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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페노메논

pena

 

 

서경이 4살때쯤부터 생일선물에는 ‘누메논’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누구야?”

서경이 물으면 그림과 민우는 예전에, 둘이 어릴 적에 들어갔던 저택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들끼리 작당해서 몰래 야행을 나섰고, 어느 날 동네를 둘러싼 저택을 둘만이 발견했으며, 저택 주인의 초대를 받아 들어갔더니 미로를 만났던 이야기였다.

“그럼 주인은? 못 만났어?”

“만났으니까 선물을 보냈지.”

서경은 어려서, 남의 거짓말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거짓말할 리 없다고 믿는 상대의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경에게 누메논은 산타클로스 비슷한 이름이 되었다. 미로의 저택의 주인, 선물 주는 아저씨, 세상의 신비와 축복.

그 이상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삼한동 사람들은 여느 소도시 사람들과 다른 데가 많지만 규칙적이고 반복적이라는 면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에 상쾌하게 기상을 해서 누군가의 독촉이나 성화가 없이 몸을 씻고 스스로 아침을 만들어 먹는다. 몇몇 예외적인 사람들은 아침을 거르지만, 그들도 기상해서 좋은 시간,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건 마찬가지이다. 영양가 높은 식사를 하고, 또는 마음의 영양을 채우고 하루에 대한 기대를 안고 여유롭게 집을 나선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밭과 과수원에 도착해서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그날의 할 일과 날씨를 살피고 서로를 격려하며 일을 시작하고, 정확한 시간에 모두의 의견에 따라 마련된 식사를 한다. 오후에 잠시 담소를 나누거나 체조를 하며 환기시키는 의례를 갖는다. 해가 질 때쯤에 인사를 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맛있는 식사를 하고 때로는 술을 곁들인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그날그날 무얼 하는지는 달라도 최선을 다해 놀고 가족과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같다. 이런 하루하루가 모여 세월을 빚어낸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기에, 반복을 소중히 여긴다.

그 생각대로, 임서경은 하루하루 살다 보니 어느덧 성년을 맞았다.

삼한동이 언제나 이렇게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이상적인 동네였던 건 아니었다. 농사가 잘 지어지지 않아서, 농사를 지어도 그 결실을 사 가는 사람이 없어서, 한 번 사가고 나서 다시 오는 사람이 적어서, 등등 이런저런 문제들로 삼한동은 한때 항시 위기상황이었고 그래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힘을 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해보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상황의 원인을 찾겠다고 설치거나 자기한테 도움이 안 된다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사람들이 있는데 동시에 의무와 노동만 짊어졌다는 것에 서러움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서경이 어린 나이에 광고를 찍었을 때였다. 물론 그 광고를 찍기 전까지 농사를 지으면 일정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사람들이 기울여온 노력이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도 들어오고, 무료체험 같은 걸로 더욱 사람을 모으고, 여러 사람의 머리를 모아서 수확물을 홍보할 수단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전단, 포스터 같은 아날로그적인 것들이었다가 조금씩 홍보수단과 내용과 디자인이 발전하기 시작하더니 서경이 5살 되던 해에 그림이 한 건을 올렸다. 정식 광고회사에서 사진과 영상을 찍어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하도 인기가 좋아서 일이 몰려 있는 곳이라 좀 기다려야 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사실 광고회사에서 해준 건 컨펌뿐이고 삼한동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그림의 그림, 민우의 카피, 서경의 외모가 다한 작업이었지만, 그걸로 삼한동 과일은 꽤 알려졌다. 실질적인 매출 증가 폭은 크지 않았을지라도 브랜드의 무게가 달라졌기 때문에 좀더 먼 비전을 생각했을 때 아주 좋은 일이었다.

삼한동의 과일과 농작물은 점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민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삼한동의 브랜드 이름을 짓고자 했다. 얼굴마담이자 광고모델이자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서경이란 이름이 논의 끝에 통과되었다. 이제 서경은 한 명의 주민이자 아이인 동시에 삼한동 그 자체였다. 그 이름은 아직 성년이 되기 전부터 불리기 시작했고, 서경이 신체적 성년이 되었을 때 삼한동의 브랜드인 서경은 이제 꽤 전통 있고 믿을 만한 농산물 브랜드가 된 지 오래였다.

 

서경이 성년식이자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몇 달이 지났다. 마을에 갑작스레 태풍이 닥쳤는데, 갑작스러운 만큼이나 매서웠다. 이젠 대비한 세월이 있어서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이상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림과 민우가 사라졌다는.

서경은 아무리 태풍이 강했다고 해도 사람이 날려 가거나 나무가 뽑힐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균적인 바람이 불어닥쳤던 대부분의 과수원과 달리 그림의 친가와 민우가 사는 집 근처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너무 이상한 것은 집 안에 있었을 그림과 민우도 사라져 있다는 것이었다. 삼한동 어디에도 없고, 전화도 연결이 되지 않고, 따로 마련한 집에도 친구 집에도 없었다. 아무 곳에도 흔적조차 없었다.

서경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복구하러 돌아갔을 때에도 계속 그림과 민우를 찾아 헤맸다. 밥도 거르거나 대충 마실 것으로 때웠고, 잠도 기절할 만큼 졸릴 때만 조금 잤다. 집과 과수원을 복구한 사람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여기저기 찾아 헤맸다. 나이 많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라 어떻게 됐을 리가 없다는 말에 반박하진 못하면서도, 뭔가 불안했다. 하필 자기가 성인이 되자마자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며칠을 찾다 못한 서경이 삼한동 한복판 길에서 멈춰 섰다. 불안과 공포에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 발밑에 진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림자는 앞으로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움직여 발밑에 고이듯 붙더니, 뒤로 다시 길게 늘어졌다. 앞에서 환한 빛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빛은 공터가 되어버린 민우의 밭에 나타났고, 그 빛이 펜대라도 된 듯 땅에 한 글자 한 글자가 새겨졌다.

 

자칭 당신의 가족이라고 하는 이들은 이곳에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 방문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이들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언제 오든 저는 있을 것이나, 이들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페노메논

 

초대장 같은 문구지만 협박장에 가까운 이 편지는 완전히 다 쓰인 후에 뻐기듯이 한 번 빛나더니 화살표 모양으로 솟아올랐다. 게임이나 내비게이션에서 길 안내를 할 때 보이던 형태와 똑같았다.

서경은 '자칭'이란 말이 굉장히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이 안내 화살표를 따라 나섰다.

안내 화살표는 삼한동 외곽으로, 외곽으로 나갔다. 아예 삼한동이 아니라 시를 벗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걸었을 때, 길고 긴 담이 눈앞에 나타났다. 서경은 그 담을 본 순간 누메논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네 경계를 두르며 길게 이어진, 도시 하나를 둘러싸고도 남을 법한 긴 담장. 그림과 민우가 말해줬던 그대로였다.

그 담장과 마주친 순간 서경의 뒤에 있던 삼한은 시간에서 동떨어진 공간이 되었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어스름한 하늘 아래에서 한순간 폐허처럼 보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깨끗하고 넓은 도로에 높은 건물이 즐비한 서울 같은 곳으로 보였다. 구름이 보이지 않았지만, 물결처럼 지나가는 빛이 구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도 같았다.

서경은 그림과 민우에게서 많이 들었던 그 이야기들을 기억에서 다시 불러오며 문을 찾아 걸었다. 안내 화살표는 담에 도달한 순간 사라져서, 긴 담을 그저 따라 걸으며 찾아야 했다. 시간에 늦으면 무슨 일인가 있을 줄 알라는 협박성 문구가 떠올라 걸음이 빨라졌다가도, 과도하게 긴장한 종아리가 느껴져서 몸에 힘을 빼야 했다. 벌써 힘을 소진하면 안 된다.

다행히도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다시금 안내 화살표가 나타나더니 한곳을 가리켰고, 그곳에 방금 생겨난 것처럼 문이 있었다.

문은 듣던 대로 컸다. 그림이 그림까지 그려주면서 설명했던 얇고 촘촘한 창살이 이루는 무늬는 복잡하고 화려하지만 너무 고풍스럽다고 느껴졌다. 하도 높고 하도 넓다 보니 가까이 갈수록 부분만이 보였다. 서경은 저걸 어떻게 혼자서 열지 생각했지만,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자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그러고 보니 저절로 문이 열려서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우쭐했었다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하지만 안의 풍경은 들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잘 다듬어진 잔디와 돌길이 이어져 있었다고 했던 길은 풀이 무성한 둑이 되어 있었고, 바로 앞까지 검은 수로가 침범해 있었다. 수로는 좁은 운하처럼 이어지다가 큰 강과 합류하는 듯이 보였다. 돌을 던져 보았더니 수심이 깊은 듯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우두커니 서 있는데 나룻배가 다가왔다. 흐름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물이었는데 빈 배가 마치 파도에 밀려오듯 스스로 다가오는 광경이 무서웠다.

그 빈 나룻배가 앞에 멈춰 서더니 양옆으로 한 번 흔들렸다. 타라는 재촉처럼 보여서 좀 더 무서워졌다. 망설이고 있으니 이번엔 두 번 흔들렸다. 서경은 큰맘먹고 나룻배에 발을 디뎠다.

놀이동산에서 큰 미끄럼틀을 떨어져내리는 배 모양 어트랙션처럼 생긴 손잡이가 양쪽에 달려 있었다.

“설마, 아니지?”

서경은 사람도 없는데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람의 목소리로 된 답은 없었으나 다시 한 번 배가 살짝 흔들렸다. 서경이 놀라서 손잡이를 꽉 잡아, 마침 잘됐다는 듯 배는 물 위를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이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점점 무서워져서 손잡이를 꽉 쥐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데,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자 정작 서경은 입을 꼭 다물었다.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고개도 숙였다. 빠르게 흘러가는 물결을 보는 게 무서웠다.

고개를 숙였는데도 물결이 보였다. 배가 앞으로 기울어져서였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배는 그 부름에 기꺼이 응해 물결에 올라탔다.

“이게 아니잖아아아아아!”

소용돌이가 가팔라지다가 마치 폭포처럼 아래를 향했을 때, 서경은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온몸이 알맹이만 내려앉으며 영혼을 날려버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전문은 20주년 기념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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