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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첫 번째 비상

2009.03.27 11:5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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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씨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에서는 비정기적으로 판타지 단편 대회나 판타지 공포/추리 단편 대회, 판타지 갤러리 과학소설 대회 그리고 판타지 갤러리 엽편 대회 등을 열어왔다. 또 판타지 갤러리에서 파생된 사이트인 FANGAL.ORG는 장르문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을 위한 사이트로, 상업성의 시류에서 벗어나 쓰고 싶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다. 특이하게 자유게시판이 없는데, 이는 장르문학 사이트로서의 본연을 지키고, 폐쇄성을 지양하고자 한다고 한다. 단편 게시판에는 이달의 단편을 뽑아 소정의 기념품이나 책을 주기도 한다. 이번에 FANGAL.ORG에서 낸 첫 번째 단편집 [첫 번째 비상](김보민 외, Fangal.org, 2008년 12월)은 이런 다양한 대회의 수상작이나 출품작, FANGAL.ORG 단편란에 올라온 글들 중에 몇 개를 선정해서 실은 단편집이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대회를 열고 역동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디씨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와 FANGAL.ORG가 지금까지 한 활동들을 정리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작년부터 황금가지와 시작에서 장르 단편집을 출간하면서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장르 단편집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 사이에도 이런 동인 형태의 단편집이 나오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지금부터 22편의 작품들을 짧게나마 감상을 해보겠다. 이 중에는 이미 장편을 출간한 출판 작가도 있고 아직 출간을 하지 않았으나 기대가 되는 예비 작가들의 작품도 있다. SF와 판타지, 무협, 추리 등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 한 권으로 기대되는 신인들과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을 읽어볼 수 있었다.

 안개의 숲 | 김보민
 처음을 장식하는 작품은 {안개의 숲}이라는 단편이었다. 제목에서부터 순문학적인 느낌이 나는 이 단편은 시종일관 차분한 문장으로 진행된다. 그 때문에 걸리는 문장 없이 부드럽게 잘 읽히는 장점이 있는 글이었다. 초반에는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제목에서 언급되는 장소가 이미 일정한 이미지를 독자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개의 숲’이라는 곳이 주인공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만들고 갈등을 만들겠구나, 거기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리고 정석 같은 전개를 거쳐 주인공은 마침내 ‘안개의 숲’에 들어가고 거기서 발생하는 이야기까지는 확실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아주 파격적인 발상이 나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대한 만큼의 장면은 제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기대가 불일치한 까닭에 개인적으로는 후반부는 그리 흡족한 글은 아니었다. 이제 막 무언가가 벌어질 것 같은 느낌에서 이야기가 없이 단순한 설명과 상황을 대사로만 알려주고 급박하게 끝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글이었다.

 그들은 여신을 꿈꾸고 아마조네스는 눈물을 흘린다 | 귀우혁
 이 작품은 예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단편집에 수록 되어서 다시 읽게 되었다. 두 번째 읽은 탓인지 글이 예전보다 흥미롭지는 않고 조금 단순한 구성이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의도한 바가 단순한 풍자적인 목적이라면 충실히 구현된 작품이겠지만,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는 설정을 이용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역시 잘 읽히는 글이고, 흥미롭고 재미있는 글이다. 미래를 배경으로 여성과 남성 뿐 아니라 중성인, 양성인, 등등 다양한 성을 설정하고 마초와 페미니즘 등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성 역할에 대해서 고찰해 볼 수 있는 풍자적인 글이라고 할까. 분량은 짧은 편이나 그 안에 충분히 세계관이나 설정 그리고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 | 말종멜론
 제목이 독특해서 읽기 전부터 무척 흥미가 갔던 작품이다. 오컬트 박물관이라니,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그러나 정작 내용을 읽어보면 ‘오컬트 박물관’은 맥거핀에 불과할 정도로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아마도 작가의 다른 장편 설정에서 일부를 따와서 단편으로 쓴 글 같았다.(그래서인지 세계관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환상적인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읽는 책들이 언급되면서 위화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떤 스토리 같은 게 있는 단편은 아니고 대화로 이루어진 글로 특정한 ‘분위기’가 주가 된 작품이었다. 장난스럽고 따뜻한 분위기 자체가 사랑스러워서 즐겁게 읽은 작품이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니 기억이 흐릿해진 단편이기도 했다. 결국 따스한 분위기였다는 기억만 남았을 뿐, 스토리나 갈등이 없기 때문에 조금 아쉬운 단편이었다. 언급되는 텍스트들이나 구성을 맞춘 듯한 반복된 대사와 대화들은 재치가 있었고 재미있었다. 특히 이 소설의 백미는 역시 대화 부분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랜드파더랑 빅 대디 사이즈’로 대표된다.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와 유사하다. 옆구리를 간질이는 정겨운 느낌이라고 할까. 그 재치 있는 대화 부분이 읽고 나서 유일하게 인상에 박힌 부분이었다. 다음에 배경으로만 나오고 만 설정들이 본격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노래하는 도시 | 니그라토
 이 작품은 SF 단편이다. 모든 것이 오로지 체제 유지를 위해 운영되고 있는 완벽한 도시를 다루고 있다. 이곳에서 모든 활동은 도시 오컴의 제약을 받고 있다. 언뜻 보면 너무 압도적이어서 경이롭기까지 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모든 시스템이 도시 안에서 이루어지고 결혼이나 지식의 발달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고 관리되는 설정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배경 설정은 아서 C. 클라크의 유명한 장편 소설인 [도시와 별](A.C.클라크 지음, 나경문화, 1992년 05월)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도시와 별]에서는 결국 ‘도시’를 벗어나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장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면(운명을 개척하고 결국 세계의 구원까지 도달하는 것에 반해) {노래하는 도시}의 주인공들은 도시에 순응한다. {노래하는 도시}에서도 도시를 탈출하는 욕망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도시의 품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유는 이 도시 안에서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노래하는 도시}에 나오는 ‘오컴’은 극도로 발전된 과학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도 같다는 말처럼, 마법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일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 안에서는 탈출도 의미가 없다. 오컴이라는 자궁 안에서 평생을 사는 인류라는 느낌이 강하다. 결국 ‘노래하는 도시’에서의 ‘노래’는 주인공에게 도시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지칭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도시’ 그 자체이고 인간들은 도시를 나타내기 위한 편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도시의 몇몇 일면들은 흥미롭게 읽히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서사가 없고 단순한 나열에 불과한 부분들과 작위적인 느낌이 나는 부분들이 많아서 아쉽기도 했다.

 존재하지 않던 별 | 니그라토
 이 작품도 앞에 실린 {노래하는 도시}를 쓴 니그라토의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SF 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의 작품보다 가독성이 높지는 않았다. 일단 인물들이 설명 없이 등장하면서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어투로 말을 하고 있다. 때문에 작품이 굉장히 읽히지 않았고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만 했다. 전체적으로 사건이나 행동보다는 이야기 전개의 대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정적이기 때문에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작품 분량이 길어져서 세계관과 인물들을 차분히 소개하고 정리해주는 부분들이 존재했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동적으로 움직여서 독자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긴장감을 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갈등을 단순히 대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상황을 만들어서 전달했다면 훨씬 이야기가 살고 작품 전체적으로 흥미롭고 인상적인 글이 되었을 것이다. 독자가 재미를 느끼고 캐릭터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뿐만 아니라 사건을 쉽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굉장히 압축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고,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억지로 독자에게 주입시킨다는 느낌이 강한 글이다.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도 사건과 이야기, 그리고 캐릭터들을 생동감 있게 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뻣뻣하고 단조로운 인형극을 보는 듯해서 많이 아쉬웠다.

 필스터 가의 피 | roland
 어두운 환상소설이었다. 필스터 가문의 남자는 살인을 하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갈등을 만들고 이야기를 강렬하게 이끌어나간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오래전 외국 소설의 느낌이 있었다. 문장은 깔끔한 편이라 읽기 좋았다. 전개나 이야기가 많이 예상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은 글이었다. 광기 어린 내용과 절대적인 운명이 느껴져서 글의 매력이 있었다. 다만 전개상 위화감이 드는 부분들이 명확히 소설 내에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웠다. 설정의 오류인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간에 독자가 제대로 납득하며 읽어나가기 어려운 글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깔끔하게 잘 구성된 글이었고 만족스럽게 읽은 편이었다. 읽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 노기욱
 앞의 {필스터 가의 피}와 유사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그보다는 보다 장르 팬터지적인 설정 등이 눈에 띄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 등이 유사한 느낌을 주었다. 광기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연쇄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파멸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앞의 작품을 읽고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상대적으로 소재에서 오는 재미가 덜한 느낌이 들었다. 막 비슷한 작품을 읽고 또 비슷한 방식의 이야기를 읽기 때문이었다. 흡인력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앞의 작품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아예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 어딘 가의 이국적인 배경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에 반해, 이 소설은 장르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두고 있어서 아예 다른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기존 판타지 세계관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데 그 세계관을 전혀 모르는 독자 입장에서는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세계관을 구성해야 했기 때문에 읽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하지만 일단 세계관이 어느 정도 인지된 상태에서는 작품을 읽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으며 작품의 재미도 한층 높아졌다. 고풍스런 판타지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섬뜩한 악령과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역시 이런 이야기의 특성상 독자의 예상을 아예 깨는 이야기는 나올 수 없겠지만, 이미 예상된 이야기 내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분위기와 재미를 동시에 갖춘 작품이었다. 앞부분에서 몇몇 설정들을 제거해서 초반 몰입도를 높였더라면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뮤즈 | 쟈리
 소설가라면 누구나 ‘뮤즈’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받는 영감 말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런 ‘뮤즈’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처음에는 흥미롭게 읽어 나갔다.초반에는 단순히 뮤즈를 소녀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장면은 세세하게 묘사되지만 이야기는 점점 뜬구름 잡는 듯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이 이리저리 밀려서 움직이고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으로 느껴졌다. 그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이 잘 되지 않고 흥미가 떨어졌다. 후반부의 결말은 평범하고 예상한 범위 안에서 끝나서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구성이나 이야기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다면 재미있는 글이 되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초반에 느낀 기대감에 비해 글의 전개와 결말이 아쉬웠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감정입니다 | 미노구이
 제목을 굉장히 잘 지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흥미를 유발하고 어떤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러나 막상 읽으니 소재 자체는 신선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SF 소설에서는 기억이나 감정은 지겹도록 다루었으니까. 그러나 감정을 소설과 일치시키고 대비시키는 부분들, 그래서 감정의 명칭이 소설들인 부분들이 좋았다. 진부한 소재를 다루더라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 이 글은 꽤 잘 쓰였고 백화점에서 감정 조율사의 대사들은 이 소설의 백미로 느껴졌다. 잘 읽었지만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끝은 좀 안이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급박하게 도중에 끊긴 느낌도 나고, 구성의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식으로 결말을 차분하게 이어나갔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게 묻기를 | 17호
 이 글은 SF단편이다. 프로그래머인 주인공이 퇴근길에 전 지구적 네트워크인 올넷을 설계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인도인으로 세 명의 ‘구루’(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한다.) 중 한 명이다. 주인공은 프라냐 테크놀러지의 수석연구팀을 반지에 새겨진 ‘구루’를 의미하는 연꽃 모양의 문양을 보고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궁금했던 올넷 심부에 존재하는 ‘마아’랴는 모듈에 대해서 묻는다. 작품 내에서는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마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구성을 통해 형상화 하고 있다.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야’에 대한 설명이 있는 다른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파니샤드는 우리가 보고 느끼고 누리고 향유하는 모든 경험적 사실들을 모두 ‘마야’의 장난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분별력을 잃고 마야의 장난에 휘둘리면,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터전인 이 세상을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착각하는 무지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라마 크리슈나는 ‘누에고치’의 비유를 들어 마야의 세상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일깨워준다. 소위 마야에 현혹된 세속적인 사람들은 누에와도 같은데, 누에는 자신이 원할 경우 고치를 뚫고 나올 수 있지만 스스로 지은 고치에 집착하게 되면 고치를 떠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서 죽고 만다. 대부분의 세속적인 혼들이 바로 이 누에와 같다는 것이다. 고치를 뚫고 나와 나방으로 변하는 누에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마야의 주문에 걸려들지 않고 자유를 얻는다.
 우리가 마야의 주문에 걸려들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세상이 환영임을 깨닫는 동시에 그 환영의 세상 또한 브라흐만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브라흐만을 궁극적 근거로 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고진하, 비채, 2009년 2월), 128쪽


 산크리트어로 ‘세상jagat’이란 말 자체가 ’변화하는 곳‘이라는 뜻이고 세상 모든 것이 변화하는 까닭은 세상의 모든 것이 브라흐만의 ‘환영력maya’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인도의 힌두 교리를 바탕으로 깔고 프로그래밍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데, 상당히 몰입이 잘될뿐더러 이야기의 흡인력이 있고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구성 역시 이 작품의 주제에 잘 부합하는 방식이었고 완성도도 꽤 높은 글이었다.

 아래에서 | 위래
 제8회 디씨인사이드 판타지 단편 대회 우승작이자 문장 2008년 2월 월간 작품상을 탄 작품이다. 그만큼 순식간에 읽히는 글이고 유쾌하고 깔끔한 글이었다. ‘엘리베이터’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는 속도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발상이 특히 좋았던 작품이다. 너무 담담하며 뚜렷하게 성격이 고정되어 있는 캐릭터들은 마치 인형처럼 보였는데, 이건 또 부조리극에서 나오는 캐릭터들 같이 느껴졌다. 즉, 소설의 캐릭터라기보다는 희곡으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대에서도 엘리베이터로 보이는 세트만 구성하면 쉽게 이십 분 정도의 짧은 공연이 가능할 것 같은 글이었다. 약간 아쉬웠던 점은 이런 분위기와 서술에서도 더 깊은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듯했는데, 단편이라는 분량의 한계 때문인지 구성이 단순해서 담백한 느낌을 주면서도 아쉬운 느낌을 같이 준다. 하지만 바꿔서 오히려 어색해지는 것보다는 이 이야기에서는 이게 딱 맞는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망 | 호두빙수
 이 글은 판타지 갤러리 엽편대회 우승작이다. 즉, 엽편의 특성상 분량이 굉장히 짧지만 글이 상당히 잘 쓰였다. 짧은 분량 안에서도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글이고 그만큼 탁월한 문장력으로 쓰인 글이었다. 적절한 문체와 제목과 잘 맞아떨어지는 내용과 처연하면서 묘한 감정을 잘 드러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기관총수 리철민 | 엘도릿, 이피
 이 작품은 앞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판타지 갤러리 엽편대회에 출품되었던 글로 입상작이다. 역시 {미망}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호평이 많았던 글이다. 이야기가 새롭다거나 강렬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글은 아니지만, 엽편이라는 정해진 분량 안에서 상당히 훌륭하게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상황 전달과 이미지가 잘 그려졌고 전쟁의 한 면을 잘 잡아냈다.

 보이지 않는 세계 | 희오
 평이한 전개를 택하고 있는 작품이다. 처음에 ‘데미안’의 인용은 불필요해 보였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구조인데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딱딱 끊어지는 느낌이라 아쉬웠다. 상황이 잘 전달되지 않고 갈등이 약했다. 전체적으로 지루하게 읽은 글이었다. 번호로 챕터를 구분한 것도 차라리 없애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환상적인 내용 전개에서 몇몇 부분은 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 걸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주인공이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장애물들이 지나치게 적고 약해서 글이 생동감이 없었고 긴장감을 형성하지 못했다. 독자가 읽고 나서도 별다른 기억이 남지 않는 글이었다.

 화성에 온 여자 | 17호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폴 오스터,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2003년 3월) 중 {유리의 도시}를 그대로 따라한 부분들이 많이 걸리는 글이다. 오마쥬로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고 있어서 아쉬운 글이었다. 글의 구조는 꽤 난해하게 진행되는데 결말은 상당히 진부하게 처리되어 있다. 간혹 흥미로운 장면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야기에 몰입되지 못하고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개연성이 지나치게 없기 때문에 독자들을 납득시키기 힘든 글이었다. 작가가 독자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이렇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려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추리적인 요소가 처음에는 많이 들어간 듯한 느낌이지만, 이후에는 모든 게 의미를 잃어서 허탈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누가 내 김치통을 건드렸는가? | 호두빙수
 판타지 갤러리 공포/추리대회 대상을 탄 작품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대로 굉장히 재미있고 능청스러운 느낌을 주는 코믹 추리극이다. 읽으면서 내내 미소를 지으면서 읽게 만드는 글이었다. 그만큼 글에 위트가 많이 들어가 있었다. ‘본격 하숙집 서스펜스, 가난한 대학생의 위장이 걸린 추리 드라마.’라는 문구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처음 제목에서부터 어떤 식이 될지는 대충 예상이 가기 때문에 정통적인 추리를 해야 하는 단편이라기보다는 유쾌한 코믹 추리극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글 전체에 흐르는 위트가 섞인 문장들과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어우러진 즐거운 글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울 | 귀우혁
 이 글은 장르소설 적인 요소는 없다. 1인칭 소설로 한 남자가 대학교 강의를 들으면서 한 생각과 그것이 차례차례 부정되는 것이 재미있는 글이었다. 분량이 짧고 내용은 단순하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짧은 꽁트를 읽는 기분이었다. 조금 더 필요 없는 부분들을 잘라내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단편집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느낌도 들었다.

 스트라이크 | 노유
 이 글은 제2회 판타지 갤러리 SF 대회 우승작이다. 처음에는 흡인력이 떨어졌지만, 계속되는 설명 등을 통해 배경을 이해하면서 글의 재미가 늘어났다. 다만, 화자가 직접 초반부터 많은 것을 서술로 설명하는 것이 글의 흡인력을 떨어트리는 요소 같았다. 좀 더 초반에 사건이나 상황을 통해 보여주기를 시도했다면 글에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중반부에 들어서 흥미로워지는데, 후반부에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는 부분에서는 약간 허무한 느낌도 들었다. 개연성이 부족해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소행성 부분이 특히 그랬다.) 작가가 설정한 결말로 가기 위해서 억지로 이어나간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과 육식을 좋아해서 이성도 잃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은 참신하고 재미있었다. 전체적으로 풍자의 느낌이 많이 나는 가벼운 SF였다.

 소포클레스와 프로이트를 증오하며 | 예니체리
 제목에서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난 소설이었다. 오이디프스 신화는 이제는 정말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지긋지긋한 면이 있는데 현대적으로 해석한 글이 새롭게 느껴지기보다는 평이하게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러나 흡인력은 상당히 뛰어나서 꽤 빠르게 읽어나갔다.
 몇몇 문장들은 비문이거나 오자가 있어서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초반에 흥미를 느꼈던 캐릭터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단순해지고 시시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아쉬웠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나 역전 등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훨씬 더 풍부한 글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결말 부분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많이 아쉽기도 했다.

 딸기파이 살인사건 | 장세진
 제목만큼이나 굉장히 귀엽고 즐거운 글이었다. 머릿속에서 동글동글한 만화 같은 캐릭터들이 나와서 심각하게 누가 죽은 것 같다고 대화를 나눈다. 웃기고 황당한 느낌이 드는 그런 글이었다. 적당한 분량에 적당한 유머와 사건이 들어있다. 입가에 계속 잔잔한 미소가 지어지게 만드는 대사들과 문체가 읽는 동안 즐거웠고 오해의 연속으로 벌어지는 사건도 흥미로웠다. 이 단편집에는 {누가 내 김치통을 건드렸는가?}와 이 {딸기파이 살인사건}처럼 가끔 쉬어가는 즐거운 단편들이 끼어있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 중에 하나인 것 같았다.

 나루터의 곰 | 호워프
 읽는 동안에도 잘 몰입이 되지 않은 글이었다. 그만큼 흡인력이 떨어졌고 읽고 나서도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져서 리뷰를 쓰기 위해서 다시 살펴봐야 했다. 지나치게 잔잔한 글이고 서사가 적어서 이야기의 매력이 적었다. 문장이 단문이라 깔끔하긴 한데 지나치게 딱딱 끊어져서 연결이 잘 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다. 이런 부분들은 가독성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다.
 가난을 배경으로 해서 교회와 연결시킨 몇몇 부분과 장면은 좋았다. 할머니와 주인공의 관계는 진부하기는 했지만 이 소설에 유일한 갈등요소였다. 다만 모든 상황들이 결국 피상적으로만 느껴지는 게 아쉬웠다. 실제로 피부에 상황들이 와 닿는 것이 아니라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이 소설의 주요 상징이자 은유로 나타난 ‘나루터의 곰’이라는 그림 역시 그런 느낌을 더해줄 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그림을 통해 나타내는 방식과 나중에 그림을 수정하는 결말 역시 독자가 처음부터 예상 가능한 범위이며 진부해서 클리셰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이런 예상들을 벗어난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나아갔다면 글이 훨씬 더 강렬해지고 인상에 남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동안 많이 나왔던 소설들을 모방해서 안전한 길로만 걸어간 듯한 느낌이라 기억에 쉽게 각인되지 않는 글이었다.

 무협연작: 남녀낙화 | 귀우혁
 무협단편은 평소에 보기 힘들다. 내가 이 글을 읽기 전에 본 것은 [진산의 무협단편집]과 장르 잡지 [판타스틱]에 실린 좌백과 문영의 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읽었는데, 전체적으로 많이 아쉬운 글이었다. 상황 설명이 잘 되지 않고 그만큼 독자가 글에 몰입할 여지가 없었다. 문장도 아쉬움이 많았는데 힘을 주려고 한 탓에 오히려 비문이 많아서 제대로 읽히지 않는 듯했다. 가령 ‘요염하다고 느껴질 법도 했지만 차분한 목소리와 금방이라도 미소 지을 듯한 부드러운 얼굴이 단아하기만 했다.’ 호응이 맞지 않아 비문처럼 느껴지는 이런 문장은 좀 더 퇴고가 필요할 것 같았다. 퇴고 부족으로 띄어쓰기가 잘못되어 있는 부분들도 거슬렸다. 문장들이 중복되는 표현들을 좀 삭제했으면 글이 훨씬 깔끔해지고 가독성이 높아졌을 것 같았다. 또 부사나 형용사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 느낌이 있는데, 특정한 분위기를 의도한 글이라고 해도 10% 정도만 삭제를 하고 문장들을 다듬어 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지나치게 장식적인 문장들이 거부감을 주면서 몰입을 방해하고 문장들이 명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았다. 이미지나 분위기를 주로 전달하기 위해서 생생한 문장이 아닌 추상적인 문장들이 많이 사용되어서 무협과는 어울리지 않는 글이 된 느낌이었다. 단편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건도 밋밋하고 진부해서 흥미롭게 읽지 못했다. 캐릭터들도 전부 살아있다기보다는 죽어있는 인형 같은 느낌이라서 전혀 정이 가지 않았다. 독특한 스타일의 글을 의도한 것이 보이긴 했지만 일단 개인적으로는 잘 읽히지 않는 글이었고, 읽고 나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리뷰를 마치며
 단편집이기 때문에 당연하겠지만, 상당히 마음에 드는 단편도 있었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단편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글들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었다. 정식 출간이 아니라 동인 형태로 나온 출간물이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큼 대부분 안정된 문장으로 쓰였고 일정 이상의 재미를 주고 있었다. 물론 읽으면서 더 나아갈 수 있는데 멈춘 글들도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신예 작가 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현재 온라인상에서 이렇게 수시로 다양한 단편 대회를 열고 응모자가 모이고 수상작이 결정되는 곳은 디씨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소설에 관한한 가장 열정적인 창작 열기가 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런 단편집도 출간될 수 있었다. 여기에 실린 다양한 장르의 단편들은 지금까지 판타지 갤러리에서 연 다양한 대회들의 성과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읽는 동안 매우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었고, 다음에 두 번째 단편집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분명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가들 중에서 앞으로 감탄할 만한 글을 써낼 작가도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장르소설의 미래는 분명 이런 열정 속에 깃들어 있다. 여기에 작품을 실은 작가들이 첫 번째 비상에서 멈추지 말고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이만 부족한 감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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