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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제호

2023.12.02 13:4512.02

 

제호 (祭虎)

 


고조선 때 서쪽 먼 지역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넘어 온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세상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뜻을 펼치고, 그 전과는 다른 학문을 하는 자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그 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으니, 그들은 오륜과 예절을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말하는 오륜이란,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부부, 어른과 아이, 친구 간의 의리와 예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말이 그럴 듯하고 따지는 것이 교묘하였으므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 났다.

오륜을 따지는 무리들이 많아지니, 그 중 몇몇 뛰어난 자들은 나라에 여덟 가지 엄한 법을 세워 시행하는 것이 세상의 혼란을 다스리는 길이라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여덟 법을 퍼뜨리고 세상에 꼭 내세워야 한다고 이야기는 무리들이 팔법당(八法黨)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는 사이에 팔법당이 온 나라에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나라 곳곳, 여러 성들을 다스리는 성주와 대부들은 모두 팔법당의 뜻에 맞추어 여덟 가지 법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팔법당을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여덟 법이 옳지 않다고 하여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성이 있다면, 팔법당은 왕검성에 있는 임금의 군대 중에 삼천귀병(三天鬼兵)이라고 하는 강한 군대를 보냈다. 처음에는 몇몇 병사들만을 보내서 그 성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물러 나라고 한 뒤에 성의 성주를 붙잡아 가 버리고자 한다. 그런데 만약 그 성이 항복하지 않고 끝끝내 버티려고 한다면, 삼천귀병의 날랜 병사 삼천 명이 모두 몰려 가서 성을 지키는 사람들을 다 잡아 죽여 버렸다. 그러니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하면서 팔법당의 뜻과 여덟 가지 법을 엄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성(東城)을 다스리는 성주는 성주 자리에 오르기 전에 남의 귀하고 아름다운 거울을 한번 훔친 적이 있었다. 동성주는 곧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거울을 돌려 주었으며, 거울의 값 보다 훨씬 더 많은 곡식을 거울 주인에게 주면서 용서를 빌었다. 거울 주인은 동성주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 동성주를 만나고  동성주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마침내 동성주는 거울 주인과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지금 동성의 성주부인이 예전에 동성주가 훔쳤던 거울의 주인이었다.

동성주는 자신도 도둑질을 한 적이 있다는 생각에 팔법당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것을 알고, 성주부인이 성주에게 말했다.

“팔법 중에서 제삼법은 ‘도둑질한 사람은 노비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팔법당이 성주께 흉한 짓을 하지 않을까 두렵소.”
“아무리 팔법당이 여덟 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어떻게 성을 다스리는 성주를 노비로 만들어 끌고 가겠는가?”
“팔법당은 여덟 법을 내세워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자 하고 있소. 그러므로 이런 일이 있는 것을 오히려 좋은 때로 여기고 성주를 몰아 내고자 할 것이오. 팔법당은 자신들이 동성을 마음대로 다스리고 싶어 하오 그러니 ‘성주도 도둑질을 하면 노비가 되어야 한다’며 끌고 가려 할 수도 있지 않겠소?”
“내 어찌 그 꼴을 볼 수 있겠는가?”

시일이 지나자, 걱정한 대로, 곧 팔법당이 보낸 병사들 세 명이 동성에 나타났다. 팔법당의 병사들은 모두 느름하였고 훌륭한 말을 타고 있었으며 번쩍이는 날카로운 동검들을 여럿 차고 있었다. 그래서 한 눈에 보기에도 싸워 이기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동성주는 그 세 병사들을 몰아 냈다. 동성은 험한 산을 끼고 자리 잡고 있었고 특히 성주가 머무는 집은 무척 들어 오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팔법당이 보낸 병사들 세 명 정도로는 성을 넘을 수도 없었고 성주를 잡아 들일 수도 없었다. 동성의 병사들은 적을 몰아 내고, “아무리 굳센 병사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기뻐서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단, 동성에 사는 사람들 중에 신정(神丁)은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지금 졌다면, 결국 동성도 구하고 성주께서도 몸을 지키실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동성이 지키지 좋은 곳이라서 지금 한 번 이겼기 때문에, 나중에 큰 난리를 겪겠구나.”

그러나 신정은 가난하였으며, 평소 옳지 않은 말을 많이 하여 남들이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동성에 간 병사들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검성에서는 삼천귀병을 모두 동성에 보내기로 했다. 왕검성에서 팔법당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동성에 가서 동성주에게 그 뜻을 전하자, 동성주는 놀라서 말했다.

“삼천귀병이 모두 온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동성은 여덟 법을 어기고자 했으며 그 벌조차 받으려 하지 않으니, 결국 삼천귀병이 와서 성을 모두 깨뜨려 부수고, 성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여 없앨 것입니다.”

그러자 동성주의 부하 한 사람이 소리치며 나섰다.

“옳지 않소. 팔법을 보면 물건을 훔친 사람을 노비로 삼는다고 했지만, 50만 전의 돈을 내면 죄값을 치를 수 있다고 되어 있소. 즉, 성주께서 정말로 죄를 저질러 노비가 된다고 해도 50만 전의 돈만 되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오. 지금 동성은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고 그 중에서도 성주께서는 가장 부유한 분이시니 50만 전의 돈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 우리는 돈을 구해서 드릴 수 있소. 그렇다면 왜 우리를 다 죽인다는 말이오?”

그러나 팔법당에서 온 신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팔법에 따라 잘못을 따지는 것은 여덟 법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입니다. 만약 왕검성에서 벌을 내리려고 찾아 온 세 병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 죄를 빌고 50만전을 낸다면 그것을 왕검성에서는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은 팔법을 어기기로 작정하여 왕검성에서 내려 보낸 병사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이는 나라를 배반한 큰 죄이고, 팔법을 완전히 물리친 깊은 죄입니다. 이제는 단지 물건을 훔친 죄에 관한 일인 것만이 아닙니다. 이런 큰 죄를 저질렀는데 어찌 죽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팔법당에서 온 신하는 돌아 갔다.

동성주는 겁에 질려 그 자리 주저 앉아 버렸다. 성주는 죽을 까봐 겁을 먹어 덜덜 떨기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잠을 자지도 못했고,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오직 그를 불쌍히 여겨 성주부인이 그를 어루 만지며 입 안에 술을 부어 주면, 술을 먹고 취하여 걱정을 잊고자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술을 먹어도 삼천귀병이 나타나 성을 모조리 부수고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무서운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성안 사람들이 모두 굳게 힘을 모아 맞서 싸우면, 아무리 삼천귀병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굳게 성을 지키면서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시간을 끌면 결국 삼천귀병은 지쳐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반드시 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하가 그렇게 말하자, 동성주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동성에서는 그때부터 성문을 엄히 걸어 잠그고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만약 동성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눈에 뜨이면 성주를 배반한 자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바로 처형했다.

“삼천귀병이 나타나면 모두 그 칼에 맞아 죽을 것이고, 그 전에 여기서 도망치려고 하면 그때는 우리 군사들에게 죽는구나. 결국 기다리다가 죽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성 안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외치며 괴로워했다.

일이 그렇게 되니, 동성에서는 길을 나서면 울음소리가 들렸고, 집 안에 들어 오면 겁에 질려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 도대체 사람이 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신정이 나섰다.

“여러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동성은 성호신(聖虎神)이라는 영험한 신령이 보호해 주는 곳이니, 결코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는 것을 멈추고, 눈물을 그치십시오. 성호신에게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성호신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신정이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따뜻하였고 또 사람을 위로하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러 사람들이 신정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어떤 사람이 의아해 하며 신정에게 물었다.

“그 성호신이라고 하는 것은 큰 호랑이를 신령으로 모시는 것 아니오? 옛날 사람들이 학문도 모르고 재물도 넉넉하지 않던 시기에, 굶주려서 산 속에 나무 열매라도 따먹으러 갔을 때 호랑이를 보면 곧 물려 죽을 것을 걱정했으니, 호랑이룰 보게 되면 제발 살려 달라고 빌곤 했으므로 사람들이 호랑이을 신령으로 떠받들었던 것 아니오? 지금과 같은 일에서, 어찌 산등성이를 돌아 다니는 호랑이 따위가 우리를 살려 줄 수 있겠소?”

신정은 그 말을 듣고 나직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성호신은 고작 호랑이라는 짐승 한 마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동성이 있는 산 전체에 깃들어 있는 신령입니다. 먼 옛날 동성의 산에는 곰들이 살았는데 그 곰들은 큰 산삼과 귀한 약초를 잔뜩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랑이는 바로 그런 곰들을 잡아 먹었습니다. 또한 그 호랑이는 신비로운 흰 뱀과 기이한 보라빛 노루 따위를 모두 잡아 먹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호랑이는 온갖 귀한 약을 다 먹었으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게 되어 결국 억만년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호랑이가 오래 살 수 있다면 기이하지는 하겠으나, 그래도 결국 호랑이일 뿐이니 하잘 것 없는 짐승인 것은 다르지 않다.”
“그렇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천 년, 만 년을 살게 되면 그저 하잘 것 없는 짐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해, 두 해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배우는 게 많아 지고 익히는 게 많아지면 더 지혜로워지고 학식이 깊어지듯이, 이 죽지 않고 늙지 않는 호랑이는 천 년, 만 년을 지나면서 극히 지혜로워지고 극히 높은 학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지금, 이 호랑이는 사람보다도 더 지혜로운 것은 물론이고, 신선이나 귀신보다도 더 학식과 재주가 높아지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상을 벗어나 천상의 세계에 오르기도 하게 되었고, 저승과 이승을 넘나 들어 사람의 삶과 죽음을 뛰어 넘는 일까지 모두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분이 바로 우리 동성의 산에 깃들어 있는 성호신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성호신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오?”
“성호신께서는 신통력으로 밤마다 제 꿈에 나타나서 세상을 구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고,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도리를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이야기를 해 주셨으니, 이 처럼 영험한 신령이 또 어느 곳, 어느 때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성호신께서는 우리 성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지켜 주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천귀병이 아니라 삼만귀병이 몰려 온다고 해도 성호신께서 몰아낼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신정은 전에 우리가 팔법당의 병사들을 몰아 냈다고 좋아했을 때, ‘차라리 이번에 졌다면 더 좋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소. 그때 그가 한 말은 지금 보니 꼭 맞는 말이오. 그러니 신정은 지혜로운 자가 분명하오. 그렇다면 이런 지혜로운 자가 하는 말은 옳을 것이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신정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정을 따르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날 수록,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의 가르침이 들을 만할 것이다.”

라고 말하며 더욱 더 신정의 말을 따르며 모여 들게 되었다.

곧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삼천귀병이 쳐들어 올 것을 물리치기 위해 신정 주위에 모여, 성호신을 향해 빌고 노래 하고 굿을 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제호(祭虎)라고 하여 대단히 정성을 기울이며 성호신을 섬기는 의식을 치렀고, 굿을 하고 성호신에게 노래와 춤을 바치기 위해 제호단(祭虎壇)이라는 곳을 쌓았으며, 제호대(祭虎臺)라는 건물을 지었다.

마침내, 동성주까지 제호단의 신정 앞에 찾아가 “성호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 “성호신의 가르침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따르겠다”, “성호신 덕택에 우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호신만이 성을 지킬 수 있다”고 밤새 소리치며 무수히 절을 하고, 신정이 일어나 방울을 흔들며 굿을 할 때마다 다같이 자리에서 뛰어 오르며 정신 없이 춤을 추게 되었다.

동성주가 밤새 제호단에서 성호신에게 빌다가 돌아 왔을 때, 성주부인이 물었다.

“삼천귀병과 싸워 이기려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많이 만들어야 할텐데, 어찌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시고 오직 신령에게 비는 일만 한단 말이오?”

동성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삼천귀병은 천하제일의 군사요. 동성 같은 궁벽한 작은 성에 있는 우리 재주로는 삼천귀병 중 한 둘도 죽일 수 없소. 온 힘을 다해서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만드느라 고생해 본 들 오직 패할 뿐이란 말이오. 그러니 뭐하러 쓸데 없는 일을 하며 힘을 쓰겠소?”

그리고 동성주는 탄식했다. 성주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제호단에서 성호신에게 빌기만 하는 것이 옳소?”
“이제 열흘 정도만 지나면 삼천귀병이 찾아 올 텐데, 그 때까지 무슨 다른 수를 낼 수 있겠소? 그나마 혹시라도 성호신이 정말로 영험한 술법을 부릴 수가 있어서, 하늘에서 산더미 처럼 큰 호랑이 발바닥이라도 나타나서 삼천귀병을 내려 쳐 주기라도 해야 우리는 살아 남을 수 있소. 안 그러면 어차피 다 죽는 수 밖에 없소.”
“성주께서는 정말로 신정의 말을 믿으시오?”
“내가 믿고 말고가 옳은 것이 아니라, 어차피 다른 아무런 방법이 없지 않소?”
“그렇다고 성호신을 믿는 자를 따라 그 같이 밤새 정성을 기울일 이유가 있소?”
“그나마 밤 새 빌고 정신 없이 날뛰고 오면 두려운 마음은 잠시 잊을 수 있으니, 제호단에 가서 신정이 성호신에게 비는 곳에서 열심히 같이 노래하는 것이오. 신정은 성호신을 깊이 믿고 따라야만 성호신이 큰 복을 내려 준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그 말을 믿기라도 할 뿐 다른 방법은 없지 않겠소?”

그리고 나서 동성주는 다시 온 힘을 다해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기이한 동작을 하더니 몸 가짐을 바로 하는 예를 갖추었다. 그러더니 주변의 시녀들과 함께 기괴한 의식을 치르고는 또 밤새 제호단에서 성호신을 향해 굿을 하겠다고 했다.

성주부인은 잠을 자려고 홀로 누웠다. 밤 동안 누워서 길거리 먼 곳에서 들려 오는 성호신을 위해 사람들이 부르는 이상한 노래를 들었으며, 가끔 부하들이 찾아 와 성호신에게 비는 무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굿을 하고 있는 지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다 날이 밝아 오게 되니, 성주부인은 시녀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직접 신정을 불러 물어 보아야 겠다.”

성주의 부하들은신정을 데려 왔다. 성주와 성주부인이 지내는 건물은 으리으리하면서도 엄숙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곳에 들어 서자, 시정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어 조용히 움직이고자 했다.

성주부인이 신정에게 물었다.

“너는 정말로 천 년, 만 년을 산 호랑이가 천상 세계에 올라 갔다 와서 너에게 신통력을 보여 준다고 굳게 믿고 있느냐? 나는 이 성의 성주부인이니 감히 거짓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숨김 없이 밝히도록 하라.”

그러자 신정이 고개를 숙여 성주부인의 발 앞에 머리를 갖다 대며 예의를 표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을 숨김 없이 말하자면, 저 또한 그저 사람일 뿐이고 성호신을 뵌 것은 꿈일 뿐인데, 어찌 그 모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모두 다 믿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꿈이야 그저 뜻 없이 잠 자는 도중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잡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루 왠종일 성호신에 대해 노래하고, 성호신을 향해 춤을 추고 있으니, 꿈 속에서도 성호신을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성호신이 꿈 속에 나타난 것이 정말로 신통력으로 저에게 고귀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인지 아니면 한낱 잡꿈일 뿐인지는 사실 저 또한 모릅니다.”

성주부인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성호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성주부인께서 물어 보시니, 감히 숨김 없이 아뢰겠습니다.”

신정은 한 번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저는 가난하지 않은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평생 기이한 일과 신비한 술수를 찾아 다니느라 재물을 다 써 없앴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아 왔습니다.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던 풍습을 배워 성호신에게 비는 것을 어릴 때 익혀서 자주 빌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저를 잡신이나 믿는 멍청한 사람이라고 오랜 세월 비웃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것이 한이 되어 맺히고, 울분으로 쌓인 것이 도대체 몇 년 치, 몇 십 년 치였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운수가 절묘하게 바뀌어 사람들이 제 말을 믿게 되었고, 이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성호신에게 빌어 보자고 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통쾌한 일을 만났으니, 내가 옳았노라, 내 말이 맞았노라, 내가 가는 길이 좋은 길이라, 어찌 소리 높여 외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너에게 모여 들고, 사람들이 너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아서, 그 이유만으로 아무 쓸데가 없는 짓인 것을 알면서도 성호신을 떠받들며 밤새 굿을 한단 말인가?”
“성호신을 떠 받드는 일을 잘 하면 사람들은 저를 보고 ‘대단히 신통한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성호신을 더이상 떠받들지 않고, 세상에 성호신이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집안 재물을 아무 이유 없이 날려 버린 가난뱅이일 뿐이고, 한 평생 헛 짓을 하며 좋은 세월을 다 보냈지만 배운 것도 익힌 것도 없는 얼뜨기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성호신을 떠 받들어 성에 사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제가 말하면, 사람들이 제 주위에 모여 들어 제가 하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말처럼 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어찌 성호신을 따른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성호신을 떠받들고 있을 때, 저는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되며, 사람들이 저를 높게 여겨 주는 기분을 느낍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저는 삶을 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주부인은 고개를 처 박고 있는 신정을 물끄러미 바라 보며 긴 시간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지금 너에게 모여 든 사람들 중에는 삼천귀병을 물리쳐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너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너는 그 사람들의 재물을 탐내지도 않고, 네가 싫어 하는 사람을 괴롭히라고 무리에게 명하지도 않는다. 대신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정갈한 몸짓으로 성호신에게 비는 일만 하니, 사람들이 너를 보고 욕심 없고 착한 사람이라고 우러러 보고 있다. 너는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스러운 사람도 아닌데, 어찌 그와 같이 깨끗하게 사는가?”

그러자 신정은 더욱 더 고개와 온몸을 납작 엎드리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재물 몇 푼을 받아 내 봐야, 그것으로 즐거운 일을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미워한 사람을 몇 대 때려 보라고 한들, 그것으로 지난 십 년 동안 제가 한심한 자로 취급 받았던 세월이 돌아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욕심 없고, 깨끗한 사람으로 지내면, 그만큼 사람들은 저를 더 떠받들 것이고, 저를 성호신의 뜻을 전하는 높은 사람으로 더욱 귀하게 대접해 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좋아서 이와 같이 살고 있는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떠 받듦을 받으며 귀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재물이 무슨 소용 입니까? 오히려 세상 사에 아무 남은 뜻이 없는 것처럼 은은히 미소를 짓는 얼굴 표정을 연습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성주부인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와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는 손짓을 하여 신정을 물러 나게 하였다.

얼마 후 마침내 삼천귀병이 몰려 왔다.

병사들은 성문을 부수는 도구를 이용하여 간단히 성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 왔다. 성 안에는 제호단 주위에 성호신을 위해 엎드려 주문을 읊조리던 사람들이 한 군데에 모여 모두 무릎을 꿇고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어디에서 호랑이 떼가 나타나 병사들을 다 잡아 먹지 않을까?”
“이제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큰 호랑이가 나타나 병사들을 모조리 밟아 죽이지 않을까?”
“성호신이 짐승처럼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이빨과 발톱으로 싸우기야 하겠는가?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면 신비롭게도 병사들이 모조리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 같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병사들이 줄을 지어 발을 맞추어 걸어서 자꾸만 다가 오고 있는데도 병사들을 막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는 점차 겁을 먹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외치기를,

“마지막까지 굳게 성호신이 적을 물리칠 거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만 성호신은 살려 주실 것이다. 성호신을 의심하고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신통력을 얻지 못할 테니 죽을 뿐이다. 꼼짝도 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성호신이 적을 물리쳐 주시는 것을 기다리면서 성호신에게 빌기만 하라!”

그렇게 소리치는 사람들이 가장 겁을 많이 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삼천귀병이 바로 눈 앞의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 오자, 사람들은 무리 가운데에 있던 신정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정은 자리에서 일어 서더니, 주위를 돌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미 성호신께서 적을 물리쳐 주고 우리를 살려 주시고 끝없는 복을 내려 주신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신정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 같은 걸음걸이 삼천귀병 한 가운데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신정은 소리 높여 외치기로,

“이제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라!”

라고 말했다.

그러자 뒤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나큰 기쁨에 들떠 이렇게 말했다.

“성호신께서 적을 물리쳐 주시는 것은 바로 저 신정에게 신통력을 주어, 신정이 적을 몰아 내도록 하는 것이구나!”
“맨발에 맨손으로 칼을 든 병사 삼천명을 향해 뛰어 나가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춤을 추는 것 같이 하고 있으니, 저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겠는가? 저것은 반드시 성호신께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신정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고 바람이 불것이고 주위의 땅이 뒤흔들리며 하늘에서는 벼락이 끝없이 떨어져서 신정 주변의 모든 적들이 산산히 쪼개져 없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기뻐서 다같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삼천귀병의 맨 앞줄에 있던 병사들이 활을 들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신정은 열 발자국 정도 걸어 왔을 때, 화살을 하나 둘 맞게 되었다. 잠깐 사이에 신정은 몸에 열 여섯 대의 화살을 맞았다. 그리고 그대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신정은 쓰러져서,

“나는 사실 죽는 것이 아니라-”

라고 하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뒤이어 병사들이 그대로 걸어 오며 그를 밟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모여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멍하니 있었다. 또 몇몇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 사이에 삼천귀병이 몰려 들어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의 심장이나 간을 찔렀다. 마지막까지 성호신에게 적을 물리쳐 달라고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그러니 동성에는 춤을 추다 말고, 노래를 부르다 말고 쓰러져 엎어져 죽은 사람들이 겹겹이 쌓였다.

그 사이에 있던 동성주는 도망쳐서 자신의 거처로 뛰어 돌아 왔다. 그는 문 앞에 놓여 있던 자신의 청동검을 뽑아 들고 허공을 찔러 대며 소리쳤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고, 온 세상이 다 망하고 죽어 없어지는 일 뿐이다.”

그러면서 닥치는 대로 눈에 뜨이는 것을 연거푸 찔렀다. 그는 거처의 귀한 의자와 장식을 부수고,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시녀들도 모조리 해치려 들었다.

그러자 성주부인은 부하에게 눈짓을 하여 동성주의 팔과 다리를 몽둥이로 때려 그를 쓰러지게 했다. 그리고 그가 주저 앉아서 울부짖고 있을 때, 그를 데리고 거처 안 쪽의 깊은 창고로 숨도록 했다. 이후 부하를 시켜, 왕검성에서 나온 팔법당의 높은 사람 중 한 명에게 번쩍거리는 거울과 금, 은, 구슬 따위를 한 무더기 쌓아 뇌물로 바쳤다. 그러면서 삼천귀병이 성주의 거처에 들어 오기 전에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만 멈추어 있기를 부탁했다.

뇌물이 받아 들여졌으므로, 삼천귀병이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성주부인은 동성주와 부하, 시녀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몰래 도망쳤다.

그들 무리는 산 속에 들어 가서 숨어 지냈는데, 동성주는 너무나 부끄러워 매일 술을 마시며 햇빛을 보지 않고 방 안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들리는 이야기로, 동성주가 늙은 후에,

“그때 다들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호신 때문에 겁을 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즐겁고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니, 그 대단한 마음을 품게 해 준 것이 성호신의 신통력이고, 그렇게 기뻐하며 목숨을 잃은 것이 오히려 목숨을 잃지 않고 산 것 보다도 더 좋은 것이다. 그러니 성호신이 참으로 영험한 것 아니겠는가?”

라고 주위에 쉼없이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 2023년, 천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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