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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chizedek@naver.com
   무거운 현실과 가벼운 환상을 잇는 명랑한 상상력
   (이거 굉장히 잘 만들어진 문구라 갖다 썼다. 책표지 만드신 분 참 잘 했어요. :D)

   가장 중요한 사족.

   어쩌다 보니 김이환의 출간작 모두에 대해, 리뷰를 쓰게 되었다. 돌아다녀 보면 그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팬도 많고, 나로 말하자면 애독자라기도 뭣한 사람인데, 굉장한 인연이지 싶다. 이번 출간작의 리뷰를 맡은 것도 그런 굉장한 인연 덕이지, 뭔가 내가 이 작가를, 혹은 그의 소설을 심도 있게 지켜보는 비평가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리뷰는 보고 그냥 흘려버리기를. 실은 여기까지만 읽고 이 페이지를 넘겨도 별 상관없다. 그저 [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이하 오후 다섯 시)을 한 번 더 지면에 써 보고 읽게 했다는 걸로 의미를 가지는 리뷰일 뿐이니까 말이다.

   오후 다섯 시.

  ‘양줍소’를 읽었던 독자라면 아마 ‘오후 다섯 시’를 선택하고 꽤나 만족했을 것이다. ‘오후 다섯시’는 작가의 전작과 비슷한 괘를 달리고 있는 소설이다. 게다가 작가가 변칙적인 발전이나 발작적인 반전에 매달리지 않아, 소박하고 담백한 미덕이 있다. 한권으로 기름기까지 쫙 뺐다는 점에 들어서면 참으로 흐뭇해진다.

   앞서 소개한 뒷표지의 한 줄이 이 유쾌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잘 설명하고 있다. ‘무거운’ 현실과 ‘가벼운’ 환상. 이만큼 이 소설을 잘 나타내는 설명이 있을까.
   학교를 휴학하고, 당장 집세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빚이 쌓인 데다, 7년간 짝사랑했던 그녀와도 헤어진 무거운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물건이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FBI가 외계인을 잡기 위해 출동하는 환상 속으로 다이빙한다. 덤으로 그는 빚도 해결하고 마음을 나눌 친구들도 얻는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꿀 만한 가볍고 포근한 이야기가 책 한 권 속에 있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비록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나 복잡한 머리 회전의 쾌감은 없었지만 마음을 차분하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장점을 잘 알고 굉장히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표현의 미려함은 없지만―――아니, 없으니까 짧막한 서술 안에 작은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대중소설로서 더 나아갔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오후 다섯 시’를 읽으며 조금 붕 뜨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은 전체적인 이 소설의 작풍 탓으로 만약 조금이라도 현실감을 느끼게 하려고 했다면 이 붕, 떠 있는 듯한 유쾌한 기분이 사라졌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독자가 바라는 것은 현실에 접촉한 듯한 까칠함이 아니니까 그런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오후 다섯시의 매력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오히려 이(런 류의) 소설에서 필요한 것은 좀 더 한 쪽으로 치우친 ‘균형감을 잃은’ 모습이다.
   작가가 ‘오후 다섯 시’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중소설로서의 ‘오후 다섯시’는 좀 어중간하다. 헐리우드의 작품주의 영화같다고나 할까, 10대의 발랄함이나 20대의 섬세한 감성 중 하나를 택해 아주 유치해졌다면 나 같은 유치한 독자는 아주 좋아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이환.

   ‘오후 다섯 시’에 대한 리뷰를 맡았지만 모니터를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작가의 전작들이었다. 2004년 [에비터젠의 유령](북하우스), 2007년 [양말 줍는 소년](황금가지), 2008년 [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로크미디어). 중간의 [착한농부와비둘기공주]의 라디오 북 출간까지 합친다면 꽤나 꾸준하게 활동하는 작가이다. 우리나라 판타지 계의 출간 권수로 보자면 이 정도의 출판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순수한 완결 작품 수로 보자면 데뷔 후 1년에 약 하나씩 완성품을 내어놓은 것이다. 참 대단한 창작열이다. 나는 바로 이 꾸준한 다작에서 김이환이라는 작가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우리, 라고 지칭하고 싶은 판타지 장르 쪽에서 이영도에 버금가는 대박 스타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주변에 자랑스럽고 출판계가 무시할 수 없는 브랜드 파워를 가진 작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시기는 넘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쌍방향 네트워크가 활성화된 이 때 단 한 사람이 군림할 수 있는 시대란 힘들지 않을까. 그보다는 적당한 상업적 성공에 기초하여 일반 문학계쪽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작가군이 탄생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비실비실한 이 쪽 장르계도 좀 더 기운차게 돌아가 주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주목받는 작가들 중 많이 이들의 침묵이 깊다. 아무리 좋아도 그것뿐이라면, 잠시잠깐 돌아보고 아쉬워할지 모르지만 미완의 가능성이므로 이미 잊혀져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오후 다섯 시’가 출판되었다는 것 자체도 매우 기쁘고 의미 있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책이 재미있기까지 하다.

   ‘이 작가가 질이라느니 작품관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말고 계속해서 재미있는 책을 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오후 다섯 시’의 김이환.

   이제 작가 김이환은 오후 다섯 시 즈음에 와 있다. 참 어중간한 시간대이다. 저녁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하루를 총평하며 마무리하기도 멋쩍은 시간대.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여유로운 황금기이기도 하다. 이제 작가는 소설을 자신을 마음에 품은 일정한 형태로 잘 조립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까지의 경지는 힘들겠지만, 자신이 어떤 문장을 잘 쓰는지, 어떻게 써야 자신의 독자가 만족할지에 대한 청사진은 나와 있는 듯싶다.

   앞으로도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줘서 독자를 기쁘게 해 줬으면 좋겠다. 보잘 것 없는 리뷰가로서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가 진짜 황혼녘에 들어섰을 때, 나 또한 풍요롭고 다채로운 저녁놀을 보며 함박웃음 지을 수 있길 기원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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