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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U, ROBOT

2009.05.29 22:4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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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국내 작가 10인의 SF단편을 모은 작품집으로,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SF단편선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수록된 작품들은 다른 경로를 통하여 발표된 것을 다시 수록한 경우가 많은 관계로, 특별한 주제의 일관성이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작품별로 간단한 감상 포인트를 짚어보고자 한다.

   U, Robot | 정희자
 양자 컴퓨터의 발달로 탄생한 초소형 인공두뇌와 인간의 클론 육체를 결합하여 만들어진 제2세대 로봇의 등장과 그들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그러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로봇들 자신이 감행하는 최후의 선택을 그린 작품. 기계로 육체를 보완한 인간이 아니라 정반대로 생물의 육체를 지닌 로봇이라는 역전의 발상은 독특하지만 로봇 반대파가 보여주는 편집증에 가까운 거부반응이나 천사에 가까운 순진함과 완전무결한 지성을 과시하는 로봇의 모습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양육자 역할을 맡은 인간과 로봇 사이의 기묘한 유대를 보노라면 과연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인간과 그 창조물의 관계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박시은 특급 | 곽재식
 천문연구 중에 뜻하지 않게 외계인의 전파를 잡아내어 일약 스타가 된 주인공. 그러나 과학자 특유의 집착과 협소한 인간관계 탓에 주변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데… 과학적인 발견이나 특이한 설정보다는 질투와 오해 때문에 대단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변인들과 사소한 문제로 인해 부조리한 고독에 빠져드는 주인공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인간 드라마. 외계와의 교신은 그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위에서 말한 주인공의 고립을 극적으로 해소하고 그와 세상의 화해를 촉구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 | 박성환
 머나먼 행성으로 파견된 심우주 탐사선이 사고를 당하여, 그 우주선 안에서 수정란 상태로 동면 중이던 개척민 후보들 중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 고장을 일으킨 우주선의 인공지능은 살아남은 아기를 친자식처럼 정성들여 키우지만, 충분히 자아를 확립할 정도로 자라난 아이는 매사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인공지능에게 염증을 느끼고 탈출 계획을 세운다. 본문 중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컨셉 자체는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아서 C. 클라크, 황금가지, 2004년 4월)에서 묘사된 HAL-2000 사건을 변주한 것이지만 한국 어머니들 특유의 치맛바람과 연결지어 컴퓨터 엄마와 인간 아들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애증관계를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비뚤어진 우리의 교육현실을 비꼰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시스템에 의해 양육되고 통제당하는 개인이 천신만고 끝에 자유를 회복하는 보편적인 성장 이야기로 읽어도 문제는 없다.

   파라다이스 | 박애진
 대부분의 인류가 달로 이주하고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미래. 이제 지구 위에는 환경보존과 유물 발굴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업기계들과 그 안에서 조종을 담당하는 소수의 인간들만이 있을 뿐이다. 달에서 조종사로 일하던 주인공은 실연의 고통을 잊고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지구로 온다. 황폐한 지구의 현실과 과거의 달콤 쌉싸름한 연애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주인공의 보일 듯 말 듯하게 요동치는 감정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외부 사건보다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점에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 김주영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이나 반려동물에게 의지한다. 정교한 안드로이드가 개발되어 이러한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면 과연 인간은 진실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안드로이드 제조 회사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의 눈을 통하여 이러한 설정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볍게 짚어보고 있다. 안드로이드를 지나치게 사람처럼 생각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처음에는 사람처럼 여기다가도 어쩔 수 없이 기계임을 의식하여 정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대화 도중에 갑자기 모든 흐름이 끊기고 침묵만이 지배하는 순간이 오면, 인간은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근원적인 고독을 실감하게 된다. 이상적인 파트너인 안드로이드를 곁에 둔다 해도, 그런 순간을 피할 수 있을까? 기술문명이 해결하지 못하는 미묘한 문제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

   우주류 | 정소연
 어린 시절부터 우주에 대한 갈망을 키워오던 주인공이 인생의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꿈을 향한 발걸음을 조금씩 내딛는 과정을 바둑에 비유하여 차분하게 그려낸 단편. 원래는 만화 스토리로 기획된 작품으로,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만화부문 가작을 수상했다. 작화는 현재 모 게임 사이트에서 웹툰 작가로 맹활약중인 원사운드님이 맡았다. 당장의 괴로움과 절망을 딛고 훨씬 장기적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가꾸어가는 주인공의 여정과, 그런 주인공을 결코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응원하는 어머니의 지혜가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무기여 잘 가거라 | 임태운
 우주 저편의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행성에서 두 종족의 처절한 교전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전황을 좌우할 만한 신병기의 설계도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한편 지구에서는 한심한 고교생의 표본으로서 별 볼일 없는 청춘을 보내던 주인공이 운명의 여인들을 차례로 만나가며 카사노바도 부럽지 않을 편력을 벌이게 된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이 대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 것일까? 평범한 남자의 성적(性的) 판타지와 기상천외한 SF설정이 결합하여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유머러스한 이야기.

   미래관리부 | 듀나
 2010년대의 근미래. 자기들이 미래에서 온 인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수수께끼의 존재들이 제공한 기술과 정보 덕분에 세상은 보다 윤택해진다. 하지만 후손들의 정체가 과연 그들의 말대로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그들이 진짜 미래인이라면 그들의 개입은 역사를 수정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작가는 이런 치명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도 주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가는 세계와 그 속에서 행복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만을 보여줄 따름이다. 냉랭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시니컬한 현실의식, 여성들 사이의 야릇한 감정, 미래의 운명보다 당장의 욕구에 충실한 태도 등등 이 작가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들도 여전하다.

   다섯 번째 감각 | 김보영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청각을 잃어버린 인류. 그들은 점차 시각 위주의 문화에 적응하면서 ‘소리’를 하나의 전설이나 신화로 취급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청각을 회복한 인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사회의 압박을 무릅쓰고 ‘소리’의 위대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청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지배층의 눈에는 그들이 단순한 이단자로 비칠 뿐이다. 그러한 내막을 전혀 모른 채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인공은 의문의 사고로 언니를 잃은 후 점차 세계의 진실에 눈뜨게, 아니, 귀 기울이게 되는데…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청각을 소재로 하여 놀랄 만한 역전의 발상을 펼쳐 보이는 걸작으로, 어떤 첨단기술도 신기한 가제트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수록 단편들 중에서는 ‘사고실험’이라는 SF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다. 100쪽에 가까운 분량을 생각하면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까운데, 그만큼 내용도 더 알차고 풍부하게 되어 있다.

   매뉴얼 | 배명훈
 철모르는 어린 아이가 휴대전화 매뉴얼을 집어 들고 자기 멋대로 읽기 시작한다. 그 아이의 손 안에서 매뉴얼은 원래 기록된 내용과는 상관없이 무시무시한 예언서로 돌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아무 의미 없는 애들 장난일까? 텍스트와 인식의 미묘한 어긋남, 다차원 세계의 투쟁, 이모와 조카의 사랑 등등 흥미로운 소재로 가득하지만 뭔가 결정적인 이벤트가 일어나려는 순간 이야기가 딱 끝나버리기 때문에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독립된 단편이라기보다는 뭔가 더 거대한 이야기의 프롤로그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책의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보니 그러한 당돌함이 더욱 더 두드러진다. (따지고 보면 이건 작가의 잘못이 아니라 편집부의 책임이겠지만) 언젠가 좀 더 납득이 가는 형태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스토리이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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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 09.07.02 16:37 댓글 수정 삭제
    이제까지 읽어왔던 국내SF집 중에서 가장 괜찮았던 책이 아닌가 싶네요.
    예전처럼 한두작품의 지뢰밭때문에 평균을 깎아먹던 현상도 없어졌고, 전체적으로 골고루 평균치 이상의 역할을 해준 듯.
    다만 처음 세작품은 나란히 맘에 들었으나 끝에 세작품이 나란히 별로여서 제 개인적인 평가는 '중간은 간다'입니다.

    표제작인 '유,로봇'은 로봇과 인간간의 갈등이나 3원칙, 가상세계. 이런 설정들이 전부 진부하긴 했지만 그런걸 잘 버무려서 (약간의) 감동까지 주는 작품으로 탄생했고.
    제일 재밌게 봤던건 역시 '박시은특급'.
    예쁜 여자연예인에 대한 곽재식님의 애정은 여전히 건재(?)하네요. 연구원의 애환과 직장 생활내에서의 잔인한 인간관계가 잘 묘사되어서 읽는 내내 분통이 터졌었는데.
    맨 마지막의 통쾌한 결말에 박수가 나왔습니다.
    얄미운 남조연이나 여자주인공은 혹시나 모델이 있는건 아닌지 궁금하네요.
    다만 자연에 대한 묘사가 뜬금없고, 따로 노는게 좀 걸렸습니다.

    '잘가거라..'는 짧은데도 인상깊게 남는 단편이었습니다.
    오류를 일으킨 메인컴퓨터의 삐뚤어진 모정이라니. 맨마지막 반전이 밝혀졌을 땐 서글픈 느낌까지 들었네요.
    '파라다이스'는 그동안 봐왔던 박애진님 작품과는 다르게 낭만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첨엔 남-여의 관계인줄 알았다가, 여-여로 보고 다시 읽고, 결국 여-남의 관계란걸 알게되기까지 굉장히 혼란이 많아서 몇번이나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이입이 되지 않아서 작품집에 있던 단편들 중에서 제일 중간에 딴짓을 많이했습니다. 저번에 로봇집사의 눈으로 바라본 여성의 고독에 대한 작품도 읽어봤는데 박애진님이 묘사하는 연애에 실패한 여성들의 외로움이나 고독은 잘 맘에 와닿질 않네요.

    '천사가..'도 괜찮은 작품이었고, 마지막 즈음에 밝혀지는 사실에 깜짝놀랐습니다.
    사실 보면 흔한 반전이긴 하지만 읽는내내 눈치를 못챘다고나 할까요.
    그치만 인간대용으로 판매되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봐서 점수가 좀 깎이네요.
    '우주류'는 만화로 먼저보는 바람에 내용을 다 알아버려 감동이 쪼끔 덜했습니다.
    정소연님은 번역가로 자주 뵙지만 단편은 제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번 작품은 정소연님 단편중에서도 또 이 책을 통틀어서도 가장 좋네요.

    '무기여..'는 남자들의 여성판타지가 집합된 단편이라고 느꼈습니다.
    SF설정과 결합된 성적인 농담도 그렇고 맨마지막에 애틋하게 고백하는 주인공의 순애보도 그렇고.
    솔직히 마지막 대사의 그 낯간지러움에 실소가 나왔네요.
    '미래관리부'는 여전히 듀나님 작품에서 보이는, 성별이 애매한 인물들간의 애정관계가 나옵니다. 이름도 중성적이고 외모에 대한 묘사도 없어서 동성애/이성애인지 감이 잘 안잡히네요. 별로 중요한 비중은 아니지만 이런 인간관계가 듀나님 작품에선 자주 보여요. 옛날에 비해서 날카로움이 많이 무뎌진 느낌입니다. 요즘은 주로 무난무난한 단편을 쓰시는 듯?

    '다섯번째 감각'은 제일 분량이 많았지만 술술 넘어가는 중편이었습니다.
    미래의 마을에 대한 묘사가 이토준지의 한 단편을 연상시키던데.
    두 남녀 인물간의 관계도 일본애니에서 많이 보던 패턴이었습니다. 주인공의 특수한 능력을 각성시키려는 인물, 그걸 거부하며 주위에 민폐만 끼치는 소심한 주인공.
    인류가 잃어버린 청각이 초능력이나 사이비종교라는 개념으로 등장하는 건 멋진 아이디어였지만 갈수록 남녀간의 애정문제에 끼어든 자그만 에피소드로 축소되는 느낌이라 실망이 컸습니다. 여자주인공의 행동도 짜증났구요.

    '매뉴얼'은 다 읽고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갔습니다.
    머 좀 읽을려니깐 아무 설명도 없이 뚝 끝나버렸달까.

    국내SF단편집은 나오면서 점점 질이 좋아지는 걸 느낍니다.
    특히 몇몇 분들은 꾸준히 높은 수준의 단편을 내주시니 그분들 때문에 찾아본달까요.
  • No Profile
    기린 09.07.02 16:39 댓글 수정 삭제
    아휴...쓰고나니 너무 댓글이 길어서 민망하네요 -ㅅ-
    참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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