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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화신은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다

김수륜

 

어린 고양이 은비는 쫓기고 있었다. 어깨에 딱딱하게 굳은 피딱지가 묻었고, 핏방울이 배어나오는 발목을 약간 절었지만 몸을 낮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빛은 조금도 기운을 잃지 않고 예리하게 빛났다. 쫓기기 시작한 지 벌써 이틀째였다.


흥분한 탓에 은비의 분홍색 코가 새빨갰다. 추적자를 찾느라 연신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그 추적자는 고양이의 귀를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움직였고, 은비의 감각을 속이기 위해 적절히 소리를 냈으며,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은비를 끈기 있게 쫓아왔다. 


그 바람에 은비는 처음으로 정착한 동네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자주 물이 흐르는 물 자리, 며칠 쫄쫄 굶을 때 갈 수 있는 밥 자리도 알아두었고, 비가 들이치지 않는 잠자리까지 몇 군데 확보해둔 동네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고양이의 영역에 들어가는 건 아주 무서웠다. 은비는 아직 한 살이 되지 않은 어린 고양이다. 길에서 오래 생활하며 살아남아서 산전수전 겪은 어른 고양이들과 맞서기에는 너무 어렸다. 
하지만, 일단 살아남고 볼 일이다. 
다른 고양이에게 물어뜯겨 죽을지도 모르는 것은 그 때 가서 맞서 싸울 일이고, 지금 당장은 추적자에게서 살아남아야 한다.


처음 은비가 추적자에게 쫓기게 된 것은 그가 다른 고양이를 죽이는 걸 방해했기 때문이다. 추적자는 칼을 휘둘러 어린 고양이를 죽였고, 마을에서 터줏대감으로 오래 산 늙은 고양이를 이어서 죽이려 하고 있었다.가로등 불빛 아래 털과 피가 범벅된 칼을 본 순간 은비는 공포감에 꼬리를 펑 부풀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절로 꼬리가 다리 사이로 말려들어갔다. 자정을 훨씬 넘긴 심야의 어두운 골목에는 고양이의 피가 흩뿌려져 있을 뿐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괴괴한 정적 속에서 귀를 눕히고 진땀을 흘리며 추적자에게서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던 은비의 코에 냄새가 스몄다. 


피 냄새, 땀 냄새, 두려움의 냄새만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있었다. 희미했지만 인간의 도시에서 길바닥을 돌아다니며 무수히 맡은 냄새들 중에는 결단코 없었던 것이었다. 머리를 흔들던 은비는 그 냄새가 냄새라기보다 질감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저 칼을 쥔 손을 그대로 두면 안된다는 강박이 머리를 꿰뚫듯이 스쳐지나갔다. 
저것은 단순한 살해나 사냥이 아니라 재해의 징조다. 


마치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았다. 은비는 놀라거나 당황하는 대신 벌떡 일어서서 내달렸다. 부드러운 발바닥이 담벼락을 딛고 뛰어내렸다. 그 곳에는 평소 은비가, 은비 뿐 아니라 모든 고양이들이 두려워 피해가는 진돗개가 있었다. 그 개는 유난히 대문 밖을 지나는 모든 생물들에게 사납게 굴었다. 고양이, 떠돌이개, 사람들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악스럽게 짖어대는 개를 피해 멀리 돌아갔다. 


개집에서 자고 있던 개가 벌떡 일어나 뛰쳐나왔다. 물리면 은비의 몸뚱이 쯤은 가볍게 찢어낼 것 같은 턱이 벌어지는 순간, 은비는 온몸에 바짝 힘을 주며 있는 힘껏 하악질을 날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벼락으로 뛰어올라갔다. 은비의 등 뒤에서 개의 턱이 딱 다물리는 소리가 났다. 꼬리가 다리 사이로 한껏 말려 올라가지 않았다면 분명 꼬리가 뜯겨져버렸을 것이다. 


“컹컹컹! 크르르르! 컹컹!”
쇠사슬을 묶어두었던 기둥이 가볍게 뽑혀나오며 진돗개가 뛰쳐나온 것이다. 저 개를 묶어둔 기둥이 얼마나 헐겁게 꽂혀 있는지, 낡은 철제 대문의 아래 틈이 진돗개를 통과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얼마나 넓은지 동네 고양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큰 코 다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비는 부리나케 담벼락 위를 달렸다. 내려간다면 개한테 죽을지도 몰랐다. 개가 하도 매섭게 짖어대서 놀란 살해범이 손에 들고 있던 늙은 고양이를 놓쳤다. 늙은 고양이는 재빨리 바닥을 기어 담벼락 틈으로 훌렁 넘어가버렸다. 살해범의 눈이 분노로 번뜩이며 진돗개를 노려보았다.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려던 진돗개가 살해범에게 겁을 먹고 발을 멈췄다. 진돗개가 더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은비는 당황한 나머지 몸을 숨겼던 낡은 양옥 2층 난간에서 머리를 꺼내 상황을 살폈다. 


시야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어둠을 꿰뚫듯 살해범의 눈이 은비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게 사흘 전의 일이다.
다음 날 밤부터 살해범이 동네를 배회하며 은비를 쫓기 시작했다. 


해가 뜰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깊이 잠들어있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면 살해범은 추적을 멈추고 떠난다. 그러면 은비도 숨을 돌릴 수 있다. 낮 동안 자고, 뭔가 먹은 다음 부지런히 움직여 동네를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밤에 추적이 시작될 때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꼬리 떨어질 뻔했다. 살해범은 은비의 냄새를 알고 추적하는 게 분명했다. 은비도 살해범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해범이 풍기는 그 무겁고 질척한 질감은 도저히 숨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은비는 부지런히 낙엽과 진흙 위를 굴러서 털에 잔뜩 낙엽 삭은 냄새를 묻히고, 몸을 핥아 깨끗이하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도망쳤다. 


살해범이 끈질기게 쫓아오는 것은 은비의 탓이 아니었다. 은비가 살해범 자신도 모르는 살해범의 정체를 직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살해범 역시 은비의 정체를 은비 스스로보다 먼저 깨달았다. 양옥 2층 난간에서 빼꼼 머리를 내민 갈색 고양이의 눈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살해범을 다그쳤다. 


당장, 저 고양이를 죽여야 한다.
어리고 약한 지금. 천재일우의 기회다. 

 

(전문은 20주년 기념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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