나를 의심할 주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정도를 계단에 앉아 쉬었다. 그러는 사이에 깊은 밤이 되었다. 계단을 걷는 사람은 그동안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엄마와 딸이 내일 학교에 해 갈 과제를 두고 다투는 소리, 어떤 남자가 “예, 예, 예-”라는 말을 끝없이 반복하며 전화를 받는 소리가 철문 너머 복도에서 들려오는 정도였다. 멀리서 알 수 없이 쾅하고 철이 부딛히거나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한참 고민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에게 따라 붙은 조직에서 아파트 옥상으로 낙하산 부대를 보내서 위에서부터 나를 붙잡아 가는 것은 아닌가 겁이 나서, 잠깐 나는 다른 방향으로 뛸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뒤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한편 뒤늦게라도 일일히 아파트를 수색하기로 한 그들이 나를 찾아 올라올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달려 올라 오는 발소리로 구분할 수 있을까? 천천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발소리가 나를 찾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급하게 빠르게 이어지는 발소리가 나를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초조함에 점점 익숙해지는 동안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이곳에서 빠져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누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내 정신은 서서히 쳐져 갔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으니 결국 졸음을 느끼게 되었다. 잠이 들면 안 된다. 만약에 잠이 들었을 때 누가 나를 발견하면 반드시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면 위험하다. 아예 그들에게 잠자고 있는 채로 바로 발견될 지도 몰랐다.

잠이 들면서 정신이 희미해지자 다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웃는 얼굴도 아니고 화를 내는 얼굴도 아니다. 굳이 표정을 설명하자면 조금 지루해 하는 표정에 가깝다. 그 모습의 그녀를 나는 옆에 앉아 보고 있다.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잠을 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아파트를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앉아 쉬었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별로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배 고픈 것은 더욱 극심했다. 그래도 움직여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어디든 내 말을 들어 줄 수 있는 곳으로 찾아 숨어 들어 가야 했다.

그런데 아파트 입구에서 나는 그들이 그때까지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먼저 계단 속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2층으로 다시 올라가서, 그들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복도를 걸어 갔다. 그곳에서 나는 땅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충격 때문에 잠깐 움직이기조차 힘들었지만, 나는 허리를 굽힌 채 기는 듯이라도 움직이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그들의 수색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다.

나는 그들의 추적망을 피해서 국가인권위원회까지 가는 길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이 내가 이 아파트에 있다고 확신하고 기다리는 것을 보면, 어떤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건 정보가 풍부한 수색망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통 CCTV와 방범 CCTV였다. 그들은 내가 발견된 주변의 교통 CCTV, 방범 CCTV 중 일부를 혹은 전부를 계속 감시하면서 내가 어디로 도망치는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짐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CCTV들이 설치 되어 있을 수 있는 장소와 구획에 대해 생각한다. 주요 도로와 교차로에 있을 것이고, 반대로 후미진 골목길이나 우범지대에도 CCTV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이의 어중간한 길로만 도망쳐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다. 너무 잘 알려진 널찍한 도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으슥한 길도 아닌 곳으로 움직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궁리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며 안팍을 살펴 볼 것이다. 그러면 도망치는 나는 눈에 쉽게 뜨일 지 모른다.

나는 빠르게 CCTV가 설치되어 있을만한 곳을 눈으로 훑고, 없는 길을 향해서만 움직였다. 뛸 경우 오히려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쉽고 더 눈에 뜨이기도 쉬우니 계속해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걸으면서 공사장들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서울에는 여전히 공사장이 많다. 공사장 중에 한 곳에는 막 일을 마치고 철수하려는 트럭이 있었다.

나는 그 차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시멘트 포대를 쌓아 놓은 트럭 짐칸에 올라탔다. 피곤한 트럭 기사는 내가 숨어든지 모를 것이다. 트럭이 CCTV 아래를 지나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나는 천을 덮고 숨기로 했다.

트럭은 달리다가 멈추다를 반복했다. 트럭이 멈춰 있을 때는 누군가 갑자기 내가 덮고 있는 천을 확 걷어 젖히고 나를 찾아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어서 다시 출발해라, 출발해라, 출발해라, 하고 빌었다. 확 내 스스로 뛰쳐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트럭 짐칸에서 사람이 뛰어 나오는 장면도 눈에 뜨이기 쉬운 모습이었다. 함부로 뛰어나갈 수도 없었다.

나는 천을 조금 걷어 하늘 쪽을 올려다 보았다. 무슨 행성인지 모를 별이 부연 서울 하늘에도 한 둘 빛을 내고 있었다. 전봇대 사이를 연결하는 전선이 하늘에 튀긴 먹줄처럼 휙휙 지나갔다. 그것만 보고 어디 쯤이 내리기에 안전한 곳이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길과 잠깐 지나가는 나뭇가지를 보고, 나는 이 트럭이 외진 산등성이 같은 곳으로 들어 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트럭에 올라탄 지역과 트럭을 달린 시간을 짐작해서 나는 그 산이 어디쯤인지 짐작했다. 이 정도라면 특별히 나를 감시하는 장치도 없고, 밤이 깊어 눈에 잘 뜨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뒤에 따라 붙는 차가 없는 지 확인한 후, 트럭이 속도를 늦추었을 때 짐칸에서 뛰어 내렸다.

내가 짐작한 산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등산로가 아닌 곳을 통해 산 속으로 숨기로 했다. 주변에 인가라고는 많지 않은 컴컴한 산이었지만 먼지바람처럼 번져 온 도시 불빛이 희미하게 발 밑을 밝혀 주었다. 나는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산 속 나무 사이를 움직였고, 조금씩 조금씩 산을 돌아 결국 다시 반대편의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밤새 그렇게 숨어 들고 뛰어 들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도대체 내가 누구이고, 왜 그곳에 붙잡혀 들어 갔는지 다시 고민했다. 과거에 내가 한 일이나, 내가 아는 사람을 생각해 내려고도 애썼다.

그러나 역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은 그녀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한 가지, 한 장면에 대한 기억.

그녀와 나는 어느 평일 저녁,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길을 택시를 타고 가고 있다. 그녀와 나는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볼 예정이다. 일생일대의 미식을 하는 저녁도 아니고, 전설적인 명작 영화도 아니다. 그냥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많은 저녁과 같은 저녁이다. 택시는 교통체증 때문에 느리게 움직인다. 그녀는 교통체증에 대해 말을 하고, 나는 거기에 대답한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평소 때라면 들을 일이 없는 방송이 흘러 나온다. 요즘 한식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는데요, 한식 의 숨은 맛이라는 책을 최근에 펴내신 누구와 지금 전화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누구입니다. 라디오 방송 소리는 택시 안에 가득찬다. 나는 차창 밖의 건물들과 다른 자동차를 본다. 라디오에서 나온 이야기가 그 사이로 멀리까지 바람처럼 퍼져나가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이야기도 세상에 관심거리구나, 하고 생각을 하지만 정말로 신경을 쓰는 내용은 아니다. 나는 다시 그녀를 쳐다 본다. 그녀는 약간 지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름답다. 나를 보고 힘빠진 표정을 짓지만 한편으로는 웃고 있다.

익숙한 도심 거리의 방향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돌이키다가 한 가지 고민을 시작한다. 만약 나를 찾고 있는 그들이 정부의 조직이라면 아무리 인권위원회라고 한들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잘해 봐야 인권위원회 위원들 중 한 두 명이 내 편이 되는 정도고, 그 사람들이 한 며칠, 몇 달 여기저기에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봐 달라고 서류나 몇 번 내다가 퇴임하고 다른 자리로 가면 그냥 묻힐 것이다. 그나마 그런 일조차 없이 인권위원회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어딘가로 붙잡혀 갈 지도 모른다.

나는 방송국이나 신문사로 가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을 알아 내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은 꼬여들고 나는 의심한다.

어느 언론사가 정부에 맞설 수 있을까? 지금 정부와 결탁하고 있는 언론사는 어디이고 맞서고 있는 언론사는 어디인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서 언론사의 논조를 확인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곧이어 나를 좇는 그들도 내가 언론을 찾아갈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이 언론사 주변에서 지키고 있으면 내가 다가갈 때 나를 붙잡을 것이다. 기자에게 제보 전화를 하는 것은 어떨까? 그들이 제보 전화도 도청할 수 있을까? 제보 전화를 제일 신경써서 도청하려고 들지 않을까? 그런 기관이라면 언론사 제보 전화는 항시 도청하고 있겠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아픈 다리를 움직여 어디인가로 가려다가도 문득문득 나는 멈춰선다. 나는 내가 누구이고 왜 감금당하고 추적당했는지, 기억해 내려고 다시 애를 쓴다. 내가 알고 있을 것 같은 정보와 내가 첨단기술 연구원이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파고 들어 본다. 기억의 막다른 길에 몰려 결국 다시 그녀를 생각한다. 평범한 날 지루하지만 편안한 택시 뒷자리, 나른하게 들려 오는 라디오 방송, 그녀의 지겨워하는 표정.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

나는 마침내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곳은 그녀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이 그녀 주변을 이미 지키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도 나에게 나를 붙잡은 조직과 그들의 음모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하겠지. 나는 견주어 본다. 다시 붙잡혀서 그곳에 갇히는 것이 어떤 고통이었는지 돌이킨다. 나는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그녀를 만나고, 그 목소리를 듣고, 여전히 피곤한 표정일지라도 그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것이다. 설령 내가 누구인지 듣지 못하고 다시 붙잡힌다고 해도,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내가 누구인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녀와 함께 타고 있는 택시 속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택시 바깥 풍경을 떠올리고, 오래 동안 고민한 끝에 그 길이 어디였는지 기억해 낸다. 그 기억으로부터 나는 그 택시가 어느 길을 따라왔고 결국 어디에서 출발했는 지까지도 기억해 낸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구덩이 같은 내 기억 속에서 오직 그것만이 흐릿한 불빛처럼 이어진다. 나는 그녀와 내가 살던 집을 생각해 내고, 그곳으로 걷기 시작한다. 점점 나는 걸음을 빠르게 하고 마침내 뛰기도 한다. 나는 뼈마디가 긁혀 나가고 근육이 끊기는 듯한 느낌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녀가 있는 집을 향해 달린다.

정오가 되어서야 나는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하늘색 옷을 입은 그들이 곧 올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그제서야 그들이 나에게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장치를 달아 놓았음이 틀림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도망치지 않기로 한다.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것은 몇 분, 몇 초 정도라도 괜찮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린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가라앉혀 보려고 한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나타난 사람은 어느 노파였다. 밝은 태양 빛 아래 그 얼굴은 분명히 드러났다.

노파는 나를 보고 놀란다. 그리고 긴 시간 말이 없던 노파는 장갑을 벗기고 내 손을 붙잡는다. 나는 그때야 모든 것을 깨닫는다. 내가 왜 갇혀 있었는지, 왜 달리고 뛰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는지, 왜 이상한 약을먹었는지, 왜 기억을 잃었는지. 그녀가 붙잡은 내 맨손은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하다. 팔목에 달린 리본에 인쇄된 글씨를 나는 쳐다 본다. “알츠하이머 제4병동”.

— 2017년, 선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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