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readingfantasy.pe.krylpatae@hyosung.com   4. 아비게일 : 마법사의 아침식사

   귀찮아하는 천재, 는 정형적이죠. (웃음) 특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잘 씻지도 먹지도 잠들지도 않는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하지요.

   글에 등장하는 마법사는 그런 자인 듯 합니다. 한참 실험실에서 펑, 펑, 소리 내면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다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마는, 그래서 작중 화자는 늘 그런 못난(!) 스승을 뒷바라지하는 일을 하지요.

   그런 마법사―――스승―――가 웬일로 아침을 먹게 되었습니다. 비록 푸짐하지는 않지만 매일 딱딱하게 굳은 것들만 먹다가 따끈하게 뎁혀진 음식을 <손수> 준비해서 먹게 된 것입니다.

   애써 외면했던 사랑이 가고나서, 이 마법사는 세상에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인간, 그리고 인간과의 사랑. 따뜻한.

   진정한 천재 대마법사는, 인간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따뜻하게 덥혀주고 관계맺어주는, 그런 이가 아닐까요?


   5. hermod : 여름

   아마추어 독자라면, 본문 중에 나온 네 줄의 한자로 적힌 비문이 무엇인지 절대로 찾아볼 엄두를 안낼겝니다. 그래서 저는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럴 경우 글의 의미는 반감되지요. 왜냐하면 길지 않은 글에서, 작가가 제시한 넉 줄의 한문으로 이루어진 문장 속에 유의미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짐작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짐작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확인해본 이들만 알겠지요)

   혹시, 저 한자를 하나하나 찾아보신 분들, 손들어 보실래요? 아마도 환상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조금 더 세밀한 편이니 그래도 꽤나 많은 이들이 한자를 찾아보셨을겝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이 글 [여름]은 책의 지나가는 소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글 [여름]을 통해서 읽은 것은, 여인의 나신만큼이나 아름다운 지나간 흔적에 대한 짧고 담백한 애정이었습니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만큼, 독자는 보게 마련이지요. 더 보고 싶다면 찾아보겠지만, 세상 모든 것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믿으니 저는 다른 것으로 같은 것을 보려고 합니다.


   6. 아르하 : 그 안드로이드는 마법사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으나, 마지막에는 기대가 사그라지는 안타까움으로 장을 덮게 된 작품입니다.

   ‘환상소설관리국’. 위험천만한 환상소설 작가를 통제하는 부서입니다. 국가기관이죠. 안드로이드를 관리하던 극중 주인공이 대행 업무를 맡으면서 시작되는 이 글은, 환상 소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한 개괄적인 낯? 그리고 그 글의 의미를 통해서 드러내어주고 있습니다.

  환상 소설이 왜 위험한가.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돼먹지 않고 불경하기 때문일겝니다. 여러 환상 소설을 통해서 읽을 수 있듯이, 환상 소설 작가들은 세상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타협하며 적당히 생애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것이 아닌 理想을 자꾸 들이밀어대면서 이걸 한 번 봐라! 라고 자꾸 들이밀어댑니다. 밑에서 이야기한 뿌와뿌와 열매가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진실과 순수가 통하는 사회, 우리가 숨쉬고 발딛고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도 혹은 용납될 수도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환상 소설 작가들은 그걸 이야기합니다. 아니, 이야기해야 합니다. 환상 소설이 가지고 있는 책무이지요.

   그래서 환상 소설은 Si-Fi 보다는 현실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Si-Fi 는 초현실적 공간에 걸터 앉아서 적당한 선에서 현실과 이상을 겹쳐보이지만, 환상 소설의 세계는 현실 보다는 이상 쪽에 더 많이 걸터 앉아 있습니다. 그럼 그런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이상에 충실한가. 그걸 이야기한다면 세상에 이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는 없지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인간은 그럴 수 없으니, 적어도 뱉아 놓고 열심히 달려가는 수 밖에는요.

   모호한 것은, 왜 갑자기 안드로이드인가, 입니다. 안드로이드, 라는 어찌보면 운율적인 호감이 가는 로보트의 다른 지칭어는, 생경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하나 더, 작가는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글을 쓰는 의도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여러 작중인물의 말과 행동을 빌어서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조금 버거웠습니다.

   진아 님이 중요 인물로 타오셔서 체크(!)해 두었습니다. :)

   (어찌 보면, 진아 님에게 바치는 헌정(!)작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 삼단분리되어있다는 느낌은요. 그러나, 이야기하려는 바는 얼추 느꼈으니... 후훗.)


   8. 赤漁 : 크레바스 보험사

   자꾸 비견하는 것에 죄송함을 느끼지만, [크레바스 보험사]는 마치 예전에 티브이에서 보던 [환상어쩌구] 프로그램을 연상케합니다. 제 어릴 때 즐겨보던 환상어쩌구는 그 당시에도 섬뜩한 느낌을 안겨주곤 하였지요. 특히 반전이 주는 묘미... 그것은 제 어린 심장을 마구마구 뒤흔들어놓고 밤새 제 꿈에 누비누비 기워져서 나타나곤 하였지요.

   [크레바스 보험사]를 통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은, 반전의 즐거움입니다. 유소년기를 거쳐서 청년기에 이르도록, 우리가 보아오고 배워온 책 중에서 반전이라고 할만한 것을 찾아보기는 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언뜻 기억해봐도 이문열 씨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맥빠진 반전 정도가 기억날 뿐,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온 시대는 반전의 충격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치열하고 가열찬 시대였습니다. 글의 처음부터 계속되는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들... 그나마 존재하는 충격적인 반전은 현진건 님의 그 서글픈 반전 정도.

   우리가 환상 소설이라는 이야기의 그릇을 가지면서 누리게 된 것은 바로 반전의 충격입니다. 환상 소설이 시대나 세대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이야기를 담는 그릇의 낮설음 때문이며, 그의 결과로써 조금 색다른 반전을 맛보게 되는 것이죠. 길게 올라가면 아직 환상성이 일상성과 충돌하기 전의 전래동화 같은 것에서 그러한 반전은 잘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작가는 반전을 드러내면서 이야기를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crevasse라는 말부터가 지독한 불운을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용하는 언어나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닥치는 재난 아닌 재난은 이미 결말을 어느정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때, 독자는 반전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반전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겁니다. 반전이 실은 반전 아닌 것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만큼 이 사회가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이겠지요. 주인공이 당하는 많은 재난들이, 실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누구나 다 겪을 가능성을 가진 일들 아닙니까? 불현듯 얼마 전, 다리가 두 동강난 사건이 기억납니다. 1년여 후에는 백화점이 땅 속으로 사라졌지요. 비행기가 떨어지고, 배가 가라앉고, 지하철이 <폭발>하는 무시무시한 위험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보험외판원(!)들이 지금 우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밤 우리집이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울러, 목숨을 보험료로써 살(buy) 수도 있다는 것. 묘한 감정으로 어필하던 환상어쩌구의 목소리와 매치되는 느낌입니다. 죽을 때 죽지 않고 돈으로 목숨을 사는 묘한 비인간적인 느낌.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는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가면서 새하얀 머리를 휘날리면서 일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실과 묘하게 얽혀서 생각해볼 것을 던져주는 글. 그러나, 그냥 흘려읽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겪은 일들이 에피소드 형태로 지나쳐가다보니 글의 길이에 비해서 글을 지탱해주는 <주>된 이야기거리는 조금 적지 않았나 생각해보았습니다.


   9. raile : 뿌와뿌와 벌레

   다른 분들의 읽기와 좀 다른, 저만의 독특함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거울 단편선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은 뿌와뿌와 벌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 짧고, 어떤 면에서는 눈에 띄는 별다른 점이 없는 이 글에 왜 주목을 해야하는지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거창하게, 우리나라 소설 쓰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가지고 있는 <진지함>에 대한 강박증을 이야기한다면, 한 번 정도 더 생각해 볼 여지를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영도 씨의 글, [드래곤 라자]는 그 작품성과는 별개로, 언어유희―――말장난―――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왜 말장난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느끼기에는, 가볍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판소리 [춘향전]이 생각납니다. 언어유희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어 있지요. 리듬감을 줄 뿐만 아니라 판소리가 가진 운율감을 한가득 살리는... 조금 더 나아가보면 [청산별곡]의 얄리얄리얄랑[라]셩 얄라리 얄라 같은 후렴구도 분명히 언어유희지요. 운율감과 리듬감을 살리는... 이영도 씨의 글은 운율감과 리듬감 대신에 글의 중간중간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로써 언어유희를 선택합니다. 적절한 긴장감이 유지되다가, 촌철살인의 한 마디―――‘물었군’ 같은―――에 독자는 그냥 모니터(혹은 책) 앞에서 뒤집어졌습니다. 그것이 비난의 커다란 근거가 되었고, 아직도 그는 그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영도 씨의 작품성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대부분 [드래곤 라자]의 말장난을 걸고 넘어가더군요.

   말장난 같은 것이 우리나라 소설을 읽고 쓰는 뭇 이들에게 쉽게 용납되지 않는 이유를, 저는 [뿌와뿌와 벌레] 같은 글이 쉽게 읽혀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의 진지함, 성찰, 그런 것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글이 묵직한 느낌을 준다면 먹고 들어가는 면이 있지요. 이문열 씨 같은 이가 아직도 우리 문단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와 같지요.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해도, 묵직하게 이야기를 끌어 나가기 때문에 일단 뭔가 있다 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곤 하였습니다.

   [뿌와뿌와 벌레]에 대한 가장 큰 호감은, 원론적인 진실함에 대한 글쓴이의 태도였습니다. 마치 영화 [라이어라이어]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 싶은 이 글은 인간의 다른 면모에 대한 복잡다단한 시선 따위는 걷어치우고, 진실함에 대하여 투박하게 접근합니다.

   일단,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합니다. 만일 자신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된다면, 일단 부끄럽기도 하고 얼굴이 빨개지기도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점이 드러남으로 타인과의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고, 상대방은 나의 약점을 끊임없이 공략할 것입니다. 또한 더 큰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며, 타인들로부터 세상물정 모른다는 충고를 듣게 되겠지요. 적당한 위선과 가식이 타인과의 관계를 적당한 선에서 유지시켜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사람과의 교제는 일단 피하고 보겠다는 태도를 확고하게 해 주기도 하겠지요. 이런 것을 인간은 <사회성>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어른이 되어가고 세상물정을 알아간다는 것이지요.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고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지고 적당한 호감으로 상대방과 교감하는... 실은, 그러한 까닭에 조금더 원론적이고 조금더 순수에 가까운 글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동화>라는 덤터기 속에서 마음껏 그 위치를 낮추어보고 있습니다. <장르문학>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가 소설 자체의 우열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것처럼 말이죠. [뿌와뿌와 벌레]는! 자라가면서 잃어가는 인간의 순수한 단면을 자극하는 소설입니다. 아름다운 글이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세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독자들이―――제가―――기대하던 결말을 암시해주기도 하며, 이미 유부남이 되어 더 이상은 그런 식의 환상을 할 수 없는 제게, 잃어가는 환상을 일으켜 세워주기도 하는 글이기도 하구요.

   폼나는 환상, 묵직한 주제, 다양한 소재, 독특한 설정. 이런 글들이 대세를 짓고 있는 거울 단편집에서 하나 건져낸, 아마추어들을 위한 예쁜 글, 이었습니다.

   하나, 첨언하자면, 글이 가끔 긴장을 잃는 부분이 있습니다. 쉽게 써도 어렵게 써도 별로 차이가 없는 글, 글이 긴장을 잃는 그 순간에 [뿌와뿌와 벌레] 같은 글은 소품으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소품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유의미함을 편견에게 잠식당할 때 작가가 느끼는 안타까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쉽게 읽히지만 어렵게 쓰여져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색채의 글이라는 말을 작가께 드리고 싶습니다.


   10. 가는달 : 나하의 거울

   제목에 속았습니다. 뭔가 낭만적인 서술과 줄거리가 쫓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담백하고 직설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쓰시는 분들을 참... 부러워합니다. 작중인물들의 감정들이 서술 속에서 절제되어 잔잔하게 조용하게 흘러오는 글 말입니다. 물론 좋아하기는 다음 달에 이야기드릴 사라방드 같은 화끈하게 달리는 서술을 좋아하지만, 제가 쓰고 싶은 글은 나하의 거울 같은 글입니다. 첨언하자면, 책머리에 있는 아도니스 같은 글은 섬뜩합니다. 잘 재단된 듯 계산된 듯 제자리에 놓여있는 글은, 한 번에 나아가지만, 두 번은 버겁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사람에 따라서 나하의 거울 같은 글을 부담스러워 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흐름이 없이 흘러가니, 적당한 파고가 느껴지는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잔잔한 수면 위에서 몸둘 곳을 몰라 허우적거리다가 그만 잠들어버릴지도 모르지요.

   예술하는 사람들(!)의 아픔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야하는데 그럴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글에 나오는 채해는 예술하는 사람, 정확하게 말하면 금을 연주하는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나하라는 아내와, 그녀의 옥거울이 곁에 있었습니다. 섣부른 이의 <침묵을 들어라>는 말. 그리고 채해는 들을 수 없는 침묵을 듣기 위해서 방랑을 떠납니다.

   맞습니다. 세상에는 채해 같은 이들도 있어야합니다. 침묵을 듣기 위해서 달려가는 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이들의 수고로움이 있어야 비로소 깨어진 거울에서 나온 듯한 나하 같은 이들이 침묵 대신에 조금 더 듣기 쉬운 것들을 들려주겠지요. 안타까운 사실은, 채해 같은 이들은 나하 같은 이들을 빛내어주는 조연이라는 사실이지요. 더 고생하고 더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세상사람들은 나하 같은 이들의 뒤편에 채해 같은 이들을 줄세워둡니다. 그건 아닌데 말이죠.

   그러나 그건 맞기도 하고 또 상관없기도 합니다. 자신의 거울이 깨어지는 순간, 채해는 웃을 수 있었고, 그 웃음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한, 자신에 대한,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스스로 누린 자의 행복은, 누려 본 사람만이 알겠지요. 나하에게는 나하의 몫, 채해에게는 채해의 몫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에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사족을 달자면, 프로도, 아마추어도, 공존하지 않는다면 환상 소설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여겨집니다. 수준있는 작가, 수준있는 비평, 그리고 수준있는 독자들 뿐이라면, 마치 갇힌 커뮤니티처럼 그들만의 문화와 이야기와 어투와 선입견만이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조금 어설퍼도 받아들이고 고무시키고, 조금 어려워도 애쓰고 노력하여 따라가보려고 하는, 적절한 선에서 프로와 아마추어가 서로의 선을 한 발자국 상대방 편으로 옮길 때, 한 10년 뒤에는 멋진 환상 소설 작가들이 활짝 비상하겠지요.

   그것을 꿈꾸며 작은 홈페이지 하나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10년 뒤에 안되면, 한 10년 더 기다리죠. :)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쓰다보니, Midway를 놓쳤습니다. 천장에 사는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다음 글의 첫머리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양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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