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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자들의 탄생: 소외된 장르의 저항

 크게 잡아 장르 문학이라고 하지만, 이 작품은 특정 장르로 분류하기 애매한 소설이다. 판타지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며 SF라고 하기엔 과학적 유희가 부족하다. 무시무시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오는 스릴러도 아니고, 치밀하게 단서를 쫓아가는 추리물도 아니다. 오히려 18,9세기 유럽의 모험 소설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사회 비판적인 면까지 더하면 꼭 걸리버 여행기의 현대 한국판이다. 유머와 풍자 대신 액션과 하위 문화에 대한 향수가 들어간.
 물론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까지 고리타분한 한두 세기 전의 고전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아니다. 신간 소설답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호흡도 내용도 주제나 구성도 모두 극히 현대적이다. 인물과 이야기 전개, 잡다한 지식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책 전반에 걸쳐 결코 적지 않게 녹아 들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쉽게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굵직굵직한 중요 장면만을 빠르게 짚어가는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잘 편집된 영화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소설은 소박한 서민과 날카로운 지식인, 소수 문화 향유자와 평범한 대중 모두를 위한 친절한 책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군사 오타쿠들을 위한 코드가 곳곳에 숨어있고, 이런 하위 문화에 무지한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적절히 풀어주기까지 한다. 작품 전체에 걸쳐 이런 하위 문화 향유자와 일반 대중 양쪽을 잡으려 노력한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데, 간혹 배분에 실패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덕분에 해당 분야에 대한 애호가는 자기 관심 분야에 대한 반가움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으며, 일반 대중은 별다른 노력이나 선행 학습 없이도 이 책이 가지는 전문성을 놓치지 않으며 따라갈 수 있다.

 그럼 이제 대중 소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재미라는 면에서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장르가 모호한 이 작품은, 굳이 따지자면 스티븐 킹 같은 스릴러 류에 가깝다. 하지만 거기에 군사 소설 같은 전문 지식이 듬뿍 포함되며, 액션과 활극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급박하지만 딱딱 끊어지는 사건 전개에서는 뭐 하나 뺄 것이 없으며, 충분한 장면 묘사로 상황에 대한 이해도 잘 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아주 영화적이며, 영상에 익숙한 세대에게 잘 받아들여질 수 있다.
 주요 등장인물이 남자인 것과, 주요 장면들이 폭력적이고 잔인한 것, 거기에 주요 여성 캐릭터들이 상당히 미화되어 있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 작품은 분명히 남성적이고, 남성 위주로 쓰여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성기의 미국 서부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남성적이라는 것은 취향과 특성의 문제일 뿐 성 차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므로, 여성 독자가 읽기에도 별 불편함이나 거부감은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군대 다녀온 땀내나는 남자들이 느끼는 만큼의 재미를 느끼기엔 쉽지 않겠지만, 장르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 즐겁게 몰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스티븐 킹이나 마이클 크라이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고서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 법.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와 박력 넘치는 액션을 한정된 분량에 담으려 하다 보니, 아무래도 섬세한 인물 묘사는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 밖에 없다. 덕분에 감정 이입할만한 인물이 적으며, 게다가 주요 등장인물들이 너무 극단적인 인물상을 가지고 있어서 더 그렇다. 사회성 빵점인 중증 오타쿠이면서도 정보 브로커로서 유능하고 현실 파악이 빠른 오기호나, 즉흥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주변 분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이 페이스인 신한이 대표적이다. 둘 다 전혀 접점 없는 두 속성이 카드의 앞뒷면처럼 맞붙어있는 상당히 만화적인 인물들인데, 등장인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이런 성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충분한 설명이 있었다면 이런 극단적인 인물도 입체적인 성격으로 살아났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지면이 한정되어 있고 풀어나갈 이야기는 너무 많았다. 그나마 공감이 가는 캐릭터를 들자면, 주인공 없는 이 소설에서 비교적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이자 사건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직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의 평면성은 이 작품이 추구하는 재미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한다면 큰 흠이 되진 못한다. 이런 계열에서 인물의 현실성을 따지는 것은, 마치 로맨스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의 직장 근무 태도에 대해 따지는 것이나 같다. 물론 뭐든 완벽하면 좋겠지만, 남성 지향적 장르 소설의 데뷔 작품에서 그런 완전무결함까지 바란다는 것이 오히려 욕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단점 외에도, 평범한 서민들이 한번 읽고 잊어버릴 통속적인 대중 소설이 되기엔 껄끄러운 걸림돌이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자 존재 가치인 동시에 반대로 명백한 한계와 단점이기도 한 현실 비판이 그것이다.
 이 책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 침투하기 어렵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작가가 매몰차게 던지는 메시지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기엔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축화된 삶이 너무 각박하고, 상처 입은 감정을 둘러싼 교양은 얄팍하다.
 그렇다 대한민국 국민.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우리나라 장르 문학계는 외국에서 유입된 장르 문학을 한국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한국적이라고 할만한 수준 높은 작품들도 여럿 탄생했지만, 이 책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아주 한국적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 중에서도 젊은이들의 거리 홍대 주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사람은 대인기피성이 있는 중증 오타쿠와 그의 몇몇 식객들. 인물 사건 배경이 모두 한국적이니 당연히 한국적인 소설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특히 한국적일 수 있는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위협을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드러냈다는 것에 있다. 작품 초반부터 호되게 몰아치는 거대 정부와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은,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러 감에 따라 점점 고조되고, 급기야 현대 금융 자본주의의 약점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듯 까발려 버린다. 이런 거침 없는 현실 비판은 그것이 진짜 현실이기 때문에 더욱 껄끄럽다.
 나라가 하는 일은 모두 올바르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훌륭한 모범 시민이 되는 거라고 교육받고 자란 우리네 평범한 서민들에겐, 대통령님이 다 잘해주실 거라고 믿고 자신이 가진 권리를 온건히 내다 바치는 사람들에겐 이런 현실 고발은 차라리 눈감고 싶은 불편한 진실 외에 다름 아니다.
 이런 현실 비판은, 작가 자신의 이상향을 작품에 투영시켰던 SF에서는 우회적인 모습으로나마 드물지 않게 나타나지만, 스릴러에 가까운 이런 작품에서는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이렇게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체제 비판을 하는 작품은 전무에 가깝다.
 이 쓴 소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금융 자본주의는 무조건 옳은 거라고 가르치는 맹목적인 학교 교육과 경제적 성공이 인생의 성공 그 자체라고 주입시키는 사회적 교훈에 끊임없이 압박 받으며 자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여린 속살을 헤집는 주사바늘 같은 불쾌감을 준다. 게다가 비판만 하면서 대안은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함은 더욱 커진다. ‘세상이 잘못된 것은 이제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물음이 곧 답이다. 주어진 정답을 맹신하지 말라, 가르쳐주는 것만 받아먹으며 교양을 쌓은 척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스스로 삶과 세계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찾으라는 것이 바로 이 책이, 국내 유일의 사회 비판 스릴러 작가 고경오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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