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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 [20주년] 묘연한 동행

2023.08.01 00:0008.01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묘연한 동행

은림

찬바람이 몰아치는 플랫폼 끝에 할머니가 서 있었다.

터널 끝에 걸린 겨울 하늘은 햇살이 청명하지만 바람이 불어서 추운 날이었다. 할머니는 밝은 색 코트와 세련된 인조 퍼 목도리와 예쁜 손뜨게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주변에 꾸물꾸물 걸어 다니는 두꺼운 롱 패딩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얇은 차림이라 한 겨울에 핀 벚꽃처럼 자꾸 마음이 쓰였다. 플랫폼에 반만 걸쳐진 할머니의 뾰족한 구두 끝도 불안했다. 굽이 너무 좁고 높아서 내 발이 욱신대는 거 같았다.

처음 할머니가 내 눈을 끈 건 퍼 목도리가 우리집 고양이랑 색이  비슷해서였다. 지금은 불안한 차림새와 조심성 없어 뵈는 행동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곧 열차가 들어올텐데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걱정하는데 할머니 뒤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열차가 곧 들어와요. 문이 열리면 위험해요.”

그 말에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 안전선 안쪽으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내내 통로 끝에 열린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차림새처럼 날아갈 듯 상쾌한 날이었다. 남자의 말처럼 금방 열차가 들어왔고 깔데기에 빨려 들어가는 쌀알처럼 문 앞에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나도 열차에 올랐다. 좌석을 찾아 부산히 가방을 놓고 두꺼운 옷을 벗고 하는데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제가 안쪽인거 같아요.”

아까 그 할머니였다. 마스크를 썼고 회색 목도리는 풀어버렸지만 모자가 똑같았다. 구두도 똑같다.

“어머 죄송합니다.”

나는 좌석 표를 확인하고 얼른 옷 짐을 내측 좌석으로 옮겼다. 오랜만에 기차여행이라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창측 좌석에 짐을 풀어버린 거였다. 너무 민망했다.

“아니에요.”

할머니는 수줍은 듯 작게 말하고 안쪽에 앉았다. 나는 무선 이어폰을 꺼내 꼈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기 전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모자를 썼다 벗었다하며 앞머리를 매만지고, 자리에 앉아서는 선물인 듯한 백화점 쇼핑백을 열까말까 몇 번을 만지작 대다가 “저어, 화장실 좀...”하고 나갔다. 다시 돌아온 건 내가 잠깐 잠든 탓에 언제인지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할머니는 모자를 벗고 긴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린 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할머니 머리가 참 길고 탐스럽다고 생각을 하면서 또 눈을 감았다.

-이번 정차역은 오산역 입니다. 내리시는 손님께서는 안녕히 가십시오

할머니는 짐을 챙겨서 내렸다. 나는 몸을 약간 모로 하고 아무나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틈을 만든 다음 계속 잠을 청했다. 무궁화호는 KTX보다 좌석 앞에 공간이 넓어서 의자에 바싹 몸을 붙이고 옆으로 앉으니 어렵지 않았다. 명절에 대구 본가에 가려고 휴일도 없이 일했던 터라 잠은 소록소록 잘만 왔다. 잠결에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설핏 보니 아줌마였다. 아까 할머니가 들고 있던 백화점과 같은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명절이구나. 다들 선물꾸러미를 들었네. 그렇게 생각했다.

“저어 잠깐만....”

어느새 발을 쭉 뻗고 잠들었던지 조심스레 청하는 목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나는 얼른 몸을 오므렸다. 옆 자리에 아줌마는 화장실이 있는 뒤편이 아닌 맞은 편 문을 향해 좌석 사이를 지나 사라졌다. 날렵한 구두굽이 또각또각 눈을 찔렀다. 잠시 후 돌아온 아줌마는 따뜻하고 향긋한 커피 냄새를 풍겼다. 나도 모르게 입맛이 돌았다. 열차 정보를 살펴보니 몇 칸 앞에 식당 칸이 있었다. 출출하면 가봐야지. 라면이나 우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대전 역에 도착해 있었다. 옆자리에 아줌마는 짐을 챙겨서 내렸다. 빈 자리를 보니 까만 손뜨개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어...”

모자를 떨어트렸다고 말해주기도 전에 아줌마의 모습은 내리는 사람들의 파도에 섞여 벌써 사라졌다. 낯익은 모자였다. 반들반들한 까만 색깔도 꽃이 달린 모양도 할머니의 것과 비슷했다. 혹시 할머니가 떨어뜨린 건가? 그럼 분실물을 봤을 때 아줌마가 당황하지 않았을까? 아니, 아줌마가 모자를 쓰고 있었나?

혼란한 틈에 가벼운 코트 차림의 날씬한 아가씨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커피냄새랑 상큼한 화장품 냄새가 코를 스쳤다. 날렵하고 예쁜 파스텔 톤 구두와 봄을 불러온 듯한 베이지색 코트가 아주 잘 어울렸다. 저 나이엔 한 겨울에 스타킹 한 장만 신어도 춥지 않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창밖을 보고 있던 아가씨가 백화점 쇼핑백에서 회색 인조 퍼 목도리를 꺼내 목에 둘렀다.

-이번 정차역은 구미역 입니다. 내리시는 손님은,,,

아가씨는 탐스러운 생머리를 한번 훑어 내리고 앞머리를 단정히 한 다음 아까 아줌마가 떨어트린, 어쩌면 할머니의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검은 손뜨게 모자를 꾹 눌러썼다.

“어....”

내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아가씨는 나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나는 내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아가씨의 회색 목도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집 고양이랑 똑같은 푸르스름한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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