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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울 20주년 기념 단편  ------    

버려진 개들의 별

아밀

 

 

버터는 태어난 지 11개월 된 푸들이었다. 털 색깔이 은은한 노란빛을 띤 흰색이어서, 마치 버터 색깔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귀여운 이름이었지만 버터는 자기 이름이 귀여운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여느 개들이 그렇듯 애초에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자각도 없었다. 다만 버터라는 말이 떨어지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행동을 하거나, 자신에게서 어떤 행동을 기대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버터야!” 아빠는 그렇게 소리 치며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버터야!” 그 소리는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아빠가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었다.

버터는 아빠가 항상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빠는 기분이 좋았다. 좁은 케이지에 갇혀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언제 여기를 나갈 수 있을지, 언제 밥을 배 부르게 먹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던 버터를 구해준 사람이 아빠였다. 아빠는 쇼윈도 밖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버터를 들여다보더니 냉큼 가게에 들어와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버터를 달라고 했다. 사료, 방석, 급수기, 놀이용 공도 한꺼번에 샀다. 아빠에게서 알코올 냄새와 함께 콧노래가 피어올랐다. 버터는 아빠가 너그럽고 통이 크고 명랑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게 주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가게 주인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빠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버터의 기분은 최고였다. 아빠의 집으로 가는 길은 추웠고 싸락눈이 내렸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아빠의 집에 오자마자 버터는 밥을 먹고 또 먹었다. 아빠는 밥을 많이, 그릇에 꽉 차도록 줬다. 집 안은 케이지보다 훨씬, 훨씬 넓었고 버터는 신나게 뛰어다녔다.

다음 날, 아빠는 집에 찾아온 어떤 여자에게 버터를 내밀었다. 여자는 황홀감과 아연함이 섞인 이상한 눈빛으로 버터를 보더니 아빠에게 화를 냈다. “이렇게 무턱대고 선물하면 어떡해? 우리 집 강아지 못 키워. 키우고 싶다고는 했지만 진짜 키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잖아.” 그러자 아빠는 마주 화를 냈다. “사람 성의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면박부터 줘? 키우고 싶다고 노래 부른 건 너였잖아. 부모님 설득해볼 생각은 못 해?” 둘은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싸웠고, 버터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큰소리가 오고가는 것이 무서웠고 더 나아가 자신이 다시 가게로 또는 번식장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무서웠다. 아빠는 “그럼 환불 알아본다.”라고 했고, 여자는 버터를 끌어안으며 “안 돼, 얘를 어떻게 보내! 그냥 오빠 집에서 키우면 안 돼?”라고 했다. 여자의 말투가 애원조로 바뀌었다. 아빠는 짜증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그러다 점점 둘의 대화가 부드러워졌고, 여자는 버터에게 입을 맞추고는 자신을 ‘엄마’라고 하며 연어로 만들어진 간식을 몇 개 준 다음 집을 나갔다. 연어 간식은 맛있었다.

그렇게 버터는 아빠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아빠는 낮 동안에는 집에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 버터는 아빠를 기다리며 집 안 곳곳을 탐색하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물어뜯고, 똥과 오줌을 누고, 공을 쫓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종종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이나 동물의 기척이 있으면 짖어서 경고했다. 들어오지 마, 여기는 우리 집이야. 내가 갖게 된 진짜 내 집이야. 난 여길 지킬 거야.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와 집 안을 둘러보더니 “버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버터는 꼬리를 내리고 몸을 웅크렸다. 아빠는 씩씩거리며 오줌과 똥을 닦아내고 휴지 조각들과 엎어진 그릇을 치우고 잇자국이 난 의자 다리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버터는 아빠의 기분이 좋아지기를 기다려 옆에 다가가 손을 핥았다. 아빠는 성질을 내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버터는 거실 구석에 놓인 방석에서 혼자 잠들었다.

그런 날이 이틀쯤 이어진 뒤 집에 택배가 왔다.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플라스틱 울타리였다. 아빠는 울타리를 치고 버터를 그 안에 넣은 다음 잠을 잤고 아침이 되자 집을 나갔다.

울타리 안은 버터가 갇혀 있었던 케이지보다 세 배쯤 넓었다.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똥과 오줌을 누고, 잠을 자야 했다. 케이지보다 조금 낫기는 해도 여전히 답답했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싸락눈이 내리던 싸늘한 바깥 공기를 다시 마시고 싶었지만, 아빠에게 어떻게 부탁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버터는 짖었다. 밖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아빠를 향해서도 짖었다.

아빠는 버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꾸만 “버터야!”라고 하면서 손을 들어 위협했다. 버터는 재빨리 도망치거나, 아빠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몸을 작게 웅크리거나, 드러누워 배를 보였다. 당신을 믿는다고, 당신에게 복종한다고. 아주 어렸을 때 헤어진 진짜 엄마가 가르쳐준 방법이었다. 그러면 아빠는 화가 풀렸는지 아닌지 몰라도 버터를 흘겨보고는 다른 데로 휙 가버리거나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곤 했다. “예, 예, 죄송합니다. 알았어요. 조용히 시킬게요.”

‘아빠가 나를 싫어하는 걸까?’ 버터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처음 만났던 날 아빠의 모습을 기억했다. 버터는 아빠가 그날처럼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기다렸다.

종종 ‘엄마’가 집에 놀러왔다. 버터는 엄마가 오는 날이 좋았다. 엄마는 버터를 울타리에서 꺼내주었고, 맛있는 간식을 주었고, 어느 날에는 산책도 시켜주었다. 밖은 더 이상 춥지 않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인도를 걸으며 버터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온 세상이 낯선 냄새로 가득했다. 다른 개들이 남긴 냄새, 버터가 모르는 동물들의 냄새, 식물들이 풍기는 냄새, 사람들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의 냄새가 사방에서 풍겼다. 어지러웠고 어쩔 줄 몰랐고 두려운 한편 행복했다. 아빠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분 좋은 아빠와 상냥한 엄마 사이에서 버터는 걸어서, 병원이라는 곳에 가서, 따끔한 주사를 맞고 돌아왔다. 주사는 싫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맛있는 말린 칠면조 고기를 줬고 그날은 버터의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날로 남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아빠가 알코올 냄새를 짙게 풍기며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빠의 피지와 땀에서 풍기는 냄새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짙은 좌절과 분노도 느껴졌다. 처음 맡아보는 기이한 악취 앞에서 버터는 이유도 모른 채 몸을 떨며 물러섰다. 아빠는 버터를 보자마자 저벅저벅 다가와 울타리를 건너 들어오더니 버터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버터는 깽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넌 왜 여기 있냐, 개새끼야. 그년은 없는데, 너는 왜.”

아빠가 그렇게 뇌까리면서 버터에게 걸어왔다. 버터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가누며 소파 밑으로 재빨리 도망쳤다. 그러자 아빠는 버터 대신 소파를 마구 걷어차더니 그 위에 털썩 널브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걔가 널 정말로 아꼈으면, 정말로 네가 보고 싶으면, 돌아오겠지. 만약 안 그러면 그것도 다 가식이었던 거야. 그 썅년이 너도 나도 처음부터 다 속인 거야.”

버터는 이 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엄마를 볼 수 없었다.

아빠는 날마다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집에 왔다. 버터가 울타리 안에 싸놓은 똥과 오줌을 치우지 않고 내버려두었고 밥그릇과 물그릇도 채우는 둥 마는 둥했다. 종종 손이나 발을 휘둘렀다. “시끄러워, 새끼야, 시끄럽다고!” 버터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고 몸 곳곳이 아팠으며 다리를 절었다.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 웅크려 앉아 덜덜 떨면서 아빠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아빠는 잠깐 슬픈 눈빛으로 버터를 바라보는 듯싶더니 이내 화를 냈다. “불쌍한 척하지 마!”

버터는 아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게 버터를 가장 힘들게 했다. 버터는 아빠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아빠가 자신을 때리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아빠가 슬프지도 불안하지도 화나지도 않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버터는 옛날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드러누워 배를 보이곤 했지만 그렇게 해도 아빠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부드럽고 연약한 배에 아빠의 발길질이 닿기 직전에 간신히 피한 버터는 다시 아빠의 앞에서 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나날이 한 달쯤 이어졌을까, 어느 날 아빠가 치킨을 시켜 먹더니 살코기를 발라내서 버터에게 한 움큼 내주었다. 버터는 헐레벌떡 고기를 먹어치웠다. 가뜩이나 배가 고픈데, 기름이 잔뜩 흐르는 닭고기는 무척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주다니, 오늘은 아빠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라고 버터는 생각했다. 아빠는 맥주와 치킨으로 뜨끈뜨끈하게 데워진 몸에 패딩을 걸쳐 입고는 서랍을 한참 뒤져 하네스와 리드줄을 꺼내 버터에게 채워서 집을 나섰다. 처음 아빠 집에 왔을 때처럼 싸락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버터가 모르는 사이에 한 해가 지나 다시 겨울이 되었고 거리는 연말 분위기로 흥청거렸다. 버터는 색색으로 반짝이는 전구알들을 보며 싸늘한 공기에 스민 구운 고기 냄새와 알코올 냄새와 향수 냄새를 맡으며 들떴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나봐.’ 아빠는 택시를 잡더니 버터를 안고 조수석에 탔다. “강화도 아무 횟집이나 가주세요.” “개 데리고 회 드시려고요?” 기사가 다소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빠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예, 그냥 울적해서요.”

횟집에서 내린 아빠는 버터를 땅에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안아든 채로 어딘가로 걸었다. 얼마 뒤 포구가 나왔다. 버터가 처음 보는 바다였다. 아빠는 아무도 없는 부둣가에 버터를 내려놓고 리드줄을 정박용 말뚝에 묶었다. 아빠는 울고 있었다. 버터는 꼬리를 흔들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버터야. 미안해.”

그게 아빠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전문은 20주년 기념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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