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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여왕의 창기병

2004.06.25 22:2706.25





airysnow@hotmail.com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골라 소설을 쓰는 방식은 낯선 것도 아니며 흔한 것도 아니지만 일부러 찾지 않는 한 보기 힘들기도 하다. 특히 출판물로 오게 되면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작가는 ?파서 글 쓰는 사람이 아닌지라 전업으로 먹고 살려면 잘 나가는 패턴 하나를 찾는 게 상책이기 때문에, 하나의 정교한 세계를 창조하는 건 야심으로 가득 찬 습작기의 철없는 작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여왕의 창기병 전반에 사용된 문학적 기법이나 철학은 저자의 나이가 어리지 않다는 점과 제법 많은 공부를 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며, 그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왕의 창기병은 습작이 아니라 저자의 확실한 의도 속에서 써진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여왕의 창기병은 독자를 위한 세계가 아니라 저자 본인이 보여 주고 싶은 세계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술과 대사는 가끔 극단으로 치달아 한숨이 나올 정도로 길게 늘어져 완급 조절이 안 되는 데가 있는가 하면 눈물을 뽑을 정도의 감정 이입이 되도록 긴밀감 있게 구성한 부분도 있다. 이런 부분을 보면 저자는 능력이 있음에도 따로 노림수가 있어서 일부러 이렇게 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읽으면서, 독자를 위해 펜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이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스토리는 하 이언(Haj Khiiean)과 레미 아낙스(Remi Anax), 케이시 튜멜(Keisey Tuemell)남작의 대화로 시작된다. 짧은 대화지만 인물의 기본적인 설정과 근본 등을 잘 표현하면서 재미있게 구성했다는 데 박수를 치고 싶다. 인물의 이름을 스펠을 적으면서 세 사람의 국적이 다르다는 것을 사실감 있게 보여 주며 초반부에 끊임없이 나오는 다른 스펠(인명, 지명 등의 고유 명사)들도 각 나라의 언어 체계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가깝고 왕래가 잦은 나라는 문법도 비슷하며 먼 나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스스로 떠돌이라고 밝히는 하 이언에게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복선과 암시가 사방에 깔려 있는데 그저 신비하게 보이려고 발악하는 습작기의 작가의 솜씨는 아니다.

  세 사람의 대화 이후 이언의 전투 씬이 한 번 있고 장면이 바뀌어 칙명관인 민트 케언(Miend Kehen)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세 명의 외국 귀족과 케언의 정치 입담을 보여 준다. 케언이랑 사내에게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그의 정치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일면이다. 또, 비서관 옌스터 데일(Yenster Deil)후작과의 대화는 유쾌하다. 짧은 장면이지만 대륙의 기본적인 현재 전황과 케언이라는 캐릭터의 비중이 얼마나 될지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초반부에 많은 힌트를 던짐으로써 스토리를 이끌어 가며 개연성을 부여하지만 굳이 골머리 싸않고 읽을 필요는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읽고 넘어가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반복해서 설명한다. 대개의 습작기 작가는 미리 써둔 서술이나 배경 설명을 그대로, 혹은 약간만 고쳐서 보여주지만 여왕의 창기병에서는 그런 복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때론 유쾌하게, 혹은 짓궂게 포장하고 있다. 이언의 냉소적인 현실관이나 케언의 우월적인 자신감, 튜멜의 “예절을 보여라, 예절을!”이라는 대사, 에피의 “난 무식한 계집애야.”, “난 쇼 오빠랑 결혼 할래!” 등등이 그 예다. 지겨울 정도로 보여주는 면이 있지만 그런 요소로 하여금 캐릭터의 이중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단면적인 인간으로 착각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복합 성격을 가진 캐릭터의 경우 현실적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대개는 우유부단하게 만들 뿐이며 몰입하기도 쉽지 않다. 여왕의 창기병에 나타나는 주요 인물은 대개 현실과 이상의 이중성을 동시에 내포하며 이를 잘 조화하여 인물을 단조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복선을 충분히 보여 주는 만큼 스토리 진행이 느긋하기에 중반까지는 눈여겨 볼 것이 없다. 초반에서 벌여 놓은 사건을 얽히게 하여 위기까지 끌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쓰인 테크닉은 참고할 만하다. 저자는 여왕의 창기병을 어지러울 정도로 산만한 복합 시점으로 점철했다. 보통은 통일성이나 완성도를 위해 단일 시점을 사용한다지만 복합 시점을 잘 구사하면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주제도 깊이 있게 된다. 또한 장면 전환을 할 때도 동일 시간선상에 놓인 플롯이 아니라 조금씩 미묘한 차이가 있어 사건의 전후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때때론 먼 과거로 옮겨가 한 인물이나 사건을 심화시킨다. 여러 모로 능력 있는 신인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독자에게 손을 떼게 할 우려도 존재한다. 드라마틱한 장면을 보여 줌으로써 좀 더 재미를 끌 법도 하지만 대부분 담담한 필체로 그리고 있다. 국가 간의 불화에서 꽃피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현실적으로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의도가 짙게 배어 있지만 저자의 생각과 전쟁 묘사는 불협화음을 이룬다. 오로지 현실성이나 사실성만을 향해 달린 것도 아니라 어느 정도의 극적 요소를 내포했음에도 그것을 부정하고(혹은 망각했던지) 리얼리티를 향해 달려간다. 이 몸짓은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진지한 고민으로도 보인다. 인물 대부분에게 주어진 이중성이 저자에게 존재하고 있음일까, 전쟁은 그다지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부분이 여왕의 창기병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근본적인 문제이다.

   바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앞서 저자 자신의 환상이라는 점. 다른 작가라면 독자의 뒤통수를 후릴 반전을 꺼낼 부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며, 담담하게 보여주기만 해야 할 부분에선 너무 나서는 바람에 느낌이 죽어 버렸다. 세상에 슬프라고 말해서 슬퍼지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울기 때문에 슬픈 것이며 죽기 때문에 비통한 것이다. 설령 슬픈 장면이라 하더라도 작가가 나서서 슬프다고 설명해 버리면 독자는 반발심에서라도 슬픔을 거부하게 된다. 특히, 사기가 떨어진 병사를 격려하는 페나 왕비의 연설 부분은 작품 전체에서 최악이었다. 스스로 감동적이라고? 감동받았다고? 내가 볼 땐 여왕의 창기병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연설이었다. 전체적으로 담담한 필체를 봤을 때 이런 식으로 억지 분위기를 조장하는 부분은 저자 자신이 애착을 갖고 공들였다고 생각된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자신과 닮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능적인 표현 아닌가. 그래서 작가에겐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버리라는 아이러니한 경구가 존재한다.

   또 하나, 여왕의 창기병은 1부만이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결말이 흐지부지하다. 스토리의 시작부터 진행된 또 하나의 플롯인 케언이 이언의 플롯과 만나 하나로 귀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2부까지 완결된다면 전체적인 완성도를 두 배 가량 이끌어 주리라 생각된다. 굳이 1, 2부로 나눌 필요도 없는 부분을 나눴기에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굉장히 아쉬운, 그런 여운이 진하다.

  독자의 즐거움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노력한 것은 알겠지만 저자가 스스로 만족해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개성이 뚜렷한 인물을 여럿 등장시키면서 개인과 전쟁과 제도에 대한 알레고리를 형성했기에 어지간히 눈치 없는 독자라도 여왕의 창기병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의도한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한 가지 사실을 밝히자면 이 리뷰는 연재분을 토대로 썼다. 읽은 지는 너무 오래 됐고 전권을 구비한 대여점이 없었기에 예전에 갈무리한 파일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출판되면서 많은 수정을 거쳤을 것이 분명한데 이런 다듬어지지 않은 원고를 보고 리뷰를 써야 한단 말인가! 이런 재미난 소설을 들여 놓지 않은 대여점 따위 죄다 망해라!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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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스 04.06.26 19:51 댓글 수정 삭제
    2부라고 해도 사실 원래 나누지 않고 12권 정도로 마무리지어야 할 소설이었죠. 언제 완결될지 알 수 없습니다. 출판사가 중단시킨 거나 마찬가지니까요.(A. U. 청어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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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bbath 04.06.27 08:55 댓글 수정 삭제
    권병수 님도 참 기구해요. 시공사에서 낸 『프리텐더스』도 결국 제대로 이야기 진행 못하고 4권에서 서둘러 완결 짓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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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스 04.06.27 11:54 댓글 수정 삭제
    제발 이번 환상제국은 좀 제대로 나왔으면 좋겠네요. 세계관을 M&A하신 것 같은데 프리텐더스와 연결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프리텐더스 표지 홍보문구는 정말 황당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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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 04.06.29 01:22 댓글 수정 삭제
    A. U.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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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파 04.07.01 17:55 댓글 수정 삭제
    아아..전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쟁신을 그렇게 담담히 묘사하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죠.... 2부 내용이 궁금했는데, 하고 싶은 말은 조금만 어렵다 싶으면 안보려고 하는 독자들이 책이 나오는 길을 막는다는거죠. 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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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rwin 04.09.09 08:50 댓글 수정 삭제
    2부까지 썼더라면 두 배 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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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rwin 04.09.09 08:52 댓글 수정 삭제
    대여점 제도에 딱히 찬반의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고 싶지만, 공개적인 비평문에 대여점에 책이 없어서 리뷰를 제대로 못 썼다라고 하는 것에, 제가 이 책을 싫어하는 편이긴 하지만, 대해서는 튜멜이 할 말이 있을 것 같군요.
    "예절을 보여라, 예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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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a. 05.08.31 02:12 댓글 수정 삭제
    전쟁신의 사실적 묘사 면에선 최고죠. 대부분의 소설의 전쟁신을 보면 무협지류의 패싸움을 못벗어 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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