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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fantasy.pe.krylpatae@hyosung.com1.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발간한 첫 <단편>선의 의의와 극복해야 할 것


   1) 환상 문학의 저변은 1990년대, 모뎀을 기반으로 한 컴퓨터 통신 수단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개인적으로 (소위) 순문학을 좋아하던 독자였고, 여느 독자가 그렇듯이 습작물을 만들어내던 시기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환상 문학이 얼마나 깊고 너른 기초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반지의 군주]가 번역되어서 들어오던 때가 1991년이고, 미하엘 엔데의 여러 작품들이 그 영화와 함께 들어오던 때가 1988, 89년도이니―[네버엔딩 스토리], [모모]―――나름대로 여러 독자/시청자 군을 그 바닥에 두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본격적인 환상 소설 창작물은 1994년의 [레기오스]라는 작품이라더군요. 물론, 저는 그 글을 알지도 읽지도 못하였고, 유의미한 환상 소설로써는 김근우 씨의 [바람의 마도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이 1996년이지요.

   우리나라의 환상 소설이 여명의 뒤에서 본격적으로 그 빛을 발한 게... 햇수로는 10여년... 이 채 안된다는 말이지요. 그런 것 치고는 <환상> 혹은 <판타지> 소설이라는 이름은 한국 현대 장르 문학을 대변하는 이름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추리소설도 무협소설도 보여주지 못한 단기간의 성취이지요. 판타지를 쓰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났고, 여기저기서 출판되고 또 서점에 깔려들기 시작했지요.

   그런 단기간의 확장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Boom> 혹은 <환상 매체와 환상 소설의 접점 사이에서 경계를 긋지 못하고 열광한 흔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서 짧은 글을 저희 홈페이지에는 끄적거렸지만, 세세하게 언급할 자신은 없군요.

  그리고 보기 좋게, 환상 소설의 저변은 이윤세 씨를 필두로 한 새로운 물결―――이모티콘 문학?!―――에 서서히 그 저변을 잠식당하고 있고, 환상 매체와 환상 소설의 경계 위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은 아날로그 적인 텍스트 대신에 비주얼한 디지털 텍스트―――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는 텍스트, 단지 읽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쪽으로 급격한 쏠림을 보여주고 있군요. 환타스틱/환타직한 영화들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환상 소설은 어떻게 써도 씹히고 뭉개지고 있습니다.

   2) 저희 홈페이지에서, 저는 줄기차게 <단편은 어렵다>는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저같이 작가의 사유를 공유하는 목적으로 독서하는 자에게, 빈 여백이 너무나도 큰 단편은 쓰기도 어렵고 읽기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시간적으로야 짧은 시간에 완결을 볼 수 있으니 답답함이 없기는 하지요. 그러나, 혹시라도 어설픈 바느질의 목도리라도 받아들게 되는 순간, 허무하게 목덜미를 파고드는 썰렁한 바람 때문에 외려 독서 의욕을 저하시키기도 하며, 때로는 쉽게 만들어진 (뭐라고 부를 수도 없는) 옷감을 건네받은 양이면 이걸 어떻게 버릴 수도 없고 하여 들고 있다가 그냥 내려놓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이죠. 가끔은 용감하게 털실과 긴바늘을 주면서, 직접 짜입으라, 고 하는 이들을 마주치기도 하는 바, 그럴 때는 난처함에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단편이 쓰여져야하는 이유는, 시가 쓰여지는 이유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바, 우리의 인생은 순간이 모여서 한 평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거대한 기승전결이라고 한다면, 장편은 기승전결을 관통해서 보여주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고, 단편은 순간을 투사함으로써 유장한 인간의 삶 속에서 누려지는 짧은 자극이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일겝니다.

   그리고, 단편은 쓰기 어렵습니다. 잘 짜맞추지 않으면 어설픈게 티가 확, 나거든요. 무게 중심을 맞춰야하는 배려, 작가의 긴 이야기를 풀코스가 아닌 맛보기로 느끼게 해주어야 하는 배짱,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결단까지. 단편의 풍요로움은 준비된 자의 것이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요 근래에 부쩍이나 단편선의 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어느정도 네임밸류를 가진 분들이 자신의 짧은 글을 드디어 활자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초절정 장편만 쏟아지던 환상 소설 영역에 드디어 (상업적인 의도는 아직 없지만 그것을 일단 가정한) 본격적인 단편선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홈페이지에서, 거울에서, 그리고 드림워커에서 말이죠.

   어찌 보면 우리나라 환상 소설의 영역은 조금 기형적입니다. 단편보다 장편이 확연히 많은 것은 분명히 기형적이지요. 그것도 초절정 장편이 월등히 많지 않습니까? 물론,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저는 현상학적인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10~12권짜리 책 1질이 여타의 작품군을 압도하는 소설의 부류는 우리나라 환상 소설의 유일하다는 귀납법적인 발언 말입니다.

   그 이유를 저는 <세계관> 혹은 <설정>의 문제에서 찾고 싶습니다. 글다운 글을 쓰려면 기반을 단단하게 엮어야 하는데, 환상 소설에서는 특히 <異世界>적인 면 때문에 그것이 또 오래 걸리기도 하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설정을 완전하게 갖추려는 작가들 덕택에 무지막지한 길이의 환상 소설들을 다량 보유하게 된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이영도 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도 그 설정의 면에서 4분의 1 분량을 잡아먹지 않습니까? 물론 탁월한 이야기꾼인 그는 독자들에게 글의 세계관을 주입시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여 보여주는 재주를 부리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으니―――김상현 씨가 또 있군요―――작가들은 10여권씩 써대면서도 그 세계관으로 더 우려먹고도 모자라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어떤 이들은 설정의 함정에 퐁당, 빠지기도 합니다. 줄창 설정만 만들다가 볼장 못보고 빠지는 것이지요. (환상 소설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묵향]이 바로 그렇고, [비뢰도] 같은 글이 그렇지 않습니까? 앞의 두 작품을 쓴 이들은 처음에는 분명히 뚜렷한 방향으로 흡인력 있게 글을 써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세계관의 덫에 사로잡혀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17권, 18권씩 써내려갑니다. 글은 질질 늘어지고 글이 가지고 있던 모든 좋은 점은, 비리비리한 노정 가운데에서 모두 어디론가 흘려버렸습니다.

   이제 장편으로 시작한 자들이 하나 둘씩 도태되어 가고, 자신이 가진 <순간>의 희노애락을 펼칠 재주가 없는 이들은 서서히 발을 빼내는 가운데, 이제 우리는 실력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는 중단편 작품군을 만들어가야 할 때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3) 이러한 시점에서, 환상소설웹진 거울 단편선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환상 소설도 전업작가가 필요한 시점이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환상 소설로 먹고 살 수 있는 이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영도 씨나 김상현 씨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 글쓰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틈틈히 - 바쁜 업무가운데, 매일 야근에 시달리면서, 출퇴근하는 지하철 혹은 버스 안에서, 제대로 된 퇴고 시간도 부족하게―――탈고하는 어려움 속에서 글을 쓰고 있으며, 그러한 이들 몇몇은 아마추어인 제가 볼 때에도, 글만 쓸 수 있게 해준다면 꽤 멋진 글을 쓸 수 있는―――물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이들도 몇몇 있지 않겠습니까?

   작가는 독자를 먹고 삽니다. 독자의 독서, 독자의 피드백, 독자와의 교류. 이 모든 것은 작가를 살찌우는 요소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붙여서 작가는 독자의 책값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독자에게 보답받는 전업작가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부지런하게 책을 써야하는 의무를 부여받는 것이고, 몇몇 전업작가들은 늘상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방향을 핵심으로 접근시켜 보지요.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초절정장편의 양이 월등히 많은 이유는, 우리나라 환상 소설의 범위가 좁은 탓이며, 그러한 이유 중에서도 <세계관>이라는 것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차지하는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운 탓이라고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출판사가 초절정 장편에만 집중하는 이유가 되었으며―――온통 그런 책들 뿐이니까―――그에 따라 단편이 매우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단편은 환상 소설 영역의 바깥으로 밀려난 모양이 되어버렸습니다. 글쓰는 이의 진정한 역량이 응축된다고 생각하는 단편이 실은, 한국 환상 소설판에서는 쓰여질 여지도 읽힐 여지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환상 소설의 Boom은 걷히고, 너나할것 없이 뛰어들었던 출판사들은 서서히 <귀여니 류>의 소설로 말을 갈아타고 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환상 소설 전문 출판사들은 소위 <검증된> 이들의 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누가 검증되지 않은 이의 초절정장편을 출간하겠습니까. 그런 광풍의 시대는 끝나야하고, 단편으로 인정받은 작가가 장편으로 올라서는 정상적인 과정을 만들어가야 겠지요.

   ...실은 그것이 어렵다는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환상 소설 출판사도 이상하게 단편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더군요. 몇 되지도 않는 문학상들은 장편에만 주목하지, 작가의 진정한 역량이 응집된 중단편에는 관심을 덜 두더군요. 이래서야 새로운 작가들이 독자를 뜯어먹을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해보는 시도조차 아예 박탈당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의미있는 여러 중단편선들의 등장은, 과연 환상 소설이 그 정체성을 확보한 후에도―――이런 저런 시류에 휩쓸려서 좌충우돌하는 것이 아니라―――더 나은 작품의 양과 질을 위해서 전업작가를 수용할만한 준비가 되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전조가 될 수 있겠지요. 즉, 네임밸류에 근거한 책의 구매가 아닌, 단편을 통해 작가를 탐색하고 그러한 시도 후에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集>을 구매하는 순서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번 단편선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결국, 거울 단편선은 환상 소설의 범위 확장에 대한 가능성과 전업작가를 수용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타진하게 될 것입니다.

   (두 가지 정도의 다른 의의가 더 있었는데... 메모를 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자동로긴 풀림 덕택에 원고의 반을 홀랑 날렸습니다. 덕택에 거울 단편선이 지닌 무수한 의미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한 번 이야기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4) 이제 거울 단편선이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4-1) 섣부른 판단이 개입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제가 간단히 느낀 부분에 대해 이야기드리고, 근거없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러야겠습니다.

   이번 뚝섬 행사에서 저는 의미있는 책을 한 권 구했습니다.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단편모음집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집 정도의 외형 및 조악한 편집, 그리고 잘 어울리지 않는 삽화에도 불구하고, 첫번째 단편모음집이 무엇일까 그리울만큼 매력적인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거울 단편선과 중복되는 몇 글쓴이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분들이 좀 계신 듯 하더군요. 거울 편집장님의 글도 읽었습니다. (헤헤)

   저는 투박하고 서툴고 거칠어도, 글쓴이 자신이 드러나고 그에 대해서 공감/반의 할 수 있는 그런 글들을 좋아합니다. 저희 홈페이지의 [마지막 용병이야기]가 그런 글이지요. 투박하고 서툴고 거칠지만, 저는 한영석 씨가 바라보는 희망과 가능성에 주목하였고 충분히 공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영석 씨의 글을 좋아합니다. 그가 요즘 쓰고 있는 [궤짝]도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좋아하는 글이구요.

  환타지 동호회 단편모음집도 그런 글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매끄럽지는 않고 섣부른 표현들도 눈에 띄고 딱딱한 것이 눈에 계속 밟히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살아있는 열정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의미 있잖습니까? 독자가 작가와 공명하고 맥박의 움직임과 심장의 박동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뜨거운 느낌.

   거울 단편선에서 그런 진솔함이 느껴졌으면 합니다. 글쓴이는 자신의 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꼭꼭 숨어서 찾을 수 없다면, 독자는 함께 이야기나눌 대상 없이, 일방향적인 가르침만 받게 됩니다. 훈계와 교훈을 받는 것은 육친과 스승에게 받는 것으로 족합니다. 예쁘고 구김없고 부드러운 글을 쓰면서, 독자의 존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2) 위의 단락에서 조금 더 나아가,

  제가 보드게임을 조금 좋아합니다. 집에 한 5, 60개 가지고 있고, 요즘은 독일 이베이를 들락날락하고, 독일 오퍼상에게 200유로씩 주문을 넣고 있습니다. 병이죠.

  한 가지를 알아간다는 것은, 어린이가 커나가는 것과 같은 양상이겠지요. 일단 이것저것 부닥쳐보는 단계를 지나, 조금 열정적인 단계에 들어가서는 감탄하고 놀라고 깨달아가는 단계를 맞이하지요. 그러다가 이제 막 이것저것 부닥쳐보는 사람들과 의견차를 가지게 되면, 내가 이 세계에서 얼마나 지냈는데, 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초보는 안돼, 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들어와서는 처음의 열정을 천천히 잃어가지요. 처음에는 누구를 만나도, 무슨 글을 읽어도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오묘했는데, 점점 어줍잖은 글은 스크롤로 내려버리고 제목만 보고는 그냥 건너뛰고, 같잖은 이야기에는 한 마디 꼭 코멘트 해줘야 하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요즘 제게 보드게임에 대해서 그런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게임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많이 플레이해본 것도 아닌데... 제가 요즘 그런 증상으로 고민을 하고 있지요.

   보드게임도 여타의 다른 문화 도구와 마찬가지로, 즐기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생기고 온갖 호불호가 난무하게 됩니다. 어떤 게임에 대해서 좋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싫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요. 이런 식으로 플레이할 수 없느냐는 참견꾼부터, 저런 게임은 해봐야 별볼일 없어, 라면서 레어게임 혹은 장고를 요구하는 전략 게임만이 진정한 게임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쉽게 그리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선호하거나, 심지어는 같은 회사에서 나온, 같은 크기의 박스로 이루어진 게임만을 모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있는 것이니, 사람 만큼 다른 모양으로 표현되고 즐겨지는 것이겠지요.

  현재, 환상 소설판에는 사람만큼 다양한 부류의 성향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들 다른 시기에 환상 소설을 알게 되었고, 다들 다른 분량의 배경지식을 쌓았고, 다들 다른 분량의 독서/습작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진 열정이 <틀린> 것이라면 비판의 대상이 되겠지만, 단지 섣부르고 어설픈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겝니다.

   프로를 지탱해주는 것은 프로의 백 배, 이백 배 되는 아마츄어입니다. 뒤에서 조용히 프로들의 움직임에 열광하고 집중하여 주목하며, 프로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자신을 반추하며 프로에 반응하는 그러한 아마추어들입니다. 저는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상, 글을 쓰지만, 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가에 대한 우려 말입니다. 물론, 다른 글쓰는 이들이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읽는 것만큼 훌륭한 습작 연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말처럼, 여러 사람의 다양한 습작/작품을 읽는 것은 분명히 글쓰는 이를 작가로써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작가>에 대한 짧은 생각은, 저희 홈페이지에 있지만, 여기에 다시 옮길 수는 없겠습니다. 아무튼, 작가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습작가/글쓰는 이 에 대해서 거의 유사한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환상 소설을 즐기는 이들은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독자들은 점점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환상 소설의 지지대가 되어야 합니다. 양질의 작품이 쏟아져도 그것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4-3) 네, 처음으로 환상소설 단편집을 낸 거울 단편선에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정말 섣부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몇몇이 다수를 끌고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고... 그렇다고 대중적인 글, 시류를 따라가는 이모티콘 소설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또한 아닙니다.

   제 짧은 생각이 담긴 이 글은, 프로와 프로를 지향하는 매니아, 그리고 아마츄어 모두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저는 순진하게도, 어떤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서른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가지고 있습니다. 편하게 글 쓰고 편하게 글 읽고, 가끔은 쓰지 않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읽지 않기도 하다가, 괜시리 땡기는 날, 글 하나 뚝딱 읽어버리고...

  저는 거울 단편선을 읽으면서 막힌 느낌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계속될 단편선의 발간에, 아무 내용도 없는 제 잡글 [호상] 같은 녀석들도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서툴고 낮설지만 그럼에도 그 가능성이 뭉클거리는 글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단편집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점차로 키워나가는 프로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2. 아도니스 - 가연

   아도니스가 뭘까, 신화의 뭔데, 라는 느낌만 가지고 글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만약에 아도니스, 가 이야기 저편 뒤에 자리잡은 무언가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었다면, 그것이 제게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스가 무엇인지는 그리스 신화를 뒤져보시면 나올 것인데... 저는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니 단지 무턱대고 읽기만 한 터, 제게는 제로델 준남작을 사랑하는 무수히 많은 귀족부인들과, 어머니를 잃은 아들의 슬픔을 깊이 느낀 카이유와의 마음이 무엇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일까 고민하다가 마친 글이었습니다.

   소유하지 않으려는 그러나 누리고자 하는 제로델, 그리고 그런 제로델에게서 자유와 배려를 느끼는 무수한 여인들. 그냥 제로델은 좀 바빴겠다, 군인의 책무에 어머니 시중에, 셀 수 없이 나오는 귀족 부인들과의 유희에... 정신이 없었겠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글을 쓰신 가연 님에게서 기분 좋은 면을 발견하였습니다. 글이 저를 빨아들이는 느낌, 있잖습니까? 사실 처음에는 산만한 문체에 이야기도 흐트러져 있었는데... 대법원장 카이유와가 귀족부인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가연 님의 서술에 빨려들어갔습니다. 지하철에서 읽었는데―――직장인이라서...―――소란함 속에서 저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글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것인가, 에 매일 필요는 없겠지요. 작가는 글을 통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수단이 되지 않고 목적이 될 수도 있지요.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작가.

   굳이 말하자면, 가연 님의 아도니스는 무언가 의미하고 있다는 생각은 드는데―――아도니스 컴플렉스...?―――독자는 연구하는 자가 아니라, 직관하는 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제 읽기는 아도니스는 아름다운 이야기, 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3. 감정세공사 - askalai

   아스칼라이 님의 꿈사냥꾼이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의 첫 글이어서 기쁘게 읽었습니다. 이번에 싸인도 해주시고... 너무 기뻤습니다. :)

   (아직 환동의 글은 다 읽지 못했습니다.)

  [꿈사냥꾼]과 [감정세공사]는 연결되는 작품입니다. 아니, 등장인물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상이라는 부분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가진다는 말이지요.

  꿈사냥꾼에서는 자신의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꿈을 <사냥>하는 여자―――제가... 등장인물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데... 마침 환동의 글이 제 옆에 없군요. 죄송합니다―――와 그녀에게 언젠가 신세를 준 남자가 또한 나옵니다. 여자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꿈 속에 들어갈 수 있지요. 마치 [감정세공사]에 나오는 감정세공인의 능력처럼 신비로운 능력이지요.

  여인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간절한 부탁을 받습니다. 꿈속의 자식, 천진난만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아이를 데리고 와 달라는 부탁입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식의 죽음때문에 슬퍼하고 좌절하지만, 꿈 속에 남아있는 자식의 모습은 그렇지 않으니, 꿈을 현실로 만들어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여인은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꿈이 현실로 되는 순간, 현실은 꿈으로 되어버리죠. 빛의 뒤편에는 어두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감정세공사]도 그런 접근입니다. 누구나 추억하는 아름다웠던 과거, 그리고 과거를 추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현실의 변화/변질.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곤 합니다. 세상도 나와 같이 변하고 사람들도 나와 같이 변하는 것인데, 나는 늘 나만 변질되었다고 생각하고 안타까와 합니다. 결벽증이죠. 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자인데,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데, 언제나 한결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죠.

   감정세공사의 주인공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감정을 박제화하지요. 그리고 성공하지만 실패하는.

   [꿈사냥꾼]과 달리, [감정세공사]는 아쉬움 가득합니다. 감정세공사, 야말로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장편의 대안 중에서 가장 유력한 옴니버스 단편의 형식으로 전이할 수 있는, 감정세공사라는 환상. 글쓴이는 이걸 그냥 버린 듯하여 아쉽습니다. 한편, 이러한 아쉬움에는 감정세공사와 그에게 청탁한 존재에 대한 상당히 추상적인 서술도 한 몫합니다. 그들이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이면의 모순을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듯하여 아쉽습니다. 독자로서, 저는 그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습니다.

   또한, 감정 세공을 부탁하는 H가, 감정세공 후에 J와 보내는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글쓴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더 깊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H가 가진, 변질에의 두려움 - 결혼하고 나서 느끼지만... 저도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와이프에게, 언젠가 소홀해지는 제 모습이 말이죠. 그러지 않으려고 부단히 집중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 이 해소된 후에, J가 보여주는 거부/부담감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실은,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H에게도 이입시킬 수 있지만, J같은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아주 건방진 이야기이지만, 글쓴이가 [감정세공사]의 또다른 이야기를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물론, 바람입니다. 듣지 않으셔도 되는 바람. 그러나, 이영도 씨에게 [폴라리스 랩소디]의 후편을 기대하는 한 독자로써, 아스칼라이 님에게도 같은 후속편을 기대한다는 바람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싸인 잘 간직하겠습니다. :)


   일단, 이 정도로 1편을 마칩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서 난감합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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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kalai 04.09.28 08:35 댓글 수정 삭제
    아하하하. 그렇지요. 그 책에 꿈사냥꾼이 들어있지요... 심히 괴롭습니다. 그나저나 재미있군요. 화자의 성별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여인'이라고 보시니... 제 성별을 아시기 때문일까요? 4년 전 환동에 그 글을 올렸을 때는 성별을 모르겠다는 말도 듣고 남자라는 말도 들었는데요 ^^ 아무튼 좋은 평 깊이 감사드립니다.
  • No Profile
    시안 04.10.01 18:30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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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십이국기4 2004.05.28
소설 열 번째 세계18 2004.05.28
소설 환타지 읽기Reading Fantasy 중단편집 I9 2004.05.28
비소설 신화와 점성학 200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