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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의 밤 
 아홉 개의 붓 이야기, 붓 없는 이야기
  
  
  
 올 겨울은 여느 겨울보다도 혹독한 바람이 분다. 서쪽에는 서아사에서 시작된 전운이 옆 고장 옆 고장으로 퍼져가, 겨울이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걸 지도 모른다. 며칠 전 떠나 온 마을에서는 피지도 못한 매화가 망울째 얼어서 떨어졌다거나, 동백은 가지째 눈도 틔우지 못하고 말라 붙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돌았다. 와야 할 봄 소식은 오지 않고 반갑잖은 피소식만 도는 겨울이다. 
  
 이틀 전, 우리 일행 넷은 마을을 떠나서 산을 올랐다. 이 한겨울에 산길을 타는 건 일부러라도 피해야 할 일이겠지만, 솜을 넣은 귀마개며 털을 기워 넣은 장갑을 단단히 채비하고 우리는 산을 올랐다. 기묘한 소문 때문이었다. 산 위에, 외지인들이 들어 오는 걸 막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어른 걸음으로 이틀을 꼬박 걸어야 닿는 산 정상 어귀에, 천인天人의 마을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사람이라 쓰고 천인이라 읽는, 큰 날개로 하늘을 뜻대로 나는 이들이 그 곳에 모여 산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마을 이야기를 듣고 솔깃해 하는 갈 형에게, 재찬 형은 한 마디로 말을 잘랐다. 
  
 “거기 가면 천인을 만날 수 있는 거지? 가 보자. 아리는 내가 잘 챙길게, 형.” 
 “장군님은 뭐라고 하시니? 천인들이 마을이 맞다고 하셔?” 
  
 갈 형이 묻자, 아리가 고개를 절래 저었다. 처음에 일행들과 같이 길을 떠났을 땐 앞으로 넷이서 길을 가는구나 싶었지만, 곧 알게 되었다. 아리의 곁에 항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또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아리만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면 아리를 통해야만 했다. 갈 형은 그 사람의 의견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종종 중요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는 이렇게 아리에게 묻곤 했다. 
  
 “그냥 가 보라고, 단단히 채비하고 가 보라고 그러셔요.”
  
 그 말에 재찬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짐을 꾸렸다. 그게 삼 일 전의 일이다. 
  
 어른 걸음으로 이틀 길이라 하지만 아리가 끼어 있는 우리에게는 무리다. 이틀째 밤을 산 속에서 보내게 되어, 아리를 빼고 셋이서 돌아가며 모닥불을 지키기로 했다. 이럴 땐 아리 옆에 있는 그 사람도 한 몫 해 주면 좋겠지만, 그건 바라기 힘들겠지. 재찬 형 다음이 나, 그 다음이 갈 형으로 순서를 정해 내 차례를 보내고 나는 갈 형을 깨운 뒤에 잠을 청했다. 잠깐이라도 깊이 잠들어야 산행을 버틴다. 
  
  “…하지만…, 어째서 확신해요? 저기, 천인의 마을이 있을 리가 없다고.”
  
 문득 이야기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모닥불 형에서 재찬 형과 갈 형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슬금 다시 눈을 감았다. 
  
 “천인은…,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아 다니는 이들이라 하늘 천자를 씁니다만, 그 시작은 물입니다.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 바다로 이어지는 깊은 물이 있어야 천인은 마음 편히 쉬는 법입니다. 산 꼭대기라 해도 물이 없으리란 법이야 없지만, 이 산은…, 이렇게 메마른 산은 천인들이 모여들 곳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그러네요, 전에도 들었죠. 천인[天人]은 물의 아이들이라고.” 
  
 내가 일행이 되기 전에 나왔던 이야기인가 보다. 길 떠난 뒤로 천인의 이야기는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재찬 형의 바랑에는 천인의 붓인 ‘종’이 들어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 하지만 천인이 물의 아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다. 머리가 나쁘니 언제 듣고도 벌써 잊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들만의 마을을 만들고 상인에게서 멀어진 천인들 중에는 상인들과 섞여서 살기를 택한 사람들도 있다고 했던가. 그런 사람들은 날개를 숨기고 얼굴을 숨기고 그렇게 살아 간다고.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이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는 들은 적이 없다. 갈 형은, 들었을까. 
  
 “하지만…, 외지인이 들어가긴 해도 마을 사람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고 하는 게, 마음에 걸려요.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곳에 붓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도련님이 원하시면, 저는 같이 갑니다.” 
  
 재찬 형이 말했다. 단 둘이 있을 땐 저런 이야기도 하는구나. 우리 중에서 가장 오래 같이 다닌 두 사람이니까, 나와 아리가 모르는 일도 두 사람에게는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갈 형이나 재찬 형이 나나 아리에게 대하는 게 불만스러운 건 아니지만, 이런 두 사람 사이에는 어쩐지 끼어들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고 만다. 갈 형이 여자였다면,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린 대도 그러려니 했을 거다. 다부진 체격의 재찬 형과 견주면 키도 나보다 작고 어깨도 좁고 마른 갈 형은 계집아이같이 보일 정도라 그런 것일까. 그래도 항상 재찬 형도 갈 형도 나에게나 서로에게나 존대를 한다. 
  
 “붓이 있으면 좋겠군요.”
 “네.”
  
 갈 형이 그저 웃으며 애꿎은 모닥불을 조금 헤쳤다. 불꽃이 타 들어가는 마른 소리가 타닥타닥 들린다. 새까만 밤으로 불꽃이 피어 오를 테지. 덧없는 일순의 빛이 흔들릴 테지. 눈 감은 채로 상상하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푸드득, 푸드득, 커다란 새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가 숲을 울렸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떠 버렸는데 다행히 갈 형도 재찬 형도 내 쪽을 보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저, 바람소리입니다.”
 “꼭…, 새 소리 같았어요.”
 “나무가 우는 소리입니다. 숲의 바람길이 우연히 그런 소리를 내는 게지요.”
  
 재찬 형이 품에서 부채를 꺼내어 모닥불에 부쳤다. 잦아든 불씨를 다시 피우려는 모양이다. 그나 저나, 저런 부채, 재찬 형이 갖고 있었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형이 내 쪽을 보려는 것 같아서 나는 슬쩍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모닥불이 따뜻해 져서인지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모닥불 지킴이 차례가 한 번 더 돌아와서 한참 지나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형들을 먼저 깨우자 갈형은 머쓱한지 묵묵히 죽을 끓이고 모두에게 나누었다. 슬슬 식량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 중으로 마을에 닿지 않으면 굶은 채로 산을 타야 할 지 모른다. 마른 날씨라 눈이 내릴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눈이라도 쏟아져 발이 묶이면 낭패다. 서둘러 배를 채우고 우리는 산을 올랐다. 
  
 대여섯 시간을 산을 오르는 동안 지난 밤 같은 바람은 다시 불지 않았지만 흘러 내린 땀이 차가운 공기에 닿아 금방 섬뜩하게 차가워졌다. 아리의 보폭에 맞추어 조금씩 걷기는 해도 마음이 급해지는 탓에 숨이 금방 턱턱 가빠왔다. 해가 중천에 오를 즈음에 시야에 겨우 마을의 풍경이 멀리 들어왔다. 계단처럼 깎아놓은 밭이 군데군데 보이고 마을 가운데에는 조금 널찍한 빈터가 있는 아늑한 고장이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인 길에는 길의 양 쪽으로 등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오른 쪽엔 모두 붉은 등을 달았고, 왼 쪽에 있는 것은 모두 푸른 등이다. 밤길에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좌우 등을 다른 색으로 한 것이 이 고장의 마음씀씀이였다. 밤에 이 곳을 보면 어둔 산길에 구원처럼 홍등 청등이 반짝일 터, 지친 여행자에게 그만한 구원이 있을까. 
  
 우리 네 사람은 서둘러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산은 오래 전 죽은 화산마냥 정상이 움푹 파인 형상으로, 그 움푹 파인 곳에 마을이 자리해 있었다. 바깥으로는 계단식으로 된 밭이 마을을 감싸듯 둘러싸고 있었다. 밭 근처에도 집은 있지만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 보다는 밭일을 하다가 잠시 잠깐 쉬어 가는 움막 같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래 전 내린 눈으로 밭이 모두 새하얗게 뒤덮여, 원래 무엇을 기르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열매 맺지 않는 이런 매선 겨울을 보낼 정도로 가을 봄 열음에 뭔가 나기는 할까. 
  
 “일단…, 마을의 어르신을 찾아 뵈어야 할텐데요….”
  
 갈 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일행은 일단 아이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공터에서 예닐곱 아이가 어울려 팽이치기를 하고 있었다. 겨울의 팽이치기야 얼음 위에서 하는 게 제격이지만, 흙을 머금고 얼어 있는 땅바닥도 팽이가 돌아가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패를 나누어 겨루고 있는 듯이, 셋이 팽이를 치고 있고 셋은 하나씩 팽이를 들고 쭈그려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팽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아이가 하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나이는 열 두어 살이나 될까. 흰 옷을 입고 아이는 표정 없는 얼굴로 아이들을, 아니 돌아가는 팽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팽이도, 끈도 없다. 
  
 “쟤는 왜 혼자 저러고 있지?”
  
 갈 형을 보았더니 형은 아무 말도 않고 그 소년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이런 표정을 보면, 내가 갈 형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게 없다는 걸 알겠다. 어른스런 표정으로 혼자 앉아있는 저 애를 보고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너희 왜 쟤랑은 안 놀아?”
  
 형의 표정이 싫어서, 끈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는 딴 아이에게 물었다. 
  
 “다 같이 놀아야지, 왜 쟤는 안 끼워 줘?”
  
 놀라 눈을 크게 뜬 아이에게 내가 재차 물었다. 
  
 “형은 누구야? 이 마을 사람이면 저 애랑 안 놀아. 저 애는 ‘천동’ 인걸. 천동이랑 놀면 어른들에게 혼나.”
 “천동이 뭔데?”
 “천동은 천동이야.”
  
 아이는 토라진 듯 입을 비쭉거렸다. 천동이라 불린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흰 옷의 아이는 그 곳에 없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어른이 누구시지? 그 분을 만나 뵈려고 하는데.”
  
 갈이 다른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 하고는 손을 들어서 대문이 높은 집을 가리켰다. 
  
 “가장 높은 어른은 여기 안 계시고, 다음 어른은 저기 계셔.
 “가장 높은 어른은 어디 계신데?”
 “여기 안 계시고, 하늘에서 저어어기, 횃대로 내려 오셔.”
  
 팽이를 치고 있던 아이가 멈추고 끼어들어, 다른 쪽을 가리켰다. 우리는 모두 아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어째서 지금에야 눈에 들어왔을까 의아할 정도로 눈에 띄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폭이 좁고 긴, 흰 빛깔의 바위는 얼른 보면 커다란 횃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꼭대기가 평평하고 좁은 것이, 딱 횃대다. 그 바위 옆에 정자 같은 건물이 서 있는데, 그 건물과 견주어도 바위가 더 크다. 저 횃대에 내려 앉을 새라면 얼마나 큰 새랴. 천인들 중에 가장 높다는 육익류, 여섯 날개를 가진 이들이 내리는 곳이라면 딱 걸맞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첫 아이가 말했던 어른의 집으로 향했다. 나이가 예순은 넘어 보이는 이가 우리를 맞았다. 환갑還甲은 족히 지났으련만 그보다 더 웃어른이 있을까? 하다 생각하니, 횃대로 내려온다는 하늘의 큰어른이란 것이 천인을 일컫는 말이구나 싶었다. 큰어른의 아들이 서둘러 차를 내 왔다. 향이 진한 쑥차였다. 봄은 아직 까마득하니 지난 해에 만들어 둔 것이겠지만 진한 쑥향에 마음이 녹았다. 
  
 “아이까지 데리고 여행하느라 고생이 많으시구려.”
  
 큰어른이 차를 권하며 웃음지었다. 
  
 “무언가 듣고 오신 길이오?”
 “이 곳이 천인의 마을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소문이 나 있더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장 큰 어른은 이 곳에 없고 다음 어른이면 이 곳에 계신다고.” 
  
 큰어른은 허허,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 이곳의 가장 큰어른이야 천인이시고. 정자 옆의 횃대를 보셨소이까? 그 곳으로 천인께서내려 오셔서, 그 옆의 정자에서 쉬어 가신다오. 벌써 몇 백 년간 계속된 일이오.” 
  
 이렇게 상인들에게 찾아오는 천인들의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나 뿐만 아니라 갈 형도 재찬 형도 큰어른의 말에 놀란 얼굴이었다. 상인들 사이에 섞여 드는 천인이 있기는 하여도 그들은 대부분 날개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 상인의 고장을 내려보고 횃대로 내려앉아 몸을 쉬는 천인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천인이 천인의 전부인 것도 아니고, 천인들이 모두 같다고도 할 수 없을 터였다. 
  
 “운이 좋으면 ‘날개의 밤’을 맞을 수도 있겠지. 어렵사리 오셨으니 푹 쉬어 가시오.” 
  
 큰어른의 아들의 안내를 받아, 횃대의 바위가 잘 보이는 집으로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방이 둘 있는 작은 집에 스물을 조금 넘겼을까 싶은 여자가 혼자 살고 있었다. 여자는 큰어른의 아들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방문을 열어 주었다. 겨울이 매서운 고장에선 밤의 한기에 가축들에게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방 옆에 우리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손님 방이나 가장 어른이 지내는 방에는 동물의 우리를 두지 않았지만, 어느 방이든 열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아궁이를 방 안에 놓는 것은 같았다. 나무를 단단히 맞물려 쌓아 올려 고운 흙을 겹쳐 발라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더도 덜도 없이 북쪽 매선 고장의 집이었다. 
  
 우리가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서자, 여자는 바삐 이불을 깔고 방에 불을 땠다. 매캐한 냄새가 빠지도록 잠시 방문을 열어 두었다가, 불꽃이 일어날 즈음에는 방문을 닫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천천히 방바닥으로 열기가 펴져 몸이 녹아 들었다. 
  
 “천동에 대해서 물어볼 걸 그랬다.”
  
 내가 중얼거리자, 갈 형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갈 형도 그 애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허면 형이라도 물어보지 그랬나. 약속은 없었어도 어쩐지 사람들을 만나 상대하는 건 갈 형이나 재찬 형의 몫처럼 되어 있는데. 
  
 “그 아이, 반비반상半卑半常일 지도 모른다 싶어서요. 혹 그런 거라면,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일 테고요.”
  
 그러고 보면 갈 형도 반비반상이랬다. 뿔이 없는 반비도 있는 법이어서, 나도 예전 아버지와 같이 살 때는 반비로 오해를 받았었다. 갈 형이 전에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 말해 준 적은 없지만, 지금 이런 표정을 보면 잘은 몰라도 예전에 무척이나 아픈 일을 겪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갈 형이 길을 떠난 것은 아홉 개의 붓을 모으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그 외에, 무언가 다른 목적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그 목적도 내가 모르는 갈 형의 지난 일과 관계가 있으려나. 
  
 “일단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지요. 아직은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재찬 형의 말에 우리는 그냥 수긍하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햇살이 방 안으로 스미기 전인데, 문 밖에 어슴푸레 미명微明이 맺혀 있었다. 무슨 소리에 잠을 깼을까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산 속에서처럼 푸드덕 푸드덕 푸드덕,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직후, 사람들의 낮은 재찬성이 벽을 타고 전해졌다. 일어나 앉으려는데 바로 곁에서 갈 형이 후다닥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형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날갯짓 소리, 분명 큰어른이 말했던 ‘날개의 밤’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갈 형이 나를 보고 놀란 듯이 손을 멈추었다. 
  
 “갈까?”
  
 소리 죽여 물었다. 갈 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훅 하고 방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그제야 방 안에 재찬 형이 없는 걸 알았다. 아리 혼자 방에 남겨 둘 수는 없다. 나는 포대기에 잠든 아리를 업었다. 푸드덕 푸드덕 새 날갯짓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손에 횃불을 하나씩 들고 공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어라 말할 것도 없이 그들 뒤를 따랐다. 공터의 한가운데, 횃대 앞에서 사람들이 멈추어, 앞다투어 절을 올렸다. 
  
 주변이 천천히 밝아지며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앞의 횃대 바위를 보았다. 새하얀 횃대의 꼭대기에 태양이 걸려, 마치 바위 위에 불의 새가 앉은 듯이 빛나고 있었다. 북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에서 붉은 옷의 사람 대여섯이 북을 치며, 입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천인이시어, 빛의 자손이시어, 섬기는 자들이 여기 있으니 부디 내려오시어 저희를 인도하소서.”
  
 “저희를 인도하소서-“
  
 뒷부분을 모여든 사람들이 되풀이했다. 
  
 “다시 오시어서, 당신의 자손을 보위에 세우소서.”
 “당신의 자손을 보위에 세우소서.”
  
 북소리가 빨라지며 사람들은 하나 둘씩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굿판이었다. 이 주변 지방과 별반 다르지 않은 흥겨운 놀이판이지만, 북 치는 고수[鼓手] 앞에 있어야 할 넋업사니가 없다. 횃대 앞에 의젓하게, 조각처럼 서 있는 소년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흰 옷의 소년, 빈틈없이 머리를 땋아 내린 표정 없는 그 얼굴은, 낮에 우리가 보았던 그 아이였다. 
  
 “천동이라는 것이, 하늘 아이[天童]였네요.”
  
 갈이 중얼거렸다. 재찬은 대답인지 탄식인지 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리 춥겠다. 돌아갑시다, 형.” 
  
 내 말이 갈 형이 네에, 한다. 나는 아리를 업은 포대기를 더 단단히 여몄다. 
  
 “고마워요.” 
  
 언제 깼는지, 아리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는 나 보고는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재찬 형은 아저씨라 부르고 갈 형은 오라버니라 부르는데, 어째서인지 나에게는 둘 다 안 쓴다. 
  
 “반천반상半天半常이라니, 그런 것도, 있을 수 있는 거군요. 그런 사람은…, 이렇게 섬김 받으며 살 수도 있는 거군요.” 
  
 갈 형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나는 잘 안다. 형이 저렇게 힘없이 말하면서 속으로는 피가 맺히리라는 걸 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재찬 형이 혼자 앉아 있었다. 갈 형은 재찬 형이 어딜 갔는지 묻지 않고, 우리가 본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 주었다. 횃대에 태양이 걸려 있던 장관이나, 사람들이 마치 감님을 섬기듯이 그 소년을 우러러 절하던 이야기나. 재찬 형은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씩, 아주 조금 눈썹을 찌푸렸다.  그 즈음 아침상이 들어왔다. 산 속 마을인데 상차림이 푸짐했다. 아낙의 표정도 환히 밝았다. 
  
 “이런 진수 성찬을 받아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재찬의 말에, 아낙은 손사래를 쳤다.
  
 “올해 처음 찾아오는 날개의 밤이었으니까요. 마을이 온통 축제 분위기인 걸요. 객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야 안될 일이죠.”
  
 “…새벽녘에 새의 날갯짓 소리를 들어서, 밖으로 나가 보았어요.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나, 해뜰녘의 풍경을 모두 보았죠. 그게 말씀하시는 ‘날개의 밤’이라는 것인가요? 저희는 외지인이라…, 괜찮으시다면 ‘날개의 밤’에 대해서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낙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보셨다니 아시겠네요. 들으신 소리는 천인께서 이 마을에 깃드시는 소리랍니다. 천지를 울리는 날개 소리를 내며 이 마을로 오셔서, 해뜰녘에 햇살과 함께 하늘로 올라 가시죠. 저희들은 그 밤이면 항상, 천동을 횃대 아래에 모시고 천인님을 배웅하죠.”
  
 “흰 옷을 입은 소년 말씀이시죠.”
  
 재찬의 말에, 아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이 년 전의 일이네요. 다른 때보다 더 크게 날갯짓 소리가 들리던 밤이었죠. 그 날 천인들이 쉬어 가시도록 이부자리를 준비했던 여식이, 빛으로 수태[受胎]해서 태어난 아이가 그 아이, 천동이랍니다. 천인님의 피를 받은 아이라 어찌나 영특한지, 서너 살이 되었을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한 번 배운 것은 잊지 않지요.”
  
 “빛으로 수태했다…?” 
  
 “매일 마을의 여식들이 돌아가며 그 정자에 이부자리를 준비하고, 밤새워 천인님을 기다렸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사람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라 처음에는 의심하기도 했지요. 혼인하지 않은 여식이 아이를 배다니 있을 법한 일이냐고. 그런데 그 여식이 눈물로, 자신이 빛으로 수태했다고 호소했죠. 마침 그 날 깨어 있던 마을 사람 몇몇이 정자에 빛이 비추이는 걸 보았다고 해서, 그제야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어요.” 
  
 우리는 모두 그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들었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 살았을 때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 헛웃음쳤을 이야기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종이 순식간에 주저앉는 것도 보았고, 강물이 살아있는 듯이 안개를 토해내는 것도 보았다. 길을 떠난 후 믿기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일행은 그 눈으로 똑똑히 보고 들어왔다. 애당초, 아홉 붓 이야기만큼 믿기 어려운 것이 뭐가 있으랴. 나 역시도 내가 만든 것이 그리 귀한 붓인 줄 모르고 내가 환각을 보는 거라고, 미쳐 가는 거라고 여겼을 정도니. 
  
 하지만 재찬 형은, 금방이라도 그렇지 않다고 외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건지 내게 말 해 주지 않는 건 날 어린애 취급 하는 것처럼 보여서 기분이 좋지 않다. 그야 천인의 일을 가장 잘 아는 것이야 재찬 형이겠지만, 아니면 아니다 기면 기다 정확하게 이야기 해 주면 좋지 않나. 
  
 “천동을 저희가 만나도 될까요?”
 “그럼요, 바깥에서 보고 들으신 것들 천동이 듣고 배울 수 있다면 그것도 다 천인님의 뜻이겠지요.” 
  
 아침을 다 비우고 우리는 횃대가 있는 마을 공터로 향했다. 아리는 장군님이 뭔가 이야기를 걸고 있는지 조용히,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갈 형은, 붓에 대한 일이면 항상 그렇듯이 굳은 얼굴이다. 
  
 “반천의 이야기는 처음 들어.”
 “저도 그래요. ” 
 “…마을에 반비라는 사람들은 좀 있었고…, 조상 중에 비인이 섞여 있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하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상인이랑 별로 다르지 않았어.”
  
 내 말에 갈 형은 조금 웃음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옅은 웃음이다. 
  
 “…제가 아는 반비는 태어난 직후에 눈을 떴다죠. 백일이 되기 전에 두 발로 걷고 돌이 되기 전엔 벌써 서너 살 정도로 보였대요. 상인의 피보다 비인의 피를 더 짙게 받은 모양인지. …반비라고 한마디로 말해도 모두 다르죠. 두 종족이 수명도 재주도 다르니까, 어느 쪽의 영향을 받는지 예측도 할 수 없어요.”
  
 갈 형 자신의 이야기다.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혹여 마을 사람이 들을까 싶어서 남 이야기처럼 말하는 게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어느 쪽도 아닌 특성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고 해요. 어느 날 갑자기 빠르게 늙어 간다거나, 갑자기 비인의 피가 옅어져 몇 년 만에 수명을 다할 수도 있죠. …모르겠네요, 그 아이. 날개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천인의 피가 깨어나서 날개가 돋게 되는 것일 지도요. 날개를 보이는 편이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기엔 더 좋을 테니, 아직은 돋지 않았다는 것이겠죠.” 
  
 반천반상인 천동은어떻게자란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아낙도 한어른도 그 아이가 상인과 어떻게 달랐는지는 들려주지 않았다. 갈 형의 말대로 천인의 피가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나 그 등에 날개가 돋게 되는 것일까. 
  
 “…반천은, 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거네요. 더러운 피라고 손가락질 당하지도 않는 거네요.” 
  
 혼잣말인지 중얼거리던 갈 형이 급히 말을 멈추었다.
  
 “죄송해요, 실언했어요.” 
 “…저희는 아무 것도 못 들었습니다.” 
  
 그림자처럼 서 있던 재찬 형이 말을 받았다. 나도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천동은 횃대 앞의 볕 잘 드는 곳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굿판을 벌였던 사람들은 어느 새 흩어지고 공터에는 전처럼 놀고 있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천동이지?” 
  
 천동이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았다. 아직 열 두어살 살이라는 애가 어째서 저렇게 무덤덤한 표정일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감정도 없는 듯이. 천인이라는 게 그런 것도 아닐 텐데. 
  
 “…혹시, 아홉 개의 붓에 대해서 알고 있니?”
  
 갈 형이 물었다. 삼인에게 고루 셋 씩, 아홉 감이 고루 내리신 아홉 붓의 주인에, 천동처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삼인이 모두 같다는 뜻으로 태어난 것이 붓의 주인이라면, 반천반상인 천동은분명그붓의주인일것이라고갈은생각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소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딱 그 나이의 아이인데 말투는 열 대여섯, 아니 스물은 먹은 사람 같았다. 재찬 형의 옅은 한숨 소리가 귀에 박혔다. 재찬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아홉 감께서 삼인에게 고루 내리신 귀한 물건이야. 어, 그러니까, 물건을 감께서 주신 게 아니라, 대대로 삼인들 안에서 붓을 만드는 ‘붓의 주인’이 태어난대. 그 사람이 붓을 만들어. 주인이 바라는 무언가를 이루어 주는 게 붓이야. ‘붓’이라지만 정말 글자 쓰는 붓인 건 아니고, 칼이기도 하고 종이기도 한데…….”
  
 내가 허둥허둥 나름대로 설명을 하자,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습니다. 어느 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삼인은 같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것이 천인, 그 아래가 상인, 가장 비천한 것이 비인인 것을 식자識者라면 누구든 알거늘, 아홉 감께서 삼인에게 고루 그런 귀한 물건을 내리신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군요.”
  
 소년은 나보다 훨씬 차분하고 냉정하게 바로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붓은 정말로…!”
  
 발끈하는데 아리가 붙잡았다. 아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지 않는 건 슬픈 일이에요. …하지만, 믿지 않는 걸 믿게 할 수는 없다고 장군님이 그러셔요.”
  
 아리의 목에서 가죽 끈이 얼핏 드러났다. 꾸욱 화를 삭였다. 화나는 것, 슬픈 것은 자신 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재찬 형을, 갈 형을 보았다. 줄곧 굳은 표정의 재찬 형의 눈도, 침착하게 서 있는 갈 형의 눈도, 아리만큼 서글픈 빛이었다.  
  
 “…당신에겐 상인의 피가 짙은 모양이군요. 천인은 태어날 때부터 날개의 근본이 있고, 늦어도 돌이면 날개가 펼쳐진다고 들었는데. 혹시 날개를 숨기고 계신 거라면 다르겠습니다만.” 
  
 재찬 형이 조용히 말하고는 몸을 숙여 아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가씨,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날씨가 찹니다. 큰 샘 하나도 없이 시내만으로 버티는 마을이라 그런지 공기도 메말랐군요. 오래 밖에 계시면 몸에 나쁩니다.” 
  
 아리는 대답 대신 갈 형을 올려다 보았다. 갈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침울한 분위기로 우리는 방 안에서 몸을 녹였다. 갈은 구석에서 웅크린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아리는 줄곧 목의 가죽 끈을 만지작거렸다. 재찬 형이 갑자기 어딘가 들러야 할 곳이 있다고 나간 뒤 방 안은 줄곧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형,”
 “…네?”
  
 갈이 고개를 들었다. 
  
 “천인은, 감 같은 사람이야?”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으시는 거죠?”
 “재찬 형이 없어서. 재찬 형, 천인 이야기 하는 거 안 좋아하지? 그래서, 지금은 없으니까.”
  
 갈은 자세를 펴고 재찬을 보았다. 아리도 두 사람을 보았다. 
  
 “아리와 저, 재찬, 이렇게 셋이서 길을 다닐 때 천인을 뵌 적이 있어요. 예전에 제가 어릴 적에 뵌 적도 있고요. …감 같은 사람이라. 글쎄요. 무척 아름다운 분들이고, …네, 한 때는 저도 그 분들이 감 같은 분들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네요. 하지만….”
  
 “하지만?”
  
 “감 같은 분들이라면, 사람 인자를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인이나 비인이나 천인이나, 똑같이 슬픔도 아픔도 괴로움도 기쁨도 알고 있다고요.”
  
 “…나도 재찬 형이 감처럼은 보이지 않으니까.”
  
 내 말에 갈 형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던 우리 마을에서, 나는 딱 한 번 갈 형의 날개를 본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 들었을 때, 황급히 갈 형을 안고 날아오르던 모습이 꿈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 뒤로 재찬 형은 날개를 펼치지 않았다. 천인과 비인과 상인이 같이 길을 떠날 수 있겠냐고 갈 형이 내게 물었을 때, 형은 내가 재찬 형의 날개를 보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아리는 어때? 재찬 형이 감님같이 보여?”
  
 “…아리는 아저씨가 좋아요. 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냥 좋아요.”
  
 나는 웃으며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천동에게 뭔가 해 주고 싶어. 있잖아. 걔 공터에서 혼자 앉아 있었잖아. 한참 놀 나이인데 아무도 같이 놀지 않고, 혼자서 책만 읽고, 사람들은 모두 떠받든다고 하지만 그냥 우러를 뿐이잖아. 그거, 가엾다구.” 
  
 “…그러네요.”
  
 갈 형이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웃었다. 삼인三人에게 골고루 아홉 감께서 내리신 아홉 개의 붓. 그게 삼인이 모두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감 님의 의지라고 한다면, 반천의 아이를 떠받드는 이 마을의 모습을 감님이 흐뭇해 하지는 않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받들어 섬겨지는 아이 역시도, 절대로 행복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바랑에서 천으로 싼 물건을 꺼냈다. 낡은 천 안에 기름 먹인 천으로 또 감싼 안에, 내 ‘붓’, 손칼이 있다. 상인의 세 붓 가운데 하나인 이 칼을 나는 내 손으로 만들었다. 나는 대대로 윗손上手 노릇 하는 집안의 업동이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친자식처럼 거두어 키우셨다. 그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니건만, 아버지의 일을 배우는 것보다도 나무를 깎는 것이 좋았다. 저 아비어미 모르는 아이는 반비의 피를 받았음이 분명하다고, 그래서 글줄 읽는 것보다 천한 일을 즐기는 거라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어느 칼을 쥐어도 무언가가 모자라서, 자기 손에 딱 맞는 칼을 만들겠다고 대장간을 들락거리며 풀무질을 배워, 처음으로 만든 칼이 이 손칼이었다. 나뭇자루에 손때가 묻도록 기름을 먹이고 푸르게 칼날을 세운 칼을 쥐고 있으면 자신을 쓸모 없는 축생畜生이라 떠드는 수근거림도 잊을 수 있었다. 
  
 일행을 만나 이 칼이 아홉 붓 중의 하나라 들었을 때, 그리고 자신은 비인의 피를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엇었다. 이 칼로 깎은 아버지의 찻잔 앞에서 처음으로 당당하게, 아버님의 아들로서 살겠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이 칼로 무언가를 만들 때였다. 잘은 모르지만, 이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 준 것처럼 나도 천동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저물고 갈 형과 아리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재찬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갈 형은 그림을 그리려는 지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았지만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청할 때까지 붓은 끝내 종이에 닿지조차 않았다. 머리는 그리고 싶어도 손은 그릴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렷다. 나는 줄곧 나무를 깎아, 갈 형이 지필묵을 갈무리할 무렵에 과정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 무렵에 불현듯 잠에서 깼다. 요즘은 제대로 잠을 아침까지 자는 법이 없다. 왜 잠에서 깼나 싶어 보니 옆에 잠들어 있어야 할 온기가 없었다. 재찬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반대편에서 자고 있어야 할 갈 형도, 내 옆에 있어야 할 아리도 없다. 이 방에 나 혼자. 그 순간 푸드덕 푸드덕 새의 날개 소리가 들렸다. 바로 방문 앞에서 들린 듯이 가까운 소리였다.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와, 청등 홍등이 줄지어 선 반대쪽으로 등불을 들고 달렸다. 이 밤중에 등도 들지 않고 나갔을 리는 없으니, 등불만 찾으면 되렷다. 
  
 마을 안을 헤매는 동안에도 날갯짓 소리는 멎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서야 횃대 근처에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여 내달렸더니, 날개 소리에 섞여 피리 소리가 들렸다. 들은 적 있는 소리다. 맑고 소박한 음색인데도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 같은 소리. 조심스럽게 다가갔더니 아리가 피리를 불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피리만 분다. 기분 탓인지,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맑고 영롱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아리의 근처에서 천천히 땅이 젖어드는 것이 보였다. 불빛 탓이 아니다. 조금씩 땅이 꺼져들면서, 조그만 샘이 솟아나고 있었다. 천천히 넓어지면서 흙은 밖으로 퍼지고, 그 아래 지반의 돌에 구멍이 뚫린 듯이 퐁퐁, 물이 솟았다.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마른 땅에 샘이 솟다니. 샘이 피리 소리에 응하듯이, 노래하듯이 솟아 흐르다니. 
  
 피리 소리가 돌연 멎었다. 아리가 나를 돌아보고 방긋 웃었다. 
  
 “…이거, 네가 그런 거야?”
 “네, 아리가 피리 불었어요. 아저씨가, 이 마을에 샘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바람이 정말로 세서, 바람 소리가 피리 소리를 묻어 줄 것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재찬 형이 그런 소리를 했었다. 나는 종소리가 계속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역시 헛것을 들은 건가. 
  
 아리를 업고 방으로 돌아오니 갈 형이 방 밖으로 나오려던 참이었다. 
  
 “오라버니!” 
  
 내가 아리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아리는 한달음에 갈 형의 품에 안겼다.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잖아. 아리 업고 또 형 찾으러 다녀야 하나 했어.”
 “…죄송해요.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나간 사이에.”  
 “사과 받으려고 하는 말 아니야. 재찬 형은 아직 안 왔지?”
  
 갈 형이 네에, 했다. 이 마을에선 모두 다 마음이 왜 이렇게 복잡한가 모르겠다. 
  
  
  
 아침이 되자 마을이 다시 시끄러웠다. 날개의 밤이 이태 연속으로 있는 건 드문 일이 아니라 첫 날만 굿판을 벌이는 모양이었고, 시끄러운 건 딴 이유 때문이었다. 밤 사이에 횃대와 정자 사이에 샘이 솟았다는 것 때문에 마을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나는 아리의 피리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 쪽으로 의심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아침을 대충 먹고 횃대 근처로 가 보았다. 언제 돌아왔는지 재찬 형도 함께였다. 사람들이 모여든 무리 앞에 천동이 서 있었다. 
  
 “어제 밤에 아버님께서 다녀 가셨습니다.”
  
 천동이 말했다. 사람들이 놀랐다. 누구보다 놀란 건 물론 우리였다. 
  
 “사당에서 지난 밤에 책을 읽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다녀 가셨습니다. 마을에 물이 없는 걸 가엾이 여기셔서 샘을 주고 가겠다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아리도 나도, 도저히 담담한 표정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밤새 사당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면 아리의 피리 소리도, 나와 아리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었을 거다. 그런데 천인이 샘을 선물로 주고 갔다니. 
  
 “…괜찮아요, 아리는, 잘 됐어요. 아무도 아리 보고 뭐라 하지 않아요. 잘 됐어요.”
  
 아리가 내 손을 꼬옥 쥐고 말했다. 그야,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 거냐 물어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오지도 않은 천인이 저 샘을 주었다고 말하는 게 옳은 일인가? 내 바랑에는 어젯밤에 깎은 팽이가 들어 있었다. 천동이 다른 아이들처럼 즐겁게 뛰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만들었는데, 천동이 정말 그걸 원할까. 
  
 “…마을을 떠나요.” 
  
 갈 형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마을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싶다고… 형이….”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마을엔 붓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의심하시는 겁니까?”
  
 천동의 목소리였다. 나는 갈 형에게 대답하지 않고 천동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의 한어른과 천동의 어머니인 듯 똑같이 흰 옷을 입고 있는 여인, 그리고 젊은이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천인의 자손입니다. 저를 보려고 아버님이 오셨다는데, 어째서 믿지 못하십니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샘의 기적은 은혜로운 일이지만 저희가 소망했던 것은 지금까지 줄곧 천동께서 보위에 오르시는 것인지라….”
  
 공손한 말로 화를 억누르며 말하고 있는 것은, 무리 중의 젊은이였다. 
  
 “천인님께서 내린 기적이 오직 작은 샘 하나 뿐이라 하고, 천동께서는 아무런 징후를 보이지 않으시니…….”
  
 이 마을 사람들은 샘의 기적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마른 고장에 샘 하나가 얼마나 감사한 일일진데, 천인의 기적이 그것 뿐일 리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천인의 자손이오. 이 샘이 증거요.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오?”
  
 천동은 돌연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횃대의 바위를 익숙하게 척척 올라갔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팽이치기로 노는 동안 혼자 글을 읽으며 외따로 있더니, 남들의 눈이 없을 때에는 바위를 친구 삼아 올랐던 것일까. 사람들이 만류하기도 전에 천동은 횃대의 꼭대기에 도착해, 두 발로 섰다. 
  
 “그런 위험한 곳에…! 어서 내려 와요, 어서!”
  
 천동과 닮은, 천동의 어미일 흰 옷의 여인이 소리쳤다. 
  
 “내 몸은 어머니에게서 받았지만 내 피는 아버지에게 받았소. 당신의 역할은 이미 다했소이다.”
  
 소년은 차갑게 그 어미에게 말하고, 
  
 “이제 아버지께 받은 날개를, 펼쳐 보이겠소!”
  
 천동이 뛰어내렸다. 햇살이 소년의 등 뒤에 눈부시게 빛난다고 느낀 것은 잠시, 소년은 그대로 횃대 아래의 반석으로 거꾸러졌다. 흰 반석이, 소년의 흰 옷이,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낙이 내달려 소년을 끌어안았다. 
  
 “아가, 아가, 내 아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아버님이…, 날 받아 주시지 않았……”
  
 소년의 숨이 끊어졌다. 바랑 안에서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랑이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서,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주저앉았다. 갈 형이 오열했다. 아리가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방으로 돌아와 바랑을 열었다. 나무 팽이가 반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팽이가 계속 뱅글뱅글 돌도록 심지를 치는 요령을 가르쳐 주어야지 했었다. 다른 애들 아무도 가진 적 없는 최고의 팽이일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건네 줄 생각이었다. 이 팽이를 치면서 그 나이 또래들이랑 어울려서 그렇게 즐겁게 지내면 좋겠다고, 천인이니 상인이니 상관없이 그 나이답게 웃고 울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깎은 팽이였다. 한 사람만을 위해서 만든 팽이니, 주인을 잃은 순간에 스스로도 부서져 버린 것이다. 
  
 “…아리가 피리를 불어서 그래요, 아리가, 샘을 만들어서 그래요.”
  
 아리는 바랑을 꾸리면서 계속 훌쩍였다. 
  
 “…아가씨 탓이 아닙니다. 그 소년은…, 반천半天이 아니니까요. 언젠가는 밝혀졌을 일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의심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던 중이었고….” 
  
 재찬 형은 계속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형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었을까. 설사 형이 천인임을 보여 준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더 큰 기적을 바랐을 거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붓의 주인이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떠나시나요?”
  
 집 밖으로 나오자 집 주인인 아낙이 젖은 눈으로 물었다. 
  
 “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런 흉사를 겪게 해서 면목이 없네요. 천인의 자손을 그리 돌아가시게 했으니, 이 마을이 이제 어떻게 죄를 갚으면 좋을까요……”
  
 아낙은 연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저희야 떠도는 사람들이니 무얼 알겠습니까만…, 믿음이 깊으신 분들이시니 분명 진심이 통하지 않겠습니까. 감님이든, 천인님이든.”
  
 재찬 형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목숨이라면, 그 소년이 실제로 천인이었다고 믿게 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 누구보다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죽고 만 천동을 위해서.
  
 우리는 다시 산길로 들어섰다. 청등 홍등이 마주보고 선 길로 들어서려는데, 번쩍, 하고 하늘이 빛나더니 이내 우루루루 우레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횃대 바위 옆의 사당에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여기까지 풍겼다. 사람들이 뛰어나와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또 사당 앞에 모여서 머리를 조아릴 테지. 천인이시어 저희를 용서하소서,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낮게 하고, 자신들의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십사 빌고 빌 테지. 
  
 나는, 우리는 돌아서서 산길로 들어섰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 들었지만, 바람보다도 더 서늘한 한기가 심장에 스미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다시 날개의 밤이 찾아 오겠지만, 그 날은 더 이상 축복된 기쁨의 날이 아닐 것이다. 앞서 걸어가는 재찬 형의 등을 보면서, 나는 내가 만난 첫 천인이 재찬 형이라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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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No Profile
    사은 09.05.30 23:4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분위기가 차분한 수면같은 글이었어요.
  • No Profile
    갈원경 09.06.01 11:45 댓글 수정 삭제
    서너번을 다시 쓴 글이라 영 신경이 쓰이네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No Profile
    ida 09.06.21 11:27 댓글 수정 삭제
    아, 저 이 연작소설 정말 좋습니다. 주인공 세 명도 너무 좋고요.(한 명 늘었지만) (장군님도 있지만) 아름다운 수묵화같은 소설입니다. 잘 읽었어요.
  • No Profile
    갈원경 09.06.23 10:07 댓글 수정 삭제
    여러번 고쳐서 쓴 글인데, 지금 읽어보니 인물이 잘못 된 곳도 있고 기호가 빠진 곳도 있네요. 오래 잡고 있었는데 왜 저게 안 보였는지…. ida님 감사합니다. 좋아한다고 말해주시다니 영광이에요.
  • No Profile
    로리타 10.03.15 02:24 댓글 수정 삭제
    좋은 작품을 보는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는데요.

    제가 이 사이트를 알고 갈원경님의 좋은 글들을 읽게되서 정.말 행복합니다 ^^
  • No Profile
    윤슬 10.12.24 16:50 댓글 수정 삭제
    '아홉 개의 붓 이야기' 늘 즐겁게 읽고 있는데 요즘 들어 새 글이 올라오질 않네요.

    바쁘신 탓인가요? 느리게 올라오더라도 완결까지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유는 다 제쳐두더라도,제가 굉장히 재밌게 읽고 있거든요!^^)
    항상 응원할께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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