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갈원경 귀가歸家

2023.12.17 22:5612.17

귀가歸家

 

 


한낮에 내리는 비가 반가운 여름의 초입, 더운 숨을 뱉어내던 길이 식으며 소도시의 거리가 언뜻, 초가을의 내음을 풍겼다. 바짓단을 적시지 않을 정도의 젖은 길 위에 유독 젖은 신발을 신고 기태가 정은을 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간다."

정은은 기태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났던 1년 전처럼 낡은 가방을 비스듬하게 메고 까만 옷을 입은 그가 정은에게 하려던 말은 그게 전부였을까. 한숨 섞인 호흡에 그의 눈은 젖어 있었을까, 메말라 있었을까.

 

정은이 콜로라도, 붉은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서 주도州都인 덴버를 택한 것은, 덴버에 있는 학교의 어학연수 코스가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도시라서 한국인이 별로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첫 수업 시간부터 정은은 까만 머리의 기태를 만났다.

[ 이름은 권기태입니다. 영어 이름은 에이브, 한국에서 왔습니다. ]

레벨 C 답지 않은 짧은 소개였다. 처음 그의 얼굴을 봤을 때는 어쩐지 한국인답지 않은 표정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당연히 일본이나 중국계로 생각했던 정은은 조금은 실망했고 조금은 기뻤다. 한국인이 적은 곳을 찾아온 곳이지만 한국인이 있다는 말이 반가운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가 한국어를 하는 것을 정은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6개월 후, 클래스의 학생 모두가 꽤 친해지고 곧잘 모국의 단어를 서로 가르쳐주곤 하던 때에도 한국어 단어를 말하는 건 늘 정은이었다. 영어 실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수업 중에 기태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늘 유창하게 영어로 대답했고, 그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 몇 개는 칠판에 적혔다. 다양한 뜻이 있는 쉬운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단어를 쓰게 되면 말의 품위가 높아져요. 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학생들은 그 단어를 입으로 되뇌곤 했다. 기태라고 부르면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이브라고 부르면 대답은 하지만, 사적인 질문은 칼같이 자르고 대화가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태는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왜 미국에 왔는지, 언제 귀국하는지, 누구나 가볍게 대답하는 질문조차 그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 질문은 답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해 버리곤 했다. 어떤 말을 할 때도 표정이 없고, 점심시간이면 아예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태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겐 조금 불편한 존재가 됐고, 그럴수록 정은은 수업 중에 기태에게 자꾸 시선을 주게 됐다.

 

기태를 학교 밖에서 만난 건 정은이 학교에서 가까운 약국에 타이레놀을 사러 갔을 때였다. 특가 판매 코너 앞 행거에 2달러 티셔츠가 빼곡이 걸려있었다. 무늬가 강렬해서 아무나 손에 들기는 어려운, 참 미국다운 디자인들이었다. 늘 무늬 없는 검은색 옷만 입는 기태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정은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기태를 불렀다.

"에이브?"

"…?"

돌아본 그가,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정은이 가끔 보았던 표정이었다. 늘 무표정하게 무심하게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하던 그는, 종종 유리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사람 앞에서는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지 않을래? 내가 살게. ]

정은이 말했다. 기태가 수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태는 조금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가려던 가게, 타코벨에 나란히 들어와 키오스크 앞에서 메뉴를 주문해서 받아든 뒤에야 정은은 기태와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은이 기태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왜 말을 걸었냐고 묻는대도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 사람들이랑 잘 안 만나는 것 같아서, 바깥에서 봐서 조금 놀랐어. ]

정은이 먼저 침묵을 못 이기고 말했다. 기태는 타코를 한 입 베어물고 정은을 보고는, 꿀꺽 입안에 든 걸 삼키고 대답했다.

[ 숙소에서 보통 글을 쓰고 있으니까, 밖에는 잘 안 나와. ]

[ 작가야? ]

농담으로 말한 참이었는데, 기태는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이야? ]

[ 알고 물은 줄 알았는데. 하긴, 필명으로 쓴 글을 알았을 리가 없나. ]

[ 어떤 걸 쓰는데? ]

[ 스페이스 오페라. 스페이스 판타지, SF. 이쪽 안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도 잘 모르지. 웹 소설이라고 하면 알려나. ]

문득 한국에서 받은 메일에 아버지가, 동생이 인터넷에서 소설을 읽느라 정신이 없다는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 어, 그럼 책으로 나오는 건 아니고, 인터넷에서 읽는다는 거지? 나는 안 읽어봤지만 들어봤어. ]

정은은 책을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할 게 얼마든지 있는데 그 중에 굳이 소설을 또 읽는 사람들이 이해되지도 않았다.

[ 그런데 왜 미국에 왔어? 소설 안 쓰고 다른 일 하려고? 글 계속 쓰는 건 어디서든 할 수 있잖아. ]

미국에서 굳이 영어를 익히더라도 매일 숙소에 앉아서 소설을 쓰고 있다면, 미국에 올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소설은 어디서도 쓸 수 있으니 미국에서도 쓸 수 있는 것도 맞지만.

[ …다른 꿈은 꿀 수 없어서. ]

[ 다른 꿈? ]

정은이 되물었지만 기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타코를 비우고, 콜라를 단숨에 비우고 기태가 일어났다. 그 뒤로 정은과 기태는 수업이 마치면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기태가 갑자기 수업에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정은에게 기태의 일을 물었다. 정은은 그에 대해서, 그가 머무는 곳조차도 알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해 준 건 정은밖에 없ᄋᅠᆻ던 것 같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돌아갔을까. 알 수 없었다.

 

정은은 길가의 분수대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장식이 없는 길가 분수대에는 아이들 몇몇이 물장구를 쳐댈 뿐 물줄기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길거리에 줄지어 있는 작은 분수대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었지만, 한낮이면 입술이 바싹 말라버리는 건조한 날씨를 생각하곤 이해가 되었다. 정은은 백팩에서 책을 꺼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간지 닷새만에 정은에게 온 DHL 박스에는 8권이나 되는 소설책이 들어있었다. [ Noram Galaxy 전쟁 ] 기태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에이브답지 않거나.

 

 

 

노람 갤럭시Noram Galaxy는 아카르Acar라는 힘으로 지탱되고 있는 우주다. 그 힘의 일부를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자를 아카르다Acarda라고 하는데, 아카르다는 돌연변이처럼 이따금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매우 두려워했다.

아이벌Ival이 일으킨 우주전이 시작된지 30년 후, 노람세기 485년에 우주는 드디어 하나의 연방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전쟁은 각 별의 지도자가 다음 대로 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전쟁을 종식시킨 영웅은 아이벌Ival의 명장 노마루스Nomarus였다. 그는 스스로 연방의 총수에 오르게 되며 각 별의 지도자들은 그대로 지도자로 남기는 정책을 택했다. 다만 그 지도자들이 연방의 지휘권에 예속된다는 것만이 달랐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예속된 소혹성 칼리스도 황제정이 왕정으로 바뀌었을 뿐 겉으로는 변한 것이 없었다.

전쟁으로 사망한 황제를 대신하여 황태자 이바Eba가 '왕'이 되었다. 전쟁 중 사망한 황제는 왕의 직위에 준해 화려하게 장례를 치렀고 연방에서는 화환과 장례용 일꾼 몇 명을 보내어 애도의 뜻을 전했다.

왕이 노마루스의 직할령인 아이벌에서 왕위를 책봉받았고, 관공서에 휘날리는 깃발이 칼리스의 것이 아니라 연방의 것으로 바뀌었고, 군인의 제복들이 연방군의 것으로 바뀌고, 관공서의 사람들은 명목상 연방에 소속된 공무원이 되었지만 그것은 그저 아주 표면적인 일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폐하라는 호칭 대신에 전하라는 호칭을 썼다. 이바 자신은 황태자일 때에도 전하라는 호칭을 받았으므로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셈이었다.

486년. 일부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칼리스 독립을 위해 일어났다. 칼리스의 연방 편입시기부터 지하조직으로 활동한 멤버중의 수장 노아Noa는 칼리스 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확보했지만 487년 1월, 체포되어 아이벌의 중앙 광장에서 효수되었다. 지하조직은 붕괴되었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노아가 살아 있으며, 그 때 죽은 것은 대리자였을 뿐이라는 소문이 한참 돌았다.

490년, 이바가 돌연 실종되어 칼리스는 공화정제로 바뀐다. 왕의 가신이었고 사실상의 실권자였던 로어Raur가 통령으로 취임했다가 1달 후 그녀도 실종되었다. 사람들은 그 둘이 오래 전부터 연인이었고 그래서 은둔해 버린 것이라고도 하였지만 잠시였을 뿐이다.

 

기태의 책을 읽는데는 꼬박 보름이 걸렸다. 육개월간 한글을 쓰지 않아서인지 한글로 된 소설은 처음 영어소설에 덤벼들었던 때를 생각나게 할 만큼 난해했지만, 정은은 그 책에 굉장히 몰입해 버렸다. 다 읽고 난 뒤에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소설의 후기를 읽었다. 속도감이 있는 전개, 세밀한 인물 설정. 정은이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확인했다. 대부분의 글에서 보이는 말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분명하다는 말이었다. 사람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정은도 낯선 이름임에도 주연급의 인물을 익힐 수 있었으니 그 말은 맞았다. 하지만 또하나 공통적으로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잘 나가던 소설의 결말이 갑자기 힘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몇 년간의 전쟁과, 그 이후 연방을 이루기까지의 상황이 너무나 리얼하게 이야기되다가, 왕 이바Eba의 실종부터 갑자기 현실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이 막판에 재미 없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야 차라리 혁명을 노리던 젊은이들이 성공하거나 영웅적인 누군가가 나타나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 기여하거나 하는 게 옳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Noa는 끝내 누구인지, 실제로 죽은 게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덴버의 거리를 걸으면서, 수업을 들으면서, 정은은 이따금 그 소설의 생각에 빠졌다. 기태는 왜 이 소설을 자신에게 보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그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고 계속 이야기의 말미를 생각하게 됐다.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신이 이렇게 몰입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은은 기태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소포를 부쳐온 주소로 항공우편을 보낼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 결말이 왜 이런데?"라고 편지를 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렇게 어이없이 떠남을 택한 사람에게 "잘 지내지?"라고 태연하게 편지를 쓰기도 어색했다. 기태 역시 그녀에게 소설을 보내면서 작은 메모도 없었으니까. 대신 정은은 몇달만에 처음으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아버지는 퇴근 전이고 어린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정호야, 나 정은인데."

"어, 누나?"

이 아이가 중3이었나, 고등학교 1학년이었나.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게 벌써 낯설었다.

"혹시, 너 [ Noram Galaxy 전쟁 ]이라는 소설 알아?"

"NG?그거 웹소 좋아하는 사람은 다 알지. 근데 왜 누나?"

"…아 얼마전에 선물을 받아서, 너한테 보내줄까 했거든."

"아냐, 나도 다 갖고 있어. 근데 그거 결말이 좀 이상해서. 웹 연재때 인기도 엄청 많았고, 지금도 계속 읽는 사람도 많은데, 다들 마지막 권은 읽지 말라고들 해. 이럴 줄 몰랐다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고, 마지막 에피소드 빼면 최고라고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그래?"

"그래서 사람들이 막, 그거 진짜 엔딩이 이래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었어. 원래 저작권상으로는 안 되는 소리지만, 고유명사 바꿔서 꼭 다른 소설인 것처럼 포스타입에 올리기도 하고 그래. 아 포스타입이 뭐냐면……."

동생은 묻지 않은 말까지 알아서 다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의아함을 가진 사람이 정은이 혼자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인기가 있었던 소설을 쓰던 사람이, 독자들의 저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사람들은 길들여지는 것을 좋아하는군."

창 밖을 내다보면서 젊은 왕이 이야기했다.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전하."

정은이 말했다. 아니 정은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분명 NG의 세계 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면 깨어나는 게 아니었던가?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왕을 보고 있었다. 관찰자처럼.

"그럴 리가. 나는 입만 산 허깨비일 뿐인걸."

"선왕의 외아드님은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고 불렸다지요."

"황태자를 높이기 위한 뻔한 아부야."

냉소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무기력해 보이는 젊은 왕은 기태의 얼굴과 닮았다.

정은은 실소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소설에서 묘사되었단 바로 그 곳, 왕 이바Eba가 밖을 내다보고 시니컬한 말을 내뱉곤 하던 첨탑의 끝방이었다. 정은의 시선은 분명히 총리대신이며 왕의 가장 측근이었던 여학자 로어Raur의 것이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은 캐릭터였는데. 어정쩡하고, 언제나 왕의 뜻에 따르기만 하는 어설픈 학자. 어째서 사람들이 신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 정은은 자신이 너무 소설을 몰입해 읽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서랍 아래 깊은 곳에 넣어버렸다.

 

 

 

왕은 정은, 로어를 돌아보았다. 난처해하는 표정의 왕의 복장이 낯설었다. 잠행이라도 갔다 온 것 같은 차림이다. 게다가 이곳은, 성의 가장 지하, 왕이 출입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이 길들여짐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서."

왕은 쓰고 있던 머릿 두건을 풀었다.

"당신은 왕입니다. 당신이 이런 것이, 이 별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이런다고 연방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대는, 독립은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독립된 별이었던 이 칼리스가 이렇게 연방의 일부로서 동화되어 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관찰자로서의 정은이 움찔했다. 아니 이런 대사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장면, 소설엔 없다. 저 왕이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지를 밝힌 적은 없다.

"하지만 로어, 나의 벗, 나의 사랑… 날 도와줄 테지, 당신은?"

왕이 웃었다.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래야겠지요, 나의 주군이여."

정은이며 정은이 아닌 로어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예를 표했다.

"나는 그저, 너와 함께 있는 세상이 이런 모습이 아니길 바랄 뿐이야, 로어. 너와 내가 같이 있을 집 하나를, 칼리스의 푸른 숲에 지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

왕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사랑한다, 로어. 고마워."

하지만 나는 당신을… 정은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놀라 깨어났다. 며칠 내내 정은은 계속해서 NG의 꿈을 꾸었다. 계속해서 소설 속의 장면에서, 언제나 로어가 되어 소설 속의 세계를 보다가 오늘 처음으로 소설에 나오지 않은 장면이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꿈속의 로어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핸드폰이 울었다. 정은은 놀라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오랜만이야. ]

에이브, 기태였다.

[ …막 NG의 꿈을 꿨어. 당신이 왕으로 나왔다. 재미있었어. ]

피식,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소설 결말이 맘에 안 들었나 봐. 소설 속에서 왕이 지하조직들을 지원하고 있었어. 나는 걱정하면서도 거기 협조하는 로어Raur이고. ]

[ 지하 통로에서? ]

[ 응. ]

대답하다가, 정은이 화들짝 놀랐다. 꿈을 보았을 리가 없는데.

[ 그런데 왜 나한테 소설을 보낸 거야? ]

말을 돌리려 정은이 물었다.

[ 곧 알게 되겠지. 또 연락할게. 잘 지내. ]

뚝. 전화가 끊겼다. 정은은 전화 수신 내역을 보았다. 발신자불명이라는 글씨가 떠 있었다. 여전히 정은은 기태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며칠동안 꿈속에서 로어는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개의 지하조직에 왕은 모두 자금 지원을 하는 모양이었고, 때로는 밤에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그것을 무마하고 수습하는 것은 로어의 몫이었다. 이야기는 점점 소설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고, 꿈은 언제나 순차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0일째가 되어가던 날이었다.

"…왜, 네가?"

일렁이는 빛의 안개 속에 왕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슬픈, 혹은 그 모두인 표정을 하고 왕은 애처롭게 로어를 쳐다보았다. 그 빛은 아카르Acar의 발동, 소설에서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었던 차원 이동의 아카르였다.

"당신이 노아Noa이기 때문입니다."

로어의 목소리가 떨렸다. 슬픈 목소리처럼 들렸지만,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라는 것을 왕은 알고 있었다. 왕은 그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가 엷게 웃었다.

"…언제부터 알았지?"

"주시자의 아카르가 당신을 비추었습니다. 노아, 당신의 조직은 너무 강력해요. 그대로 두면 분명히 연방을 위협하게 될 겁니다."

"…너였나. 왕실의 가까이에 심었다는 연방의 첩자가."

"……그렇습니다."

빛 속의 왕은 점점 모습이 흐려져 가고 있었지만, 왕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원망이 아니었다. 이 공기는 두 사람의 감정으로 차 있었지만 분노는 오직 로어의 것, 원망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로어 그래, 너의 아카르를 나를 위해 써준다니 감격스러운걸. 나는 어디로 가나? 이 이동의 아카르는 대상이 있어야만 할 텐데."

"자그마한 환상입니다. 왕이여. 어쩌면 그곳에서 당신은 더 평안하실지도 모르지요."

숨죽인 목소리. 왕은 목까지 사라지고 얼굴만이 흐릿하게 남았다.

"부디, 너의 삶을 평안히 하길 바래. 사랑한다, 로어."

왕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로어는 그 자리에 비틀 주저앉았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옷을 입은 장년의 사내가 들어섰다. 처음으로 꿈에서 보는 회색 머리의 남자 노머루스였다.

"수고했다, 로어. 이제야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겠군. 약속한 대로 너를 이곳의 통령으로임명하도록 하지."

"아뇨."

로어가 고개를 들어 노머루스를 쳐다보았다.

"전 여기 남지 않을 겁니다."

"아이벌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나? 좋아. 네 공은 충분히 인정하니 그렇게 해주지."

"……모르는군요, 당신은."

로어가 일어났다. 아카르가 서서히 근처를 일렁이기 시작했다. 노머루스가 영웅이 된 이유중의 하나는 그가 아카르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카르로 공격하는 것은 먹히지 않았다. 노머루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로어를 보고 서 있었다. 로어가 아카르를 모았다. 노아를, 이바를 보냈던 이동의 아카르였다.

"당신은,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알지 못해."

"설마, 아이벌의 제2의 아카르다인 네가, 겨우 이런 결말을 택하겠다고?"

"이제 당신에게 빚은 없어. 당신이 내 생명을 구했던 빚을 이제 갚았으니까, 앞으로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야."

노머루스가 씁쓸히 웃었다. 로어, 정은은 자신의 주변을 흰빛이 채워주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소망했다. 그가 간 환상 속으로, 온전히 새롭게, 그와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아카르여, 내 바람을 들어줘.

 

 

 

정은은 눈을 떴다. 기태에게 연락해야 했다. 연락처를 알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은은 눈을 감았다 떴다. 눈앞에는 칼리스의 푸른 숲과 닮은 '한국'의 숲이 있었다. 그 숲 나무 아래에 기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 정은을 쳐다보았다.

[ 왜 소설을 썼지? 에이브Abe, 아니 이바Eba. ]

[ 니가 여기에 왔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현실'의 이야기를 쓰면 니가 날 찾아와 줄 것 같아서. ]

[ 그럼 왜 결말을 바꾼거야? ]

기태, 이바가 엷게 웃었다.

[ 너라면, 쓸 수 있었을까? ]

[ 아니. ]

정은, 로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 절대 깨지 않았을 텐데. 이 곳은 내 환상- 니가 예전의 기억을 되살릴 수는 없었을텐데. ]

아울러 소망하지 않았던가, 새로이 그와 시작하게 해 달라고.

[ 넌 내가 노아라는 걸 알아냈는데, 내가 아카르다라는 건 몰랐나보군. 그래, 그래서 나한테 아카르를 써서 공격했던 거였지. 나의 아카르는 꿈의 아카르. 누군가를 공격하기엔 한없이 약한 힘이지만, 이곳에서 내 기억을 찾기에 충분했지. 그래서 알아냈던 거다. 니가 이 곳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

아카르 공격은 아카르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상대 아카르다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로어의 아카르가 이바를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다. 로어는, 자신이 아카르로 스스로를 이동시켰던 것처럼 이바 역시 그 세계에서 떠나길 바랐다는 걸 알았다. 아카르는 아카르다의 의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 로어는 스스로를 환상 속으로 이동시켰고,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카르는, 로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자신이, 잊기를 원하면서 또한 기억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 너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나는 어디서든 상관없었어. 너와 함께 있을 푸른 숲 속의 집 하나를 지을 수 있으면, 너의 눈을 볼 수 있으면. 하지만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기억해달라고, 내가 너를 사랑했던 것을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

[ 어떻게 하지, 이제. ]

로어는 대답을 아는 질문을 이바에게 물었다. 이바는 로어가, 정은이 대답을 알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 당신은 거기서 뭘 소망했었지? ]

[ 칼리스의 푸른 숲, 나무가 너무 크지 않은 그 숲에 너와 함께 있을 집 하나를 짓는 것. ]

로어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바의 손을 쥐었다. 응, 알아. 이젠 나도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겠어. 에이브Abe, 이바Eba, 노아Noa, 내가 사랑하는 사람.

[ …돌아가자, 집으로. ]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신내림 증세의 독특한 변형 양상 1례 2024.04.01
곽재식 하찮은 묵시록 2024.03.01
pena [20주년] 페노메논 (맛보기) 2024.03.01
박낙타 좀비 공장 공장장 2024.03.01
곽재식 너 때문이거든 2024.02.03
pilza2 조개교 2024.02.01
곽재식 나비 혁명 2024.01.02
미로냥 요원(遼遠) 2024.01.01
갈원경 귀가歸家 2023.12.17
노말시티 공미포 오천 자 2023.12.15
강엄고아 배터리를 교체해 주세요 2023.12.02
곽재식 제호 2023.12.02
빗물 분홍토끼의 음모 2023.12.01
곽재식 심연의 이치 2023.10.31
곽재식 해탈의 길 2023.10.02
돌로레스 클레이븐 재판 2023.09.29
곽재식 인공지능 때문에 인류 멸망한 이야기 2023.09.01
김아직 40일의 바다 2023.09.01
돌로레스 클레이븐 폭발하는 평론가 2023.08.27
곽재식 서하 2023.08.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