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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이 쓴 책]은 데이비드 미첼의 ‘장편’소설이지만, 장편보다는 연작 단편에 가깝다. 비록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사건 전개와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각 장의 직접적인 연결성은 미약하고 동일한 사건을 시점을 달리해서 보는듯한 옴니버스 식 구성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단편화된 부분이 모여서 모자이크처럼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척 기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종반 80%에 이르기까지는.

 장편 치고도 분량이 상당해서 매출에 관심이 많은 출판사라면 2권으로 분책할 법도 한 이 책은, 그 많은 분량에 긴박하고 흥미로운 사건들이 미려한 문체로 알알이 꽉 들어찬 훌륭한 작품이다.
 각 장에서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는 사소하지만 절묘하며, 때로는 기발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각 장의 독립성은 충분히 유지되고 있다. 더욱이 그 독립적인 장들이 모여서 하나의 완성된 덩어리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짜릿할 정도다.
 이런 구조적인 장점에 더불어 미려한 문체 또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작품 전체에 걸쳐 전문 작가다운 기량이 넘쳐 흐르고 있다. 건조한 해설과 흐트러진 감성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으며, 세부적인 문장 역시 아름다운 표현들이 무성하다.
 게다가 이런 문학적인 장점은 원작 못지 않은 훌륭한 풍미를 가진 번역 덕분에 더욱 빛난다. 오역이 거의 없으며, 기계적인 번역에서 벗어나 글의 흐름과 호흡을 잘 읽고 충실히 우리말로 옮겨 내었다. 게임/애니메이션 하위 문화를 주로 접하는 덕에 비문에 가까운 일어/영어 번역체를 신물이 나도록 접해온 나로서는 조미료 통에서 허우적거리다 빠져 나와 샘물을 들이키는 기분이다.
 서양인 답지 않게 동양 문물에 정통한 저자가 자신의 해박함을 뽐내듯 각 장마다 아시아 각지를 옮겨 다니며 그 지방의 정경을 눈으로 보는 듯이 그려낸 원작을, 그 못지 않은 지식과 필력으로 섬세하고도 정확하게 번역해낸 솜씨는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연마된 문장력과 폭넓은 지식이 겸비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전문 번역가로서 부끄럽지 않을 솜씨다.
 다만 어떤 번역이든 완벽할 수는 없는지, 몽고 씨름을 레슬링으로 번역한다든가, 성스러운 산을 그냥 성산으로 번역한다든가 하는 사소하면서도 엉뚱한 문제는 있다. (덕분에 나는 차례만 보고 한국도 이 책의 아시아 지역 순례에 포함되는 줄 알았다. 성산이라니, 아주 한국적인 지명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부분은 굳이 옥의 티를 찾아내려면 눈에 띄는 정도일 뿐 작품 전체를 감상하는 데는 거의 흠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문제는 사소한 번역 상의 어색함보다, 중반까지 꼭꼭 숨겨오던 주제를 말미에서 뜬금 없이 퍼질러 버리는 구조적 오류가 훨씬 심각하다.
 초반부 각 장들이 독립적인 듯 이어지는 큰 얼개는 중반부에 도달하면서 최고조에 달하며, 산만하게 늘어 놓였던 퍼즐이 비로서 하나로 맞아 떨어지는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종반에 접어들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튀고, 마지막은 너무나도 고리타분하고 개연성도 부실한 존재론 타령으로 끝나버린다. 작가의 넘쳐나는 문재와 풍부한 문화적 지식도, 단지 책을 쓰기 위해 억지로 삼킨 것 같은 과학 이론과 조잡한 철학 논리에 대비되면서 퇴색될 뿐이다.
 중후반까지 독자를 매료시키면서 도도하게 흘러오던 전체 윤곽이, 사실은 마지막 두 장을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설정에 불과하다는 반전 아닌 반전을 깨닫게 되면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읽는 재미는 급감하며, 종반의 뜬금 없는 전개와 마지막 장의 부실한 마무리는 작가가 책을 쓰기 싫어졌거나, 마감에 쫓겨 정신 없이 휘갈겨 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북돋울 정도가 된다.
 덕분에 각 장은 독립적이면서도 연관되며 개별적으로도 재미있고, 모이면 더욱 아름다워지는 멋진 구조를 만들었으면서도, 결국 그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각 장들을 하나의 통일된 장편의 일부가 아니라 뿔뿔이 흩어진 단편들의 모음으로 만들어 버렸다. 각각의 맛은 훌륭하지만, 모아놓으면 결코 한끼 식사가 되지 못하는 디저트들만의 만찬인 것이다.

 이런 종반부에서 드러나는 치명적인 결함은 용두사미라기보다는 조기 종영에 가깝고, 작가가 처음부터 제대로 쓸 역량이 없었다기보다는 소설 외적인 다른 문제로 인해 충분한 퇴고 없이 황급히 결말로 치달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쩌면, 중반까지 잘 이어져오던 큰 흐름을, 종반부 한두 장을 위한 배경 설정으로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발단과 전개로 이어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품의 10개 (혹은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 장들이 하나도 빠질 게 없는 전체를 이루어, 놀랍도록 매혹적인 명작을 탄생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건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고, 이 책은 그저 몇 년마다 한두 편씩은 나오는, 출간 당시엔 호평을 받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찬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못 되는 정도의 평범한 우수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단점만 자꾸 말하다 보니 꽤 혹평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객관적으로 볼 때 무척 우수한 소설이고 최소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서 후회할 일은 없다. 단점이 크다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많지 않은 단점이 더 아쉽게 느껴지고 그 부분만 부각되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디저트들은 맛있었고, 먹으면서 배도 적당히 불렀다. 단지 뭔가 제대로 한끼 먹었다는 뿌듯함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아쉬운 걸 게다. 코스 요리를 기대하고 왔는데 실상은 케이크 뷔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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