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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원한 제국], 이인화

2005.02.26 13:1302.26





druidkwon@empal.com이미 빌릴 수 있는 한도만큼 책을 다 빌리고 한 권이 비어서 도서관의 서가를 어슬렁거리며 뭔가 한 권 더 빌릴 책이 없나 살피고 있었습니다. 왜인지 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적어도 상하 두 권 이상으로 이뤄진 책들이었습니다. 도무지 손이 가질 않아 여러 차례 서가를 오가면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습니다. 마침 전날 저녁 문창과에 다니는 아는 동생으로부터 '내가 왜 이인화의 책을 주문해야하느냐'에 대한 푸념을 들었던 데다가 어린 시절 TV를 통해 보았던 영화가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보통의 제 독서는 소위 판타지,SF 혹은 장르문학이라 불리는 것들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적게는 몇 달, 길게는 몇 십, 몇 백 여년에 이르는 일들을 서사형식으로 쓴 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루 동안의 사건을 장편으로 엮어놓은 이 소설은 유독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참 읽고 며칠 던져두고, 다시 읽고 잊어버리고 하면서 근 한 달에 걸쳐 읽게 됐습니다. 때마침 도서관에서 시스템교체작업을 한다고 반납기간이 한참 늦춰졌기에 그나마 끝까지 읽게 될 수 있었죠.



우리는 긴 단절의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한 사람의 반생에 해당하는 시간이 짧다면 짧기만 길다면 긴 세월이죠. 더불어 철저한 말살과 압제 속에 지내온 긴 단절의 세월이었기에 우리의 기억은 과거로 쉽사리 거슬러 오르질 못하죠. 아직도 단절의 세월을 지내온 후유증을 다 떨쳐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느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앞으로 나가는 속도에 질려서 뒤돌아볼 여력이 없는 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로 인해 가장 근래의 우리 왕조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물며 그 이전인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어떠한지... 그나마 역사 시간에 배우는 단편적인 지식과 사극에서 보이는 모습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넘어갈 따름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받쳐주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어야 할 부분들이 너무 쉽사리 잊혀지고 무시당하고 있는 셈이죠. 근데 이거 저 혼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 런지 모르겠네요. 제 무지와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하여간 헛소리가 길었습니다. 무슨 서평 쓰는 데 쓸데없는 소리를 이리 늘어놓고 시작하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헛소리들은 다 '영원한 제국'을 읽고 나오게 된 소리이기에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니겠죠.



'영원한 제국'은 조선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일이 많이 벌어진 영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정조의 선왕은 영조입니다.(전 그나마도 잊고 있다가 책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정조의 아버지는 영조로 인해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처참하게 죽인 할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 정조입니다. 게다가 그 시기에는 당쟁이 극에 달한 시기였으며, 왕권과 신권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서학이 유입되었으며, 천주교가 전파되어 들어왔고, 탄압을 받았습니다. 소설 속의 정조는 신권을 누르고 조선을 왕권중심국가로 만들려합니다. 하지만 오래간 기득권층으로 있던 노론의 세력은 강대했고, 그들을 억누르기 전에 정조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었죠. 그래서 정조는 면밀히 계획을 짜 노론을 단숨에 처단할 구실을 만들려합니다. 하지만 노론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대감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그 이전에 먼저 선수를 칩니다. 결국 정조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노론은 앞날을 두려워해 정조는 독살했다는 풍문이 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조의 계획에는 사도세자를 죽인 날 자신의 선왕인 영조가 자신의 슬픔을 쓴 글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글, '선왕대왕의 금등지사'가 공개되면 노론에게는 큰 타격이 가기에 노론은 눈에 불을 켜고 그 글을 찾습니다. 소설은 '선왕대왕의 금등지사'를 둘러싸고 정조치세의 마지막해인 정조24년(1800년) 1월 19일,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을 면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의 서두에 저자는 취성록이라는 낡은 서책을 발견해 그 서책의 내용을 번역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터지는 살인과 어명, 또 다른 죽음이 이어지고, 그 죽음은 다시 강한 바람을 일으키면서 이야기를 몰아갑니다.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을 반반쯤 섞어놓은 듯한 느낌으로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도록 팽팽히 진행되는 가운데 단편적으로만 외우고 넘어갔던 당시의 주류를 이루며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던 여러 철학이 녹아있으며, 이미 지나간 역사의 흐름을 두고 생각하는 저자의 아쉬움이 녹아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섞여들면서 소설은 진실을 말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정말 훌륭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끝으로 ‘영원한 제국’은 1995년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구해서 보고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어설픈 실력으로 다루려 했던 게 실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소리고 뭐고 항상 읽고 느낀 바에 대해서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놓게 되네요. 공부를 좀 더 많이 해야 하나 봅니다. 아직 미숙하고 부족함이 많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고 타박해주시길 바랍니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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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야 05.02.26 17:19 댓글 수정 삭제
    영원한 제국, 영화는 살떨릴정도였지요. 영화관에서 친구들을 꼬셔서 같이 봤는데 - 명보아트홀이었지요 - 우리까지 두 팀 9명에, 저 빼고는 모두 자더군요. -_-a

    살떨리는 내용과는 달리, 이인화씨가 파시즘을 미화한다는 그 내용상의 우경화때문에 나중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저 또한 처음의 감동이 많이 퇴색되더군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아흔아홉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양이 이끄는 아흔아홈마리의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민주주의의 본질과는 무수히 거리가 먼 그런 류의 것이죠. 아무리 힘들고 어렵게 돌아가더라도,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이인화 씨가 <영원한 제국>에서 이야기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더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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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5.03.09 22:02 댓글 수정 삭제
    아흔 아홉마리의 사자쪽이 이기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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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 alien 05.03.11 08:37 댓글 수정 삭제
    영원한 제국은 장미의 이름으로에서 아이디어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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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야 05.03.16 22:58 댓글 수정 삭제
    ida 님... 아니라더군요.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