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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태운님의 전자책 출간을 축하하며, 일단 제가 읽은 것은 총 여섯 편의 길거나 짧은 소설들입니다. 사실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는 작품도 하나 섞여 있습니다만 작가의 개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일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전자책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종이가 아니면 도통 소설을 읽기도 버겁습니다. 항상 취해오던 독서 습관을 버리게 됨으로써 제가 어떤 편견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최근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유, 로봇](듀나 외, 황금가지, 2009년 2월)을 통해 처음 임태운님의 소설을 접해봤습니다만, 이때와는 접하는 태도가 다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저는 [유, 로봇]에 수록된 {무기여 잘 가거라}를 전자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이책과 전자책 중 어느 한쪽에 더 권위를 둘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종이책에 익숙해진 독자에게 페이지를 넘길 때 촉감으로 전해지는 독서 형태가 갖는 즐거움은 꽤 비중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약간은 뭔가 부족한 느낌을 항상 받게 됩니다. 소설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축사에 따르면 임태운님은 선천적인 이야기꾼입니다. 유머러스하고 재기 넘치며, 발랄한 상상력 등 따라붙는 수식어 또한 젊은 작가에게는 굉장히 어울리는 듯합니다. 게다가 좋은 이야기의 미덕인 ‘듣는 즐거움’까지 갖춰져 있다는 표현은 제가 생각할 때도 퍽 들어맞는 듯합니다. 소설의 대부분이 발화에 가깝거나 혹은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구성은 뛰어난 흡입력을 가져다줍니다. ‘듣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결국 청자에게 수용적인 태도와 함께 편안함을 유발합니다. 굳이 사건이 주는 의문들과 상대하거나 복선을 놓칠까봐 긴장할 필요 없이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대답이 들려올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목소리이자 작가의 완전한 개입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한 장치들 대다수는 작가에 의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어느 정도 리얼리티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르니까요. 독자들은 막힘없이 읽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빠른 흡입력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생소한 단어들이 범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특히나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이나 {그레이브 키퍼} 등이 그렇지요. 이러한 것들을 설정이라거나 세계관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독립된 단단한 단편소설로서는 썩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만화적인 상황을 자주 연출하는 점은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요. 재미있기는 합니다만, 행동이나 대사에서 작위적인 느낌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제가 판타지나 SF를 그다지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읽을 때는 보통 세계나 사건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기대하고 읽지 인물의 대사나 행동까지 낯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물론 소설의 구조를 벗어나서 따로 놀 경우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작품 전체가 유기적으로 함께 맞물려 돌아간다면 낯선 대사와 행동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아마 이것은 아쉽지만 제 취향 탓으로 돌려야할 문제 같습니다.

 아름다운 결말에 관해서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유, 로봇]에 수록된 {무기여 잘 가거라}를 처음 읽었을 때도 느꼈던 심정인데 전자책의 다른 작품들까지 읽고 나서 좀더 명확해졌습니다. 진행이 매끄럽다보니 결말을 처리하는 방식까지 의외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사모사}와 {아름다운 감금}의 경우에는 이러한 의외성이 보다 더 요구되는 콩트에 가깝습니다. 결말이 이전까지 이야기 판도를 얼마나 뒤집을 수 있느냐에 따라 재미가 갈리는 것이지요. {사모사}의 경우에는 뱀과 지하철의 비유가 상당히 연상하기 쉽고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아쉬웠습니다. 아름다운 감금의 경우에는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이 상당히 지지부진했던 것은 아닌가, 우화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까지 상세히 서술하면서 약간은 당위성이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밖에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의 마무리 또한 상당히 착하고 올바릅니다.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런 결말을 읽고 나면 어쩔 수 없이 허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패턴을 답습했다고 느낄 테니까요. 사실 만화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레이브 키퍼}는 마치 만화공모전 판타지 부문에 입상한 연작 가능한 단편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공모전용 만화들은 대부분 연재 가능한 형태로 스토리를 짜놓기 마련이지요. 말하자면 당선작은 자체로도 독립적인 1화의 형식를 갖춰야만 합니다. 결국 주인공이 자기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깨닫게 되면서 끝나는 장면은 마치 일개 에피소드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전반부가 좀더 거창할 뿐이지요. 결국 결말을 마무리 짓는 방식은 실제로는 입에 담기에는 좀 낯간지러운 대사입니다. 주인공 자무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지 혹은 앞으로 또 어떤 사건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열린 결말이라 할 수 있겠군요. 정리하는 의미에서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몇 편에 대해 짧은 감상을 남기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레이브 키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만화적입니다. 일례로 저는 이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타케이 히로유키의 만화 [샤먼킹]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수호령을 다루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수호령의 전투방식 또한 비슷하다는 인상을 저버릴 수가 없더군요. 다만 이 소설은 엄연히 판타지라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지요.

 뮤즈의 속삭임
 결국은 나비효과에 대한 또 다른 변주입니다. 제가 이와 비슷한 소설을 여러 편 읽은 것도 아니고, 다만 듀나의 {나비전쟁} 한 편만을 읽었을 뿐입니다. 나비효과를 이용한 악당이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뮤즈의 속삭임}에서는 속삭이는 돌이라는 흥미로운 아이템이 충분히 악당의 기호를 당길 만한 물건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나비효과를 다루는 소설에서 과연 등장해도 되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상상력의 비약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누군가 “내가 달리는 이유는 사실 궁극적으로 세계평화를 위해서야”라는 말을 했다고 칩시다. 그냥 헛소리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말일지라도 저는 이렇게 사소한 행동 하나가 일으킬 수 있는 커다란 파급효과에 대한 가능성을 여전히 동경합니다.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
 영화 [하이랜더](Highlander, 1986)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정말 재미있게 봤던 영화이기 때문인지 사실 별 차이를 못 느끼겠습니다. 소설이 훨씬 발랄하고 유머러스하다는 점이 만화적이기는 합니다. “진정한 전사는 지켜야할 대상이 있을 때 가장 강한 법이다”는 대사는 확실히 일본 만화에서 많이 접해본 형태의 가치관입니다. 그렇다고 틀린 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너무나 익숙해져 있을 뿐이지요.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
 이 작품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시작은 시황제를 십보 앞에 둔 무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웅](英雄: Hero, 2002)을 연상케 합니다. 말하자면 ‘자객열전’과도 같은 비장함도 묻어나면서 철저한 계획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매끄러운 이야기가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설명이 많고 무엇보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 작가 임의로 만들어낸 장치들이 너무 많습니다. 금붕어를 통해 황제를 암살할 수 있는 조건을 채우기 위해 부차적인 설정들을 작위적으로 채워 넣었지요. 점차 소설 속 세계관이 확장되고 구체화될수록 단편소설로서의 견고함은 느슨해지고 읽는 이는 설명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이 소설의 황제는 사실 그렇게까지 악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주인공의 증오는 일방적인 데다가, 황제 암살이라는 화두는 소설 속 세계에서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처형당한 죄인의 유족이나 재산에 대한 허술한 뒤처리로 봐서는 겨우 단 둘뿐인 암살단의 존재도 설득력이 부족하니까요. 이 소설 또한 아름다운 결말을 그리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이러한 세계에 대한 긍정성은 임태운님만의 장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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