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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2004.12.29 23:4412.29





latehong@unitel.co.kr

과학을 세계를 파악하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엄밀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인식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런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SF 소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현실적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은 ‘우리가 사는 태양계’라는 식의 특정 시공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에 의해 구축된다. 즉, 이우혁의 [퇴마록]은 행성 지구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그 세계는 엄밀한 과학적 논리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배경으로 기능할 뿐이며, 작품의 전개를 지배하는 것은 환상적인 힘과 인물의 주관적 인식틀이므로 SF에서 말하는 '현실적'인 세계와 거리가 멀다. 반면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 라마를 바탕으로 하는 아서 C. 클라크의 [라마]는 비록 세계 자체는 허구이지만 그 세계를 파악하는 시선은 정밀한 과학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현실적'이다.

   (물론 여기서 이 이야기가 지극히 제한된 범위의 SF―――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소위 하드 SF에 해당하는 작품들에 어울리는 이야기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젤라즈니식 뉴웨이브쯤 나가면 이 SF의 S, 혹은 Science의 의미부터가 상당히 달라지는 듯한데, 거기까지 포괄해서 이야기를 할만한 자신은 없다. 그리고 실상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SF라는 장르의 의미를 명확히 제시한 뒤 거기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특정 작품집의 특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평소 몇몇 SF 소설들에서 느꼈던 이 장르의 주목할만한 특성에서부터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일 뿐이다. 뭐, 변명은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그리고 SF의 힘은 바로 이 ‘현실성’에서 나온다. 분명히 현실 논리를 딛고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어쩔 수 없이 ‘비현실’을 인정해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SF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짜릿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물론 다른 종류의 짜릿함도 있지만). SF 장르의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그렇게 극과 극을 과학이라는 다리로 단숨에 이어내는 경계, 틀, 인식의 파괴에 있다는 이야기다(문득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 연대기]에서 앰버와 혼돈의 궁정을 잇는 검은 길이 떠오르는구나. 그럼 코윈은 SF의 원동력, 과학 그 자체란 말인가. [앰버 연대기]는 어쩌면 메타SF였을지도).

   여기 이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SF의 그러한 힘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실로 경이로운 단편집이다. 테드 창의 작업은 극과 극을 이어내는 작업 그 자체다. {바빌론의 탑}부터 {이해}, {0으로 나누면} 등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일견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개의 틀을 기가 막히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쿼런틴]에서 그렉 이건이 양자역학 관측의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어 인류의 전우주적 학살이라는 개념을 끌어내는 것과 같은 정도의 과감함!) 붙여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작품을 다 다루면서 앞으로 이 책을 읽게 될 분들의 즐거움을 저해하고, 동시에 이 엄청난 작품집의 가치를 부족한 글 솜씨로 몽땅 훼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여기 실린 여덟 작품 중 단연 백미(물론 개인차는 있을 수 있겠다)라고 할만한 {네 인생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면…….

   이 중편의 구조는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자신의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와, 이 주인공이 외계 종족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면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 두 줄기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제시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또, 주인공이 언어학자로서 헵타포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인류의 언어와 헵타포드의 언어라는 두 언어의 상이함이 나타나고, 두 언어의 상이함은 이내 각각의 종족이 가진 세계관의 상이함으로 이어진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兩義的)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中

   그리고 주인공이 이 상이함을 인식하고 그 간극을 뛰어넘어 다른 인식 체계에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순간, 지금까지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보였던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는 인류와 외계인의 이야기에 철썩 달라붙으며, 동시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하여 과학적 엄밀함과 인간 냄새 물씬 풍기는 극적 감동 모두를 휘어잡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주목할 것은 테드 창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대상이 순수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네 인생의 이야기}나 {0으로 나누면}에서 드러나듯 그의 시선은 언어학이며 수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가 하면 {이해}에서처럼 주인공의 인식 범위를 무지막지하게 넓혀가며 우주의 전체 체계를 하나의 미학적으로 완성된 예술로 바라보는―――사실상 인간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다고나 할까―――폭거를 감행하기도 한다. 심지어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신의 사랑마저도 무소불위의 법칙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과학적으로 따져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이 테드 창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과학적 접근법과 상상력을 세상에 들이대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갈 데까지 가는 인간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히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그 방법론을 표현해내는 실력에 있어서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장편으로 길게 늘어놓아야 될법한 아이디어를 정밀하게 압축해서 중ㆍ단편으로 내놓은 결과물을 보자면 그 밀도는 기가 막힐 지경. 사실 그 밀도 때문에 독해 자체가 다소 난해해지는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그 몇 십 페이지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세계를 일단 펼쳐낸 다음에는 오로지 벅찬 감격만 있을 뿐이었다. 아아, 살아있길 정말 잘했어. 앞의 몇 편을 읽었을 때는 ‘재미는 있는데 아무래도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추천하기는 무리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해야 한다’로 마음을 돌렸다. “누구나 쉽게 잡아들어지지 않는 분야의 책이 있거니와, SF도 장벽이 높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놓치기엔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라는 알라딘 김명남 편집장의 말이 이만큼 절절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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