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돌로레스 클레이븐 재판

2023.09.29 01:1109.29

재판

돌로레스 클레이븐

 

비대한 근육이 갑옷처럼 몸을 감싼 사내는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등 뒤로 묶인 양손에는 장난감같이 생긴 은 사슬이 찰랑거렸다. 금방이라도 힘을 주면 가느다란 사슬 따위는 끊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물론, 그가 무죄를 받을 일은 없었다. 아직도 얼굴에 들러붙은, 다 지워지지 않은 검붉은 액체가 그를 현행범이라 말해주었다.

“제가 죽인 게 아니에요! 먼저 선화가 죽였어요! 그 다음에는 상혁이가 그랬고요!”

상투적인 항변이었다. 이대로 피의자가 조서를 엉망으로 만드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다빈은 옷매무새를 다듬고서 천천히 의뢰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근육질의 남자는 다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에 서린 당혹감과 놀람을 엿보았다. 특별할 게 없는 눈빛이었다. 죄를 저지른 어린 양들이 도살장 앞에 끌려와서 지을 눈빛은 많지 않았다.

다빈은 변호사증을 보이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김도준 씨의 변호사입니다. 아직 조서 작성 전이죠?”

“네. 작성 전이긴 한데.”

경찰은 피투성이인 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자, 도준 씨. 협조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렇고 좋게 말하고 있는 건 그쪽이 빠져나갈 건덕지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건 차차 따져볼 일이죠. 성함이…….”

경찰은 명찰을 내보였다. 그러자 플라스틱 케이스 속에서 공효석이란 이름이 반짝거렸다. 다빈은 피투성이 남자 옆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정장 치마가 꽉 끼는 바람에 불편했지만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변호가 먼저였다.

다빈은 정석적으로 조서 작성에 참관하려 했다.

조서는 벌써 다빈이 오기 전에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도준의 사인뿐이었다. 다빈은 항의했다. 변호사가 선임되었는데, 변호사가 오기도 전에 미리 조서를 작성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였다. 그러나 그녀의 항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효석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어차피 너무 간단한 사건이라 변호사님이 계시나 안 계시나 변하는 게 없을걸요.”

“그건 봐야 아는 거죠.”

효석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작성한 조서를 다빈에게 내밀었다.

사건은 간단했다. 도준과 그의 친구 셋이 외딴섬으로 향했다. 그곳은 도준의 아버지가 산 무인도였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한 이들은 식량과 술을 바리바리 싸 들고 섬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섬에 들어간 지 보름 뒤에 피투성이가 된 도준이 나타났다. 그는 탈진한 상태로 모터보트를 타고 근처 어촌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도준을 보호하고서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섬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경찰들이 마주한 장면은 처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별장은 불에 타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람 유골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별장 밖 숲에서는 여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여자는 토막이 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흉기가 발견되었다. 커다란 마체테였다. 흔히 ‘벌목도’라고 불리는 거대한 칼은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부둣가에서는 피 묻은 도끼도 발견되었다. 나머지 한 명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렇게 병원으로 이송되었던 도준은 조사가 시작된 지 5시간 만에 긴급 체포되었다.

조서를 살핀 다빈은 손톱을 긁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좋지 않았다. 일단 섬에 들어간 네 명 중 둘은 죽었고, 하나는 실종이었다. 그중에 제정신인 상태로 발견된 것은 도준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발견 당시부터 피투성이로 발견되었고, 조사 결과 마체테와 도끼에서 도준의 지문이 나왔다. 그리고 두 개의 흉기 역시 여행 전에 도준이 직접 산 물건이었다. 대략 1년 전에 산 물건이었다. 다빈은 도준에게 물었다.

“김도준 씨. 이 물건들은 왜 샀는지 기억나시나요?”

“아버지, 아버지께서 섬에, 집을……. 집을 짓는다고 해서 산 거예요.”

그는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경찰은 왜 아버지에게 선물 드린 도구로 사람들을 해쳤느냐 물었다. 도준은 고개를 저으면서 소리쳤다.

“나, 난 아니에요! 난 그걸로 애들을 해치지 않았어요!”

“김도준 씨. 그만 하세요.”

다빈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단했다. 이건 조서를 쓰는 과정으로 조사의 첫 시작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이 틀어지면 앞으로의 재판 과정이 전부 어그러질 수도 있노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도준은 조금 진정한 듯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내가 죽인 게 아니에요.”

“그럼, 누가 죽였죠?”

경찰이 묻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섬에 도착해서 우린 술부터 마셨어요. 모든 게 다 잘 굴러갔죠.”

그는 울먹이면서 섬에 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와. 여기가 한국이라고?”

상혁은 똥배를 두드리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이마 위에 올려 쓴 뒤에 도준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야, 진짜 내가 친구 복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야. 고마우면 진즉에 빌려 간 300이나 내놓으셔.”

“알았어. 300원 나중에 줄게. 야. 진짜 대박이다. 넌 어디서 이렇게 보트 운전을 배운 거야?”

“하와이에서. 15살 때.”

“15살? 세상에. 아니, 네 아버지는 15살짜리에게 보트 운전을 시켰다고? 대단하시다, 야. 하긴 그렇게 깨신 분이니까 이런 곳을 사서 별장까지 지으셨지.”

호리호리하게 생긴 호민은 락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라 마시는 중이었다. 놈은 부실하게 갈비뼈가 드러난 새가슴을 펴고서 잔을 돌렸다. 그 옆에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 하나가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호민의 여자친구인 연화였다.

그녀는 예정에 없던 손님이었다. 본래는 친한 친구 셋이 군대 가기 전에 모여서 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군에 가기 직전인 상혁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하지만 호민의 여자친구인 연화는 이 모임을 영 마뜩잖게 보았다.

그녀는 대놓고 험한 말을 했다. 남자 셋이 섬에 들어가면 여자 셋을 끼고 들어가지 않느냐는 둥. 남자 셋이 뭐 하려고 섬에 들어가냐는 둥. 별 요상한 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감시하겠다면서 기어코 여행길에 따라붙었다. 때문에 도준은 영 그녀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서 저런 소리를 대놓고 하는 걸까? 거기다 비키니 밖으로 노출된 문신은 조금 께름칙했다. 그녀는 평소에도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니면서 헤픈 느낌을 주었다. 엉덩이골 바로 위에 찍힌 날개 문신은 어딘지 모르게 몸을 파는 여성처럼 보였다. 때문에 도준은 빨리 여행이 끝나기를 바랐다.

“와. 물 튀기는 것 봐.”

연화는 배 밖으로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호민은 위스키를 마시면서 웃었고, 그걸 본 상혁도 호민과 마주 보고 앉아 테이블에 놓인 주전부리를 먹었다. 간단한 빵 쪼가리가 게걸스럽게 상혁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대한민국 북단의 외딴 이름 없는 섬에 도착했다. 우뚝 솟은 바위 암초가 즐비했기에 도준은 보트 속도를 줄이고서 천천히 섬으로 접근했다. 섬 가까이 다가가자, 새하얀 백사장이 보였다. 백사장 끝에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두가 보였다.

도준은 부둣가에 배를 댔다. 그러자 호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상혁이 던진 밧줄을 잡아 들고서 부두에 묶었다. 보트가 단단히 고정되자, 세 남자는 짐을 들고 보트에서 내렸다. 일주일 치 먹거리와 놀거리가 순차적으로 부두 위로 옮겨졌다.

“좋아. 좋아. 그럼, 우리 별장은 어디에 있는 거야?”

“저기. 해변가에.”

도준이 손으로 해변가와 숲의 경계를 가리켰다. 그러자 별장이라기에는 조금 초라한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농막이라 해도 될 만큼 집은 작았다. 거기다 지푸라기 따위와 나무를 엮어 만든 터라 원시적이기 짝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오두막을 본 일행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상혁은 고기 구워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고, 호민은 조금 실망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술이 있어서 괜찮노라 말했다. 하지만 선화는 오만상을 다 쓰면서 벌레가 많노라 소리쳤다.

“당연하지. 여긴 무인도라고. 여기서 벌레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잖아! 이씨. 몰라!”

선화가 화를 내자, 호민은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그녀는 단단히 화난 듯 보였다. 상혁과 도준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벌써 저러면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일단은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야 했기에 두 사람은 짐을 옮겼다.

얼마나 짐을 옮겼을까? 어디선가 여자 비명 소리가 났다. 도준과 상혁은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 소리는 오두막 뒤쪽에서 났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간 도준은 호민과 선화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말하자, 숲 안쪽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호민이 소리쳤다.

“야, 여기 와서 이거 봐봐!”

도준과 상혁은 뭔데 그러느냐며 호민의 목소리를 따라 숲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자 수풀 속 작은 공터에 서 있는 호민과 선화를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괴이쩍은 얼굴로 도준 쪽을 쳐다보았다. 뭐 때문에 저러나 싶어 도준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뭔데? 왜 그러는데?”

뒤따라오던 상혁이 묻자, 호민은 말없이 선화를 안아주며 공터 구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공터 구석에는 쓰러진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오래된 고목처럼 보였다. 썩어서 쓰러진 건지, 아니면 바람에 쓰러진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무는 검게 변한 뿌리를 허공에 들고 있었다.

일행은 뿌리 아래 드러난 허연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사람 해골이었다. 네 사람 중에 유골 근처에 다가간 것은 상혁 뿐이었다. 그는 뿌리 사이에 파묻혀 있던 유골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도준이 그를 말렸지만, 그는 해골들의 모습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와, 딱 봐도 이거 겁나 오래된 해골이야.”

“어떻게 알아?”

“해골 주위로 나무 뿌리가 얽혀 있잖아. 누가 파묻었으면 이렇게 뼈와 뿌리가 엉켜 있을 리 없지. 그나저나 죄다 괴상하네.”

“뭐가 괴상한데?”

호민이 묻자, 상혁은 나뭇가지를 주워 유골을 뒤적거렸다. 흙을 흩어내자, 기다란 뼈가 튀어나왔다. 뼈와 함께 해골이 같이 흙 속에서 딸려 나왔다. 그러자 해골에 박힌 이빨 조각이 보였다. 선화는 기겁하면서 자리를 떴다.

“놀러와서 왜 이런 걸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칫.”

호민은 그녀의 뒤를 쫓아 숲 밖으로 나갔다. 도준은 상혁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오래된 뼈는 3등분으로 조각이 났다. 눈대중이었지만, 거의 정확히 이빨이 박힌 부분을 따라 조각난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 조각난 뼈의 단면에서는 허연 실 같은 벌레들이 튀어나왔다.

상혁이 기겁을 하면서 펄쩍 뛰자, 도준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그러게 그런 걸 왜 건드리고 난리야?”

“신기하니까 그렇지.”

“너 밥먹기 전에 손 세 번씩 꼭 씻어라.”

상혁은 알겠노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오두막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왜 아버지는 이런 곳을 산 걸까? 상당히 오래전부터 무인도라고 들었는데, 저 유골들은 대체 누구의 뼈란 말인가?

이 모든 기이한 사건을 뒤로 하고 상혁과 도준은 놀기 위해 기본적인 조처를 했다.

오두막 뒤 숲속에 세운 작은 창고에서 발전기를 돌렸다. 기름 발전기라 발전기를 돌리기 무섭게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도준은 발전기의 기름을 살폈다. 기름 자체는 빨간 플라스틱 석유통으로 5통 정도 남아 있었다. 기름을 확인한 그는 장작을 쪼갰다. 고기를 꼬치에 끼우는 것은 상혁의 몫이었다. 냉장고가 서서히 냉기를 머금기 시작하자, 상혁은 냉장고 속에 맥주를 집어넣었다.

오늘 밤은 최고의 밤이 될 것이다. 도준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그래요. 유골은 도준 씨 말대로 근대 사람 유골은 아니었어요. 못해도 400년 전 사람 유골이더군요. 토양 성분 덕에 어찌어찌 남은 모양인데.”

검사는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다 도준을 바라보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깐깐한 두 눈이 여유롭게 눈웃음쳤다. 검사는 도준에게 따져 묻듯 말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그래서 피해자 중 한 명의 여자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검사는 컴퓨터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무미건조한 검찰 조사실 안에서 도준은 다빈을 올려다보았다. 다빈은 조용히 그에게 속삭였다.

“사실대로 말씀하시면 돼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준이 말했다.

“모르겠어요. 걔는 솔직히 아는 애도 아니었어요. 아까 말했듯이 호민이 따라온 거예요.”

“그래서 계획했던 살인이 어긋났나요?”

“살인이라뇨! 아니에요!”

“검사님. 지금 발언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검사는 웃으면서 미안하노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미안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토끼의 발버둥이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살쾡이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음, 일단 첫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날도…….”

“다음날도 좋았어요. 문제는 3일째 되던 날 일어났죠.”

“그럼, 이틀 동안은 잘 먹고 잘 놀았네. 인터넷 기록 보니까 넷이 게임도 했더구먼.”

도준은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셋이었어요. 선화 씨는 못마땅하게 호민이 무릎 위에 앉아 있었거든요. 그러다 둘이 숲속으로 들어갔었죠. 저랑 상혁이는 계속 게임을 하다가 둘이 하는 걸 훔쳐보긴 했는데…….”

“도촬도 했니?”

도준이 당황한 듯 입을 벌리자, 다빈은 도준에게 말했다.

“불리하면 답변할 필요 없어요.”

“아뇨, 전 그런 짓 안 해요. 그것도 오줌 누다가 본 거라고요. 일부러 본 게 아니라고요.”

검사는 턱을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네 핸드폰은 바닷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테니까. 참 편리한 일이야.”

“제 의뢰인은 사건 외의 분리한 진술을 심문받을…….”

“알아요, 다빈 씨. 이제 안 그럴 테니까 가만히 계십쇼.”

검사는 다빈의 말을 끊고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다빈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검사님. 검사님은 피의자의 권리에 관해 배우신 바가 없으신가 봐요?”

“알죠. 알죠. 빌어먹을 변호 받을 권리 말입니다. 하지만 그쪽 꿈자리는 뒤숭숭하지 않은가 봐요. 척 봐도 범죄자인데 당신 같은 족속들 때문에 못 집어넣고 있잖아요. 피해자들 생각도 좀 하면서 돈을 버셔야지.”

“그쪽도 잠 잘 자잖아요. 억울한 사람도 잡아넣으신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던데. 송승연 검사님.”

송승연은 입가를 씩 밀어 올리면서 여유롭게 말했다.

“뭐, 제가 판결하나요? 판결은 법원에서 하는 거죠. 그리고 여기까지 올 정도면 이미 반 이상 범죄자인 거요. 당신네 실력이 부족해서 의뢰인 감방에 처넣게 된 거지 내가 사악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라고요. 이번 건도 법정에서 보면 알겠죠. 조서에 적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법원이 받아 줄지는 의문이지만.”

검사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다빈은 희미하게 눈웃음을 흘렸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죠.”

“벌써 대 본 것 같지만, 좋습니다. 일단은 계속해봅시다. 도준 씨.”

승연이 말하자, 도준은 코를 훌쩍이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

 

일이 벌어진 건 사흘째 되던 아침이었다.

선화가 앓아누운 것이다. 세 남자는 처음에는 단순 감기일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친구인 호민이 주기적으로 오두막 속을 들여다보고 그녀의 용태를 살폈다. 그동안 상혁과 도준은 낚시를 즐겼다.

물고기는 별로 없었다. 죄다 피라미 새끼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입질했다. 그렇게 낚시가 시시하게 끝나갈 때 즈음. 멀리서 호민이 달려왔다. 그는 손을 흔들면서 도준과 상혁을 불렀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면서 왜 그러느냐 소리쳤지만, 그는 말없이 모래사장을 내달렸다. 당혹감에 굳어버린 호민은 도준과 상혁을 보자, 거의 울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야, 이거 어쩌지? 이거 어쩌면 좋냐?”

“뭐가 어쩌면 좋아?”

상혁이 되묻자, 호민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오두막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두 사람은 호민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호민은 안절부절못하면서 말했다.

“지,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야 해! 맞아. 병원에 가야 해. 그러면 발에 난 상처에서 나오는 하얀 벌레도 어떻게 될 거야!”

벌레라니. 도준은 대체 무슨 소리냐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해변을 가로질렀다. 세 사람이 오두막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10여 분이 흐른 뒤였다.

거의 실성한 호민을 상혁이 말리는 사이, 도준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안에는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선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자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입가에는 게거품이 일었다. 이미 두 눈두덩이가 푹 꺼져 얼굴 아래 가려져 있던 해골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도준은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짧은 셔츠 너머에 드러난 백옥 같은 살이 드러났다. 아픈 와중에도 수영을 하고 싶었던걸까? 그녀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상태였다. 훤히 드러난 맨 살갗에는 군데군데 멍자국이 보였다. 얼핏 보면 보라색 호피 무늬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숨을 쉬는 걸까 확인하고 싶었지만, 도준은 도무지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멍자국 곳곳에는 허연 실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꿈틀거리는 벌레는 몸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었다. 그것이 살을 파고드는 건지 아니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도준은 손에 쥐고 있던 이불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진저리를 쳤다.

“씨발.”

도준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그는 멍하니 호민을 바라보다가 오두막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말이다. 그는 혹시라도 누가 볼까 싶어(무인도란 사실도 잠시 잊을 정도의 충격이라고 도준은 진술했다.) 오두막 문을 닫고 호민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새끼야. 너, 뭔 짓을 한 거야?”

“모르겠어! 난 술 마시고 했는데, 숲속에서 했는데, 어제 숲속에서 발을 베였던 거 같아. 갑자기 발이 아프다고 하더니……. 아침부터 갑자기 열이 나고…….”

“씨발 이제 뭐라고 할 건데?”

“왜? 무슨 일인데?”

상혁이 묻자, 도준은 오두막 안을 가리켰다. 말보다는 보는 게 더 빨랐다. 상혁은 심각한 얼굴로 오두막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상혁이 말했다.

“뭐야, 멀쩡한데.”

호민과 도준은 고개를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오두막 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그러자 오두막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선화의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선화에게 다가갔다.

“선화 씨. 이제 몸은 괜찮아요?”

선화는 대답이 없었다. 상혁이 선화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자, 그제야 선화는 고개를 돌렸다. 허옇게 뜬 두 눈이 상혁을 노려보았다. 그가 숨을 죽이던 그때. 선화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상혁에게 달려들었다. 이 뚱뚱한 놈은 달려드는 선화를 피하지 못했다.

선화는 짐승처럼 상혁의 목을 물어뜯었다. 피가 오두막 안 곳곳에 튀었다. 구석에 둔 짐과 현관에 놓인 신발, 침구류에도 튀었다. 상혁은 선화를 떼어 내려는 듯 몸부림을 쳤다. 도준은 곧장 선화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챈 도준이 상혁에게서 선화를 떼어냈다. 그러자 그녀의 이빨 사이에 물린 상혁의 목덜미 살점이 뜯겨 나왔다. 그러자 목에서 피분수를 쏟아내던 상혁은 뒤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호민은 그의 목에 난 상처를 손으로 눌렀다. 그러자 선화는 몸을 비틀어대면서 도준을 물어뜯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작은 몸으로 이런 힘을 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헬스장에서 꾸준히 운동한 도준에게 여자 하나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몸을 비트는 선화를 들어 올렸다. 발이 땅바닥 위에서 들리자, 그녀는 발버둥을 치면서 도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든 말든 도준은 선화를 오두막 문밖으로 멀찍이 집어 던졌다. 그러자 앞으로 고꾸라지듯 모래사장에 처박힌 선화는 뒤집힌 태엽 인형처럼 몸부림을 쳤다. 그 틈을 타 호민과 도준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괴성이 울려 퍼졌다. 도준은 등으로 문을 막다가 자기 손을 문뜩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에 엉킨 허연 실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털어대면서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야, 상혁이. 상혁이 지혈해!”

호민은 이미 하고 있노라 소리쳤다. 하지만 상처는 꽤 심각했다. 호민의 손으로 피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피는 벌써 호민의 셔츠를 반 이상 적셨다. 상혁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서 상혁을 바라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우지끈하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곧 소리는 잠잠해졌다.

도준은 혹시 몰라 문간에 서서 문을 막았다. 이게 무슨 일일까? 두 사람은 눈빛으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좀비지? 이거 좀비 맞지?”

호민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도준은 고개를 저었다.

“씨발. 좀비가 어디 있냐? 뭐, 부산 가는 열차도 아니고 왜 여기에 좀비가 있어?”

“하지만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저 헤픈 게 어디서 약이라도 잘못 맞고 온 게 아닐까?”

도준이 중얼거리자, 호민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쌍욕이 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도준은 그를 진정시키면서 화제를 돌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거, 상혁이는 어때? 의식 있냐?”

호민은 말없이 상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양팔은 축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웅덩이가 고일 만큼 피가 흘러내린 뒤였다. 누가 보아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호민은 피투성이가 된 셔츠를 벗으면서 말했다.

“씨발. 이게 뭐야? 어쩐지 무인도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찜찜하다 했다. 이 씹새야.”

“하. 웃기시네. 좋다고 따라온 게 누군데? 내가 너네들 납치해서 여기 데려왔냐? 너희들이 동의해서 온 거야! 네가 쟤 안 데려왔으면 우리끼리 더 재미있게 놀았을 거다. 씨발, 발정나서 매일 밤 숲속에 들어가는 것도 참아줬더니.”

도준이 중얼거리자, 호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빼빼 마른 가슴을 쫙 펴고서 도준에게 다가왔다. 도준은 문을 등지고서 호민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호민이 달려들자 그는 호민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호민은 가슴을 움켜쥐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가 캑캑거리면서 기침을 내자 어디선가 괴성이 울렸다. 꽤 먼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선화가 멀찍이 가버린 것 같았다. 도준은 호민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좀비든 아니든 일단, 닥치고 조용히 하자. 알겠냐? 그리고 네 정신 나간 여자친구 말야. 엉덩이골 위에다 문신한 게 제정신은 아니야. 그건 인정하지?”

“씨발, 내가 새기 자고 한 거란 말야.”

“그럼, 너도 제정신 아냐. 새끼야. 쟤 너 군대 가면 분명…….”

도준은 말을 멈추었다. 어둑한 오두막 안에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빛 아래서 상혁은 상체를 일으켰다. 도준이 상혁이의 이름을 부르자, 호민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호민을 바라보던 상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호민에게 달려들었다. 호민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의 이빨은 이미 호민의 오른팔에 깊숙이 박힌 뒤였다.

호민은 비명을 질렀다. 도준은 부리나케 상혁의 비대한 몸을 발로 걷어찼다. 물이 가득 찬 포대 자루를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가 옆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지자, 호민의 팔뚝의 살점이 사탕 포장지처럼 뜯겼다. 호민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도준은 그를 데리고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그가 문을 닫자, 이번에는 오두막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하리만큼 주위는 고요했고, 선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준은 말없이 호민을 바라보았다. 호민은 두려운 얼굴로 오른팔에 난 상처를 손으로 감쌌다. 하지만 이미 뼈가 드러날 만큼 심각한 상처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민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냐. 난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렇지? 도준아?”

호민이 말하기 무섭게 도준은 헐레벌떡 창고를 향해 뛰었다. 호민이 뒤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그는 더 빨리 창고로 뛰어갔다. 도중에 새된 비명과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무기가 필요했다. 그의 머리에 든 생각은 창고 벽에 걸어둔 마체테와 손도끼였다. 예전에 가져다 놓은 공구들이었다.

얼마 지니지 않아 창고 건물이 나왔다. 낡은 슬레이트 가건물의 문을 연 도준은 안에서 창고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숲의 습기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문짝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휘청거렸다. 도준은 숨을 헐떡이면서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덜덜덜 돌아가는 기름 발전기가 기름 냄새를 뿜어댔다. 그 옆에는 빨간 기름통이 놓여 있었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도 먼지 덮인 창고 안에는 큼지막한 도끼와 마체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도끼와 마체테를 양손에 들었다. 하나 보다는 두 개가 더 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는 마체테를 휘둘러보았다. 묵직한 감각이 균형감 있게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손도끼는 가벼워서 휘두르기 쉬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고 앞에 고꾸라진 호민이 보였다. 그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도준은 숨을 몰아쉬면서 창고를 빠져나와 그를 불렀다. 하지만 도준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도준을 본 호민은 턱을 딱딱 부딪치면서 몸을 돌려 도준에게 다가왔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걸 본 도준은 숲으로 도망쳤다.

곧이어 괴성이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하지만 슬리퍼를 신고 숲을 달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도준은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뒤에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도준이 휘청 이는 사이, 호민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도준에게 새하얀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도준 역시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넘어지면서 도끼를 휘둘렀는지도 몰랐다. 일어나 보니 도끼는 왼손을 빠져나가 호민의 정수리에 박혀 있었다. 호민은 진저리를 치며 도끼 자루를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더니 벌레가 버둥거리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상황이 명확해졌다. 이건 영화와 드라마 속에 나온 좀비였다. 확실했다. 만일 이게 좀비라면 우선, 상혁이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선화를 찾아야 했다. 후에 도준은 수사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단 제 안전도 중요했어요. 그래서 호민이를 그렇게 한 거예요.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감염된 이들 중 누구라도 섬 밖으로 나갔다가 세상이 망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라도 놈들을 봤으면 같은 생각했을 거예요. 제 안전도 중요하지만, 일단 해결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날뛰는 상혁이랑, 선화를 죽여야 했어요. 하지만 선화는 찾을 수 없었어요.”

도준은 어쩔 수 없이 영화와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했다고 말했다.

그는 호민을 토막 냈다. 머리를 찍었음에도 몸이 계속 꿈틀거렸다. 도준은 진저리를 치면서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머리를 잘랐다. 그러자 호민의 눈에서 허연 기생충 같은 것이 기어 나왔다. 하는 수 없이 도준은 손도끼로 양팔과 다리를 잘랐다. 하지만 토막 난 호민은 여전히 꿈틀거렸다.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눈알은 도준을 쫓는 중이었다. 그는 손도끼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도준은 그것의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선화가 튀어나올지 몰랐지만, 일단 지금은 다른 할 일이 있었다. 상혁을 처리해야 했다. 도준은 조심스럽게 창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창고 안에서 기름통을 꺼냈다. 묵직한 기름통을 들고서 그는 천천히 오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기름을 부은 그는 마체테로 오두막의 전선을 잘랐다.

스파크가 튀는 전선이 기름 위에 떨어지자, 오두막은 불길에 휩싸였다. 그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상혁이 안에서 뛰쳐나올까 싶었었다. 하지만 거센 불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준은 씁쓸하게 불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선화를 찾아야 했다. 그녀를 찾아 죽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선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섬을 빠져나오기 전까지도 그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하. 진짜 골 때리는 이야기야. 안 그래?”

송승연은 침대맡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말했다.

“지가 죽여놓고 좀비라니. 차라리 대낮에 외계인이 와서 친구들을 죽였다고 하는 게 더 신선하겠어.”

“신선은 무슨.”

졸린 목소리 하나가 이불을 들추고 얼굴을 내보였다. 그러자 화장이 지워진 다빈이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모으고서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대어 앉아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봤을 때 말이지. 그 근육 덩어리는 그냥 맛이 간 거야. 아마, 스테로이드를 잘못 맞았겠지. 그래서 지가 죽여놓고서 현실 도피하는 거고. 모레 약물 검사 랑 정신 분석한다며.”

“하든 말든. 어차피 사이코패스든 아니든, 토막살인범이라고. 정상으로 나올 리 없어.”

송승연 검사가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말하자, 다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면서 말했다.

“하긴. 아무튼 자기 법원에서 너무 몰아붙이지는 마. 알았지? 이거 3심까지 가야 해. 그래야 나도 벌어먹지.”

“알아. 알아. 2심은 줄테니까 3심은 내가 가져가게 둬 알겠지?”

승연이 말하자, 다빈은 그의 등을 손으로 두드렸다. 담배를 달라고 손짓하자, 승연은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건넸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리드미컬하게 얽히며 불붙은 담배를 주고받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조금 흔들리자, 담뱃재가 침대 위에 흩뿌려졌다. 다빈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깊이 빨았다. 붉게 탄 불꽃이 잿가루를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다빈은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국과수에서 뭐, 신종 선충을 발견했다며?”

“그렇긴 한데, 선충이란 게 매년 몇십 종류씩 신종이 발견된다나 봐. 연구는 더 해봐야겠지만, 특별한 게 나올 게 없데.”

“그럼 그렇지. 좀비는 개뿔.”

다빈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고서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담배꽁초를 지져 껐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 내가 그 애새끼 부모 앞에서 얼마나 알랑방귀 뀌었는지 알아? 뭐, 자기 애가 얼마나 착한지 아냐면서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네 시간씩이나 듣고 있었어. 하여간 뻔뻔한 건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니까. 3심까지는 돈을 받아 낼 사람들이지만. 에휴,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그래도 우린 그런 버러지들보단 성공한 인생 아냐? 그런 민초들이 백날 일해야 누릴 수 없는 걸 다 가졌잖아? 안 그래?”

“그건 맞아. 이런 5성급 호텔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는 건 아무도 못 하는 일이긴 하지. 어때? 한 번 더?”

“초반에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송승연 검사님~.”

“아휴. 3심 갈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릴게요~. 김다빈 변호사님~.”

두 법조인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 도준은 멍하니 철창 안에서 수감복을 입은 상태로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변호사가 가져올 낭보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낭보가 올까?

그는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을수록 그의 기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뒤엉켰다. 어쩌면 내가 친구들을 죄다 죽인 건 아닐까?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 광기 어린 시체의 울음소리와 그 냄새는 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선화가 저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

 

도준은 법정에서 그렇게 진술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글자글하게 늙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안경을 벗으면서 말했다.

“피고, 법정에서 거짓 진술을 하는 건 위증죄입니다. 알고는 계십니까?”

“전 맹세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준이 말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코웃음 치면서 검사에게 말했다.

“검사 측. 피고의 혐의 중에 약물 관련 사항도 있습니까?”

“아, 넣지 않았습니다, 재판장님. 약물 검사 결과 전부 음성이 나왔거든요.”

송승연 검사가 말하자, 다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님. 부디 객관적으로 피고의 진술을 바라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수사대가 시신에서 채취한 선충을 증거로 제시하겠습니다. 이 선충은…….”

다빈은 선충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 신종 선충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읊었다. 선충이 혈관을 타고 뇌로 올라가 인간의 대뇌를 자극할 수 있다는 보고서였다. 하지만 재판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빈은 계속 이야기했다.

“따라서 오히려 도준 씨는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도 토막 난 호민 씨의 몸에는 방어흔이 보였고, 선충이 다량 증식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였다. 방청석에서 고성이 터졌다. 도준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60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남자가 그에게 물병을 집어던졌다. 청원경찰의 제지 덕에 물병은 재판장 계단 위에 떨어졌다. 도준은 겁먹은 얼굴로 잘못했노라고 호민의 아버지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들은 이는 다빈뿐이었다.

“선충이 사람을 괴물로 바꾼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기각합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소. 불확실한 이야기를 법정으로 끌고 오는 건 옳지 않소.”

“하지만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가운 형태의 자주색 법복을 입은 판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변호인. 조용히 하시오. 그런 괴변은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을 겁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한쪽 말만 들으시는 거죠? 확실히 증인의 말대로 오두막에서 발견된 시신에는 목에 상흔이 발견되었습니다. 목뼈에 심한 충격으로 금이 가 있었고, 토막 난 시신의 오른팔에서도 불탄 시신의 치열과 같은 치열이 발견되었습니다!”

“정숙하시오. 변호인. 계속 그런 식으로 딴지 걸면 법정에서 퇴장하라고 요구할 겁니다. 알겠소? 최종심의 후, 판결하겠습니다. 10분 휴정하죠.”

다빈은 산처럼 쌓인 증거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과학적인 증거 자료이자, 동시에 지루하고 알아먹기 힘든 증거들이었다. 이런 증거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뢰인들은 좋아하는 증거였다. 도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진심으로 무죄가 나올지도 모른다 여기는 듯 보였다. 그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학자들이 보증해주는 증거라면 다 받아줄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된 후부터는 도준은 줄곧 울상을 지었다. 죄수복을 입은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다빈은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도준 씨?”

“결국에는 살인자가 되겠죠? 하긴, 나도 내가 겪은 걸 아직도 못 믿겠어요.”

“배심원들은 다를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빈은 지친 말에게 당근을 내민 마부처럼 말했다. 그로부터 20분 뒤. 배심원과 판사는 도준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했다. 도준의 진술이 말이 안 되고,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흉기도 미리 준비해둔 상태였기에 이건 확실한 도준의 계획적 학살이라 말했다. 거기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뻔뻔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태도 역시 문제 삼았다. 거기다 치열 따위의 증거는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반론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다빈은 딱히 문제삼지 않았다. 연기는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1심은 약속대로 승연의 몫이었다. 다빈은 승연과 잠시 눈을 맞추고서 선고를 지켜보았다.

“피고는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 허황한 진술을 펼치며 유족들의 아픔을 더욱 증폭시켰다. 약물 오남용이 의심되는 상태로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 약물 관련 사안을 조사하지 못함이 아쉽다. 변호인 측은 방어 행위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방어 행위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 본 법정의 판단이다. 설령, 피고의 주장대로 피해자들이 죽은 시체라고 하더라도, 방어 행위는 사회 평균인의 시선과 최소한의 대응을 해야 했다. 그러나 피고의 행동은 감히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잔악한 행위였다. 따라서 본 법정은, 피고 김도준에게 계획살인 혐의 유죄를 인정하는 바,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주문 낭독이 끝나자, 도준은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처럼 법정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그가 호송차에 올라탔다. 이제 그는 교도소에 수감될 터였다. 하지만 아직 재판은 1심이 막 끝난 뒤였다. 그런데도 도준의 부모는 아들이 죽기라도 한 듯 울고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그들에게 비난 어린 고성을 질렀다. 몇몇 이들은 가해자 측 가족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물론 청원경찰의 개입으로 물리적인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빈은 울고 있는 고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죄송하다 말하며, 아직 2심과 3심이 있노라고 안심시켰다. 다행히도 도준의 부모는 아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들을 위해서 얼마든지 돈을 버릴 생각이 있었다.

도준의 부모가 항소의 뜻을 밝히자, 기자들은 재판 결과를 빠르게 적었다. 아마, 지금쯤 도준은 영원히 살고도 남을 욕받이가 되어 있을 터였다. 다빈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빈은 욕을 먹은 것에 비해 수십 배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다빈은 검사석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승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잠시 눈을 마주치는 사이.

도준이 탄 호송차는 빠르게 교도소로 떠났다. 그러자 뒤로 쏠린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생각 하나가 찰랑거리며 쏟아졌다. 이대로 2심을 가봐야 의미가 있을까? 이미 판사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믿지 않았다. 거머리 같은 변호사는 정당방위가 될 수도 있노라 말했지만, 결과는 무기징역이었다. 무기징역이란 말이 그의 목을 졸랐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죽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죽음마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다.

도준이 호송차에 올라 멍하니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아둘 때쯤.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인천 앞바다에서 어부 하나가 그물에 걸린 시체를 발견했다. 그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들은 시체를 확인했다. 거의 알몸 상태의 여자였다. 수영복 팬티만 간신히 달려 있었다. 얼굴은 물고기에 파 먹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엉덩이골에 새겨진 문신은 절반가량 남은 상태였다.

경찰은 그것을 옮겼다. 그물을 자르고 시신을 장갑 낀 손으로 건드린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부는 자리에서 얼었고, 목을 물린 경찰은 비명을 질렀다. 시체는 발버둥을 치면서 흐물거리는 살점을 뒤틀었다. 곧 그것은 중심을 잡고서 퉁퉁 부은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 살점이 벗겨지든 말든 그것은 어부에게 달려들었다.

외마디 비명이 어촌마을 밖으로 유유히 벗어 나가고 있었다.

 

.

 

“어, 잠시 정규 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어, 믿어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인천에서, 시체가 되살아나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법원을 나서던 다빈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법원 대기석 앞에 걸린 커다란 TV를 바라보았다. TV 속 아나운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료 화면이랍시고 모자이크 범벅이 된 화면을 송출했다.

판결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웅성이면서 TV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뭔가 큰일이 났나 하는 사람들부터 무슨 장난인가 싶어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빈은 자리에 굳어버렸다. 곧이어 탄식과 함께 안내 방송이 날아들었다.

법원의 모든 재판을 연기한다는 안내 방송이었다. 다빈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집어 들고서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자 멀찍이서 낯익은 노인 하나가 보였다. 법복을 벗었지만, 확실했다. 도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재판장이었다.

그는 청원경찰과 함께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자들은 판사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판사님. 한 시간 전에 내린 판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직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판사는 고개를 돌려 당혹감에 휘둥그레진 눈을 부라리다 걸음을 옮겼다. 기자들은 판사 뒤를 좀비처럼 쫓았다. 법원을 지키는 청원 경찰들이 기자들과 재판장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소화기가 날아와 재판장의 머리를 때렸다. 재판장이 쓰러지자, 기자들 사이로 중년의 끝에 놓인 남자 한 명이 난입했다.

다빈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도준의 아버지였다. 그는 청원경찰들 손에 붙잡혀 비명을 질렀다. 다빈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 승연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주위가 너무 시끄러웠고, 승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다빈은 그렇게 법원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붙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다빈이 인파 속에서 아우성을 치던 그때였다.

저 멀리, 서울 외곽에는 거대한 차 벽이 세워졌다. 하늘에는 헬기가 바쁘게 날아다녔고, 전투기는 폭격하기 바빴다. 그리고 차 벽 뒤에서 향토 예비군들은 도로에 서서 총들을 바라보았다. 소총에는 탄피수거망과 소형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자, 이제부터 소총과 실탄을 챙긴다. 실시.”

장교가 말했지만, 총을 받아 가는 사람은 없었다. 장교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예비군들은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소총에도 탄피수거망과 소형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예비군 중 하나가 말했다.

“거, 소형 카메라는 왜 단 겁니까? 뭘, 녹화하려는 겁니까? 거기다 이 탄피받이는 또 뭐고요?”

“아,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냥 여러분의 안전 때문에 단 겁니다. 그리고 소형 카메라는 사고 예방을 위해서 단 거고요. 빨리 챙기십쇼. 지금 인천시의 결단 덕에 시체들의 진격이 늦어졌으니까…….”

“안전? 무슨 안전? 소형 카메라가 좀비 이빨을 막아줍니까?”

군복이 꽉 끼는 뚱뚱한 장교는 두툼한 턱살을 실룩거렸다. 그가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동안, 예비군 중 하나가 말했다.

“결국에는 전부 총을 쏘는 우리 책임이라는 거네.”

순식간에 동요 어린 웅성거림이 도로 위를 가득 채웠다. 장교는 방금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호통치면서 군법으로 다스리겠노라, 엄포를 놓았다. 그의 태도에 먼저 무너진 것은 예비군들이었다. 예비군들은 하나둘 등을 보이고서 대열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이미 직장과 가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총 한 발에 교도소 구경을 하기에는 너무나 잃을 것이 많았다.

장교들은 예비군들에게 총을 겨눴다. 그들의 권총에는 소형 카메라도, 탄피수거망도 달리지 않았다. 잠시 움찔거리던 예비군들은 냅다 도로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총성이 울리면서 몇 사람이 쓰러지긴 했지만, 모든 예비군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성난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도망가는 새끼들 쏴!”

“하지만…….”

이제 갓 20살을 넘긴 군인은 멍하니 자기 총에 매달린 소형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결국 총을 떨어뜨렸다. 살인을 저지르기에는 너무 앳된 나이였다. 장교는 그에게 권총을 겨눴다. 하지만 그는 총을 쏠 수 없었다.

구린내 나는 시체들이 예비군들을 향해 쏜 권총 소리를 듣고 몰려든 것이다. 그것들이 차 벽에 부딪히자, 차 벽은 움찔거리면서 흔들리다 뒤로 밀렸다. 군인들은 소형 카메라 달린 소총을 뒤로 하고 대열을 완전히 이탈했다. 장교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뒤를 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뒤로 밀린 차 벽 틈 사이로 시체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저지선에 서 있던 장교들을 집어삼킨 시체들은 빠르게 내달렸다. 그들은 먹잇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들의 먹이가 되거나,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세 시간 전에 총을 쏘란 명령이 떨어졌지만, 누구도 총을 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명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결국 책임을 지는 것은 총을 쏜 군인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탄피 수거용 그물망이 달린 소총을 버렸다. 서울과 경기도를 막는 장벽 너머로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사이렌이 울리고, 이탈하지 말라는 경고 방송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도준이 되고 싶은 이는 없었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신내림 증세의 독특한 변형 양상 1례 2024.04.01
곽재식 하찮은 묵시록 2024.03.01
pena [20주년] 페노메논 (맛보기) 2024.03.01
박낙타 좀비 공장 공장장 2024.03.01
곽재식 너 때문이거든 2024.02.03
pilza2 조개교 2024.02.01
곽재식 나비 혁명 2024.01.02
미로냥 요원(遼遠) 2024.01.01
갈원경 귀가歸家 2023.12.17
노말시티 공미포 오천 자 2023.12.15
강엄고아 배터리를 교체해 주세요 2023.12.02
곽재식 제호 2023.12.02
빗물 분홍토끼의 음모 2023.12.01
곽재식 심연의 이치 2023.10.31
곽재식 해탈의 길 2023.10.02
돌로레스 클레이븐 재판 2023.09.29
곽재식 인공지능 때문에 인류 멸망한 이야기 2023.09.01
김아직 40일의 바다 2023.09.01
돌로레스 클레이븐 폭발하는 평론가 2023.08.27
곽재식 서하 2023.08.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