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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
데이비드 핀처 감독, 브래드 피트ㆍ에드워드 노튼ㆍ헬레나 본햄 카터 주연의 영화, 혹은 척 팔라닉의 소설.

난 오늘도 어김없이 홈쇼핑채널을 돌린다. “오늘 저희가 파는 이 물건은…….” “삼만 구천 팔백원, 삼만 구천 팔백원에 모십니다.” “저주파 진동이…….” “……100개 거기에 더해서 청소를 쉽게 해주는…….” 홈쇼핑 카탈로그를 본다. 눈길을 끄는 란제리 광고. “이거 하나만 있으면…….” 080-XXX-XXXX. 전화를 거는 손. “예, 감사합니다.” 왜 샀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물건들. 컴퓨터에는 결제해 둔 온라인 게임들이 여럿 깔려 있다. 신용카드 한 장만 있으면 못살 물건이 없다.

   토요일에 홈쇼핑 보다가…… “또 샀어?”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머피가 말을 끊는다. “지겹지도 않냐? 필요도 없는 것들 사서 쌓아놓기 밖에 더하냐.”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머피의 얼굴. 근데 눈은 왜 그래? 어 입술도 터졌네. “아, 별 거 아니야.” 뭐가 별 거 아니야. 많이 아프겠는걸. “별 거 아니라니까. 근데 토요일에는 뭘 샀어?” 난 내가 본 것들과 내가 주문한 것들에 대해 열렬히 설명한다. 그러니까 그게 세제도 필요 없고……. 머피는 딴청을 부린다. 그래서 이게 청소에는……. 머피는 여전히 딴청이다. 게다가 밀대도 덤으로……. “근데…….” 머피가 내 말을 끊고 들어온다. “나 좀 때려봐.” 그게 뭔 소리야? “말 그대로야. 때려.” 머피가 얼굴을 들이민다. “날 때리면 그 시시한 홈쇼핑보다 훨씬 좋은 걸 알려주지.” 홈쇼핑이 시시해진다고? 정말이야? “물론이지.” 퍽. 머피의 고개가 돌아간다. “좋았어. 그 클럽의 규칙은…….” 머피는 날 파이트 클럽에 데려갔다.

   “파이트 클럽의 첫 번째 규칙은 절대 파이트 클럽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
   “파이트 클럽의 두 번째 규칙은 절대 파이트 클럽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
   “모든 싸움은 단 둘이서!”
   “싸움은 한 번에 한판만 한다!”
   “셔츠와 신발은 벗는다.”
   “싸움은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한다!”
   “처음 나온 사람은 무조건 싸운다!”
   빌어먹을 머피. 마지막 규칙은 말해주지 않았다. 난 구경만 해도 되는 줄 알았다고. 머피가 웃는다. 파이트 클럽이 시작되고 모두가 규칙을 제창한 뒤 난 클럽에 모인 이들의 환호성 속에 가운데로 밀려나간다. 누군가 내 신발과 셔츠를 가져갔다. 그리고 주먹이 날아온다. 입술이 터지고 환호성은 더 커진다. 일단 싸우고 보자. 그러나 내 주먹은 허공을 가른다. 누군가는 웃음을 터뜨린다. 정신이 없다. 세상이 돈다. 주먹이 얼얼해진다. 한 대 때렸나? 그렇게 얻어터졌는데도 속이 후련해진다. 앞이 컴컴해진다.



   나는 체육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남자다워지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내가 체육관에 다니는 이유는 오로지 파이트 클럽 때문이다. 보기 좋게 포장된 홈쇼핑의 물건들이 대부분 실생활에 쓸모없는 것처럼 보기 좋은 근육이 항상 싸움에 쓸모 있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파이트 클럽에 가는 날이 기대됐다. 초등학교에서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손꼽아 기다렸다. 이번 주에는 누구와 싸울까? 얼마나 얻어터질까? 누가 첫 번째 규칙을 어겼을까? 두 번째 규칙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지켜지지 않는 두 규칙 때문에 언제나 파이트 클럽에 들어오는 사람은 늘어난다.

   파이트 클럽이 천국이고, 파이트 클럽이 지옥이다.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환호성을 지른다. 가끔 야유도 질러주면 좋다. 내가 싸울 차례가 되면 셔츠와 신발을 벗는다. 아드레날린, 아드레날린.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박동이 빨라진다. 근육이 수축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주먹이 오가는 데 이유는 없다. 내가 있고, 싸울 상대가 있다. 그 사이에 속임수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다.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야만 하는 세상에 비하면 거친 주먹이 오가는 아수라장인 파이트 클럽의 하룻밤은 언제나 최고일 수 밖에 없다.

   우리 클럽에 타일러가 왔다. 최고급 비누 세일즈맨 타일러. 폭탄 전문가 타일러. 파이트 클럽을 처음 시작한 타일러. 잠을 자지 않는 타일러. 자신감 넘치는 타일러. 타일러는 나의 구세주. 타일러가 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이날 나는 머피와 싸웠다. 코피가 났다. 입술이 터졌다. 부은 눈은 잘 떠지질 않는다. 나는 머피에게 완전히 묵사발이 됐다. 클럽이 끝나고 타일러는 파이트 클럽의 가장 열성적인 회원 몇을 남겼다. 회사원, 호텔 웨이터, 자동차 정비공, 주방장, 운전기사 등등. 타일러는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 계획은 완벽했고, 멋졌다.

   이런 일은 쉬운 일이다. 축 처진 어깨, 힘없는 발걸음. 다가가 돌을 던진다. 맞고도 그냥 가는 멍청이. 이번에는 가까이 다가가 시궁창으로 밀어버린다. 옷이 엉망이 됐는 데도 그냥 가는 멍청이. 마지막으로 뒤통수를 후려친다. 멍청이 눈에 불이 붙는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 가소롭지만 그냥 맞아주면 된다. 멍청이는 처음으로 싸움에서 이긴다.

   머피는 호텔 주방에 있다. 스테이크 소스에는 침을 뱉고, 스프에다가는 오줌을 눈다. 홀에 앉은 멍청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최고급 스테이크와 머피의 타액을, 최고급 스프와 머피의 오줌을 먹는다.

   바람 빠진 스포츠카의 타이어들. 또 다른 스포츠카는 시내 중심가 분수대로 돌진했다. 담벼락마다 붙여진 누드 사진. 대형마트 앞에 버려진 발기된 페니스상. 고층 빌딩 한 가운데에 커다랗게 그려진 악마상. 매주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일들. 경찰은 단속을 강화하지만 단속하는 경찰도 우리들이다.

   우리는 타일러의 군대가 됐다. 검은 셔츠, 검은 바지, 군용 매트리스, 구두 속의 장례비용 500달러. 지방을 훔쳐오고, 정원을 가꾼다. 비누를 만들고, 폭탄을 만든다. 우리를 위협하면 고환을 위협당한다. 심지어 타일러 자신조차도 우리들에 의해 아랫도리가 벗겨졌다.

   입에 총을 문 타일러. 우리가 계획한 가장 큰 규모의 작전이 진행되는 사이에 타일러는 입에 총을 물고 있었다. 십, 구, 팔. 카운트 다운이 끝나면 은행이 폭파된다. 칠, 육, 오. 카운트 다운이 끝나면 유명한 다국적기업의 본사가 폭파된다. 사, 삼, 이. 카운트 다운이 끝나면 지긋지긋한 도시는 정글이 된다. 일. 타일러의 총소리.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타일러는 불사신이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타일러는 죽지 않았다. 우리들은 타일러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오늘도 서로에게 주먹을 날린다. 우리는 어디에 가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 주저앉은 코, 눈자위의 멍자국, 깨진 이빨, 터진 입술, 구두 속의 장례비용 500달러, 이 모든 것이 꿈과 같다. 그 어떤 분노도 없이 싸울 수 있는 곳,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 그 어떤 누구에게도 주먹을 날릴 수 있는 곳. 파이트 클럽은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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