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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허물연서

2023.06.30 23:1306.30

허물연서(戀書)

 

 

 

끝을 알 수 없이 첩첩이 이어진 산중에 매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착륙보단 추락에 더 가까운 광경이었다. 매는 깃털이 듬성듬성 빠진 날개를 익숙한 듯이 접어 기우뚱한 몸을 비뚤어진 다리로 디뎠다.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자 깃털이 빠지고 몸이 길어지며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보이는 살마다 패이고 지져진 흉터로 가득한 몸에 재빨리 옷이 덮였다.

그는 잠시 방향을 가늠하고는 허공에 손을 짚었다. 숲 한가운데처럼 보이던 곳에 균열이 일더니 약간의 거리를 두고 조그만 구멍이 나타났다. 그는 손으로 입구를 둘러싼 덤불을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구멍 안은 여덟 자는 되는 높이라 사람이 멀쩡히 서고도 천장까지 여유가 있는 통로였다. 커다란 원통 모양 무언가로 찍어낸 듯이 반듯한 안으로 그는 거침없이 들어갔다.

통로 끝에는 바람이 한 바퀴 휘 돌아서 나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법한 큰 방이 나타났다. 방 가장자리에는 턱이 탁자처럼 자리잡았고 그 위에는 반투명한 천 같은 것이 곱게 개켜져 있었다. 거기에는 단정하고 힘준 필체로 글들이 쓰여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몇 뭉치 나란히 놓였다. 그는 가장 왼쪽에 가장 작은 천을 들어 훌훌 풀어냈다. 겹쳐서 알아볼 수 없던 글자들이 의미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허물에 무언가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번부터였어. 내 본신의 크기가, 아니 길이가? 이제 꽤 커지고 길어졌거든. 하지만 지난번 허물에는 붓으로 썼다가 번져버렸지. 내 허물이 그렇게 미끈거리고 기름기가 있는 줄은 예상치 못했다.

네게 말 거는 게 항상 어려웠던만큼 여기에도 실없는 소리부터 늘어놓게 되는구나. 넌 나만큼 말주변 없는 이를 처음 보았다 했지만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이는 내 주둥이를 딱 한 번만 때려보고 싶다고 할 정도라면 설명이 될는지. 익숙한 소리 아니냐? 너도 그런 소리를 들었던 걸로 아는데. 그런데 상성인지 뭔지 네 앞에서는 말이 꼬이거나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심지어 이 허물에서조차 말이지. 기가 막히는군.

그래서 지금은 무엇으로 쓰고 있는가 하면, 네 깃털로 만든 철필이다. 예전에 네가 세 개 뽑아주었지. 원래 술법에 쓰라고 주었지만 쓰지 않았다. 남겨두고 싶었어. 그러기를 잘했지. 지금 내게 남은 건 이 깃털 세 개뿐이니까. 어떻게 이다지도 한 가지도 안 남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네가 세상의 공적이었대도, 아무리 모든 게 다 타버렸대도 네가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고 걷고 활보하던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그리 짧지도 않았고 그 행보가 그리 좁지도 않았으니 어딘가에는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나는 네가 죽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무어라도 남은 게 있었으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시체도, 물건도, 하다못해 네 발자국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나는 계속 네가 살아 있다고, 널 누군가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숨긴 거라고 믿을 테다. 그리고 언젠가 네가 돌아와 이것을 읽을 수 있으리라고 믿을 테고.

널 향한 말은 언제나 조절이 안 되어서 허물을 낭비했다. 다음 허물에서는 부디.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첫 번째 천을, 아니 허물을 내려놓았다. 진정되지 않는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가, 목을 쓸었다 하다가 두 번째 허물을 집어 들었다.

 

진아.

이리 부르는 게 나은가? 네 이름을 이렇듯 불러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너, 그쪽, 새야, 이런 미친……이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이것이 그저 내 일지가 아니라 네게 남기는 전서라고 생각하니 무언가 앞에 호칭을 써야 할 듯했어. 그러나 아직도 결정하지는 못했다. 다음에 쓸 때까지 더 생각해보도록 하지.

이 허물들을 어디에 둘지 고민했다. 보통의 허물이라면 먹어치우거나 태웠으나, 이건 네게 남기는 것이니. 그러나 또 편지라고 해서 부칠 수도 없지. 네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니까. 어딘지는커녕…… 아니,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련다.

고민해보았는데 내가 허물을 벗는 안식처에서 가장 깊은 곳에 놓기로 했다. 원래 이곳을 알게 된 것도 너와 함께 위험을 피하다가 그런 것이니. 그때에도 이미 우리는 죽이 잘 맞았던 건데 나는 계속 부정했지.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겐 사실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뱀이고 너는 매지. 나는 땅에서 기고 너는 하늘을 날지. 나는 네 표현에 따르면 고지식하고 따분하며 정도를 벗어난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데, 너는 내가 한때 나무랐듯이 천방지축에 말썽과 재난의 화신이며 스스로 화를 부르지. 사실은 그저 자유롭고 틀을 벗어난 기재이며 세상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입으로 말해준 적이 없다. 글은 이런 게 좋구나. 네 얼굴을 보고 있지 않으니 섣불리 오기로 내 생각과 다른 말을 내뱉고 주워 담지 못할 일 같은 게 없으니. 너를 다시 만나면 꼭 얼굴을 마주 보고 말로 해주고 싶다. 잊지 말아야 할 일에 넣어두었어.

네가 이곳을 기억할지 사실 자신이 없다. 네가 사라진 이후 내가 허물을 벗는 곳으로 쓰면서 진법을 더 깔아뒀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아. 네가 이 정도는 쉽게 파훼하고 들어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 장소 자체를 기억할지를 모르겠어.

나는 함께 위험을 피했던 동료가 너였기 때문에 잊지 않았지만, 네게도 그만한 의미가 있었을까? 너는 다양한 사람과 함께 다양한 위험에 빠졌었잖느냐. 게다가 어릴 때부터 말썽을 피우는 일이 많아 도망가는 길은 물론이고 숨을 곳도 천지에 여러 군데 마련해두었다고 했었지. 너는 분명 여기가 아주 안전하니까 쉬다 가라고, 필요할 때는 마음껏 쓰라고 했지만, 어딘가 불안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니 네가 숨을 곳을 그리 마련해두는 성격일까 싶기는 하구나. 매 순간 뒤를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날아가던 네가? 너의 무모함은 뒤에 무언가를 마련해두고 찾는 여유 같은 게 아니었다. 너는 항상 몸이 부서져라 부딪히고 네가 해야 한다고 정한 일을 그저 했고 재물에도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네가 숨을 곳을 마련했다는 게 왠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네가 내게 거짓을 고할 이유도 모르겠단 말이지. 너를 깊이 마음에 두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어쩌면 나보다 더 네가 마음의 벽이 두꺼웠던 것도 같아서. 언제나 시원시원하게 긍정적인 말만을 했던 네 심중에는 배수의 진만 남아 있던 건 아닌가 싶어서. 많은 밤을 과거 돌아보는 데에 쓰며 받았던 느낌이지만 말로 전달하기가 어렵구나.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내 진심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너도 마음을 열까? 바라마지 않는다.

 

“닫았던 게 너지, 나냐?”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허물에 손을 뻗었다.

 

진에게.

이번 허물에는 찢어진 부분이 있지. 그래서 혹여 나중에 보고 걱정할까 그것부터 설명하려 한다. 한마디로 나는 다치지 않았다. 허물을 벗는 도중에 변고가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변한 것뿐이다.

이제 내게는 다리가 있다. 그저 몽둥이처럼 생긴 것이지만, 앞뒤로 4개가 생겼지. 손발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야.

뱀에게 다리가 있다니? 그래, 나는 등용문을 밟기로 했다. 몇 번 허물을 벗어야 할지 모르나,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더군. 백련도사라는 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가르쳐주었다. 알고 보니 내 가문에서 그쪽에 먼저 간곡한 서신을 보냈다더군. 내가 죽은 이를 잊지 못하다 못해 그이의 죽음을 아예 부정하고 있다고, 내 마음을 돌릴 방법을 알고 싶다고. 이전에 무슨 짓을 해서든 말리려 하였는데 모두 실패했노라고. 그래, 모두가 날 말렸다. 그만 잊으라더군. 그건 참된 우정이 아니라더군. 애심도 연모도 아니라더군. 그저 집착이고 미련이라더군. 간 사람을 갔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것이라더군. 눈을 막고 귀를 막고 그저 나 좋을 대로만 하고 싶은, 고집조차 되지 못한 아집이고 망집이라더군. 어쩌면 나를 보며 너도 똑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좋다. 네가 있어, 내 마음이 말하는 소리대로 살아 있어 쏟아지는 거라면 원망이든 비난이든 달기만 할 테니.

요전 번에는 이번에야말로 날 꼭 개심시키겠다고 작정한 듯, 일가친척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훈계했지. 눈물로 애원하기도 하고 도리를 핑계로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보내고자 무던히도 애쓰시더라. 그들의 눈에 꺾인 것처럼 보인 후에 실리를 챙길 만한 수완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건 내가 아니지. 그거 하나는 맘에 들었어. 너도 그런 건 잘 못하잖아. 그런 걸 잘했다면 가족하고도 떨어져서 홀로 세상에 맞섰을 리가 없지.

그래도 그들이 한 말 중에 주워들을 만한 것이 있긴 했다. 사람이 큰 충격을 받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겪으면, 앞에 두면 시간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는 게야. 처음엔 일단 부정하지만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 분노하고, 협상하려 하고, 그러다가 침울해하며 가라앉았다가 결국은 받아들인다는 거지. 그런데 나는 부정과 분노에서 머물러 있다고, 자기들하고 협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며 자기들을 무시하는 거냐고. 어찌 그러겠어, 그 말을 한 것이 내 형님이었는데. 무시하는 거냐는 말도 진심이 아니라 그저 내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낚싯바늘 같은 거라는 걸 알아챘고, 내가 알아챘다는 걸 형님도 알아챘어. 나는 말씀드렸지. 형님께서 말씀하신 협상과 다른 의미일지 모르나, 나도 지금 나 자신과 협상하고 있다고. 당장 뛰쳐나가 세상을 떠돌며 너를 찾고 싶으나 그러기에는 가문의 상황이 좋지 못하며 내게 뚜렷한 방도가 없어 참고 있다고, 힘을 기르고 나면 너를 찾아 세상에 나설 거라고. 그때의 내 눈을 보고 형님도 포기하고 가문 어른의 말대로 백련도사에게 도움을 청한 거야.

한데 백련도사는 엉뚱하게도 용이 되는 법을 상세하게 적어서는, 본래 서신을 보냈던 가문의 어르신이 아니라 내게 직접 전했어.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보낸다며, 이렇게 덧붙였더군.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하느니 높이 올라가보라.

너는 바로 알아듣겠느냐? 형님은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한다”는 부분에 대해서 이것 보라고, 네가 명백한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느냐던데. 나는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내 상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지. 상실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인데 거기서 피하고 있으니, 반대인가? 잘 모르겠군. 알지 못해도 상관없고.

 

허물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그는 바로 다음 허물로 옮겨 갔다.

 

진에게.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아서 잠시 웃었다. 네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도 없어졌으나 여기서는 마음껏 써도 되겠지. 진아. 진아. 나의 진아.

지난번 허물에서 용이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고 넘어갔던 것 같다. 내가 왜 거기에 응했는지도.

사실 바로 결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다 써서 충분히 고민하고 고려했다. 비워야 할 건 비우고 채워야 할 건 채웠어.

그래야 했던 이유는 일단, 한번 과정을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음을 백련도사가 경고해두었기 때문이지. 돌이킬 수 있지만 그랬다간 높은 확률로 죽음에 이른다고, 그것도 흔적도 남기지 못할 거라고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몸을 보존해야 한다. 마음과 영혼도 물론이고. 애초에 내가 나이게 하는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너를 기다리지는 않을 테지. 주위에 휩쓸려서 너를 잊거나 네가 죽었다고 믿겠지. 그러니 나는 그 과정에서 절대로 버릴 수 없는 나, 잊지 말아야 할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리는 없어. 용이 되는 과정은 무려 9번의 변신을 거쳐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승천의 길인데, 그럴 수 있을 리 없지.

몸을 보존한다는 것도 무사하고 건강하게 지킨다는 뜻이지, 그 몸 그대로를 보존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킬 수 없는 것,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그런 식으로 추려야 했다. 그런데 그리 생각하니 지켜야 하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더군. 내가 네 존재가 어디서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금 널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모습이 바뀌어도 무언가를 못하게 되어도 나로서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너를 잊지 않는다면. 너와 함께한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러나 또한 너와 함께한 나란 어떤 존재인가? 뱀의 일족인 것도, 지혜의 영역을 맡은 일족의 계승자로서 받아온 교육도 모두 나를 이루는 요소가 아닌가? 선을 행하고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맹세와 신념은? 지독히도 나를 얽어매는 일족의 규약 말고 이제껏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소중히 지켜준 가족과 친우와 스승님과의 인연은? 나는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나? 다 버리고 난 뒤의 나를 너는 나라고 알아볼 수 있을까?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는 괜찮은가?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결론이 나지 아니해서 어쩌면 평생이라도 그러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한데 그때쯤에 일족의 장로들이 백련도사의 얼토당토않은 답신에 불만을 품고 최후통첩을 해오더군. 뱀 일족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청사의 공녀와 혼인하여 의무를 다하라고.

알다시피 나는 이제껏 너에 관한 일을 제하고는 가문과 일족의 뜻에 맞선 일이 없다. 무엇을 바라든 어떤 높은 기준을 세우든 채우지 못한 적도 없지. 나는 가문의 자랑이고 일족의 기둥이었다. 이는 내가 한 말이 아니니 뻔뻔하게 들려도 어쩔 수 없어. 심지어 너도 한 적 있는 말이잖느냐? 반쯤 조롱이었으나,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 누구보다 먼저 경서를 떼고, 누구보다 빨리 무(武)와 예(禮)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영력 또한 형님과 더불어 최고라 인정받았으니까. 네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며 침잠하여 말썽거리가 되기 전까지는 혼인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앞길이 창창한 후기지수의 선봉에서 정략혼인으로라도 쓸모를 다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뜻이지. 하여 나는 더욱 나의 처지를 내려앉힐 수밖에 없었다. 혼인을 시키면 상대에게 폐를 끼칠 것이 뻔하여 밖으로 내돌리지도 못할 괴짜로, 그러나 가문에서 내쫓기엔 명분이 부족한 정도로만. 그에 용으로 변신하는 길이 딱 알맞아 보이더군. 짐승 중의 짐승, 신의 영역에 닿은 동물, 수신, 뇌신, 천신, 무엇으로든 고귀한 존재. 백련도사도 알았으니 그 길을 알려주지 않았겠는가 싶은 것이,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더라. 하여 그 길을 시작했다.

용이 되는 길은 아홉 단계를 밟아 이루어진다. 뱀의 원신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여덟 단계면 된다고 하더군. 용의 형체에 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야. 비늘과 긴 몸을 이미 갖고 있단 말이지. 그 뒤로, 처음에는 다리가 생기고, 그다음에는 눈이 변하고, 턱이 변하고, 귀가 생기고, 머리 전체 모양이 변하고, 갈기에서 시작되어 몸의 중앙을 덮는 털이 나고, 꼬리가 변하고, 뿔이 난다. 마지막으로 여의주를 맺지. 가끔 여기에 더해 날개가 생기거나 아가미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아마 뱀에서 시작하는 나에겐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적다더라.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특별한 약물과 대법이 필요하지만, 그 외에도 심상을 매번 달리 하며 과정을 견뎌야 한다. 여러 동물과 영물의 형상이 모여 이루어진 궁극적인 존재이기에 변신이 나아갈 때마다 내 존재의 외연이 넓어지고 기존의 형체를 탈피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도 뱀이 유리하다더군. 우리는 허물을 벗고 다른 몸을 갖게 되는 데에 익숙하니까. 탈피 직전의 미칠 듯한 간지러움과, 그럼에도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이 없는 뱀은 어릴 적에 죽게 마련이거든. 새로운 몸…… 본디 다리는 도마뱀의 그것과 같으나 손바닥은 호랑이, 발톱은 매의 것을 갖게 된다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조합이지 않으냐? 결국 앞다리는 길짐승의 것, 뒷다리는 날짐승의 것을 닮게 된다는 게지.

문제는 그 심상이란 것이 각자 다르게 다가온다는 거다. 어떤 자는 정직하게 곧이곧대로 다른 일족의 일부를 받아들인다더라. 각 짐승이 뜻하는 바를 천기와 음양오행에 비추어 해석해내는 식으로 변하는 자도 있다고 했다. 어떤 자는 정식으로 단계를 시작하지 않았으나 고된 도주 중에 이리저리 위험을 피하느라 다른 짐승의 길을 끌어들인 끝에 용이 되었다지. 어느 길로 가든 거친 굴곡을 감내해야 함은 매한가지라. 이 단계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좌절하거나 헛되이 세월을 낭비한다 하였다. 내 경우에는.

이 단락을 다시 쓰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읽는 너는 알 수 없겠지. 사실 심상이 필요하단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나만의 방법을 떠올렸고, 누구보다도 쉽게 그 단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걸 여기에 써야 하느냐, 그것도 솔직하게 써야 하느냐를 두고 생각이 많았다. 생각이 많았다니 그것조차 회피하는 말이로군.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어쩌면 이 부끄러움이 네가 이 편지 아닌 편지를 읽을 거라는 내 굳건한 믿음을 증명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허물을 앞뒤로 살폈다.

“여기서 끝이야? 이 자식이 진짜……!”

허탈한 한숨을 쉬면서도 그는 녀석이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워서 못 쓰겠다면서 한참 동안 다음 단락을 쓰지 못하고 끙끙댔을 모습, 결국은 제대로 된 이야기는 쓰지 않고 놓아두기까지 장고를 거쳤을 그 머리를 떠올리면, 그런 구석이 꽤 많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법도 했다.

그래서 피식피식 웃어 가며 다음 허물을 집어 든 그의 얼굴은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점점 굳기 시작했다.

 

진. 이번 허물 다음에는 아주 오랫동안 네게 편지를 쓸 허물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난 지금 아주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거든.

백련도사가 초대를 했었다. 내 변화를 점검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도움도 주겠다고 하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어 받아들였지. 백련도사와 그 집에 의탁하고 있다는 백면이라는 자가 나를 맞아주었는데, 그 백면이란 자는 굉장히 독특한 외양을 지니고 있었어. 처음에 보았을 때에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옆모습은 새 같고, 뒤에는 긴 꼬리도 있는 것 같고, 손을 내미는데 손에는 물갈퀴가 보였지. 그마저도 조금 후에 보면 달리 보였다. 내가 그에게서 눈을 못 떼니까 백면은 부끄러워하였으나 백련도사는 바로 알아채고 답해주더군. 그 답이 또 놀라웠어. 그는 아주 먼 옛날에 용이었다가 벌을 받아 저런 몸으로 환생했다고, 그래서 모든 동물의 형상이 여기저기에서 비치는 거라는 거야.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그가 궁금해졌으나 이 이상 눈길을 두었다가는 무례할 듯하여 고개를 돌렸지.

백련도사는 나를 본신으로 변하게 하여 찬찬히 살피더니 말했어. 변화가 단계별로 일어나지 않고 조금씩 한꺼번에 일어나는 양상이 보이는데,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나는 앞뒤로 네 개의 다리가 생긴 것 말고도 눈은 이미 변했고, 턱이 조금, 귀가 한쪽만 생겼고, 머리 모양 또한 변하기 시작해서 찌그러졌고, 갈기가 보송하게 솜털처럼 자리 잡았더랬어. 뿔이 마치 어린 사슴이 봄에 그러하듯이 밑둥만 드러났지. 한 마디로 정말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백면이와 내가 나란히 있었으면 그의 부모조차 둘 중에 누가 그인지 혼동했을 게 분명했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으리라 생각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된 건 백면이의 말이었지. 그가 묻더군. 용이 되는 중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나보다 먼저 백련도사가 그건 왜 묻느냐고 했더니 소심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라. 괜찮으니 부디 말씀을 달라 하길 몇 번을 거듭하고 나서야 내 등을 가리키더군. 여기에 딱딱한 부분이 생기고 있는데, 이게 등껍데기라면, 용이 아니라 현무가 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했어. 나는 현무란 말에 잠시 놀라서 백면이를 보았지. 백련도사가 잠시 기다리라면서 들어가더니 방에 있는 죽간이란 죽간은 다 들어엎더군. 그래서 찾아온 문헌에 현무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어.

나는 그 이전에 이런 일이 가능한지부터 물었어.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이냐고. 백면이가 생각해보더니 자기가 아는 이에게 물어보겠다며 들어갔고, 백련도사는 현무에 대한 설명부터 해주었어. 현무 또한 신수이긴 하나 뱀과 거북이 합쳐진 것이 다르지. 용은 청룡이 동방, 황룡이 중앙을 맡고, 천신일 때도 있고 수신일 때도 있지만 현무는 언제나 북방을 맡고. 용이 생명의 상징이라면, 현무는 죽음을 말한다더라. 애초에 북방이란 영혼이 가는 곳을 가리키기도 하지. 들으면 들을수록 무언가 감이 잡히려고 하는데, 백면이가 나와서 말했어. 변화의 과정에서 방향을 잘못 잡거나, 떨칠 수 없는 미련에 사로잡히면 목표가 되는 지점 또한 바뀔 수밖에 없고, 그리 드문 일도 아니라고 들었다면서, 물었어. 변화의 심상을 들려줄 수 있느냐고.

그래서, 답했지. 진,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 허물에 써둘 것을 그랬지. 어쩌면 네가 그 허물과 이 허물을 한꺼번에 읽을지도 모르지만, 네게 고하기에 앞서 다른 이에게 먼저 알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네가 이런 것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님을, 그저 한바탕 웃으며 나를 놀리면 놀렸지 마음에 둘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줄곧 너를 떠올렸다. 너와 함께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내가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것들을 되새겼다.

내게 손발이 있었다면, 네가 절벽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질 때 함께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돌에 박아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기라도 할 수 있었을 테지. 내게 다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면, 그러는 와중으로 널 쫓아왔던 자들에게 무언가를 되돌려 던지거나 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지. 남아도는 사지가 있다면 동시에 여러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너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돌이켰다. 내 꼬리를 미끄러지던 네 발톱을, 허공을 스치던 네 날개가 눈에 선하다. 죽을 때까지 그 광경은 잊지 못할 거야.

하다 못해 내 얼굴에 굴곡이라도 있었다면 네가 사람 형상으로 변해 내 턱에라도 매달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길고 커다랬더라면, 네 사람 형상을 머리에 태울 수 있을 정도였다면, 그때에 네가 손에 쥘 수 있는 뿔 같은 것이 있어서 의지할 수 있었다면. 뿔이 아니라면, 귀라도. 이렇게 안으로 숨어든 뱀의 귀가 아니라, 다른 짐승들처럼 밖으로 튀어나온 귀가 있었다면. 보드랍고 연약해서 찢어진다 하여도 네 손에 꼭 붙어 있도록 나는 힘을 주었을 텐데. 갈기도 좋겠지. 사람이 말을 타면서 귀를 잡지는 않으니까. 마구 없이 야생마를 타는 이들은 갈기를 쥐지 않더냐. 이 경우에는 갈기가 너무 연약해선 안 될 테지. 네 손에 털 몇 자락 남은 채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이미 본 것으로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꼬리에라도 무언가 있었다면, 뱀의 매끄러운 꼬리가 아니라 물고기처럼 꼬리 지느러미라도 달려 있었다면 너는 그것을 잡고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휘돌았지. 물고기의 지느러미 따위에 매달렸다간 대번에 그것이 먼저 찢어졌을 테지만, 용의 꼬리 지느러미라면 그보단 튼튼하지 않을지.

뿐이야. 용이 된다면 하늘을 날든 물을 건너든 하여 네게 갈 수 있겠지. 네 날개가 갑자기 묶인다거나 돌풍을 맞거나 아래에서 세찬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거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균형을 잃거나 해서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떨어질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던 기억 또한 지나치게 생생하다. 너를 만나기 전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로네 섞인 그 말썽쟁이는 날 줄은 아는데 우아하지 못하고, 솟구치거나 수직으로 떨어지거나 하여 사람들 놀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하였는데, 그러다 다친다는 말이 없었거늘. 내가 만나 겪은 너는 항상 다쳐 있었고, 나는 그것을 뒤늦게 보거나, 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받아내거나 피하게 하지 못하였어. 아니지, 그때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때가 더 많았다. 날개가 부러진 채로도 웃는 줄을 몰랐기에, 네 웃음에 감춰진 고통을 내가 내 것처럼 느낄 줄도 몰랐기에 그리 바보처럼 굴었다.

네게로 쏟아지던 폭우도 바람도 화살도 번개도 무엇하나 막을 수가 없었던 무력함을 떠올리며 몸이 커지길 바랐다.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너를 가까이 하지 말라 했었지. 너는 타고나기를 태풍의 불운 한가운데서 사는 자라, 발걸음이 가볍고 입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다고 했다. 변덕이 마치 북방 하늘과도 같아서 맑았다가도 갑자기 서리가 내리고, 폭우가 몰아치는 와중에 따스하니 가까이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자라더군. 그게 그저 네게는 여러 모습이 있고 너는 기분이나 속마음을 속이지 않으면서도 네 사정을 구구절절 이해시키려 들지 않아서 듣는 소리라는 것을 이전에는 몰랐다. 그렇듯 많은 말이 떠도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되어서 그렇다는 것을, 두려워할 것 없는 내게 남은 건 매혹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고 났을 때에는 너는 이미 자취를 감췄으니, 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세상을 뒤지기 위해서도 용의 몸집과 힘이 필요했다.

네게는 지금 이렇듯 길게 토로하고 있으나, 처음 보는 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내 부족했던 점들을 떠올렸노라고 말했다. 내가 붙잡고 지키고 싶은 이가 있었는데, 미욱한 탓에 내 마음도 몰랐고 지키지도 못하였고, 그러하기에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변해야 할 부분을 짚어냈다는 내 말을 듣고 백면이가 갑자기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더라. 백련도사가 백면이는 벌이자 속죄의 일환으로 원하는 자들에게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자기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고 옆에서 설명해주었다. 보통은 오래 기다려야 하니까 자리를 비키자고 말하는데, 백면이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묻더군. 내가 지키고 싶었던 이가 혹시 죽지 않았느냐고. 그자를 내 손으로 죽일 뻔했다. 평상시 일족들의 모욕 앞에서 참는 것이 일상이기에 아무 동요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초면인 자가 물어서인지 어째서인지 분노가 확 일었다. 백면이의 멱살을 잡거나 바로 양 어깨를 잡아 양쪽으로 찢어버리고 싶은 광포한 분노가 일어나니 백면이는 그 살기를 감지하고 백련도사의 뒤에 숨었고, 백련도사는 나를 말리고,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낯선 일이었어. 그럴 줄은 몰랐다.

겨우 진정한 다음에야 백면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덜덜 떨면서 이야기해주었는데, 내 기원과 소망이 미망에 가깝기 때문에, 내 심상의 대부분이 후회와 회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의 방향이 북쪽과 지하로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게 아니겠느냐. 누가 귀 옆에서 천둥을 치는 것 같더군. 그 말이 틀림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지. 애초에 내가 그리 화를 낸 것도 그에게 분노한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분노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네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고,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그렇게나 말해왔으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못했던 거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게 되자 내 얕은 믿음이 깨지고 불안과 후회만이 시커멓게 드러난 거지.

간신히 정신을 차려, 어찌해야 좋겠느냐고 물었다. 백련도사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차를 내주며 말하기를, 딱딱한 껍데기가 생긴다고 해서 바로 현무가 되리라는 법은 없다고 하더라. 용에게는 어떤 변형이든 가능하니까 딱딱한 껍데기를 지닌 용이 될 수도 있거니와, 현무의 경우 그저 거북의 등껍데기를 진 뱀이 아니라 암컷 거북과 수컷 거북이 음양합일을 이루며 함께한 신수이니 홀로 현무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아,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느냐? 암컷과 수컷이 아니더라도, 음양이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합일하는 둘이라면 현무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나조차 어처구니 없으니 이를 들으면 네가 얼마나 웃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머릿속으로는 너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현무가 되어가는 중이라면 되돌리거나 방향을 돌려 용이 될 수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백련도사는 답을 주었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다시 한 번 그 허물을 앞뒤로 살폈다.

“이번에는 여기서 끝이라고? 허참, 믿을 수가 없네!”

이번에도 한숨이 나왔는데, 이건 허탈함보다는 배신감에 가까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정말로 녀석은 자신이 이 허물 편지를 읽을 거라고 믿었던 게 틀림없다. 독자를 의식한 게 아니라면 이렇듯 궁금증을 남겨두고 끝을 맺을 리가 없다. 심지어 이번 허물에는 빈 자리가 아직 있었다. 그는 길고도 긴 허물을 조심스레 갈무리하면서 옆을 보았다.

다음 허물에는 몇 글자 없어 보여서 마음이 급해졌다.

 

진에게

노력했으나 성과가 적었다.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이만 총총.

 

바로 다음 허물을 집어 들었다.

 

진에게

허물은 벗었지만 변한 곳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번에 현무로 변할 뻔한 결정적인 시기였는데 그 방향을 트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번 허물은 온전히 뱀일 때와 마찬가지로 시기가 되어 묵은 것을 벗겨낸 것이니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는 허물에 쓰인 필체가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갈하기 그지없던 앞서의 허물과는 달랐다. 떨린 원인이 힘없음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그는 추측했다. 글자 중 끝맺는 획에 구멍이 뚫린 곳에 서너 군데 있었기 때문이다.

몸속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이렇게 썼을까? 힘일까? 분노나 다른 감정으로 떨리고 힘 조절을 못한 건 아닐까? 녀석은 항시 침착하고 얄미울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평정은 아주 좁은 곳에서 아주 치밀하게 자극을 제한한 결과로 얻은 것일 뿐, 녀석이 누구보다 격정적이고 직선적이라는 것을. 철없을 시절 그것은 놀리는 맛으로 다가왔고, 조금 알고 났을 때에는 꽤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특징이었으며, 지금은…….

그는 조심스럽게 방금 읽은 허물을 다시 내려두었다. 망가뜨리기 싫어 내려두었지만 원래처럼 곱게 다시 접을 능력은 없어 그저 놓아두기만 했다. 문득 생각했다. 그렇듯 곱게 접혀 있었던 것을 보면 나중 언젠가에는 매무새를 다듬을 만한 시간과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기대에 부응하듯이 다음 허물에는 글자가 많았다.

 

진.

너의 이름을 부르는 한 글자 이후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몇 번을 되뇌었는지.

무엇을 생각하기 싫다고 하면 그것을 생각하게 되는 법이라지. 지난 두 허물 동안 나는 현무가 되기를, 북으로 가기를, 지하로 끌려 내려가기를 거부해왔다. 그것이 현무로, 북으로, 지하로 끌리는 일인 줄도 모르고.

백련도사는 용이 되는 단계를 중간에 임의로 중단할 수 없고, 차라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이무기로 남는 것이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였더랬다. 현무가 되는 것도 똑같다고 했지. 물론 그것은 지난 예들에 비추어 그러한 것일 뿐, 안 되는 것은 아니라더군. 세상과 백련에 법칙이 있다면, 의지는 힘을 갖고 있으며 간절할수록 더 큰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뿐이라. 세상 풍파에 닳아 힘이 빠진 노인네인 줄 알았건만 소년 같은 기대를 품고 나를 보더라. 그 눈이 꼭 너를 떠올리게 했어. 웃음을 잃지 않았던 네 입매와 달리 백련도사의 입매는 내려간 채 굳어버린 듯하였지만 말이지.

달리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었다. 네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이 아니라, 앞으로 해주고 싶은 것들을 그리겠다고.

너를 잡지 못했음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게 생긴 다리를 단련하기로 했다. 용의 다리는 길지는 않아서 다리만을 뻗어봤댔자 가소롭기만 하더라. 긴 몸에 띄엄띄엄 있으니 걸리는 곳이 생긴 것은 다행이 아니냐 마음먹었다.

비늘에도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몸이 충분히 커진다면 비늘 하나라도 네가 잡기에 충분할 수 있을 테지. 내 몸이 길고 길어지면 네가 어딘가를 잡을 확률 또한 늘어날 테지. 기다란 몸에 힘이 있다면 아예 너의 몸을 휘감아 끌어 올리거나 잡아당기는 것도 가능할 테고. 나는 더 크고 길어져야 한다 마음먹었다. 세상을 뒤지는 데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몸집과 힘은 기본적으로 필요했다. 커다란 몸은 잘 보이니 내가 너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네게는 내가 잘 보일 것이 아니냐.

날개를 가진 용도 있다고는 하지만, 내게 날개가 생기지 않더라도 떨어져내리는 너를 바라만 보는 일은 없겠지. 아니, 이리 말하면 안 된다. 네가 떨어지거나 날다가 힘이 빠지더라도, 돌풍에 맞아 균형을 잃더라도 언제든 구름 속에서 하늘을 누빌 수 있는 힘을 가지면 된다고 맘을 먹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먼저 너를 맞이할 수 있겠지. 함께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날 수도 있을 거야.

내게 네가 붙잡을 것 하나 없이 매끈했기에 못한 것들이 아니라, 내게 이제부터 생겨서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 튀어나오게 될 주둥이도, 그 밑에 생길 수염도, 커다랗게 자리잡을 귀도, 기다랗게 자리 잡을 갈기 모두 네가 붙잡을 수 있는 동앗줄로 써다오. 네 한 몸쯤은 받을 수 있는 몸집을 키우기로 하였으니 아무거나 붙잡고 내 등에 앉아다오. 힘이 빠져 뒤로 날아가더라도 붙잡을 기회가 있도록 내 몸을 길게 늘렸으니 그 위에서 뒹굴다가 꼬리만이라도 붙잡아다오. 날개에 힘이 생길 때까지 노닥거리다가 가라. 날개에 힘이 생기지 않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그저 내게 모든 걸 맡기고 방향을 지시만 하면 된다. 내가 네가 가야 할 곳, 가고 싶은 곳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혹여 네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쉬고 싶다고 하면 긴 몸을 이리저리 똬리 틀고 감싸서 너만을 위한 둥지를 마련해주리라.

내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너를 그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복수심을 누그러뜨리거나 최소한 숨겨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백로들 가운데에서 다리가 짧고 목이 짧고 날개가 새카맣다 하여 배척받았다지만, 네가 매의 핏줄임을 다들 알았을 터인데. 당대 새의 왕이자 날짐승의 왕이자 천하를 안녕케 할 봉황의 후보에 가장 가까운 것이 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아니지, 어쩌면 알기에 네게 더 모질게 하였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능력이 뛰어난 자에게 감탄과 찬사보다 시기와 질시가 먼저 튀어나가고 더 오래 지속되는 자들의 속사정을, 일의 결과와 의도보다는 과정에서 발생한 잡음에 더 눈길이 쏠리는 선대의 아집을, 뻔히 질시로 인한 모함임을 알면서도 거기 어울려서 놀아나는 당대 권력자들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거리들을.

그런데 그렇게 증오스러운 자들 가운데에는 나도 있었다. 아니, 으뜸이 나였다. 너의 새까만 깃털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자들 중에 나도 있었다. 봉황이 언감생심 너에게 어울리기나 하느냐는 말들을 들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선대 어르신들이 너를 꾸중하며 옆에 감시관 겸 본보기로 붙여두었던 것이 나였고 나는 그들의 바람을 성실히 이행했더랬다. 그때에 네게 느낀 혐오감이 내게로 고스란히 돌아와 늪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 한 말이라고, 너를 가까이 하지 말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은 너를 판단하지 아니하고 내게 내려진 것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안다. 네게 그저 자연스레 따라붙는 질시와 질투, 왜곡 말고도 그보다 더한 악의와 책략이 네 숨통을 조였음을. 네가 백로의 무리와 내 일족을 구하고 부상당해 아무 말도 못할 적에 네 공을 가로챈 자들이 지금은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너의 모든 명예를 짓밟고 있다는 걸 아느냐? 그걸 넘어서서 네가 그 일의 주동자이며 호랑이 일족과 내통한 배신자라고 아예 오도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나 교묘하게 일을 은폐했는지,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에서도 너와 나 정도나 그 빈틈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기억하느냐? 산불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네가 선두에서 길을 찾고 내가 뒤에서 몰았었지. 산군이면서도 미련하게 산을 불태운 호랑이 일족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모두에게 짙게 깔려 있었다. 다른 일족을 굴복시킬 수만 있다면 터전을 잃거나 피를 땅에 뿌려 오염되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겠다는 그 포악한 계획에 모두 치를 떨었지. 그러나 그 계획들은 알기 쉽고 대처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숨어서 사이를 이간질하고 공을 빼앗아 자기들 것으로 만드는 음모자들은 알아채기도 어렵고,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증거는 없어지고 권력 또한 넘어가 진실이 깊이 묻혀 있더라. 그때 내가 그 쥐 일족의 전령 몸에 붙어 있던 깃털이 어떤 뜻인지 알아차렸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 그렇진 않았을 거다. 나는 그들이 널 기습하여 네 공로를 가로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아마 너의 마수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느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고 네가 도망갔다고 했을 테니까. 쥐 일족 전체가 들고일어나면 진실이 어느 쪽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며, 같은 값이면 모두의 질시와 선망을 한 몸에 받는 네게 서는 일족은 없었을 테니까. 그 또한 나의 후회로 남아 있다. 네가 공개적으로 네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면 홀로라도 네 곁에 섰을 텐데, 우리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 나 또한 그때에 사람들 인식을 돌리려 돌아다닐 시간도 없었다. 네가 살아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 너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 다시 돌아가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보다 더 현명한 처신법은 있었을지 몰라도 아마 당시에 나는 떠올리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때 네가 모두의 추적을 따돌리고, 완전히 축난 몸을 하고도 살아서 나를 맞아주었기에 지금도 널 믿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너에 대한 믿음인 거지. 너는 살아 있을 거라고. 어떤 모함을 받아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혹시, 만에 하나 천에 하나 네가 죽었더라도 넌 다시 되살아나리라고. 너는 창공을 가르는 매이며 세상에 다시없을 기재이고, 나의 봉황이니까.

다시 어려움이란 문제로 돌아가자면, 호랑이 일족은 진즉에 모두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쥐 일족이 권력을 쥐었다. 너를 찾다가 내 일족에게 강제로 끌려 돌아오고 벌을 받고 하며 내가 세상에서 눈을 돌린 동안 착실히도 권력과 부를 불렸더군. 그들과 결탁했던, 알아서 충성을 바친 많은 일족들이 너를 매도하고 나를 견제했다. 내 일족의 안전을 위해 눈감은 척했던 것들이 용이 되기 위해 허물을 벗고 변하는 과정에서 자꾸 떠올라왔다.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는 게 아니라 내 영혼의 변화를 위해 껍질을 벗는 과정이라서일까? 점점 나를 숨길 수 없게 되고 내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드러난다.

세상을 불살라버릴 이 분노만이 내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너를 괴롭힌 자들을 끌고 가 깊은 나락에 던져버리고 싶은 이 차가운 혐오가 내 전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이것들로 인해 내가 껍데기 속에 나를 가두고 차가운 땅속으로 들어가 현무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겠다. 이것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용이 되고자 했던 것이 어쩌면 내 도피에서 시작되었으나 진정 바라는 것이 너를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네가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나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면, 나 자신을 반으로 갈라서라도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래, 나를 반으로 갈라서라도.

 

그것이 마지막 허물이었다. 그는 혹시나 다른 허물이 바닥에 떨어지거나 뒤로 넘어가진 않았는지 뒤지면서 온 동굴을 뒤집어놨다. 찾아낸 것이라고는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지도에는 몇 군데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린 솜씨가 조악하고 글씨가 천하의 악필이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이게 직감적으로 여의주를 품을 수 있는 장소를 나타낸 지도라고 알아챘다. 이 지도를 두고 간 것은 누군가가 알아채지 못하길, 알아챈다면 그만이 알아채길 바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날듯이 달려 바깥으로 향했다. 절벽이 보이자마자 뛰어내려, 옷가지를 훌훌 떨어뜨리며 매의 모습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힘껏 날개를 퍼덕였다. 날갯짓 한 번 한 번에 힘이 들어가더니 불꽃이 솟아올랐다.

불꽃으로 만들어진 새가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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