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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naver.com/paswonikpaxwonik @ naver.com 신을 믿지 않는 시대의 환상문학

《병 속에 든 바다》: #2. 왜 '아밀'인가?

신을 믿지 않는 시대의 환상문학

이러한 배경으로 왜, 아밀我密인가? 그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일순간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름아닌 정력적으로 자신의 세를 불리고 있는, <거울> 환상문학 웹진의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환상문학의 언어로 사유하고 글을 쓰는 그이지만, 어쩐지 그의 작품은 환상문학 영역에 완전히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다. 단편적인 인상비평 수준에서 이야기하자면, 그의 소설들은 제도적인 순문학이 기분 좋게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내밀한 주관적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여타 환상문학의 장르적 자의식에 여하간 고집스러운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왜일까? 이번에 전자책으로 출판된 <병 속에 든 바다>에 수록된 작품들을 본다면, 우리가 일관되게 볼 수 있는 것은 그런 단호한 고집이, 왜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환상문학이 오늘날의 현실감각을 지탱하는 주요한 축들 중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에는 어떤 아이러니도 없다. 그것은 환상문학이, 현실에 대해 보충적인, 위대한 허구적 서사로서 환상(신화를 통해 현실의 생로병사의 원리를 설명하는 등등의 기원적 환상)이라는 위상을 '더 이상' 차지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뜻이다. 말하자면, 환상문학에 담지된 환상성은 오늘날 의미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데이터베이스 형形 인간'이 준거하고 있는, 자의식적 장르적 합의의 다발들에 가까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오늘의 지평에서 환상문학의 환상성은, 빅토리안 시대 정숙한 여인의 다락방에 꼭꼭 숨겨진 채 은밀한 향유의 원천이 되는 무엇이기는커녕, 정반대로 온전한 장르적 합의를 통해 공적으로 PR되는 자기실현된 환상이다.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형 인간이라는 것 역시, 바로 그런 '데이터베이스-화化'된 허구적 세계관들의 편린 자체를 재전유하고, 패러디하고, 재상연하는 한에서 존속하는 새로운 포스트모던한 자의식이라고 일컬어진다.(나는 일전에 이를 절대 패배하지 않는 기만적 자의식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에 전복적이거나 새로운 것은 전혀 없는데다, 더 나쁘게도, 어떤 더 큰 상상적인 기만에 준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환상문학이 준거하고 있는 '허구적 세계관'을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여기는 태도를 기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누구도 이 '세계관'을 눈곱만큼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진지하지 않은 "바로" 이 태도야말로 오늘의 유일하게 일관된 현실감각을 보증하는 수행적Performative 차원이자 사회화 수단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말하자면 오히려 기만은 허구가 아닌, 허구들을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패러디와 재전유와 '동인지화'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의식적 장르적 관행들에 대한 바로 그 '합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대여점과 라이트 노벨의 지평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환상문학의 환상성의 위상인 것이다. 환상문학이라는 것이 하나의 온전한 '장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유력한 관행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밀에게 환상문학이라는 주제를 향한 어떤 일관된 욕망이 있다면, 바로 이 합의를 추월하고자 하는 추동이다. 가령, 20세기 이후에, 환상문학에 투신하는 이들은 속에서 공유되는 묘한 예의범절이 있다면 그들이 서로가 가지고 있는 '환상' 내지는 세계관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A의 작품이 드러내는 B라는 설정은 결코 A의 내밀한 '상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기술조작적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라든가, 혹자는 누군가의 소설에 드러나는 세계관과 설정들 그리고 특유의 플롯에 어느 정도 자의식적인 접근이 있었다는 고백을 듣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저런 곤란함이 있어서, 화자의 태도와 그의 배경들을 이렇게 조작하며 이런 저런 무대연출효과를 얻고자 했었지" 기타 등등. 이런 상황에서 용인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진짜로' 그 혹은 그녀가 자신이 쓴 소설의 배경과 설정들 그리고 캐릭터리티를 자신의 한몸처럼 여길 수 있으리라는 그 가능성이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 분명 하나의 사회적인 類Genre적 존재로 격상된 환상문학의 지평에 기어코 어떤 교란을 가져오고야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던져주지 않는가? 혹은 오늘날 환상문학이라는 자명한 하나의 지평은 바로 이러한 태도를 사전에 금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가? 다음과 같은 고백들은 오늘날 누가 불편해하지 않고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나는 언제나 내 뇌가 만든 세계에 만족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내 내적 논리에 기반한 것이었다. 아무리 총천연색으로 선명하게 너울대는 풍경과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에게만 총천연색이었고 나에게만 선명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만든 세계에 압도되는 일이 없었다. 창조주가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낄 수는 없는 법이고, 내가 내 창조물에서 느끼는 것은 보람 따위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없는 위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굉장히 추웠다. 귓바퀴며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시렸다. 내가 입고 있는 코트는 언젠가 교복 위에 걸쳐입던 낡은 더플코트였다. 그딴 걸 입어서 12월의 추위가 막아질 리가 없었으므로 나와 K는 언제나 히터에 몸을 가까이 붙이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너무 컸다. 눈은 거추장스럽게 질척거렸다. 그런데도 아름다웠다. 나는 절대로 이런 장소를 만들지 않았다. 만들지 못했다." (병속에 든 바다 中)

여성성

물론 예외 없는 금지는, 그것에 예외가 없다는 한에서 하나의 예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라캉의 성차공식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사실이기도 하다. 어떤 예외인가? 물론 그것은 금지의 작인Agent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종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더욱 더 만연한) '금기'를 통해 유지되는 어떤 사회적 결속은 필연적으로 이런 금지의 예외지점을 더욱더 유력한 '전이'지점으로서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다고 가정된 주체, 혹은 이보다 더 유력한,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라는 예외적 전이지점은 환상문학계와 같은 느슨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유지되는 공간에 더욱 더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정말로 진지하게 누군가의 세계관을 온전하게 승인하고 이를 흥미로워하며 즐기는 바로 그 태도를 모종의 가상적인 순진한 독자들에게 위임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환상에 대해 감히 쓰거나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금지의 자기지칭적 예외지점은 또한 표준적인 남성적인 세계가 공유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사례들을 일상적으로 조우할 수 있다. 남자들의 음담패설과 허장성세 기타 등등의 '센 척'하는 바로 그 태도는 술자리에서 곧바로 자신들의 예외지점을 드러내곤 한다. 공동체의 '우정'에 신경 쓰는 지배적인 남성적 태도는 언제나 포스트모던한 맹아를 품고 있지는 않은가? 남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자신들의 우정어린 관심사를 공유하는 진정한 소통의 순간에 언제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음담패설과 성적 환상들의 과시어린 표현들은, 그 자체로 가장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역겨워하는 순수한 상처입은 소년이지만, 우리로서는 그것을 진정으로 듣고 즐기는 모종의 '아버지'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극단의 내면적 관심사는 혹은 환상은 정반대의 극단, 즉 철저한 외면적 연기(장르적 합의)에 의해 지탱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감각이다. 그런데 반대극단은 혹은 반대의 성차는 어디에 있는가? 환상문학의 환상적 배경에, 스토리에, 캐릭터리티와 공명하는 리비도적 외상에 온전히 동일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오늘날 온전히 자의식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보편적 의식에 하나의 '예외'(우리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유지될 수 있는 현실과 허구의 자명한 경계선)가 있다면, 오늘날 가능한 '여성성'이란이 그 예외를 단순히 인정하지 않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지평의 부인된 기원, 부인되어야만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는 환상적 기원을 공공연히 떠맡고 주체화하는 윤리적 태도를 함의할 수 밖에 없다. 남성성이란 도덕적 원리라고 한다면, 여성은 이와 반대로 유일하게 가능한 윤리적-주체적 태도인 것이다. 이 사이에 어떤 '조화'도 없다. 이것이 성적 적대이다. 성적 적대 그 자체와 동일한 한에서의, '윤리'란 오늘날 의미에서 광기 어린 근본주의 혹은 테러리스트, 미친년 등등으로 불리는 바로 저 유명한 자세로 흔히 부정적으로 지칭되는, '아무 것도 아닌 것' 혹은 환상문학에서의 '환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의 진실을 투여Invest하는 바로 그 태도이다.

이것은 '기원'에 대한 어떤 불가능한 미친 내기를 함축하기에, 하나의 지평에서 그토록 쟁점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어떤 기획을 지탱하는 기원에, 그 기획의 영층위(기원적 환상)에 돌입한다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바대로 존재하던 기획의 동일성을 망쳐놓게 된다. 이런 '이율배반' 속에 모든 성적 적대Antagonism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지평을 지탱하는 불가능한 기원인 있는 곳마다, 우리는 여성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밀의 여성성은 어떤 지평마다 가능할만큼 범용한, 그러나 주어진 지평 속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성이기도 하다. 라캉Lacan이 드러내듯, 無를 위해 목숨마저 거는, 혹은 좀 더 순화해서 주체의 '체면'마저 거는 윤리적 태도란, 진실로 우정 어린 공동체에 파국적인 결과를 드러낸다. 우리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저 유명한 눈치 없는, (누군가의 마쵸적 발언에 분개하고 상처입(척 하)는) 진지하지 못한 혹은 지나치게 진지한 히스테리적 여성들에 대한 신화적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혹은 이는 지나치게 소녀적인 감상에 젖은 신변잡기성 글들을 써서 순문학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진지 못한 혹은 지나치게 진지한 여성작가들의 사례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녀들은 적당히 진지함을 가장하는 바로 우리들의 술자리(우리는 하나의 술자리에 얼마나 정교한 사회적 합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지를 매 순간마다 의식하게 된다)를 망쳐놓는 저 윤리성의 편린들은 아닌가. 환상문학에도 진실로 술자리와 같은 어떤 사회적 결속에 상응하는만큼 어떤 한 줌의 '윤리'Minima Ethica가 있다면, 아밀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런 포지션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아밀의 소설들을 가능한 몇 가지 키워드로 묶을 단초를 얻게 되는것이다. 우선 그녀의 소설은 전적으로 '여성적'이다. 혹은 환상문학의 가능한 지평의 적대(실재reel)을 드러내는 한에서, 여성성을 체현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는 그녀가 여성적인 글쓰기를 한다든지 심리적인 차원에서 소녀적인 감수성에 어떤 일가견이 있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환상문학에도 남녀의 성적 적대의 실재가 존재한다면, 앞서 말한 환상문학이라는 하나의 '장르적 지평'에 내재하는 비일관성을 돌파하는 바로 그러한 주체성을 우리는 온전히,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무슨 말인가?

신을 믿는 자가 환상문학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환상문학의 관건은 그것이 현실세계의 법칙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새로운 의미지평을 창조하는가와 더불어, 자주 간과되곤 하는 다음의 단서조항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관'으로서, 그 자체로 정합적이어야 하며, 현실세계의 법칙으로부터 독립성을 얻어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히 논리적 정합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환상문학의 개별 작품들이 형상화하고 드러내는 세계관은, 우리가 겪는 것과 또 다른 일종의 대안적인 '박탈감'을 생성하는 근본적인 유한성의 세계지표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해석학적 바로미터가 된다. 그러한 세계지표 내에서는, 현실 속에서 이뤄지는 것과 동일한 투쟁과 분투 그리고 좌절과 희망의 메시지가 드러나야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엄연히 '다른 의미지평'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가령 하루키의 후기 소설들 중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작가적 자의식의 측면(하지만 이는 얼마나 불확실한가!)을 제외한다면, 바로 그러한 전형적인 장르적 문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이 문법은 사후적으로 정립된 해석적 지평을 통해 지속된다. 말하자면, 독자들은 어떤 소설들을 읽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율적으로 어떤 현실적 참조점 없이, 해석학적 의미지평을 나름대로 정립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환상문학의 장르적 쾌감은 바로 이런 데에 있다. 그리고 이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장르적 쾌감 자체를 희생하면서까지) 밀고나간 소설이 있다면, jxk160의 단편선, <밤 너머에>이다. 가령 그것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완전히 순수 가상적인 세계(이는 힐베르트의 형식주의 수학의 임의적인 공리계들을 떠올린다)이며 결코 우리가 알던 것들 중 하나가 아니지만, '신화적'인 울림을 지닌 세계관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세계관들의 의미지평을 각자가 극단적으로 '내던져진 채' 완전히 낯선 상황에서 재정의해야만 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효과이다. 이것은 '전제들의 정립'Positing the Premises이라는 저 유명한 헤겔적 테제를 상기시킨다. 헤겔의 모티브는 통상 신화적 환상을, 가령 엘리아데의 '종교'라든지, 칼 구스타프 융의 '원형 이이미지'라든지, 청년 루카치의 '서사시적 총체성'과 같이 인간의 정신활동의 '원재료' 내지는 '영층위'로, 원초적인 정신적 소여로 간주함으로써, 근대적 자의식의 피폐한 정신사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왜 궁극적으로 파멸적인 것인지를 알려준다. 정신적 전제(환상)들은, 동시에 이들을 정립하는 매개활동의 결과로서만 실존하는 것이다. (환상에 대한) 의식은 언제나 자기관계적 의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환상의 이런 반성성은 동시에 환상을 하나의 자의식적 장르적 범주로 격상시킨 오늘날의 환상문학의 지평에서 부인할 수 없는 형태로 전개된다.

그런데 아밀의 소설들이 결여한 단 하나의 것이 있다면, 하나의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자기반성적인 해석적 의미지평이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은 완전히 자신만의 환상에 투철하게 몰입된 사私-소설인가.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의 소설은 전혀 다른 '반성적 형태'를 알려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적 모티브를 통해서 접근되어야만 한다. 언젠가, 작가 자신이 스스로를 크리스챤 모더니스트 라이터라고 자칭했듯이, 기독교적 모티브들은 그녀의 소설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령, <키리에>와 <방문자>는 명백하게 기독교적인 배경을 두고 전개된 소설이다. 오늘날 신을 믿지 않은 환상문학의 지평에서 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는 단 하나의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아밀 자신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기독교적 배경과 별개로, 그녀의 소설을 굉장히 기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환상들의 내적 논리들에 대한 사적인 혹은 해석적인 의미지평을 거부하는 자의식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을 믿는 자들 가운데에서만 가능하다. 혹은 오늘날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지평을 거부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드러난다.

신부는 열에 들뜬 눈을 들어 문 쪽을 보았다. 토요일 밤이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났으므로 사실은 일요일 새벽이었다. 신부는 눈을 크게 떴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문 너머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율리아나 수녀는 소돔의 눈 먼 무리들 중 하나였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아담을 유혹했던 하와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저주받은 곳에 선한 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내려온 천사였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신부가 낯선 손님들을 악의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해 팔아넘겨버린 순결한 딸들 중 하나였는지도 몰랐다. 신부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또옥. 방은 조용했다. 나무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는 컸다. 신부는 눈을 감고 짧게 기도했다. 내 주여, 당신의 종이 유약함을 용서하시며, 그것을 담대히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나이다.

기독교와 우울

<방문자>는 어떤 마을에서 각자의 외상적 죄의식과 결부된 환상을 구현한 불가해한 '방문자'가 문을 두드리는 사건에서 시작한다. 이에 굴복하여 문을 열어준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희생되고, 가장 순결하고 죄 없는 자들 중 하나인 줄리아 수녀의 목숨마저 앗아가자(그리고 그녀 자신이 이 방문자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결국 모종의 '깨달음'에 의해 주인공인 신부 자신이 그 방문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결말맺는다. 그러나 그 방문자는 단연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신부는 그것을 '깨닫고' 문을 열었다고 해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은 결코 통속적인 반전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사고게임을 전개해보자. 만일 아밀 자신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어떤 이단적인 세력의 암약이라든지, 혹은 마을의 존속을 지탱하고 있는 어두운 과거를 상정했다면, 이는 곧바로 무신론적인 지평의 흔한 장르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신을 믿는 자에게, 마을에 죽음을 안겨주는 '방문자'는 혹은 각자의 내밀한 외상적 환상을 수반하는 이 손님은 단연코 무無에서 찾아온 자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적인 태도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실존적 결핍과 죄성罪性에 대한 환상적 시나리오들에 대한 해석적 의미지평이 원초적으로 가장 내지는 미끼(악마의 유혹)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지평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관 자체가 악으로 가득찬 허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작품 속에서 신부는 이 점을 매우 철저히 하는데, 이 점은, 문제의 방문자가 악마의 유혹이나 신이 보낸 시련이라는 가설을 버리게 할만큼 철저하게 사고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이 고유의 기독교적 태도에 의해서만, 의미의 궁극적인 지평을 무의미로 돌려보내는 절대적인 희생의 제스처에 의해서만, 각자의 '환상'은 어떤 해석학적 역사지평의 흔적들로, 기호들로 드러나는 움베르토 에코 스타일에서, 문제의 해석적 지평 기저의 '억압된 보편성'에 대한 신적인 계시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부조리로만 알려질 수 있다. 이를 알리는 것은, 안드레아 신부의 그것과 같은 자살적인 제스처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재시작Reset의 계기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 그 누구도 자신의 환상을 이렇게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환상의 의미지평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는 고유한 기독교적 제스처만으로도 환상에 대한 어떤 세련된 (<장미의 이름>에서 표출된 바와 같은 움베르토 에코 스타일의) 신화적인 해석학이나 기호학Semiotics보다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면 어쩔 텐가.

누군가의 환상이 곧바로 신적 계시로 화하는 지평에서만, 각자는 그 자신의 '환상'에 대한 주술적인 사고게임(오늘날 만연한 타로카드 점과 같이, 신의 노여움을 살만한 이단적 주술들과 같은)들은 궁극적으로 중단되고, 환상 자체가 진실로 주체 자신이 떠맡지 못했던 수 많은 삶의 진리(기독교는 이것을 죄라고 부른다)들을 담아내는, 윤리적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환상은 여기서 물론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무신론적 지평에서도 물론 환상은 자신의 것만은 아닌 일종의 재화의 혹은 공통통화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것은 결코 '타자의 편'에서 사고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장르적 합의의 편에서 수행적 규칙의 편에서 사고될 뿐이다. 반면에 아밀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환상들은 하나 같이 '타자'의 편에서 등장한다. 맨 처음에 인용한 <병 속에 든 바다>의 문제적 구절은 이를 보다 명확히 한다. 그녀는 애초에 기시감의 원천이었던 자신의 선연한 환상에서, '지나치게 선명한' 타자를 발견하고 곧바로 (다소 성급한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K와의 유년시절에 폭력적으로 중단되었던 동성애적 관계를 떠올린다.(+여기서 아밀은 마치 환상문학계의 주디스 버틀러인 양 '우울과 동성애'라는 모티브를 꺼내드는 것 같다. 이러한 부분은 흥미롭고 논의될 여지가 남아 있다 )

가령 유년시절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자살한 K는 곧바로 어떤 합의나 언어게임의 상대가 되기엔 지나치게 버거운 존재가 되고 만다. 그녀가 다름 아닌 주인공의 폐제된Foreclosed 환상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억압된 것만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원초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그런 영역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환상의 영역의 심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그녀가 장르 소설을 읽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 혹은 비행위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K와의 실패한 우울증적-동성애적 동일화는 사실 자신만의 고유한 사적 영역--이것은 동시에 재화와 상품의 영역이기도 하다--으로만 여겨지던 환상의 지나치게 생생한 리얼리티의 원천임이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환각상태 속에서 조우하는 것은 정작 K가 아닌, K와 공유했던 풍경들, 그녀와 함께 떠났던 여행 장소들과, 전혀 상관 없는 낯선 남자이다. 이 남자는 물론 그녀의 환상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상연되는 환상적인 장면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총천연색의 산란한 풍경들이 단연코 자족적인 것이기는 커녕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를 사로잡고',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해' 상연되는 미끼임을 알려준다.

“나가게 해줘요.”
“저한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왜죠?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라면서.”
“당신이 찾아왔으니까. 그리고 나는 아마도 당신을 기다리려고 여길 지키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를 친근하게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친근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침투한 다정함에 기대고 싶어하는 마음과 이 불쾌한 거부감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나를 기다렸다구요?”
“봐요.”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바다가 보였다. 파도 소리가 귀를 묻었다. 그것은 불규칙적인 화음이었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어떤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일관된 낮은 물소리를 아래에 깔고, 스으 몰려오는 소리, 그것이 절정에 달하면 생명이 다해 부서져내리는 소리, 그것이 끝났다 싶으면 다시 몰려오는 소리. 그것을 하나하나 뜯으며 듣고 있노라면 눈송이가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나 수면에 내려앉아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소리나 지는 해의 빛조각이 물결 위로 던져졌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소리도 들려온다. 눈이 천천히 잦아들면서 저편의 섬과 숲들이 보였다.

“기억나지 않아요?”

남자가 물었다. 그 물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기억났다. 갇혀 있던 저수지에서 기억들이 미친 듯이 둑을 뚫고 쏟아져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왜,

“……왜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죠? 어째서 나를 이런 곳으로 불렀어요?”
“당신이 찾아왔을 뿐이에요.”

그는 흔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했던 거예요.”

여기에는 칸트의 모티브가 함축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칸트에게 상像이란 단순히 언어적-상징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뿐만이라면 우리는 그 너머의 事物사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물론 사물은 단지 현상의 질서와 배치를 구성하는 순수한 작용으로만 알려지는 무의 장소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상들은 그 자체로서 자족적인 것이 아닌, 다름아닌 마치 '무언가(사물)에 대한 상'인 것인 양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 관건이다. 현상의 현상형태는 다름 아닌 이런 '상연'의 기능에 있다. 그리고 이 '상연'의 기능에서부터, '초월론적' 전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현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Not-all', 다른 차원의 질서를, 다른 현상적 질서를 알려주는 순수한, '보여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역설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칸트의 요지이다. 여기서부터 단순한 즉자적 존재론적 지평에서 윤리적 타자성을 향한 초월적 전회가 시작된다. 이 상을, 통해 우리는 다름 아닌, '타인'에게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환상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환상이란 오늘날 단순히 임의적인 상징적 구성물로서만 혹은 더 나쁘게 상상적 원형Prototype으로서만 간주된다. 그러나 환상은 또한 하나의 순수한 '베일'(+왜 수도승의 도포자락과 수녀의 면사포를 연상하지 않으면 안되겠는가? 숭고한 베일 이면에는 물론 평범하고 의심 많은 진부한 개인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관건은 베일이 가리우는 평범한 인격이 아닌, '베일 그 자체'가 아닌가?)이며, 그 이면에 다른 차원의 질서가 혹은 타자他者가 있음을 알려주는, 현상적 질서의 순수한 만곡 내지는 왜상의 '현현'Epipheny는 아니겠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날 잊혀진 환상의 기독교적 기원은 아니겠는가. 여기서 환상은 단연코 해석학적-장르적-의미지평의 수행적 합의 내지는 게임규칙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성격의 '환상'은 아밀이 고집스럽게 다루고 있는 그 무엇이다.

<송신>이라는 기념비적 사례

<송신>이라는 그의 가장 탁월한 작품은, 강신무와 같은 무속신화를 배경으로 차용한 소설이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배경은 여전히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송신이라는 그의 소설은, '메타-신화'의 층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기독교가 어떻게 조로아스터적 전통 내지는 각종 이방신들의 혼합을 통해 나타났는지에 대한 통상적인 음모론적 비난(다빈치 코드 류의 비난)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물론 기독교는 전통 토착종교들의 신화적 세계관에 '기반'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것들과 '다른' 층위에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신에 대한' 야훼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노여움(이것은 하나의 수행적 모순을 구성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언명은 또한 다른 신들이 있는 한에서 가능한 언명이 아닌가? 여기서 유일하게 가능한 일관된 결론은 야훼란 결국 개별적인 자연현상의 힘들을 표상하는 전통적 토착신들이 헤겔적인 '자기 관계적 부정성'으로까지 고양되는 유일무이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모순'은 다름 아닌 야훼 자신의 권능이다.)을 언급하는 구약의 지평이라든지, 궁극적으로 신 자신의 죽음을 무대에 올리는 부활 장면에서 전적으로 드러난다.(신화적 층위에서 결코 유일신의 절대적인 상실과 부재는 그 자체로 온전히 서사화될 수 없다. 세계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우주론적 법칙으로 퇴행하지 않고서 유일신의 '죽음'을 그 자체로 서사화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독교적 지평 속에서이다.) 기독교를 다른 신화적 세계관과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가는 선'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아밀의 소설 역시 한국 토착의 고대 설화들과 강신무 의식들이 기반한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여전히 기독교적일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몰락한 유력가문의 여식인 주인공은 어느날 신내림을 받고서 당골에서 무당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 전란에 휘말리고 가까스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서진 마을과 더불어 자신과 함께 하던 장군신은 난리통과 함께 (어쩌면 그녀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녀는 굿판 대신 기방에 들어 기녀로서 생활하지만, 옛 추억에 못이겨 부른 속된 무가巫歌를 부르는 것을 한 묘령의 선비에게 들키고 만다. 그는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노래를 어여삐 여겨, 매일 밤 찾아와 그녀의 노래를 듣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 선비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고, 놀랍게도 왜倭와의 전란 통에 그녀와 더불어 접신의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땅을 버린 주작신이라는 정체를 밝히게 된다. 그녀는 마지막에 오직 가장 신성한 자리에서만 부른다는 송신送神을 그 앞에서 부를 것을 요청받는다. 여기에는 기묘한 전도가 일어난다. 정작 신내림의 주체인, 신 자신은 마치 자신이 한 맺힌 자인양, 자신이 이 땅에서 지키지 못한 수 많은 목숨들을 되뇌이며 스스로의 본풀이를 요청한다. 그는 다름 아닌 이 땅 한 가운데에서 민초들과 함께하는 이상 그들을 지켜줄 수 없음을 자각하고 천계로 올라가려는 결심을 내린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신이 되어줄 수 없겠느냐는 사랑에 빠진Amorous 주인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그녀의 사랑 때문에라도 그는 자신의 결단을 실행해야만 한다는 사태가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과 인간이 함게 붙잡힌, 고유한 유한한 차원의 선택이 내재되어 있다. 천계에 올라가 땅의 질서를 회복하고 구원하겠다는 기획은, 동시에 신과의 어떠한 인간적인 내밀한 관계지평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더 이상 신은 고유한 자리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일상사를 '만져주는' 인격신일 수 없는 것이며, 영원한 침묵과 부재로 스스로를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 자신의 '죽음' 내지는 '자기처벌'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스토리의 온전한 기독교적 비극성이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신을 떠나보낸 주인공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아닌 세속무로 전전하며 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굿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주작신을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떠나보내며 잊을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여기서 성령의 모티브를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령은 다름 아닌 신의 즉각적인 상실이 바로 신의 불멸적인 현존양태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닌가? 신이 신의 고유한 장소(율법, 성전, 예루살렘)에서 몰락한 것은 동시에 신의 존재가 그를 사모하는 개개인들 사이에 항상 깃들여 있다는 반성적 전도를 수반하지 않는가? 강신무라는 신내린 자가 되길 그치고, 세속무로 활동하며, 그를 잊겠다고 결의하는 그녀의 행동은 동시에 그에 대한 최고의 사랑과 헌신의 표현이지 않겠는가. 기독교의 본질은 다름 아닌 이 '전도'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이것은 오늘날 '신'과 '사랑'에 대해 믿지 않는 자들의 우울증적 세계지평에서 망각되는 혹은 망각되고자 하는 그 무엇이다.

(+그녀의 소설이 만약, <손님>, <심청>과 같은 황석영 류의 소설과 동일선 상에 있었다면, 그녀는 그녀가 스스로 마치 '천형'처럼 모시던 장군신과 주작신의 영원한 이별 앞에서, 어떤 '약속'과 '떠나보냄' 혹은 '신에 대한 인간적 사랑과 증오의 양가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커녕, '생生의 회복'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화자 자신이 스스로의 상처를, 생채기를 반복해서 꼬집어대는 식의 남성적 자기-향유의 원천으로 팔아넘기는 태도를 중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는 고대 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품의 평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그녀는 '어느 기성작가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기성작가에는 황석영 자신도 포함된다고 해도 좋다. 다시 말해 황석영은 이 히스테리적인 자기부인에 사로잡힌 환상문학 소녀보다 덜 떨어진 소설들을 쓰고 있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어느 소년-마쵸의 원한어린 질투심으로 끝맺으며

물론 내가 아밀의 소설의 이런 저런 '새로운' 측면들, 단연코 새로운 측면들인 데도 매우 유감스럽게도 같은 웹진 내에서도 통상 침묵 속에서 간과되고 있는 그러한 측면들(환상적 세계관이 결여된 자기-희생적 환상, 크리스챠니티,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 제 아무리 새로운 점을 알고 있고 그것을 견지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필력이 지탱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 당위가 또한 '문학'의 영역을 지탱하는 당위라는 것을 믿는다. 결국 무엇이든 '쓰기 나름'이라는 것은 오늘날 문학의 퇴락과 몰락을 말하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지만, 아밀의 경우에는 동시에 구원의 지표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재치 있는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의욕에만 앞서는 문장들이 사실 흔한 요즘에, 그와 같이 정갈하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뼛속 난삽한 번역투에 오염된 필자에게도 돌이키게 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녀의 소설들은 환상문학의 장르성에 대한 어떤 반성적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소설들은 어떤 범속한 소설들보다 주목될만한 가치가 크다. 우리가 그의 소설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녀의 소설이 자신만의 언어로, 다름 아닌 소설을 쓰는 데 있어 혹은 시를 쓰는 데 있어 사유란 중요하지 않다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통념에 대한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유를 하는 자들이 소설과 시를 쓸 수 없다. 하이데거가 휠덜린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이데거를 예비하는 휠덜린에 대해 여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통상 간과되곤 하는 하이데거의 지혜를 떠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시학의 지평은 동시의 존재의 역사적 지평이다.' 여기에 함축된 모든 형이상학적인 의미들을 덜어낸다면, 그것은 곧 시와 소설이란 오늘날의 언어적 조건에 대한 강렬한 예외지점 혹은 특이점으로서 출현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담고 있다. 그것이 시와 소설의 역사적 지평에서 단연코 '사건'으로서, 깨어짐으로서 드러나야만 온전히 시와 소설 본연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보수주의적인 통찰은, 하이데거 자신의 사유에 견주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시학Poetics(혹은 어원상으로는 창작학)을 동시에 마케팅과 기호학Semiotics과 언어학 내지는 장르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사유에 견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밀과 같이, 쓰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언어가 동시에 묻어나오는 완숙한 글들이 저들 가운데서 많이 등장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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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심 09.04.25 01:36 댓글 수정 삭제
    언젠가 아밀님의 소설을 오역한 적이 있어요. 이 글을 읽고 나니 언젠가 시간을 들여 아밀님의 글을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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