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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독일 환상 문학선

2009.06.26 23:0806.26





pilza2.compilza2@gmail.com
 이른바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을 뒤늦게 읽게 되면 시시하거나 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그 작품 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단 체계적이고 순차적으로 독서를 하지 못한 독자의 불행이라고 볼 수 있다.
 말초적이고 자극적이며, 수많은 설정과 아이디어를 혼합한 최신 장르소설에 길들여진 입맛에 장르가 세분화되기 이전,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기 이전 단계의 작품은 아무래도 심심하고 밋밋하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하여도 필자가 [톨킨의 환상 서가](윌리엄 모리스 외, 황금가지, 2005년 5월)를 다룰 때도 언급했듯, 이 작품집 역시 장르소설(특히 판타지와 호러)을 넓고 깊게 읽고 싶은 사람, 장르의 근원과 발전을 조망하고 싶은 사람, 원조가 가진 향취와 아우라를 실감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추리소설이 에드거 앨런 포에게 진 빚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 이들 독일 낭만주의의 후예가 선보인 환상/공포 소설들이 오늘날 장르소설에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덤으로 이 작품집은 번역자 박계수가 직접 작품을 고른 선집으로 한국인이 편집한 외국 장르소설 선집은 찾기 드물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추리 및 스릴러쪽은 정태원이 편집한 다수의 단편집이 있고 SF쪽은 홍인기가 도솔에서, 박상준이 고려원과 서울창작에서 단편집을 편집하여 출간한 바 있으나 이는 사실 베른 조약 가입 이전이기에 가능한, 즉 저작권자와의 협의 없이 했던 무단 번역이었고, 조약 발효 후에는 단편 하나하나에 일일이 계약을 하기에는 비용과 시간, 여력의 문제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된 것이 사실이다. 정진영이 편집한 공포소설 걸작선과 같이 퍼블릭 도메인이 된 작품만을 다루는 경우가 예외라고 할까.
 이후 황금가지와 시공사가 비슷한 시기에 The Year’s Best Fantsy&Horror와 The Year’s Best Sci-Fi(데이빗 하트웰 편집) 및 Year’s Best SF(가드너 도조와 편집)를 번역해서 내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나 안타깝게도 일회성 시도에 그치고 현재까지 후속작의 출간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는데, 그나마 [최후의 날 그 후](아서 클라크 외, 에코의서재, 2007년 7월), [원더 월드](닐 게이먼 외, 북스피어, 2007년 6월), [하드SF 르네상스](데이비드 브린 외, 행복한책읽기, 2008년 10월), [21세기 서스펜스 컬렉션](제프리 디버 외, 황금가지, 2008년 12월) 등 외국 앤솔로지의 번역 출간 및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권정은 외, 황금가지, 2006년 11월), [얼터너티브 드림](김보영 외, 황금가지, 2007년 12월), [U, ROBOT](곽재식 외, 황금가지, 2009년 2월) 등 한국 작가의 단편집이 꾸준히 나오고 있어 고무적이다. 아울러 잡지 [판타스틱]도 단편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비록 최근의 환상문학전집은 그 성격과 경향을 알 수 없어 변질되거나 정체성을 바꾼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게 만들지만(일부에게는 절판된 SF를 재간하는 레이블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 작품집은 환상문학전집 초기의 기획 의도―――가려진 환상이 제 목소리를 내고 환상 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를 충실히 계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어 문학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영어, 일어, 불어 문학에 비해 소개가 덜 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어 환상소설은 E.T.A. 호프만과 미하엘 엔데 정도를 제외하면 불모지에 가까운 상태임은 물론이고, 본작의 수록 작가들 대부분이 당대에는 통속/대중/환상 소설을 쓴다는 이유로 주류 문단으로부터 차별과 무시를 당했다고 하니, 이러한 제반 사실들이 차별과 침묵을 강요당한 환상소설을 대변하는 자격을 갖추게 해준다.
 고전이 가진 무게, 소외당한 독일 환상소설이라는 정체성. 이러한 소설 외적인 부분이 소설 자체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런 외적인 요소를 제외한다고 해도 본작은 고풍스러운 환상/공포소설로써 즐기기에 충분하다(선집의 제목은 환상 문학선이지만 수록작 상당수가 공포소설로 분류해도 좋을 만 한데, 이는 두 장르가 명확히 분류되기 이전 시대의 작품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런 전통을 계승하는 의미인지 현재까지 The Year’s Best 시리즈는 판타지와 호러를 함께 묶어서 내고 있다).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 재미있거나 추천할 만한 작품 일부를 살펴본다.

 만다라화 이야기 | 흐리드리히 푸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병 속의 도깨비}([헤럴드 블룸 클래식] 수록)와 놀랄 정도로 유사한 소재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시대상으로 푸케의 이 작품이 스티븐슨이 태어나기 전에 발표한 글이므로 그가 이 글을 읽고 모방했거나 이와 유사한 내용의 전설이나 민담이 원래 존재하고 두 작가가 그걸 소재로 쓴 듯 하다.
 부(富)를 가져다주는 대신 영혼을 잠식하여 고통에 빠지게 하는, 만다라화가 담긴 병. 이것은 자신이 산 가격보다 더 싸게 팔지 않는 한 버려도 돌아오는 등 벗어날 수가 없다. 같은 소재를 다뤘지만 스티븐슨과는 해결책이 다른데, 궁지의 끝에 다다른 주인공의 앞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도 같은 존재가 나타나 싱겁게 해결이 되고 만다. 소설적인 재미로는 {병 속의 도깨비} 쪽이 더 낫다.

 잃어버린 거울상 이야기 | E.T.A. 호프만
 거울과 그에 비친 또다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르시스를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수많은 신화, 민담, 시와 소설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현실과 환상의 혼재, 자아의 분열과 무의식을 위한 모티브로 기능하고 있는데, 내가 읽은 호프만의 다른 글과는 다르게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헌신적이면서 현명한 주인공 아내의 덕분인 듯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광적으로 빠져드는 사랑, 주인공을 유혹하고 괴롭히는 사악한 존재 등 [모래 사나이](E.T.A. 호프만, 문학과지성사, 2001년 9월), [브람빌라 공주](E.T.A. 호프만, 책세상, 2004년 7월)를 비롯해 호프만의 작품에서 보이는 숱한 소재와 구조가 등장한다.

 인간 공장 | 오스카 파니차
 우연히 길을 잃고 헤매다 흙을 구워 인간을 만드는 공장을 방문하여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공장주와 인간에 대해 논쟁을 하는 이야기. 인간 창조를 다룬 SF의 뿌리와도 같은 작품. 공장에서 만든, 매력적인 외모에 아무 생각도 행동도 없는 인간이 인기리에 팔린다는 공장주의 언급을 통해 현대 사회를 풍자하기도 하고, 인종 차별과 인권에 대한 문제로까지 해석이 가능한 내용이다.
 다만 마지막 공장에 대한 정체(일종의 반전) 때문에 이 이야기 자체가 거대한 농담 혹은 주인공의 환각처럼 해석될 수도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시시하게 끝맺게 놔두고 싶진 않다. 작품 자체가 인간이 물화되는 세상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하고 있다.

 경이로움 | 하인리히 만
 잃어버린 꿈과 환상, 경이로움에 대한 송가.
 주인공에게 들려준 이야기 속의 여인과 저택은 마치 웰즈가 그린 벽문 너머의 세상처럼 이상적이고 환상적이지만, 그는 거기로 영원히 떠나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그리워할 뿐이다.
 중세 소설다운 액자소설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진산의 시인 이야기 연작과 전민희의 {11월 밤의 이야기}([꿈을 걷다](김정률 외, 로크미디어, 2009년 3월) 수록)} 등의 최근작에까지 이어지고 있어 고전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거미 | 한스 하인츠 에버스
 작가 소개란에 비평가들로부터 악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글을 읽으면 그 이유가 짐작이 간다. 이 작품은 놀랄 정도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호러 장르의 구성을 갖추고 있는데, 적어도 시대를 50년은 앞서 창작된 이 소설을 당대 주류문단의 비평가들이 제대로 읽고 받아들여줄 리가 없던 것이다.

 두 개의 가면 | 알렉산더 모리츠 프라이
 가면에 관한 우화. 자신의 얼굴이 가면이라 주장하는 여성 욜란테와 가면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주장하는 남자. 가식과 위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무도회라는 공간적 배경과 가면을 쓴 남자의 기괴하고 신비한 풍모는 포의 {적사병 가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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