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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랩 가사로 고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지만 캐시디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중략) 그러나 리의 개작은 캐시디의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다. 그의 각색에서 큰아버지의 언어는 대부분 살아남았다. 하지만 리는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을 고치고 대사의 의미를 바꾸었다. (중략) 리의 연극에서 큰아버지의 언어는 레고 블록에 불과했다.
―――듀나, {히즈 올 댓}

 올해는 영국의 제인 오스틴이 사망한 지 200주년이 된 해였다. 이에 미국에서 이를 기념하여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을 패러디한 소설이 출간되었는데, 그 패러디 방식이라는게 재미있다. 원전인 [오만과 편견]의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되 거기에 살짝 살짝 살을 붙여서 전혀 다른 장르의 소설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무려 좀비물로.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과연 나올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뻔뻔하면서도 대담한 기획의 산물이라 하겠는데, 이 책을 기획한 출판사에서는 아예 제인 오스틴을 이 소설의 공저자로 올리기까지 했다. 무려 사후 200년만에 신작(?)을 발표한 작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기획의 참신함이 그 결과물의 완성도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 법이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 널리 알려진 고전을 각색했다는 작품치고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소설 또한 그 다수의 예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 하다.


 좋은 각색물을 위한 조건

 좋은 각색물을 만들기 위한 조건이야 여러 가지지만, 자고로 원작에 대한 충실한 이해 없이 만들어진 작품은 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법이다. 원작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할 때야 말할 것도 없고, 아예 파격적으로 재해석을 가한 작품을 만들려 한다 해도 그게 기본이다. 당연한 일이다. 원작과의 아무런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작품이라면 굳이 각색이나 패러디의 형태로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원서 표지. 하드커버(왼쪽), 그리고 하드커버 디럭스 에디션.


 오만과 편견 vs 좀비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서 [오만과 편견]은 어느 정도나 살아남았을까? [오만과 편견]의 문장을 조금씩 수정하여 좀비물로 바꾼다는 게 이 소설의 당초 컨셉이고보니, 일단 제인 오스틴의 문장은 그럭저럭 많이들 살아남았다. (물론 번역서만으로는 이러한 작업이 얼마나 성실하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기야 하다.) 거기에 ‘공동 저자’인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가 원작의 대사를 슬쩍 틀어놓거나 새로운 설정, 장면 등을 삽이한게 이 소설의 기본 구조다.

 문제는 새로 덧붙여진 요소들이 원작과 그렇게 잘 어울린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첨가되거나 바뀐 부분으로 인해 소설의 의미 자체가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원작에서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당대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이질적이고 급진적인 인물들이었다. 작중 등장인물 거의 대부분이 결혼 상대를 구함에 있어 재산이나 계급, 아니면 기껏해야 외모 정도나 보는 속물들인데 반해, 이 두 사람이 사람을 보는 기준은 지성과 품격이다. (이 소설에서 독서를 진정으로 즐기는 인물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정도라는 점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이 대비는 당대 사교계의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두 주인공 커플이 겪는 로맨스의 진정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자네가 예로 들었던 정도를 가지고 교양을 갖추었다고들 한다면,” 다아시가 말했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 손지갑이나 짜고 수를 놓는 것 말고 다른 아무 교양을 갖춘 게 없는 많은 여성들에게도 보통 교양이 있다고들 하니까. 그렇지만 난 아가씨들 전駙?대한 자네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아. 내가 아는 아가씨들을 다 따져봐도, 그중에 진정으로 교양을 갖춘 사람은 여섯 명도 안 되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빙리 양이 말했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신은 교양 있는 여성이라는 말에 상당히 많은 것을 포함시키는군요.”
 “맞습니다. 물론 상당히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지요.”
 “물론 그래야죠.” 그의 충실한 교수가 외쳤다. “진정으로 교양 있는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런 말을 들으려면 적어도 음악, 노래, 그림, 춤, 그리고 몇 가지 외국어를 완벽하게 알아야 해요 그리고 이 모든 것 이외에도 걸음걸이의 맵시, 목소리의 높낮이, 말하는 태도와 표현에 품위랄까, 그런 게 있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교양을 반밖에 못 갖춘 거죠.”
 “그 모든 것을 갖춰야 하고,” 다아시가 덧붙였다. “거기다 또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지성을 계발함으로써 더 실속 있는 내면을 갖춰야죠.”
 “그 말씀을 듣고 보니 교양 있는 여성을 여섯 명밖에 모르신다는 게 놀랍지 않네요. 오히려 그런 여성을 한 사람이라도 알고 계신다는 게 신기한데요.”
 “이 모든 요건을 갖춘 여성의 존재 가능성을 의심할 만큼 그렇게 동료 여성에 대해 가혹하신가요?”
 “저로서는 한 번도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는데요. 적어도 그런 능력에다 그런 취향, 그런 학구열에 그런 품위까지 전부 갖춘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민음사 57~58p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서는 여기에 ‘무술’이라는 요소가 도입된다.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재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교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아가씨가 좀비를 얼마나 잘 썰어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이 분야(?)에서도 단연 최고의 면모를 나타내는 인물들로 설정되었다.

 “자네가 예로 들었던 정도를 가지고 교양을 갖추었다고들 한다면,” 다아시가 말했다.
 다아시가 입을 열었다.
 “물론 손지갑을 짜거나 수를 놓는 것 말고는 아무 교양도 갖추지 못한 아가씨들에게도 그런 표현을 쓰곤 하지. 하지만 내 동생 조지애나는 분명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 그 애는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재주뿐만 아니라 전투 기술까지 완벽하게 익혔으니까. 내가 아는 아가씨들을 통틀어 그 정도 교양?갖춘 여자는 여섯 명이 넘지 않는다네.”
 빙리 양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그래요.”
 “다아시 씨. 당신은 교양 있는 여성이라는 말 속에 상당히 많은 것을 포함시키시는군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여성이라면 적어도 음악과 노래, 그림, 춤 , 언어 몇 가지를 완벽하게 할 줄 알아야죠. 또한 교토의 무술 고수들의 전투 기술과 현대 전술, 유럽식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만 하고요. 이외에도 몸짓, 걸음걸이, 목소리의 어조, 말하는 태도와 표현, 어휘 등에 뛰어난 면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교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죠. 교양 있는 여성은 이 모든 자질을 반드시 갖추고 거기에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정신을 함양하여 좀 더 본질적인 면까지 갖춰야 하는 법입니다.”
 (중략)
 “전 그런 여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 경험상 여자는 대단히 훈련이 잘 되었거나 대단히 세련되었거나 둘 중 하나예요. 이런 시절에는 두 가지를 겸비하는 사치를 누릴 만한 여유가 없죠. 제 언니와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저희 아버지께서는 책이나 음악보다 그 몹쓸 병에 걸린 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시죠.”
―――제인 오스틴/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해냄 40~41p (강조는 인용자)

 이 장면만 놓고 본다면 캐릭터들의 무술 실력은 일종의 미덕으로 설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본다면 엘리자베스나 다아시가 이 방면의 최고 실력자로 설정되고, 소설 내에서 (좀비와의) 무수한 싸움을 벌이는 것에도 나름 이유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술 실력을 지닌 게 비단 이 두 사람만은 아니다. 원작에서는 시종 속물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엘리자베스나 제인을 돋보이는 역할을 하는 리디아, 메리, 키티도 이 소설에서는 무술 훈련을 받은 엄연한 좀비사냥꾼이며, 속물주의의 결정체라 할만한 캐서린 영부인 역시 무술의 고수로 나오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설정이 가미되면서 두 주인공은 물론 그 외 여러 사람들의 성격도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가령 엘리자베스는 원작에서 발랄하고 재치 있는, 세련된 화법으로 상대를 넉다운시킬 줄 아는 지적인 여성이지만 개작된 소설에서는 어떻게 하면 마음에 안 드는 상대의 목을 썰어버릴까 고민하는 엽기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설정이 바뀌는 경우조차 있는데, 다아시의 여동생인 조지애나가 그런 경우다.

 하지만 내 동생 조지애나는 분명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 그 애는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재주뿐만 아니라 전투 기술까지 완벽하게 익혔으니까. (40p)

 “다아시 양도 오빠만큼 인물이 좋은가요?”
 “아, 그럼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죠. 무술 실력도 뛰어나시고요! 열한 살 생신이 지나고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벌써 첫 번째 좀비의 목을 베었답니다! 물론 다아시 씨가 그 사악한 놈을 나무에 사슬로 묶어놓기는 했지만, 아주 멋진 솜씨였죠. 다음 방에는 아가씨를 위해 방금 들여온 새 카타나가 있답니다. 주인 나리의 선물이지요. 내일 주인 나리와 함께 아가씨도 오시거든요.” (252p)

 다아시 양은 키가 크고 몸집도 엘리자베스보다 컸다. 열여섯이 채 안되었지만 몸은 다 자랐고 여자다운 고운 모습이었다. 몸의 동작에는 타고난 우아함 같은 것이 있었다. 살인 기술에 대해서는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은 게 분명했지만, 대부분의 또래 아가씨들처럼 굼뜨고 산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266~267p)

 ‘좀비’나 ‘닌자’처럼 새로 곁들여진 설정들이 원작과 그리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는 더 있다. 소설에서 베넷 가문의 다섯 자매는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웠다고 하며, 위컴이라는 인물은 교토에서 공부를 했다. 캐서린 영부인의 경우에는 본인도 일본 무술의 고수이지만 수하에 일본인 닌자들을 여럿 거느리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설정들이 [오만과 편견]의 시대인 18세기 초반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오만과 편견]이 발표된 1813년 당시 청나라에서는 서양 국가에 대해 광동성의 광저우 지역만을 개방했을 뿐이며 (소림사는 하남성 소재.) 일본에서도 사실상 쇄국에 가까운 대외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서양인 여성에게 무술을 가르쳐주거나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어차피 좀비니 닌자니 하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쓰기로 한 바에야 이런 ‘고증’을 문제 삼는 건 쓸데없는 트집일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걸 뻔히 알면서도 독자들이 모른척 속아주는 경우야 오락물에서는 드물잖게 벌어지는 일이니까. 하지만 기왕에 패러디물을 쓰기로 작정한 바에야 이러한 세세한 설정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것은 각색자의 의무에 가깝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막나가는 오락물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대체 왜 [오만과 편견]이라는 ‘공동 저작’이 필요했단 말인가?


 정말로 원작이 필요했을까?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 추가된 것은 좀비와 닌자, 취미가 좀비 목 따기인 처자들만이 아니다. 책 말미에 보면 [오만과 편견]에는 없던, 이른바 ‘독자분들을 위한 독서 가이드’라는게 붙어있다. 고전의 아동/수험생용 축약본을 떠올리게도 하는 탐탁찮은 부분인데, 이중 마지막에 실린 질문은 조금 재미있다.

 일부 학자들은 뻔뻔하게도 판매 부수를 올리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좀비란 요소를 이 소설에 집어넣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좀비가 제인 오스틴의 줄거리 구성과 사회적 논평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좀비들의 격렬한 폭력 장면이 없다면 이 소설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강조는 인용자)

 사실 그 의도가 꽤 뻔한 질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질문에서 유도하는 바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 좀비라는 요소가 빠진다 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오만과 편견]에서 좀비물의 요소를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위의 질문은 역으로 던져져야 한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서 [오만과 편견]이 빠진다면 어떨까.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의 독자들이 이 소설이 좀비 살육 장면 따위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장면들의 주인공이 엘리자베스 베넷이고 피츠윌리엄 다아시이기 때문이지, 그런 장면들에서 참신함이나 파격적인 재미를 느껴서는 결코 아니다. 사실 그런 장면들 자체야 할리우드 B급 영화계에서만 해도 숱하게 양산되어오지 않았던가. (바로 그 점에서, 출간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은 이 소설이 벌써부터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될 조짐을 보인다는 건 유념할만한 대목이다.) 만일 이 소설이 특정 작품의 패러디물이 아닌 순수한(?) 좀비물이었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실로 회의적이다.

 그러니 이 소설이 본문도 아니고 후기도 아닌 ‘독서가이드’라는 이상한 방식으로 거기에 얽힌 논란을 피해가려한다는 건 너무나 치졸한 발상이라고 할 밖에.

 서두를 듀나의 단편에서 따온 구절로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인용구로 맺어볼까 한다. 탈무드에서 나온다는 경구다.

‘글자 한 자의 빠춤이나 더함이 전 세계의 파멸을 의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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