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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세계
파라그 카나, 이무열 옮김, 에코의서재, 2009년 1월



배명훈 (mh_bae@hotmail.com)



   이 책은 최근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변화를 저자가 제2세계라고 이름붙인 국가들을 통해 분석하는 연구서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제2세계라는 용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요, 왜냐하면 이 말은 냉전기에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진영을 제1세계로, 소련과 동유럽을 중심으로 한 진영을 제2세계로, 반둥회의로 대표되는 비동맹 국가에 중국을 더한 국가군을 제3세계로 부르던 전통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이 책에서 정의된 제2세계의 개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자면,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중간 그룹에 해당하는 국가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1세계로 분류했고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전부 제외한 것을 보면 대강의 상한선과 하한선이 보이겠죠.


▲ 2011년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 연례회의에서의 파라그 카나.

   그렇다면 세계질서의 변화와 이런 국가들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기에 이런 책을 쓰게 된 걸까요. 일반적으로 제국들은 팽창기에는 서로 정면충돌을 하지 않습니다. 땅따먹기 놀이를 할 때 일단은 누가 얼마만큼의 영역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할지를 결정하는 단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영토 바깥에 팽창해야 할 영역이 남아있을 때는 강대국 서로 간에 직접 충돌이 잘 일어나지 않거든요. 식민지 쟁탈이 끝나고 더 이상 팽창할 곳이 남아있지 않게 되면 그때서야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거죠. 이 책의 저자는 지금이 바로 이 팽창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 중국, EU, 이 세 제국이 기존의 냉전, 탈냉전 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고쳐가는 시기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제국들의 땅따먹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강대국들간의 관계보다는 중간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다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을 거고, 그게 바로 이 책의 제목과 부제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입니다. [제2세계: 세계 권력의 대이동은 시작되었다](The Second World: Empires and Influence in the New Global Order)


   연구방법과 대상

   이 책의 연구방법은 위에 소개된 것과 같습니다. 제1세계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제2세계들의 현주소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런 접근방법은 사실 좀 특이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지적인 사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방식이거든요.

   우선 이 책의 분석 범위가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규정해 볼까요. 대외정책을 분석하는 데는 대략 여섯 가지 정도의 분석수준이 사용되는데요, 복잡하니까 대충 넘어가고, 국가보다 더 큰 분석수준들만 열거해 보면, local level, regional level, global level의 세 가지의 분석수준들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결구도를 예로 들면 남북관계는 local level, 남북한과 한중일러를 포함한 관계는 regional level,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싸움은 global level에 해당하는데요, 아마 구글 지도의 축척을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겠죠. 어느 축척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범위가 전혀 다르잖아요. 나라 하나가 통째로 보이기도 하고 도시 하나가, 혹은 동네 하나가 도드라져 보이기도 하고요. 대외정책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다양한 축척들을 모두 넘나드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구글 지도(maps.google.co.kr). 보려는 범위에 따라 축척을 직접 조절하는 것은 사용자의 몫.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는 주로 개별국가, local level, 그리고 regional level까지입니다. 물론 더 큰 분석수준인 global level이나 더 작은 분석단위인 개별국가 내부의 변수들까지도 종종 언급되고 있지만 주로 다루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개별국가와 이 국가들을 둘러싼 환경입니다. 저자는 이 범위의 변수들을 “지정학”이라는 용어로 묶어서 부르고 있죠. 그래서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제2세계에 해당하는 나라들의 국가명이 쭉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나라가 한 꼭지를 이루는 셈이죠. 그 나라들을 모아서 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하는 식의 지역구분에 해당하는 장을 이루고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백과사전처럼 찾아보기 좋은 형식이 돼 있습니다.

   그 다음은 시간적인 범위입니다. “지정학”이라는 말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지정학은 쉽게 말하면 땅의 정치학 혹은 위치의 정치학입니다. 한반도는 이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게 되죠. 파나마는 그 위치 때문에 파나마 운하를 가진 전략적 요충지가 돼야 하고요. 벨기에와 스위스는 수백 년간 변함없이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진격로로 사용될 운명이었습니다. 여기에 땅에 매장된 천연자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변수들도 있겠죠. 이처럼 땅에서 연유한 변수들은 꽤 긴 시간에 걸쳐서 똑같은 패턴의 행동들을 유발하게 마련인데요, 그래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단위는 주로 백 년 내외의 단위입니다. 백 년 규모의 트렌드를 짚어내는 게 목표인 셈이죠.

   여기서도 역시 구글지도의 축척을 떠올려 보세요. 공간 개념을 시간 개념으로 바꿔서. 천 년 단위의 트렌드는 문명사에 해당하고 10년 단위의 트렌드는 현상 진단에 해당하겠죠. 100년 단위 트렌드는 그 사이, 현대사에 해당하는 범위가 됩니다. 이 책의 시간적 분석단위는 바로 이 100년 단위 내외입니다. 아울러 이 시간 단위는 대부분의 제2세계 국가들이 근대국가로 자리 잡은 후의 나이와도 비슷합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1000년 단위와 10년 단위가 간간히 등장하기도 하겠죠.

   이 시간 범위가 왜 중요하냐면, 이 책이 예측하고자 하는 미래가 어디쯤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느 단위의 시간을 쓰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이 책의 리비아나 이집트 편을 보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그렇다고 이 책이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적어도 수십 년 뒤의 변화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시공간적 범위를 연구 대상으로 잡은 것은 성공적이었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책의 재미는 대부분 이 점 때문에 발생하거든요. 다시 말해 굉장히 거시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본론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세계여행기로 표현한 서평이 있던데, 타당한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나라들의 현대사를 학술적이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가 쓴 것에 가까운 문장으로 경쾌하게 풀어냈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상당하다는 거죠.

   문제는, 한 나라 한 나라가 이렇게 백과사전식으로 소개가 돼 있어서, 지금 이 지면을 통해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디가 더 중요하고 어디가 덜 중요하고가 아니라 완전히 병렬식이거든요.


   연구방법에 대한 평가

   그런데 이 책의 연구방법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게,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사회과학 서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는 게 제 느낌입니다. 방법론이, 추론을 위한 논리적 사고과정이, 아주 엄밀하게 적용되지는 않았거든요. 말하자면 서론과 결론에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바와 본론의 내용 혹은 형식이 좀 따로 노는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저자의 주장은, 이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저자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강대국들의 영향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요, 본문의 내용에서는 이런 영향력 문제 못지않게 개별국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변수들이 꽤 많이 다뤄지고 있거든요.

   이걸 굳이 단점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고, 저자의 주장이나, 특히 출판사의 주장과는 약간 다르게 바꿔서 표현하고 싶네요. 이 글이 다루고 있는 각 국가들의 이야기는, 세 개의 강대국들이 퍼즐을 맞춰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그들이 맞추려고 하는 퍼즐 조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히 묘사하는 데 좀 더 적합한 것 같다는 말로 말이죠.


   엄밀성에 대한 평가

   사실 저는 이 책의 저자처럼 세계일주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연구계획이 얼마나 엄밀하게 수행됐는지를 일일이 평가할 수는 없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바로, 한국이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보면 되거든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시아를 설명하는 장에 이르면 사실 살짝 손이 안 가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 저건 저렇게 볼 게 아닌데 하는 부분이 생기는 거죠. 아무래도 미국의 눈으로 본 지역현상은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차이가 나게 마련인 걸까요. 어쩌면 그들의 눈이 더 정확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동의할 수 없는 순간이 발생합니다. 저는 일단 우리나라를 1세계에 집어넣은 것 자체가 눈에 띄었는데요, 아마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책에서 이 순간이 발생한다는 건 중요합니다. 세계의 변화를 짚어내려고 했던 야심찬 시도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베스트셀러 [문명의 충돌]인데요, 이 책은 냉전 이후 국제적 대립 양상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 대립에서, 종교와 문화를 혼합한 개념인, 문명권 사이의 대립 양상으로 바뀔 거라는 진단을 내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역사의 종언]에서 이제 공산주의 진영이 사라졌으므로 대립할 대상도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역사는 더 이상 진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것과 비교해 보세요.)

   그런데 이 [문명의 충돌]을 읽다가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지역이 나오면, 어,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을 유교 문화권으로 넣고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한 문명권이 되어 미국이 포함된 문명권과 대립하게 되리라는 대목을 읽을 때면, 어딘지 경계선이 잘못 그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헌팅턴에게 반론을 제기하면서 새로 경계선을 긋기 시작했는데요, 문제는 이겁니다. 헌팅턴이 그은 경계선이 맞게 그은 것이든 아니든 아무튼 경계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는 거죠. 어쩌면 없던 경계선도 이 책 때문에 새로 그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 사람들이 비판을 하면 할수록 [문명의 충돌]은 타당한 예언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문명을 기준으로 선을 긋게 만들었으니까요.


   ▲ ‘문명충돌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왼쪽),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3세이자 미국의 미래 정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이 책, [제2세계] 역시 그럴 소지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 부분이 이상하게 보였다면, 우즈베키스탄 사람이 보기에 중앙아시아 부분이 이상하게 보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고요. 그 다음 순서는 뭐가 될까요? 아마도 현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선을 긋기 시작하겠죠. 보다 정교하다고 생각되는 선을 말이죠. 그 선들이 모여서 비로소 굵고 진한 선이 그어지는 겁니다. 이런 현상을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도 하죠.

   이 책을 읽을 때는 바로 이 점을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저자의 무급 연구원이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책의 논지를 정밀화하는 일에 종사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이 책의 진짜 주제 (결론에 대한 스포일러)

   사회과학 책이긴 하지만, 스포일러가 될까봐 뒤에 따로 빼서 쓰고 있는데요, 이 책의 진짜 주제는 사실 그 많은 나라들이 아닙니다. 저자가 다루려고 하는 나라는 단 한 나라입니다. 중국이죠. 세 개의 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이 책에서는 EU를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습니다. 들러리 제국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중국 위협론은 미국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연구결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위협적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이 미국의 장래에 훨씬 더 위협적이라는 말입니다.


   ▲ 1972년 2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이 마오쩌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항상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헤게모니와 관련해서 국제정치학계에는 이런 아주 오래된 의문이 있었는데요, 2위국가가 자신을 따라잡으리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1위국가가 손놓고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영향력이 무시무시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묘사되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경우, 저자의 설명에 모두 동의한다고 해도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 군사기지를 가진 제국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죠.

   엄밀히 말하면 중국은 아직 글로벌 파워가 아닙니다. 유일한 글로벌 파워는 미국이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기축통화 등 전통적인 초강대국의 조건은 몇 가지가 있는데요, 복잡하니까 생략하고, 세계 어느 곳이든 인력과 물자를 보낼 능력이 있는 세력은 이제 미국밖에 없습니다. 군사영역으로 갈수록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경제영역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죠.

   이 책이 왜 위에서 설명한 연구대상과 방법을 골랐느냐 하는 문제의 해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의 지배력이 확산되는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을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세계는 너무 커서 인간의 인지 한계를 넘습니다. 이론이든 통계든, 이성에 의해 한 번 걸러낸 결과물을 보는 것 말고는, 세계를 직시하는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렌즈를 고르느냐는 곧 어떤 세계를 보게 될 것인가와 동일시됩니다. 보고 싶은 걸 보게 된다는 거죠. 이 책에서 저자는 세계를 보는 수많은 눈 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눈, 제2세계를 의도적으로 골라낸 셈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에 나와 있는 흥미진진한 세계여행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해외여행을 나간 여행자가 먹을 거 준다고 낯선 사람을 순진하게 따라가는 것만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 때문에 이 책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옳으냐. 그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굳이 이 책을 비난할 필요는 없죠. 세계를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미국의 입장에서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정확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어느 나라 사람이 쓰든 자기 세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미국 사람이 미국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바라본 결과물이 나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차피 완전히 객관적인 눈이란 존재할 수 없다면 말이죠.


   총평

   자, 여기까지 마음의 준비가 되셨으면 이제 이 책을 마음껏 읽으셔도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자면, 이 책은 아주 재미있는 책이거든요. 자세한 세부사항들도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도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실용적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첩보활동을 펼치는 스파이나 스나이퍼 등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사회 분위기나 정세, 향후 수십 년간 진행될 삶의 조건 등을 아주 자세히 설명해 놨거든요. 백과사전식이라 찾아보기도 좋고요. 무엇보다, 세계를 서술하는 방법 자체를 참고하시려는 분들께도 꽤 큰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추가 의견: 천하삼분지계

   여기서부터는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다극체제 중 3극체제는 가장 불안한 체제에 해당합니다. 동맹을 바꿔가며 1:2 대립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하거든요. 삼국지 같은 구도를 생각하시면 되겠죠. 그런데 삼국지의 천하삼분지계를 보면서 궁금했던 점은, 수십 년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군벌 유비가 스물여섯 청년의 브리핑을 한 번 듣고는 며칠동안이나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논의할 정도로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는데, 그 브리핑의 내용이라고 전해지는 것들이 어째 좀 허전하다는 점입니다. 겨우 3극체제를 구성하자는 정도의 평범한 제안에 유비가 홀라당 넘어갔을 리가 없거든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심지어 자연발생에 가까운 전략적 사고이니까요.

   제갈량의 브리핑 내용의 핵심은 3극체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보다는 “세계를 하나 만들어서 적의 침입을 막자”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황제를 등에 업고 절대 한사코 한 왕조를 끝장내지 않은 조조의 주류 세계가, 천 년 단위의 트렌드에 해당하는, 양자강 하구에 진을 치고 반란세력을 형성한 대안 세계 손권을 향해 밀고 내려갑니다. 그 길목에 놓여 있는 유비의 진영은 그 거대한 파도를 막아낼 군사력도 경제력도 인재도 없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제갈량이 말합니다. 주군께서도 세계를 하나 만들어서 막아내시지요. 유비는 그 말에 깜짝 놀랍니다. 과연! 그래서 만들어진 게 촉이라는 천하입니다. 황하와 양자강에 각각 북경요리 광둥요리가 있다면 파촉에는 사천요리가 있습니다. 완전히 독립된 삶의 여건을 갖춘 천하 하나를 만들어낸 거죠. 천하삼분은 사실, 없던 천하 하나를 만들어 이분된 천하 사이에 끼워 넣는 전략입니다. 이 정도는 돼야 유비도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요.

   증거도 있습니다. 촉을 세우고 얼마 안 돼서 유비는 한황실의 후손 어쩌고 하는 소리를 걷어내고 그냥 황제를 칭합니다. 제국이 됐다는 뜻입니다. 제국은 그냥 큰 나라가 아닙니다. 이론상,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중국의 천하관이 딱 그렇고, 로마나 알렉산더 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굴제국은 인도 반도를 다 점령하기도 전에 세계를 점령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세계라고 할 만큼의 크기라는 게 딱 그 정도였거든요.

   이 책, [제2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제국의 개념도 사실 그렇습니다. 미국이 제국인 건 실제로 지구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EU는 사실 제국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단일정부가 있기는 한데 중앙집권이 확립된 정치체제는 아니거든요. 다만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언어가 함께 사용되는 공통의 생활권일 뿐이지요. 그런데 이건 제국이 아니라 천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누가 뭐라고 했건 하나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 책에서는 그걸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세계의 영향력은 단일국가인 미국의 크기보다 큽니다. 물론 미국의 동맹국들, 야구를 사랑하는 미국의 유사 식민지 국가들을 모두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 대목입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EU라는 세계, 그리고 그 생활방식이 팽창하는 건 저지할 수 없다는 것.


▲ 문화대혁명 당시의 포스터.

   그와 똑같은 생각이 중국에도 적용됩니다. 이 책의 저자가 묘사하는 중국 공포는 중국 정부의 정책보다는 사실 인구유입 이야기를 할 때 더 생생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연해주 지방에 중국계 인구가 1억 가까이 증가해 버리자 러시아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식의 묘사를 할 때가 그렇습니다. 결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중국은 원래 제국이었고 원래 세계였다고. 지난 백여 년간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제 역할을 못한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겁니다. 중국이 제국인 건 아예 이 책의 분석 단위를 넘어서는 천 년 짜리 트렌드 혹은 그 이상이라는 거죠. 조조 입장에서 본 촉나라라고나 할까요.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중국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이기 때문에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나라인 모양입니다. 에너지 문제만 아니면, 대외교역을 하든 말든 대내수요만으로도 경제를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재고 뭐고 소용이 없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이 중국이라는 세계를 향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 거대한 시장 때문에라도 말이죠.

   이 부분은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아마도 중국은 초강대국의 한 축이 되어버릴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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