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소설 보이 A

2009.09.26 00:2909.26





lunabell.netlunabell@hanmail.net
 (이 리뷰에는 스포일링이 있음을 밝히지만, 사실 스포일링이 별 의미가 없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끝이 예정되어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정해져있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자유주의가 선사하는 우연과 기회에 홀려서, 모든 일이 예측불허인 동시에 자신의 의지나 결의로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라고 쉽게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정해져 있는 그 무엇을 동양철학에서는 '이치'라고 부르고, 소설이론에서는 '원형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철학이 통하는 현실 속이든 소설이론이 통하는 픽션이든 간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의 첫장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잭'의 삶이 끝장이 나버리고야 말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그저 구성과 내용이 얽혀드는 소설의 법칙에 훈련된 노련한 독자이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원래부터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비밀은 탄로날 수밖에 없다. 잭은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벼운 반전이나 알면서도 속아넘어가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사치스러운 희망 따위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고, 내내 무거운 심정으로 380페이지를 쫓기듯이 넘겨야만 하게 된다. 잭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당신은 잭과 똑같은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당신은 잭과는 달리 언제든지 책을 놓으면 벗어날 수 있는 관조를 향락하고 있을 뿐이다. 이 거리감 자체가 다시 당신에게 죄책감이 들게 만든다. 결국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잭에게 공모하게 만들어버린다.



▲ [엘리펀트]의 한 장면.

 이렇게 하도록 독자를 잡고 놓지 않을 만한 힘을 발휘한다는 데서 최소한 이 작품은 잘 쓰인 작품이다. 범죄. 아동. 죄. 용서. 사법 절차. 사회. 국민성. 언론. 하나만으로도 이미 간단히 의견을 내놓기 쉽지 않은 담론이 이렇듯 무수히 와르르 등장하는 가운데서도 소설은 그 어느쪽으로도 목소리를 치우치지 않고, 잭의 고통 자체를 보여주는 데에만 충실하고자 했다. 나는 소년A가 소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동기와 배경이 설명되리라고 기대했다. 한 소년이 잔혹한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를 내몰아간 어떤 것이, 관계의 비극이든 부모의 불화든 사회든 제도든 그 어떤 얼굴로든지 간에 끔찍한 그대로 그려지기를 기대했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거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같은 부조리극이 아니고서야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나단 트리겔은 내가 기대한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섣부른 동정이나 이해를 베풀어 독자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았다. 작가는 한 소년 ――― 청년이 처해 있는 그 막막한 고독을 섬세하게 재현해줄 뿐이다. 실제로 벼랑끝까지 몰려본 사람이 품을 만한 생각. 정말이지 이제는 정말로, 죽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해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 모든 세상이 자신을 적대하고 증오하는 곳에서 발걸음이 향하는 방식. 완전히 철저히 혼자가 되었고 모든 것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 차오르는 담담한 진짜 절망. 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느리지만 확실히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의 공포감.

 잭은 다시 일어서는 일에 익숙했다. 일어서라, 올라서라, 입을 다물어라,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는 순간 침대보로 만든 줄에 목을 매달고 죽어 있거나 손목을 긋고 피 흘리며 쓰러져 있게 될 것이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굴복하지 마라.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힘이 중요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선택을 하도록 하니까. 계속해서 결정을 하게 한다. 스스로의 결정을 말이다. 때때로 잭은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를 지금까지 살아 있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 p. 62.

 허영이나 가식이 없는, 좋은 문장이다. 그리고 이 좋은 문장의 미덕은 마지막 부분으로 치달을수록 더욱 빛난다. 잭이 기차에 몸을 싣고 그 바다로 가게 되기까지 말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종이 한 장 차이의 긴장이 교차되고, 마침내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는 그 바다와 배가 발 아래 아득하게 펼쳐진다. 그 전까지는 "이 정도면 괜찮네." 정도였다면,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작가의 겸허함과 꿋꿋함이 꽤 특출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양날의 칼이다. 미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결함으로도 작용한다는 말이다. 참견하지 않고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그러려면 결국은 운신의 폭이 줄어들고 주인공이 처할 수 있는 위기나 선택의 여지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반성이란 주인공이나 작가의 태도와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순전히, 주인공과 작가의 앞에 내던져진 사건과 거기에서 이어지는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잭에게는(새로운 삶을 선택한 시간 동안) 이런 사건이나 결단이 전혀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진짜를 경험하지 않는다. 진짜 고통, 진짜 죽음의 위기, 진짜 절망, 진짜 고독을 경험해보지 않고, 나아가 진짜 죄를 저질러보지 않는다. 천국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보이A는 우리와 달리 진짜 죄를 지었고, 진짜 괴로움을 겪고, 바야흐로 독자에게 용서를 받거나 깨끗하게 멸망할 기회를 얻는다. 이 기회는 진짜 기회다.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 맛보기는커녕 구경도 하기 힘든 진짜 가능성.
 물론 이 귀중한 기회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원죄의 죄질이 무겁고 끔찍하면 할수록, 삶의 길은 더욱 가파르고 어려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칫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다시 죄로 돌아가거나 병신이 되거나 이도저도 아닌 중단에 불과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 위험천만한 길이어야만 한다. 그토록 힘겹고 위태로운 길을 건너가기 때문에야만 비로소 용서든 파국이든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잭이라는 이름을 고른 보이A에게 펼쳐진 길은 그리 힙겹지도, 위태로워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꽤 수월해보인다.
 수월하다는 표현에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물론, 주인공이 상당히 힘들어하긴 한다. 하지만 그 힘겨움은 다만 예전에 저지른 죄에서 기인한 공포심일 뿐이다. 다가올 무엇에 대한 두려움은 실질적인 유혹이나 위협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선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맞설 필요가 없는 가상의 적 말고, 그가 용서로 다다르는 길 한가운데에서 '실제로' 그의 앞을 막아서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주인공의 적antagonist 장치가 견고해야만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기서 그 역할을 하는 제드라는 장치는 그다지 효율적으로 쓰이지 못한다. 제드에게는 물론 당위성이 있지만, 잭은 제드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했을 뿐 아무것도 맞바꾼 일이 없다. 테리와 잭이 제도에서 제공한 공식적인 관계로 이어져있는만큼 테리와의 관계를 잭이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수렴한다면, 결국 제드가 잭의 인생을 망치려고 드는 것 역시 잭이 새로운 인생 속에서 만든 결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원죄 자체 때문일 뿐이다.



▲ 존 크로울리John Crowley 감독이 영화화한 [보이 A](Boy A, 2007)의 한 장면.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원죄에서 도망치다가 결국 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도망하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 소설은 비극이 아니다. 이러한 특성이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웰메이드 비극을 기대한다면 이 소설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편견과 폭력은 일방적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독자는 그 편견에서 자신만은 제외될 수 있다고 믿거나 혹은 그 편견 속에서 자신도 가해자라고 자학하는 식으로 응수하게 된다. 그리하여 독자는 이 이야기가 픽션이라고 생각하고 어느정도는 낭만적인 감수성으로 주인공의 고통을 다룰 수 있게 되어버린다. 마지막 1분간의 자유낙하가 그토록 아름다워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보이A의 죄는 진짜였고, 용서도 진짜지만, 그 사이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참회의 과정이 결락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A는 나같은 독자에게 다소 몹쓸 생각을 하게 만들어버린다. 그가 어떤 지점에서는 무척 부러워지는 것이다.


댓글 0
Prev 1 ...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