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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인간 종말 리포트

2009.08.28 23:5908.28





pilza2.compilza2@gmail.com
 지구상의 인류는 전멸하고 단 한 명의 생존자만이 남았다. 스스로를 눈사람이라 칭하는 그는 인류를 대신하여 지구의 주인이 된 크레이커들을 지켜본다. 눈사람이 지미라는 본명으로 불렸던 과거, 천재적인 두뇌로 유전공학을 연구하던 친구 크레이커가 인류의 단점을 모두 고쳐 만들어낸 신인류 크레이커. 하지만 크레이크가 만든, 젊음과 쾌락을 주는 신약의 부작용으로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고, 크레이크가 미리 몸에 넣어준 백신 덕분에 살아남은 눈사람은 크레이커들을 연구소에서 풀어주고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며 그들을 만든 아버지 크레이크와 길러준 어머니 오릭스를 추억한다…….


1. 과학소설이 아닌 이유

 오랜만에 민음사에서 황금가지를 통해 나올 법한 소설이 나왔다. 그것도 제목마저 원제(Oryx and Crake, 오릭스와 크레이크)와는 딴판인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제목으로 바꿔달고. 제목과 출판사 서지정보만 보면 밀리언셀러 클럽으로 나와도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시녀 이야기](마거릿 애트우드, 황금가지, 2002년 7월)는 SF가 아니라며 장르소설에 대한 폄하와 비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작가의 글인 만큼 그 내용이 일반적인 장르소설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리란 것도 예상 가능하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이 소설에 대한 뉴욕타임스 리뷰는 SF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한다고 한다(원문은 잡지 [판타스틱] Vol. 5에 수록된 에세이 {과학소설은 왜 아직도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인용되어 있다).
 이에 질세라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에 이어서 여기에도 번역자의 ‘이 작품은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라는 자기방어(혹은 ‘애트우드적인 말실수’)가 들어 있으니, 그 심리야 장르소설을 중간문학이나 경계문학이라고 부르는 문학상/출판사 측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심리이자 마케팅 전략일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틀렸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엄연한 이유는 있다.
 우선 장르소설(특히 SF가 그렇고 라이트 노벨에 대한 논의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지만)이 작가 혹은 출판사나 레이블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탈로 칼비노가 그렇듯 마거릿 애트우드도 장르소설 분야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팬덤과의 교류도 전혀 없는 작가이며 출판사 역시 장르소설로 출간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원작은 물론 우리나라 번역판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사실에 애석한 혹은 분개의 마음을 품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비논리적인 근거에 의해 결론 내리자면 이 소설이 공상과학도 SF도 아닌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이다. 좀 더 살을 붙이자면 장르에서 쓰는 소재나 클리셰는 들어가되 장르가 주는 재미와 쾌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대한 조사를 거쳤다고 선전하지만 내용은 그다지 리얼하지 않고, 뱀과 쥐를 결합하여 뱀쥐를 만든다는 등 너무 안일하고 간단하며(소설적 상상력이라고 홍보하고 있으니 더 할 말은 없지만), 알약의 부작용으로 인류가 간단히 멸망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알약을 먹으면 죽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전세계 인류가 먹었을 가능성도 별로 없으며(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먹는 약인 아스피린이라도 마찬가지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전염병이라면 몰라도 딱히 그런 묘사는 없었다.
 다만 생각보다 교훈적 혹은 설교적이진 않으며, 출판사의 주장과는 달리 희망적이지도 않다. 신인류가 이전 인류의 문화와 종교를 답습하는 듯한 단초를 보여주는 결말부를 보면 그들도 결국 인류와 같은 길을 걷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예측을 하게 한다.
 이렇듯 과학적 근거는 B급 SF 수준이되 스스로 사변소설이라 말했듯 설정의 납득이 아니라 그러한 설정으로 야기된 세계의 변화와 인물의 내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딱히 SF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연상작용

 그러나 어쨌든, 아무리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읽는 사람에게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장르소설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작가 자신도 [시녀 이야기]를 발표하던 과거와는 달리 SF에 대한 편견을 상당 부분 씻어냈다고 하니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우선 가장 많은 이들이 [나는 전설이다](리처드 매드슨, 황금가지, 2005년 9월)를 떠오를 것이다. 인류가 절멸하고 단 하나의 생존자만 남았다는 배경부터, 인류의 뒤를 이은 신인류가 나타난다는 내용 전개까지 요약만 해놓고 보면 혼동이 될 정도로 비슷하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 표현방식은 다르다. 양 작품이 모두 생존자의 고독을 다루되 네빌은 삶이 곧 투쟁이고 전쟁임을 실감하며 싸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나가지만, 눈사람은 친구도 적도 없는 세상 속에서 그저 과거의 추억을 더듬어 나간다. 전자가 미래를 찾아 헤맨다고 하면 후자는 과거로 퇴행하고자 하는 심리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두 번째로 유전공학이 낳은 파국과 인류의 갑작스런 변화를 그린 [블러드 뮤직](그레그 베어, 늘벗, 1992년 6월), 갑작스러운 인류의 진화를 통해 일어난 혼란과 충격을 그린 [다윈의 라디오](그레그 베어, 시공사, 2007년 3월), 유전공학으로 각종 생물은 물론 나아가 유사 인간마저 낳는 미래를 그린 [넥스트](마이클 크라이튼, 김영사, 2007년 7월)와 같이 유전공학과 새로운 인류를 소재로 한 SF들도 연상된다. 덧붙여 미토콘드리아에게 의지가 생겨 주인인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빼앗는다는 내용의 [패러사이트 이브]([제3의 인간], 세나 히데아키, 한뜻, 1996년 11월)도 인류의 변화라는 거시적 테마 안에서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다.
 세 번째로 신약 개발이 낳는 비극을 그린 [울트라]도 빼놓을 수 없다. 쾌락과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신약을 개발하여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여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본작과 흡사하다. 다만 이 작품은 사건의 해결을 그린 스릴러물이라 신약이 유통되기 전에 연구 단계에서 알게 되어 확산을 막게 된다.
 여기에 하나만 더하자면 장르소설 카테고리에는 들어가지 않으나 갑작스레 인류가 몰살당하고 한 명의 생존자가 외로이 남는 [로라, 시티](케빈 브록마이어, 마음산책, 2008년 8월)가 연상되는데, 어쩌면 여기 열거한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본작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딱히 구체적인 설명이나 묘사 없이 전세계 인간들이 다 죽는다는 설정도 그렇고, 혼자 남은 생존자가 스스로 최후의 인간이라는 어떤 비장함이나 사명감, 숭고함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그저 외롭고 쓸쓸하게 남아 있는 것까지. 이렇듯 세세한 설정에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과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미시적인 세계관이 장르와 비장르를 나누는 독법의 기준이 될지도 모르겠다.


3. 오릭스와 크레이크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서, 원제인 ‘오릭스와 크레이크’를 떠올려본다. 왜 좀 더 멋지고 자극적인 제목(한국판 제목 같은?)이 아닌, 그것도 소설의 중심인물인 눈사람(지미)도 아닌 오릭스와 크레이크라는 인물을 제목으로 내세웠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 인류가 사라진 새로운 세계, 그곳에 남겨진 새로운 인류(크레이커)라는 의미가 아닐까.
 크레이크는 인류의 유전정보를 조작하여 자외선에 강하고 초식만으로 생존이 가능하며 발정기 때만 생식이 가능토록 하는 등 겉모습 외에는 새로운 존재라고 해도 좋을 신인류 크레이커를 창조해낸다. 그리고 어릴 적에 아동 포르노를 찍는 등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도덕적 가치를 잃어버린 여성 오릭스가 크레이커들을 가르친다. 즉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신인류의 이브와 아담인 셈인데, 이들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은 보편적 인간으로서 가지는 도덕과 윤리의 결여이다.
 천재로 대접받아온 크레이크는 보통의 사람들을 열등하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며 종내는 인류 자체를 경멸하여 자신의 지식으로 DNA를 보완, 개조하여 더 완전한 존재를 만들어 대체하려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릭스는 선악, 도덕에 대한 가치나 신념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무심에 가까운 태도가 크레이크를 매료시켜 크레이커의 교육을 맡도록 했을 것 같은데, 이러한 두 사람의 합작에 의해 크레이커는 기존 인류의 단점이라 여겨졌던 식욕, 성욕을 유전적으로 통제당했음은 물론 가족관계와 같은 것도 사라져, 문명을 발전시킬 여지도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의미로 기존 인류보다 퇴화된 존재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런 극단적인 인류와의 대비가 크레이크로 대표되는 기술 만능주의가 불러올 비극을 경고하기 위해 기능하고 있는데, 사실상 디스토피아라기보다 포스트 홀로코스트에 가까운 본작의 분위기가 과연 출판사 서평대로 인간의 과욕에 의한 자멸을 비판하는 '리얼한' 미래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겠지만, 작가는 일방적으로 크레이커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음으로써(눈사람이 화자인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류의 미래상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극단적인 진화가 곧 퇴화와 같다는 이러한 발상은 옳고 그름을 넘어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4. 그래도 SF라고 부르며

 마지막으로 이 글의 위에서 무슨 말을 했든 간에, 본작을 SF라고 불러도 좋을 이유를 내세우면서 끝맺고자 한다. 테드 창이 우리나라에서 했던 강연에 의하면 그는 SF를 변화의 문학이라 정의한다. 가령 [쥬라기 공원](마이클 크라이튼, 김영사, 1991년 7월)은 위험이 등장하자 이를 막고 파괴하여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 SF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기준을 놓고 본다면 똑같이 신약이 불러온 인류에 대한 위험에 대해 이를 조기에 막아낸 [울트라]는 SF가 아니며, 신약이 세상에 퍼져 변화를 돌이킬 수 없는 본작은 SF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갑작스러운 진화로 신인류의 탄생이 이어질 것임을 그려낸 [다윈의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본작도 신인류가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할 것을 그린 SF라 할 수 있다.
 다만 두 작품 모두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결말은 아니다. 후자의 경우 전술했듯 크레이커들이 인류의 과오마저 이어받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통해 불안과 긴장감을 남겨놓았고, 전자 역시 현생 인류와 신인류가 당분간 공존해야 하는 상황이고 이로 인한 갈등과 혼란이 있을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그 내용은 속편 [다윈의 아이들]에서 다뤘겠지만 아쉽게도 번역 출간되지 않았다), 두 작품 다 인간의 정의를 ‘혼란 속에서’ 탐구하고 있는 SF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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