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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

아리엘 골란, 정석배 옮김 ,푸른역사, 2004년 6월



정원사 (gardener_77@hotmail.com)



놓치기 아까운 대작,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

가끔 서점을 둘러보다가 “아니, 이런 책이 나오다니?” 하고 눈을 의심할 때가 있다. 그다지 풍요롭다고는 하기 힘든 국내 출판계에, 그 중에서도 상당히 척박한 분야에, 훨씬 기본적이거나 고전적인 텍스트도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척 보기에도 공은 많이 들고 이득은 별로 나지 않을 게 뻔한 책을 보았을 경우다. 해외에서 많이 팔렸다는 명분도 없고, 누구나 아는 고전으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면서 ‘좋은’ 이런 책이 번역 출간될 때는 그저 관계자들의 취향에 감사할 수밖에 없나니, 지난 6월 서점에 깔린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원제 Myth and Symbol: Symbolism in prehistoric religions, 아리엘 골란, 정석배 옮김, 푸른역사, 2004년 6월)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1,200쪽이 넘는 무겁고 뿌듯한 장정본을 보면 바로 짐작이 가겠지만 이 책은 ‘신화 상징 백과사전’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방대한 내용을 자랑한다. 우선 시간적으로는 구석기시대부터 19세기까지를,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하되 전세계를 가로지르며 동굴 벽화와 그릇 문양과 건축과 장식 문양을 총망라해놓은 그림이 압도적이다. 아직 의미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거나 기존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는 몇몇 상징에 대해 재해석을 내리는 전반부에서는 수많은 그림을 헤집으며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할 정도다. 그리고 이 방대한 문양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비교 분석한 신화와 역사, 고고학적인 발견과 언어학적인 자료, 축제와 풍습과 민담과 속담과 장신구와 건축 등에 남아있는 잔재들 또한 입이 딱 벌어지는 양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쳤다면, 그러니까 단순히 그림과 도상만 모아놓았다면 1995년 열화당에서 출간한 조르주 나타프의 [상징ㆍ기호ㆍ표지](조르주 나타프, 김정란 옮김, 열화당, 1995년 4월)와, 자료를 쌓고 기존의 해석을 정리하는 데 그쳤다면 1994년 까치글방에서 출간한 진 쿠퍼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상징사전](진 쿠퍼, 이윤기 옮김, 까치글방, 1994년 5월)과 차별성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 모든 자료를 통해 저자 자신만의 해석과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우선 몇 가지 가정에 기초하여 신화, 상징의 뿌리를 찾아 올라간다. 그 가정이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부분적인 해석에 필요한 가정들은 생략하겠다).
   첫째, 대부분의 문양에는 원래 상징적인 의미가 존재한다.
   둘째, 비슷한 상징은 공통의 기원을 갖는다. 즉 같거나 비슷한 문양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될 때 그것이 우연의 결과일 가능성은 없다.
   셋째, 상징의 의미는 오독과 전파에 의해 잊혀지거나 변할 수 있다.

   이런 가정에 동의하든 않든 저자가 자신있게 내놓은 몇 가지 결론과 그에 이르는 과정은 상당히 그럴싸하다. 본래 태양숭배는 그렇게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기존에 태양으로 해석하던 원판형 기호 대부분은 하늘 기호일 것이라는 점이 그렇고, 시대가 변하면서 신앙 형태가 변하고 그에 따라 옛 기호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가설이 그렇다. 그보다는 훨씬 신중하게 받아들여야겠지만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민에게는 크게 큰여신(하늘여신)―――그 배우자인 큰신(지신, 지옥신)―――그들의 자식인 쌍둥이신(성장의 신)이라는 세 가지 거대한 신성이 존재했고, 그들 각각이 상당히 모순적인 속성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한 부분도 대단히 흥미롭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문양을 통해 큰여신-큰신-쌍동이신이라는 거대한 신화 공식을 짜낸 다음, 도저히 이 지면으로 정리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를 이 도식으로 수렴시킨다. 예컨대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 기독교에 속해 있는 교리와 연희와 상징과 이야기들 중에 ‘독자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산타 할아버지와 루돌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될 테고 말이다(웃음).

   몇백쪽이 넘어가도록 후대의 이름과 풍습과 신화들이 저자의 해석을 뒷받침하고 그에 따라 재해석되면서 공식은 좀 더 완전해지며, 마침내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또 수백쪽이 이론 정리에 할애된다. 25장 큰여신, 26장 흑신, 27장 백신이 바로 그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큰여신과 큰신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정리하고 또한 몇몇 문화권에서 일어난 ‘신들의 세대 교체’를 재구성하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같은 범주에 밀어넣다 보니 읽으면서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받아먹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료 면에서도, 문양 해석과 신화적 사고에 대한 가설 면에서도 이 책의 가치는 크다. 저자가 자신의 오랜 연구 경험에 비추어 자신있게 단언할 때조차 신중함을 잊지 않는 학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맨 뒤 100여쪽은 저자가 재구성한 세계관 변화를 다시 설명하고, 이 모든 연구의 뿌리가 된 셈인 다게스탄 문양 연구를, 마지막에는 어떤 문양 해독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것은 추측 수준에 그친다고 여기는지를 정리하는 데 할애되었다. 덕분에 독자는 언제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직접 판단할 수 있다.

   솔직히 이런 책을 쓴 아리엘 골란이나, 번역한 정석배 교수나, 출판한 푸른역사나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워낙 두껍고 무거운(들고 볼 수도 없고 무릎에 올려놓아도 다리가 쑤신다!) 데다 집중력을 요구하는 내용이라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만한 고생을 감수할 가치는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상징 관련 서적 두 권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점도 보장한다.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으라고 권하는 데 있어 걸림돌은 두께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가격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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