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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2009.09.26 00:4309.26





abraxas.pe.krgkman1@hanmail.net
 2009년과 단편집

 올해 들어 출간된 창작 SF/판타지 계열 단편집은 다섯 권에 달했다. [U, ROBOT](황금가지, 2009년 2월), [꿈을 걷다](김정률 외, 로크미디어, 2009년 3월),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듀나 외, 해토, 2009년 7월),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2](강지영 외, 시작, 2009년 8월), 그리고 본서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김이환 외, 황금가지, 2009년 9월)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0년에 출간된 [윈드 드리머](방지나 외, 명상, 2000년 5월)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출간된 창작 SF/판타지 계열의 단편집을 합해도 20권이 채 되지 않는다는 걸 감안한다면 ――― 물론 이는 창작 집단에서 자체적으로 찍은 책을 제외한 결과이지만 ――― 이미 권수만으로도 상당한 수치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장르문학 출판계에서 단편집은 출간하기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감개무량할 정도이다.



 이들 단편집에 작품을 수록한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해볼만한 것이 환상문학웹진 거울 소속 작가들이다. 앞서 언급한 책 중에서는 [꿈을 걷다]를 제외한 모든 책에 거울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메이저 버전'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책도 두 권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를 해석하는 관점이야 여러 가지일 터이다. 거울 필진의 약진일 수도, 장르문학 작가 발굴 시스템의 기형성(?)을 고발하는 사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창작 장르문학 단편에서만큼은 거울의 입지가 서서히 탄탄해져간다는 것만큼은 사실이 아닐까 싶다.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는 지난 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김이환 외, 황금가지, 2008년 7월)의 후속편에 해당한다. 앞서 소개했듯 '환상문학웹진 거울' 소속 작가들이 주축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세세한 부분은 크게 달라졌다. 일단 책의 포맷 자체가 전작에 비해 훨씬 가벼워졌고 전작과는 달리 표제작을 선정하였으며, 포맷도 달라졌다. 조금 쉽게 말하자면 열린책들의 'Mr. Know 세계문학' 전집에서 쓰는 포맷이라 해야 할까.

 물론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표제작의 출간 연도 및 그 수준이다. 사실 전작에는 해당 작가의 대표작보다는 초기작, 데뷔작에 해당하는 작품이 많이 실렸다. 어떻게 보면 거울 작가진의 공동 포트폴리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내놓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는 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에서는 좀 심드렁하게 읽었던 단편을 썼던 작가가 이번 책에 수록한 작품에서서는 놀라울 정도로 좋은 결과를 보여준 것에 크게 놀랐을 정도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보다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쪽이 훨씬 낫다.



※ 제목 옆의 연도는 해당 작품이 발표된 연도이다.

 박애진 {학교} (2008)

 '희생양'이라는 개념을 한국 사회에 잘 맞게 활용한 작품이다――― 라고만 하면 본 서평자를 포함한, 몇몇 비평가 지망생들에게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이 작품의 성격/매력을 절반 이상 들어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물론 학교라는 배경과 제물이라는 소재가 제법 강렬하긴 하지만 결국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건 고독과 소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왜 외로워지는지, 혹은 스스로를 외롭게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다소 급작스러웠던 결말도 수긍이 가고. 작품에 공감한 독자들을,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슬프게 할 작품이지만, 그렇기에 음미해볼만한 소설이다.

 은림 {노래하는 숲} (2007)

 적어도 출간된 작품만 놓고 본다면 은림은 여성성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작가고, 여성과 식물을 연결시키는 기법 또한 여러 작품에서 써 왔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나무로 변한다는 주제의 {할머니 나무}가 그랬고, 임신을 나무 키우기에 빗댔던 {낙오자}가 그랬다. 일관되었다고도 할 수 있고 자기중심이 잡혔다고 해도 좋겠지만 사실 발표된 작품들이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고서는 그런 우려가 일거에 씻겨 나갔다.

 종래의 주인공들이 다소 수동적인 면모를 많이 보였던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노래’나 ‘걸음’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플롯 자체는 그다지 참신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노래’나 ‘매미’ 등 이 소설만의 상징이 결합됨으로서 참신한 맛을 주는 근사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아쉬운 부분이라면 제목 하나. 작품과의 연결성을 생각하면 근사한 작품이긴 하지만, 보다 튀는 제목이었다면 표제작으로 선정되기에도 충분한 소설이었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김보영 {노인과 소년} (2009)

 거울이 아닌 네이버를 통해 소개되었던 작품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노인'과 '소년'의 대화가 후반부로 헤세 풍의 선문답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스크립터} 등 이전 작품에서도 강점이었던 섬세한 문장만으로도 견딜만 하다. 상당한 길이지만 그다지 할 말은 없는 작품.

 김선우 {천국으로 가는 길}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다. 일단 ‘천국에 가기 위한 삯을 이승에서 치룬다’는 소재부터가 이미 여러 작가들에게 사용되어 그 참신성이 영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해야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마르셀 에메가 그 예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끝나서는 안 될' 부분에서 끝났다는 게 아닐까. 고백하자면 다 읽고 나서도 혹시 편집 미스로 뒷부분이 누락된 거 아닌가 싶어서 페이지 번호를 확인해봤을 정도다. 차라리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한 이런저런 소동들을 더 공들여 보여줬다면 모를까 이 정도의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기대해서는 안될 터이다.

 김이환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2006)

 표제작이기는 하지만 같은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유독 튀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백하건데, 처음 읽었을 때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을 때도 있었을 정도이다. 반복되는 문장들이 정교하게 얽혀있긴 하지만, 그 외에 특별한 인상을 주진 않는다.

 정보라 {은아의 상자}

 제법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만, 결말에 가서 ‘은아’가 보낸 답장이 나오는 부분부터 급속도로 맥이 빠진다. 사건의 전모를 설명해주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면 보다 덜 노골적이고 덜 성급한 방식으로 처리했어도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임태운 {뮤즈는 귀를 타고}

 나비 효과와 타임 패러독스를 이용한 단편. 사실 같은 소재라면 듀나의 {나비 전쟁}이 더 나았지 싶다. 이 작품도 재밌게는 읽기야 했지만… 항상 겪는 일은 아니지만 임태운의 단편을 읽다 보면 한창 재밌게 읽다가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섹스 관련 장면 때문에 기분을 잡치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게 절정에 달했던 {전설의 용 우리 마을에 오시네 Red Dragon is coming to town}때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작품에도 그런 대목이 하나 있어서 영 찜찜했었다. 소년만화 풍의, 명랑한 작품을 많이 써온 작가라 유독 그런 느낌이 강한지도 모르겠지만.

 정지원 {장미 정원에서} (2009)

 호러 판타지라고 해야 할까? 작품의 분위기와 문장이 제법 근사하게 어울렸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오빠'란 캐릭터의 '급격한' 성격 변화는 좀 당혹스러운 데가 있었다. 바로 전까지는 주인공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다가 바로 그 직후에 태도를 바꾸는 식이었던 지라. 물론 결마까지 다 읽고 나면 대략 이해할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캐릭터가 일관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리는 들을만 하다. 거기만 제외하면 제법 준수한 단편.

 정희자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목차에서의 제목은 편의상 이렇게 잡혔지만 정확하게는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하는 식으로 나왔어야 할 소설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아예 제목으로 원 을 만들어서 애초의 의도를 살렸다.

 90년대 중후반부터 문학 관련 통신 활동을 해온 사람이라면 향수를 자극할만한 요소들이 제법 많이 나온다. 다만 중반 이후부터는 다소 난잡해진다는 인상이 강해서, 차라리 전반부 부분을 보다 길게 쓰고 후반부를 보다 간결하고 알기 쉽게 썼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영도 {샹파이의 광부들} (2009)

 과거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가 모 스포츠신문에 연재되었던 적이 있다. 단행본으로 치면 대략 첫 권 분량쯤 연재되다가 중단되었는데, 훗날 작가는 이 당시 ‘무능한 작가’ 취급을 받았었노라고 회고했었다. 신문 연재 소설의 특성상 한정된 분량 안에 극적인 사건을 매회 풀어내야 하는데 ―― 거기다 스포츠신문은 사람들이 매일 꾸준히 보는 것도 아니다 ―― 분량 제약에서 자유로운 웹상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의 성격과 잘 맞지 않았던 듯하다.

 이영도가 근래 몇 년 사이에 발표해온 단편 소설들 ―― 중에서도 특히 이 {샹파이의 광부들} ―― 을 보자면 그 때의 자평을 떠올리게 된다. 장편에서는 꽤나 강점을 보여 온 작가이건만 단편에서는 영 힘을 못쓴다는 이야기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이영도가 지금까지 발표해온 단편 소설들은 단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편에 가까운 느낌으로 써온 작품이 많다. 가령 ‘오버 더…’ 시리즈나 ‘키메라’, ‘골렘’, ‘행복의 근원’ 등을 생각해보라. SF소설인 [{카와이판돔의 번역에 대하여}나 역시 결국에는 같은 배경을 이용한 작품이 또 나왔었다. 한 작가가 같은 세계관을 이용하여 여러 편의 단편을 쓰는 것이야 흔한 일이고, 딱히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에소릴의 드래곤}(이 책의 출간에 앞서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문학’에서 발표)과 {샹파이의 광부들}의 사례를 보면 이영도가 단순히 연작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책에서는 작품 서두에 ‘이 작품만 읽으셔도 내용의 이해에 무리는 없’다고 하고 있으나 이게 사실에 맞는 표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 작품에서는 인물이나 설정 등에 대한 많은 설명을 전작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 단편에서는 더스번 칼파랑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그가 왜 ‘좋은 남자’인지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실 ‘좋은 남자’라는 개념부터도 이 단편에서는 모호하게 나올 뿐이다) 월장석이 어떤 돌인지도 등장 후에야 간략하게 설명될 뿐이다. 전작인 {에소릴의 드래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리둥절해할만한 대목이 여럿 된다는 이야기다. 여러 권으로 된 장편 소설 중 가운데 권이 그러하듯이.

 그 점에서 본다면 {샹파이의 광부들}은 {에소릴의 드래곤}과 함께 수록되는 것이 맞고, 정 한 편만 골라야 한다면 {에소릴의 드래곤}이 수록되는게 맞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의 모든 독자가 이영도의 팬일 수는 없고, {에소릴의 드래곤}을 먼저 읽고 오라고 요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에서는 {에소릴의 드래곤}이 게재된 곳을 알려줬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지만, 인터넷 게시판 상에서 아예 링크를 알려줘도 읽지 않는 독자도 수두룩한 판국에 과연 그것이 어느 정도의 효과를 지닐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작품 외적인 사설은 그만두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정말로 이영도다운 소설이라 할 만 하다. 이영도 소설의 단점을 착실하게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시 기왕에 발표된 작품에서 이영도는 ‘반전’에 대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집착을 보여왔다. 과거 복거일이 ‘벽장 위의 총’ 운운하는 체호프의 발언을 인용해가며 [드래곤 라자](이영도, 황금가지, 1998년 5월)에 가했던 비판이 대체 어느 정도나 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작품으로 올수록 반전이나 복선을 많이 집어넣으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반전’을 작가가 거듭해서 사용하면서 점점 그 반전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령 ‘A와 B가 특정 사안을 놓고 싸우지만 사실은 둘 다 틀렸고 C가 내놓는 해답이 정답이다.’ 식의 패턴 말이다. 이 패턴에서 C는 대개 자신의 등장이 왜 반전인지 설명해주는 해설역이기 마련인데, 이 같은 시도는 많은 지면이 허용되는 장편에서라면 모를까 단편에서는 상당히 민망한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과거 나왔던 단편 중에서는 {봄이 왔다}가 가장 그러했지만, {샹파이의 광부들}에서 보여주는 수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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