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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꿈을 걷다

2009.03.27 11:5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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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걷다](김정률 외, 로크미디어, 2009년 3월)는 로크미디어의 노블레스클럽 11번째 책이자 장르 단편집입니다. 지금까지 장편만 내놓던 노블레스클럽에서 최초로 장르 단편집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 책은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되었는데, 작가 이름부터 아주 화려했기 때문입니다. 판타지와 무협 쪽에서 유명한 작가들이 한 권의 단편집으로 모인 것이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죠. 열두 명이니 영화 [오션스 트웰브] 같다고 할까요. 이 정도 이름값을 가진 작가들을 이렇게 한 권으로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번이 최초이기도 하고요. 다들 어떻게 이런 작가들이 모일 수 있었는지 신기해하기도 했죠.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모인 만큼 단편집의 색채도 독특했습니다. 보기드믄 무협 단편들이 여러 편 실려 있는가하면, 판타지 단편과 SF도 실려 있는 단편집입니다. 이름 있는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재미있는 단편들이 많았습니다. 그럼 이제 각각의 단편들에 대한 감상을 시작하겠습니다. 감상이기 때문에 몇몇 단편은 내용 누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 주세요. 언급되는 페이지 수는 일반본이 아닌 양장본 기준입니다.

 이계의 구원자 | 김정률
 전형적인 이계진입물입니다. 판타지 세계에서 드래곤이 차원을 넘어서 무협 세계로 와서 무림 고수들을 데려오죠. 따라서 이런 무림 고수가 판타지 세계에서 활약하는 인계진입물의 재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단순하고 진부한 패턴이긴 해도, 이 패턴이 갖고 있는 재미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보통 장편으로만 쓰이는 이 소재가 단편으로 쓰인 것은 신선했습니다. 작가가 워낙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로 많은 작품은 선보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었고 꽤 즐거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동안 이계진입물을 많이 읽은 독자나, 이 작가의 작품들을 상당수 읽은 독자라면 식상할 수도 있겠고, 그게 아니더라도 작품이 가볍고 단조로워서 재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구도 | 문영
 이 작품은 월간 판타스틱 2008년 9월호에 실렸었습니다. 차분한 문체가 특징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문체가 아름답습니다. 굉장히 많이 공들인 느낌이 나고, 문장들이 오래 다듬어진 느낌입니다. 제목이 사전에 있는 두 가지 뜻으로도 동시에 읽힌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깔끔하게 읽히는 단편이었고 고사를 이용한 글쓰기가 감탄스러웠습니다. 이번 단편집에는 [판타스틱]에 실렸던 주석이 빠져있는데, 단편집으로 처음 작품을 접한 분들을 위해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형가(荊軻, ?~BC 227)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 위나라 하남성 출신으로 연나라 태자 단의 식객이 된 후 진나라가 침략한 땅을 되찾아주든가 진왕 정(진시황)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진나라에서 도망쳐온 장수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 독황의 지도를 가지고 진황을 알현해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처형당했다. ‘형가 이야기’는 ≪사기≫ ‘자객열전’에 실렸으며, ≪시황제 암살≫≪영웅≫에서도 그려졌다.

 * {구도}는 ‘자객열전’에 짤막하게 언급된 인물 개백정을 주인공으로 ‘형가 이야기’를 다시 쓴 작품.


 꽃배마지 | 민소영
 여러 권의 장편 판타지를 쓴 민소영 작가의 글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동양적인 배경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설화나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가장 먼저 연상된 것은 바리데기 신화였지요. 막내공주인 여자아이가 주인공이고 임금이 앓아눕고 부모를 위해 모험을 겪는 일 자체가 많이 유사합니다. 이런 시도나 작품 분위기는 좋았지만 아쉬웠던 점은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한 대로 문장이 많이 퇴고가 덜 되었고, 구성에서 조금 더 압축되거나 늘어났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첫 장부터 ‘세상이 천천히 가난해지자 사람들은 야박해지고 잔인해지고 서로 나누지 않고 서로 미워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같은 문장은 퇴고가 안 된 것 같은 아쉬움을 줍니다. 이 문장 뒤로도 계속 ‘서로’가 반복되어서 어색한 느낌이 특히 강하죠.(물론 좋은 문장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퇴고가 안 된 듯한 걸리는 문장들이 있었다는 거죠.) 이런 설화 같은 분위기 자체는 좋았고 몇몇 장면들은 눈에 들어왔지만, 전체적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해지는 결말로 가버렸고 불필요한 부분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좋은 글이 될 수 있었던 글감이라 특히 아쉬웠습니다.
 
 인카운터 | 윤현승
 한정된 장소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짧은 환상 단편입니다. 이야기가 딱 예상한 범위 내에서 깔끔하게 진행되고 가게 자체와 주인과 종업원의 캐릭터가 좋았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주요 구조는 ‘부정적 아이러니’입니다. “계속해서 강박적인 욕망에 매달리다 보면 그 집요한 추구의 결과로 욕망은 성취하겠지만 당신은 파멸할 것이다.”(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기, 황금가지, 199쪽) 동시에 장소와 화자의 매력이 작품 전체를 받들고 있어서 예상한 범위 안에서 패턴대로 이야기가 진행되더라도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즉, 캐릭터와 장소가 잘 그려져 있고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되어 흡족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인 것처럼 이후의 이야기들도 자동적으로 상상이 가고, 이 캐릭터들이 앞으로도 이 공간에서 다양한 일들을 겪으리라는 사실이 기대감을 줍니다. 이 소재를 살려서 연작 단편이 나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삼휘도에 관한 열두 가지 이야기 | 이재일
 이번에 [꿈을 걷다]는 일반본이 출간되기 전에 이벤트 형식으로 양장본이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이 양장본을 보면 작가마다 앞에 짧게 코멘트가 붙어 있는데 이 작품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작가가 ‘삼휘도’라는 이름을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시기는 출간작으로 첫 번째라 할 수 있는 [칠석야]를 구상할 즈음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두 가지 소재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했는데 [칠석야]의 만애청에게 지는 바람에 10년이 넘는 세월 뒤로 밀려나 버렸다고 하네요. 그 동안 기법 면에서 다소 변화를 주고 전체 분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뼈대만큼은 당시 만들어 놓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읽으면서 확실히 긴 글을 줄여놓은 느낌이 났습니다. 그만큼 이 책에서 가장 긴 분량을 자랑하는 중편입니다. 하지만 읽는 동안은 굉장히 흡인력이 있고 잘 쓰인 글이라 분량을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읽어버립니다. 재미있게 읽은 글 중에 하나였고 완성도도 높았습니다.

 11월 밤의 이야기 | 전민희
 이 작품은 월간 판타스틱 2008년 12월호에 실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좋은 장편을 여러 권 펴낸 작가답게 안정된 문장과 문체가 인상적인 글입니다. 작가의 장편인 [세월의 돌](전민희, 제우미디어, 2004년 12월)에서도 각 달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죠. 그래서 제목부터 이 작가만의 느낌이 났습니다. 벽난롯가에 빙 둘러 앉아 벌꿀 술을 돌려 마시며 밤새 각자 이야기를 한다는 ‘11월 밤의 이야기’라는 설정부터 좋더군요. 이것은 마치 입담 좋은 이야기꾼들이 모여서 자웅을 겨루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납니다. 또 하나, 이 작품의 제목이 작품 내에 언급되면서 이 작품이 하나의 11월 밤의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한 달 전에 약혼을 한 남자입니다. 그가 약혼을 한 여자는 ‘라일라’라고 하는 수선화처럼 앳되고 버들가지처럼 나긋한 천생 도시 아가씨라고 하죠. ‘나’는 ‘라일라’를 자신의 고향인 솔즈리드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초반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예상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솔즈리드에 요정의 성과 마귀할멈과 죽은 자를 데려가는 움직이는 섬이 있느냐고?
 물론이다.”(254쪽)


 여기서 말한 ‘요정의 성’과 ‘마귀할멈’과 ‘죽은 자를 데려가는 움직이는 섬’은 각각 초반에 사용된 중요한 암시입니다. 이후 이야기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죠. 이렇듯 이 작품은 단편임에도 세세한 구성으로 짜여 있습니다.

 “응,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나는 모르겠는데 내 손은 아는 것 같다든가, 그런 때 있잖아요.”(256쪽)

 라일라의 이 대사는 후에 드러나는 라일라의 정체에 대한 복선으로 들어간 느낌을 줍니다.

 “이를테면 자기 것을 두고 간 사람은 돌아와야만 하는 법이지요.”(260쪽)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수상한 집의 여인. 그녀가 한 말은 주인공이 아니라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라일라에게 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죠.

 여인은 나와 라일라를 번갈아 보며 킬킬 웃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셨나요? 정말로 그럴까요?”(263쪽)


 이 부분에서 ‘나’가 가족이라면 몰라도 모르는 사람의 머리카락은 간직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여인은 웃으면서 ‘나’와 라일라를 번갈아 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작품은 액자 형식으로 이야기 안에서 다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는 또한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시간 구성을 품고 있습니다. 마치 여인이 말한 “좋습니다. 오늘 같은 11월 밤에는 매혹적이고, 수많은 뜻을 품고 있는, 애틋하면서도 음산한 이야기가 어울릴 테죠. 그런 것은 분명 있습니다. 다만 제가 권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대가는 비쌀 겁니다.”(266쪽)와 부합되는 이야기입니다.(작품을 다 읽고 나면 그 대가가 얼마나 비쌀지 독자는 체감하게 됩니다.) 또한 라일라가 말한 “아무도 뒷이야기를 모른다면 더 좋겠는데.”(266쪽)와도 부합하죠. 이 단편은 액자 속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연결된 액자 밖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이제 아무도 뒷이야기를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작품 구성이 계속 나선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읽을 때 훨씬 풍성한 이야기들과 설정들을 알아보고 더 큰 재미를 느끼게 되는 단편이었습니다.

 월아 이야기 | 조진행
 분량이 상당히 짧아서 이야기 거리가 없는 글입니다. 깔끔하게 잘 읽었고 쉬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단편집에는 때론 중편 같이 긴 분량의 글이 있는가하면 엽편처럼 짧은 글이 실리기도 하죠. 이 글이 이번 단편집에서 짧게 읽고 넘길 수 있는 글이었죠. 재미있게 읽은 글이었습니다. 이런 소재는 익숙하더라도 역시 이런 소재가 주는 재미 역시 그대로 살리고 있는 글이네요.

 느미에르의 새벽 | 좌백
 감상에 들어가기 전 양장본에 수록된 작가 코멘트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써 보는 판타지(혹은 SF?)입니다. 무협의 세계와 달리 무한에 가까운 자유도가 오히려 집필의 장애가 되더군요. 텅 빈 공간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내려고 허우적거리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끄집어내어 구성한 것이 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막상 끝내고 나니 재미있어져서 기회가 된다면 또 해 보고 싶은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312쪽)

 참고로 작품 내용 중 컴퓨터 언어에 대해서는 후배 작가인 무악의 도움을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실 무협 작가이기에 무협 작품이 실릴 것을 예상했고 또 예전에 판타스틱에 발표한 무협 중편을 싣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SF 작품이라서 놀랐습니다. 오래 글을 쓴 유명한 작가답게 안정된 문장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잘 읽었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의 발상에서 충격을 받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예상한 범위 안에서 진행되어서 약간 실망감이 드는 글이기도 했네요. 밝혀지는 이야기들이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해서 글을 아쉽게 만든 것 같습니다. 듣기로는 이 작품이 끝이 아니고 연작 형태로 다음 편도 이미 쓰셨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 이 세계가 진행되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진행된다면 그것들이 연결되어서 더 큰 재미를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점은 많은 기대가 되는 글이기도 했습니다.

 두 왕자와 시인 이야기 | 진산
 진산님의 두 편의 글을 실었는데 각각 연작 형태의 글입니다. 첫 번째 작품인 {두 왕자와 시인 이야기}는 [청소년문학] 2006년 가을호에 실린 글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가 재미있는데, 메타픽션처럼 이 소설이 나오게 된 사실적인 경위를 그대로 적으면서 능청스럽게 전부다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위에서 나오는 ‘왕자, 마법, 용, 모험 그리고 여행’이라는 주어진 소재를 전부 사용한 글이라 또한 감탄이 나오기도 한 단편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많이 사용된 익숙한 이야기였지만 액자 형식의 포장도 새로웠고 음유시인의 설정이라든가 이야기가 진행되는 부분들이 참 차분하고 좋았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죠.

 그릇과 시인 이야기 | 진산
 이 글은 앞서 발표된 글보다 뒤늦게 발표되었는데도 먼저 읽은 글이었습니다. 나중에 발표된 순서대로 읽었다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은 하나의 단편이라기보다는 연작 형태로 읽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간 판타스틱 2008년 10월호에 실린 이 단편을 읽은 독자라면 나중에라도 이 단편집을 구입해서 앞의 단편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앞에 발표된 글보다는 재미는 떨어지지만 더 정교하게 많은 것을 담은 글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잘 쓴 글이었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에 걸맞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인상적인 연작 단편이라서 그런지 두 편 정도 이 연작이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앵무새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다 | 하지은
 “단편은 무거워야 하고 의미심장해야 하고 투철한 주제 의식으로 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웠는지 전 단편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알드 달의 [맛]이라는 단편집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읽고 나서 가슴속이 간지럽고 더없이 유쾌한 기분이 든다면, 그것으로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글이 뭔가 말하려는 듯 보여도 결국엔 그저 웃고 끝내자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네, 앵무새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입니다. 그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시고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402쪽)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적힌 작가의 코멘트가 이 작품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딱 그대로라는 인상이랄까요. 정말 읽으면서 시종일관 유쾌한 기분이 들었고 즐거운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새롭지 않고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도 많지만 이런 유머스러운 위트 넘치는 분위기 자체가 참 따뜻하고 좋군요. 단편집에는 역시 이렇게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단편도 들어가는 것도 이런 여러 작가가 모인 단편집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거름 구덩이 | 한상운
 짧은 분량 안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소설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작가가 의도한 탐미적이고 강렬한 이미지가 잘 드러난 글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호러 소설 같이 보이는데, 무협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독자가 느끼는 공포감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과 달리 무협 세계는 워낙 엄청난 능력자들이 살아가는 세계라서 위험이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마그니안 | 홍성화
 이 단편집에서 가장 아쉽게 읽은 글이었습니다. 좋은 소재와 내용이었는데, 압축이 지나치게 덜 되었다고 느꼈고 몇몇 부분들이 허술하게 넘어간 것 같았습니다. 일단 처음 사건의 동기가 소설 전체를 뒷받침해줘야 하는데 너무나 황당하고 우스운 사건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소설 전체가 성립되지가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소년이 소꼬리에 불을 붙였다가 놀란 소가 뒷발질해서 죽었는데, 그걸 가지고 또 다른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과거를 잊으라고 말하자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 자체가 지나치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의도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려고 한 것이 보이나, 블랙 코미디도 아니고 처음부터 거부감이 확 드는 이야기였다고 할까요. 이런 부실한 받침 위에 전체 소설이 얹혀 있으니 이야기가 전부 다 제대로 읽히지 않습니다. 차라리 아예 이 부분을 빼고 숨겨서 독자의 상상으로 넘기는 게 나을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저주에 숨겨진 것에 대해서 각자 다양한 상상을 하고 작품을 오히려 풍성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즉, 앞부분을 다 날리고, “난 마그니안이 되고 싶어.”(454쪽)라는 대사로 시작되어도 충분히 좋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소설이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세계관과 설정을 설명하고 주입시키기 보다는 보여주기로 일이 진행되면서 설정을 깨닫게 되는 것도 재미 면에서 더 지루하지 않고 좋고요.)
 ‘마그니안’이라는 설정 자체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이 매력적인 소재가 작품 내에 매끄럽게 녹아들지 못해서 굉장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저주의 배경부터가 이 소재의 매력을 확 죽이는 요소가 아닌가 싶었고요.
 초반 부분에서 넘어가 산적이 쳐들어오는 부분부터 이야기가 정리가 되지 않고 부산스러운 느낌이 많아서 아쉬웠습니다.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이야기 전개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퇴고가 부족해 보였다고 할까요.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들을 날리고 이야기를 단순하고 깔끔하게 속도감을 높였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결국 이야기의 쟁점은 케이트와 폴인데 그 사이에 벌어진 간격이 지나치게 넓어서 독자가 길을 잃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이앤과의 씬도 불필요해 보였고 혼란만 가중시키는 느낌이었고 베본의 영지 부분도 갑작스러운 감이 있었습니다. 마녀도 뜬금없이 등장해서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는 부분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는데, 앞부분에서 베본의 영지에 마녀가 갇혀 있다는 대사나 서술로 한 번만 언급을 해줬더라도 복선으로 작용하여 글이 훨씬 읽기 좋았을 것 같았습니다.(분명 그럴 부분은 있었죠. 라크네의 무기를 설명하면서 언급할 수 있었고 아니면 마그니안이 처음 드러났을 때 다른 사람이 해결 방법 중 하나로 생각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마법 병기를 가지고 하는 폴의 싸움도 물론 구성상 처절해야 하지만 좀 지나치게 길고 지루한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습니다. 이미 독자가 그런 싸움을 할 거라는 것을 짐작한 상태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아쉬움이 드는 거지요. 조금 더 잘라내고 속도감 있게 전개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몇몇 세세하게 묘사되고 서술된 곳들은 그리 중요한 부분들이 아니었으니까요.
 읽으면서 {꽃배마지}도 생각이 났는데 두 작품 다 어떤 사건에 의해서 저주가 발생하고 그 저주가 풀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남녀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두 작품 다 저주가 생기는 과정이나 저주가 풀리는 이유, 저주가 풀린 다음에 느껴지는 감동과 여운이 아쉬운 작품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작품 다 저주라는 소재의 특성상 신비하고 환상적이며 음울한 느낌을 내재하고 있는데 반해, 그것들에 효과적으로 개연성을 주고 독자들을 납득시키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만큼 ‘저주’라는 소재가 굉장히 다루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리뷰를 마치며
 12명의 작가들이 펼친 13편의 이야기들. 우선 이런 단편집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부터 반가웠고 작품들도 대부분 재미 면에서 뛰어난 편이었습니다. 기존에 나왔던 국내 장르 단편집들 중에서 단순히 느껴지는 재미 면에서는 상위에 드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쉬운 단편도 있었지만 또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단편도 있었습니다. 원래 단편집의 특성 상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 수 없는 법이죠. 최소 한 두 편의 단편만 건져도 괜찮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말이죠. 이 단편집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좋은 단편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매년 이런 단편집을 기획하겠다고 말한 만큼 다음 단편집 역시 기대가 됩니다. 특히 장르의 특성상 보기가 힘든 무협 단편들이 무척 재미있었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진산의 무협 단편집 빼고는 국내에 무협 단편집이 나온 적이 없었는데, 이런 형태로나마 무협 단편을 접할 수 있어서 읽는 동안 재미있었고 다음에도 또 읽고 싶어졌습니다.
 최근 주류문학은 단편에만 집중된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고 반성하면서 다양한 장편문학상들이 신설되고 지원금도 장편 쪽에 집중하며 장편 중심의 계간지도 생기는 등 장편 위주로 체계가 바뀌는 모습입니다. 현재 장편을 쓰고 있는 작가들도 많은 상태이고요. 그러나 장르소설은 반대로 그 동안 장편에만 집중된 시스템에서 단편집도 나오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경우든 편식은 좋지 않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장편과 단편이 조화를 이룰수록 더 많은 작가들이 발굴되고 더 좋은 작품이 나올 토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편이라는 형식이 갖는 미학과 재미도 따로 존재하는 만큼 독자들도 장르 단편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을 반기고, 또 장르 작가 지망생들도 무턱대고 장편부터 쓰는 게 아니라 단편소설도 많이 읽고 써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장르 단편집들이 출간되고 다음에는 기성 작가들 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는 신인 작가의 작품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이 책을 안 읽은 장르 독자들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무협과 판타지 세계를 넘나드는 즐거운 장르 소설의 매력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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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l 09.03.27 12:20 댓글 수정 삭제
    꽃배마지 의 문장이 안 좋다는 감상은 몇 들어봤지만,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안 좋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의아했는데, 말씀하신 부분 같은 것은, 문장을 보는 관점 자체가 아예 달라서 갈리는 평 같네요. 저는 예로 드신 문장이 굉장히 리듬감 있고 유려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지시적 의미만 사용할 경우 '서로'는 당연히 한 번만 나와야 하겠지만, 이 문장에서는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형성하지 않나요? 이렇게 리듬감으로 강조된 사람들 사이의 불신과 분열은 작품 전체의 주제로 연결되는 거 같고요. 오히려 이야기 소재는 바리데기 때부터 닳고 닳은 소재라, 형식적 아름다움 없이는 정말 진부해졌을 단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No Profile
    날개 09.03.29 05:33 댓글 수정 삭제
    확실히 그런 면에서는 예를 잘못 든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의도한 분위기와 형식미가 보이긴 했는데, 그럼에도 역시 초고 같다는 느낌도 받아서요. 기회가 되면 다시 살펴보고 적당한 예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부족한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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