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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내림 증세의 독특한 변형 양상 1례

 


박성원은 유능한 회사원이었다. 박성원이 과장이 되었을 때, 그때만 해도 그 회사에서는 여성 과장이 드물었기에 어느 정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박 과장은 차근차근 승진했고 별다른 사고나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어디를 가든 복잡하게 얼키고 설켜 흘러가기 마련인 한국의 직장 생활에서 별다른 사고나 사건에 오랜 기간 한 번도 휘말리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큰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이 아니라, 사건 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평범한 날이 계속되는 행운이다. 그러한 원리는 박성원의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30대 초 과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성원은 조금씩 이상한 일을 차례로 겪게 되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무리하게 고객을 끌어 들어 보려고, 다들 갈 필요가 없다고 했던 고객의 친지가 남긴 낡은 중고 물건들을 몇 개 비싼 값을 치르고 받아 온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길게 이어지기 마련이었던 2000년대 초의 술자리에서 술이 거하게 취하는 새벽 시간 즈음이 되었을 때, 박성원 과장이 평소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던 이상한 말투로 한 마디씩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정도였다. 그 말의 내용에 좀 차갑거나 섬뜩한 점이 있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는 했다. 예를 들어, 고압적인 임원 험담을 하는 자리에서 “그런 놈은 총살을 시켜버려야지”라고 중얼거린다든가, “내가 작심하면 한 손으로도 숨통을 끊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그 무렵에는 농담거리 정도였다.

그렇지만 점점 이상한 일은 더 많이 벌어졌다. 그 정도가 심해졌고,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간격도 점점 줄어 들었다. 전체 직원들이 모여 회사의 매출과 비용에 대해 긴긴 설명을 듣고 그 숫자를 따지며 그 모든 활동이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짜증스러운 설교가 이어지고 있을 때, 박성원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그 모든 매출과 비용과 부채와 자본에 대해 강한 목소리로 비난한 뒤에, 숫자들을 써 놓은 종이들을 찢어 버리고 표가 나오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두들겨 부수어버렸다. 박 과장의 동료들이 진정하라며 말리려고 나섰는데, 박 과장이 어찌나 기운이 센 지 오히려 여러 명의 동료들을 제압해버렸다.

그때부터 박성원의 인생은 이상해졌다.

평범한 직장 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성공하는 삶을 꿈꾸고 있었던 박성원은 어떻게든 그 이상한 말과 행동과 생각을 없애고자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떤 발작적인 신경질환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저곳의 병원을 전전하며 다양한 치료를 받고자 노력했다. 사람을 고분고분하게 해 주는 진정제 같은 것을 처방 받아 먹기도 했고, “가끔 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내 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도 강한 외로움을 느낀다.” 같은 항목이 적혀 있는 무슨 심리 검사 같은 것을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어쩌다 뭘 좀 잘못 추천 받아서, 별 쓸 데 없는 이상한 내용에 대해 긴 시간 묻고 답하는 이상한 얼치기 상담사를 여럿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박성원의 증상을 치료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진정제를 먹으면 박성원이 갑자기 딴 사람처럼 돌변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모습이 진정된 형태로 나타날 뿐이었다.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차분한 목소리로 무서운 말을 하는 것이 차이점일 뿐이었다. 심리 검사를 해 보면 보통 때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올 뿐이었고, 돌변해서 이상한 모습을 보일 때에는 돌변했다는 결과가 나올 뿐이었다. 얼치기 상담사들은 박성원에 대해 긴긴 상담을 이어 가야만 할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시일이 지나기도 전에, 오히려 그 상담사들이 사기죄로 구속 되거나, 사이비 종교 비슷한 열광적인 자기 계발 모임을 차리거나, 그냥 임대료가 너무 올라서 사무실을 닫게 되어 그 후에는 다단계 회사 같은 데 취직하거나 했다.

그러던 중 박성원이 직장 생활을 하던 때, 항상 그를 질투하고 시기했던 직원 하나를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나 박성원을 미워하던 그 직원은 박성원이 알 수 없는 증상에 시달려 일을 쉬게 되자, 그 직후부터 돌변하여 박성원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며 불쌍하게 여기고 친한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왜 그렇게 돌변하게 되었는지는, 그 스스로도 몰랐다.

직원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삶의 가장 큰 고난을 마주한 것처럼 보이는 박성원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혹시, 신병 아닌가? 신병이면 절대 약이나 의학적인 걸로는 치료가 안 된데. 신내림을 받아야 치료가 된다던데.”

박성원은 처음에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고 비웃었다.

“무슨 소리야? 세상에 신내림 같은 게 있는 나라가 한국 말고 몇 나라나 더 있다고 그래. 러시아 사람이나, 독일 사람들이 한국 처럼 신병 앓고 신내림 받는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어 봤어? 한국 사람만 무슨 굉장히 특별한 종족이라서 신내림이 한국인한테만 내려 오는 것일 리는 없잖아. 그냥 한국에만 이상한 증상의 해답이 신내림이라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믿음이 돌고 있는 것 뿐이지.”

그러나 한 번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박성원은 그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박성원은 며칠 즈음을 망설이다가 서울 시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여러 무당들을 찾아 다니게 되었다.

박성원의 증상은 무당들이 보기에도 특이했다. 경력이 많고, 진지하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당일 수록 박성원에게는 지금껏 본 적도 없을 정도로 강한 신이 내렸으니 반드시 신내림 굿을 하고 신내림을 받아 무당으로 남은 인생을 사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성원은 무당으로 사는 삶이 달갑지 않았다. 증오했다기 보다는, 한 번도 자기 인생의 미래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점점 그 길이 맞다는 생각이 박성원의 주변을 감돌았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과 자신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때까지 나쁜 증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무당들은 선택된 능력처럼 취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박성원은 자신의 삶이 남들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가진 무당이 된다는 특별한 삶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우쭐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신내림 굿을 받기까지 여러차례 고민하고 준비하는 동안 정말로 자신의 증상에 대해 무엇인가 알아 가는 것도 있었다. 박성원은 발작을 일으키면 대단히 냉정하고 강인한 모습이 된다. 사람 목숨을 빼앗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남의 목숨을 해치는 일도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아무렇게나 흥분하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고 착한 사람을 도와 준다는 의식도 강하다. 이런 성격은 한국 회사에 적응해서 살아 온 박성원의 모습과는 별로 닮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발작을 일으킨 상태가 되면, 도저히 박성원이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지식을 떠들어 대기도 했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이해하는가 하면, 갑자기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가 볼 수도 없었던 개성 지역의 동네 모습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신내림 굿을 한 뒤, 박성원은 모든 무당들의 말을 종합하여 자신에게 개성 송악산에 있는 한 당산나무에 붙어 있던 귀신이 자신에게 옮아 왔다고 믿기 시작했다. 박성원이 직장 생활 중, 무리하게 사들였던 그 오래된 묵은 중고 물건에 이곳저곳의 귀신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때 개성에서 온 제사 밥 못 얻어 먹은 귀신이 건너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물건의 원래 주인이 이북 출신으로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라던가 하는 말을 들은 듯 하기도 했다.

박성원은 그리고 10여년 간 무당으로 살았다.

최고의 무당으로 자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용한 무당”, “진짜 무당”으로 소문이 났다. 나름대로 존경 받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돈도 꽤 번 권위자가 되었다. 박성원은 무당으로 자신을 찾은 사람들의 많은 문제들을 모두 다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박성원은 속임수가 아니라 정말로 귀신이 씌여서 행동하는 진짜배기라는 소문이 그의 삶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무당이 박성원을 몰래 찾아 오기도 할 정도였다.

“내가 요즘 신빨이 떨어져서 큰 일이야.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요즘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가짜로 귀신 씌인 흉내만 내면서 일할 때도 많은데, 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 그래서 자기한테 어떻게 도움을 받아 보려고. 자기는 정말로 아직도 짱짱하게 귀신이 붙어 있잖아.”

박성원은 용한 무당이 되어, 전국에서 귀신이 들려 고생한다고 하는 사람들, 귀신이 붙어 부정탄 건물이라고 하는 곳들, 자꾸만 나쁜 일이 생기는데 그게 귀신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회사들, 등등을 돌아 다니며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 도전했다. 문제가 잘 해결될 때도 있었고 잘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오히려 더 진실되게 생각했다.

재미난 것은 박성원이 귀신의 목소리로 해결책을 이야기하는 내용은 대체로 그냥 가장 상식스러운 풀이 방법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마법적인 위력으로 악의 귀신을 몰아 냈으니 이제부터 이 회사는 영업이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 보다는 “이 회사는 사장 아들이 능력도 없는데 사장 아들이라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항상 개판이 나는 거지. 그 아들을 잘라”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박성원의 사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훌륭한 무당으로 존경 받고 있단 그가 요 얼마 사이에 더욱 이상한 형편에 빠졌고 그 때문에 더욱 다르게 변했다는 제보를 받은 후였다. 2010년대 후반 즈음이 되었을 때 그 송악산 당산나무 귀신은 너무 시도 때도 없이 막 나타났다 사라지고, 과거와는 다르게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일 때도 많아졌다고 했다. 이제 회사 기술영업지원팀의 과장이었던 원래 박성원의 모습을 보기가 더 어려울 정도로 돌변이 심해졌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좀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지 걱정이 된다는 말까지 제보 이메일에 실려 있었다.

대략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그냥 재미 삼아 처리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일단 의사를 만나 보고 더 위험한 일을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견을 전했다.

그리고 제보자에게 박성원이 하루에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접하는 지를 세심하게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언제 송악산 당산나무 귀신이 내려와 특히 난동을 부렸는지도 자세히 알려 달라고 했다. 돌아온 답을 살펴 보니, 박성원은 TV나 인터넷 영상을 보다가 접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팀에서는 TV에서 무엇을 보느냐와 박성원의 상태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가 직접 살펴 보기로 했다.

직접 보니 확실히 박성원이 원래 상태일 때와 접신한 후의 상태는 굉장히 달라 보였다. 그 정도로 사람이 달라지는 사례는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조차도 아주 신기하고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박성원의 접신 기록의 시간이 주로 그 당시 여러 케이블TV 방송국에서 유행하던 탈북인들이 여럿 나오는 쇼가 방송되던 시간과 겹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몇 가지 추가 분석을 통해 우리는 특히 박성원이 당시 “전직 북한 아이돌”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활동하던 한 방송인에게 바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박성원과 그 “전직 북한 아이돌”을 직접 만나게 해 보면 어떻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의사와 간호사까지 대동하고 그 탈북인 방송인과 박성원을 만나게 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그 방송인은 먼발치에서 박성원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주춤주춤 뒷걸음으로 물러 났다. 그러더니 전화기를 꺼내 그의 모습을 이곳저곳에서 검색해 다시 세심히 살펴 보았다. 그러더니 그 방송인은 악마에라도 들린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방송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온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뒤쫓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막무가내로 계속 달아났다. 그 방송인은 너무 격렬히 도망치다가 자칫 사고를 당할 뻔도 했는데, 다행히 우리 팀은 겨우 그 방송인을 안전하게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전직 북한 아이돌”에게 도대체 왜 도망쳤냐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 온 대답이 굉장히 의외였다.

“김정일이가! 김정일이가 저승에서도 나를 잡아 죽이려고 저것을 보냈어요.”

우리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그 방송인이 숨기고 있었던 다른 사실에 대해 고백을 받은 뒤, 그 자료를 토대로 육군 심리전단을 찾아 가야 해야 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은 육군 심리전단 기술3실이라는 부서에서 일하면서 휴전선에 설치된 초대형 스피커로 북쪽을 향해 어떤 노래를 틀면 좋을까를 고르는 사람이었다.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어찌 보면 심심하고 어찌 보면 재미난 일을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블랙핑크 노래를 틀까, 아이브 노래를 틀까, 사이에서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 이외에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위한 지식 또한 아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박성원과 박성원을 보고 도망친 탈북인 출신 방송인으로 부터 입수한 모든 자료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가 추측한 내용을 모두 알려 주자, 심리전단 기술3실의 담당자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98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뇌반응 연구소에서는 한평숙 박사라는 사람이 헝가리 연구진과 함께 대단히 새로운 뇌 조작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연구의 주요 내용은 몇 가지 약물과 반복적인 충격, 쾌락 반복을 동시에 활용하면 사람의 생각과 버릇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평숙 박사는 이 방법을 활용해서 실험을 거듭하면 사람의 뇌에 대해 훨씬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꿈을 품었다. 그래서 대단히 의욕적으로 헝가리 연구진과 함께 일했다.

그러나 그 해에 대한민국, 그러니까 남한이 헝가리와 수교를 맺었다. 냉전시기 반공국가의 대표였던 남한이 동유럽 공산국가와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사례였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남한은 동유럽 공산국가와 교류하는 듯한 시늉만 해도 큰일 날 일이라고 하던 나라였는데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뀌어 헝가리와 한국에서는 공무원들이 오가며 대놓고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증진시키자”라고 외치는 세상이 되었다.

냉전이 끝나가는 그 당시의 세계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어정쩡하게 옛 시대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지 않았다. 남한 외교 당국은 냉전이 끝나는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놓치기는 커녕 오히려 지금 보면 주도하는 쪽에 가까웠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한국은 수많은 동유럽 공산국과와 수교를 맺었다. 1990년에는 공산주의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과 남한이 수교하기도 했다.

남한에 밀리고 있다는 생각에 북한 당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헝가리에게는 같은 공산주의 국가끼리 이럴 수 있냐고 마지막 순간까지 남한과 수교하지 말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의 변화를 거스르기는 어려웠고, 결국 북한 외교는 고립 국면으로 가기 시작했다. 북한은 항의의 표시로 중요한 기밀 교류 작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 때문에 한평숙 박사의 뇌 연구도 갑자기 중단 되었다. 한평숙 박사는 사흘만 더 연구할 시간을 달라고 버텼다고 하는데, 결국 요원들에게 질질 끌려서 북한으로 되돌아 갔다고 한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한평숙 박사는 강하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 한평숙 박사는 자신의 연구가 그 만큼 큰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헝가리에서 연구했던 기술을 시연해 보이기로 했다. 아직까지 기술이 완벽하게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예비시험을 거듭하면서 한평숙은 삶을 연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한평숙은 원래 이름이 이관옥이었던 특수요원을 새로 개발된 방식으로 세뇌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한평숙 스스로 헝가리식 완전세뇌라고 이름 붙인 방법이었는데, 사람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헝가리식 완전세뇌가 끝나면, 이름, 나이, 말투, 과거행적,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삶의 목표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데,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자기 진짜 이름은 따로 있고 세뇌된 모습은 가짜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관옥은 원래 나이 보다 한 살 더 많은 박성원이라는 남한 사람으로 사는 삶을 뇌 속에 주입 받게 되었다.

“헝가리식 완전세뇌의 핵심은 사람 뇌의 기본 기능을 가장 충실히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일히 세뇌할 모든 사항을 다 개발해서 넣어 주지 않아도, 세뇌 당하는 쪽에서 알아서 가장 자연스러운 상상으로 빈 공간을 채워서 완벽히 다른 삶을 스스로 받아 들이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름과 고향과 좋아하는 과목 정도만 알려주면, 학교를 다닐 때 무슨 일이 있었고 친구들과 뭘 하며 놀았는 지, 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세뇌 당하는 쪽에서 알아서 생각해 낸 뒤에 그걸 깊게 기억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관옥은 1991년 남한에 침투했다. 그리고 북한 특수요원 이관옥이 아니라 남한의 취업준비생 박성원으로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신이 이관옥이라는 인식은 있었던 것 같은데, 팍팍한 한국 직장 생활의 경쟁에 빠져들면서 점점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려워졌던 것 같다. 원래 한국 직장생활이 자기 자신을 갉아 먹으며 없애는 것 아닌가? 게다가 1994년에 북한에서 김일성이 사망하고 조직 개편이 일어나면서 한평숙이 일하던 부서가 통째로 없어지는 바람에 박성원에게 지령을 넘겨 주거나, 박성원과 정보를 교환할 상대까지 없어지는 바람에 박성원은 버려졌다.

이후 방치된 박성원은 그냥 성실한 직장인으로 열심히 남한 사회에서 잘 살았다. 과거의 이관옥도 총명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로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조직 생활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칭찬을 받는 지도 누구 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박성원으로 변한 뒤에 남한 회사에서도 좋은 성과를 보이며 승진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박성원의 헝가리식 완전세뇌는 말 그대로 완전해졌다. 그는 자신의 꿈이 적화통일이 아니라 아파트 청약에 당첨 되어 내집마련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받아 들였다.

상황이 변한 것은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서, 온갖 매체에서 북한 소식, 김정일과 그 주변의 모습이 쏟아져 나오면서 부터였다. 박성원은 대뇌피질의 얕은 곳보다 더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고 할 만한, 국가 최고 존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그 다양한 영상에 반응했다. 더군다나 남북관계에 대해 나날이 쏟아져 나오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의 정신을 강하게 자극하는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평양을 보여 주는 화면에 스치고 지나간 작은 소도구 하나, 잠깐 화면에 등장한 한 사람의 얼굴 하나가 그의 기억을 들쑤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그는 문득문득 원래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찾을 듯 말 듯한 상태가 되었다. 바로 자신이 개성 태생의 우수한 특수요원 이관옥이라고 생각하는 상태다. 왜 자신이 그런 낯선 말과 행동과 생각 하는 지 알 수 없었던 박성원은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정신 속에 들어 있던 것은 결국 그 자신일 뿐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박성원이 완전세뇌에서 회복될 기회에 진입한 것을 주변 사람들은 신내림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박성원은 엉뚱하게 10년 동안 무당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특수요원 훈련대에서 같이 지낸 동료를 TV에서 발견하고 박성원은 좀 더 강한 충격을 받는다. 이관옥은 가장 어려운 임무에 대한 실험에 자원했지만, 그 동료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 동료는 특수요원 훈련대를 졸업한 후 좀 더 편한 부서에서 일하려고 노력하며 이리 저리 옮겨 갔다. 동료는 심리전 부대로 들어 갔다가 직접 노래와 춤을 개발하고 선보이는 일까지 하게 된 것인데, 대량탈북이 한참 발생할 때 남한으로 넘어 온 것이다. 그리고 탈북인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여느 오락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조금 과장을 섞어 “전직 북한 아이돌”이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다 알아낸 뒤에 이 정보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고민했다. “전직 북한 아이돌”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을 때는, 일단 특수요원 훈련대의 동료였던 이관옥이 자신을 처단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주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관옥이 지금 행복하게 사는 것 같으면 차라리 그 사실을 알려 주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반대로 육군 심리전단 기술3실에서는 우리에게 좀 더 철저하게 모든 사실을 다 알려 달라고 하면서, 박성원을 한 번 세밀하게 연구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지금은 세상에서 사라진 헝가리식 완전세뇌 기술을 우리가 입수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하겠지만 무엇 보다도 과학의 큰 진보가 아니겠냐고 하면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박성원 본인에게 이 모든 일에 대한 전혀 다른 설명이 있다고 말했을 때, 정작 그 자신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또 무슨, 굿과 신내림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 그런 거 이야기하시려고 하세요? 괜히 그런 쪽으로 파헤치려고 들면 당산나무신께서 노하시고 부정타는 거에요.”

우리는 그래서 일단 그냥 돌아 오기로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박성원이 지나치게 우리의 설명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어느 순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또 듣기라도 하는 것 처럼.


- 2023년, 양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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