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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문명
자크 르 고프,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년 11월



pena (pena9.egloos.com)


서양 사람들은 중세에 어떻게 살았을까

  판타지의 세계란 이 세상에 없는 세계이거나, 이 세상과 같은 세계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판타지의 세계는 상상하면 상상하는 대로 얼마든지 여러 가지 특색을 가지고 만들어질 수 있지만, 가장 빈번하게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은 중세이다. 특히 로망스 장르가 태어난 곳인 서양의 중세가 가장 많다. 마법은 역사에서도 관념적으로만 등장할 뿐이지만, 갑옷이나 무기, 생활상, 신분체계 같은 것은 대개가 서양의 중세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정말로 중세의 세계가 어땠고 서양 사람들은 그 세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역사는 정치적 사건과 사회구조를 중심으로 쓰여 있으니 높으신 어르신들의 추태 또는 영웅 노릇 정도밖에는 알 수 없고, 중세에 대한 역사책을 검색해보면 꽤나 많은 종류가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는 명작이지만 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서 자장가+베개 대용으로 쓰면 좋을 책들도 있고([중세의 가을], [세 위계의 상상체계], [연옥의 탄생] 등), 제목은 그럴듯한데 번역 문제로, 혹은 원래 내용의 문제로 난삽한 책들도 있고([중세의 세계], [중세의 소외집단] 등) 진짜 중세인이 쓴 책도 있다(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신국론] 등). [서양 문명의 역사]나 [서양문화사]와 같은 책들은 몇 권으로 분책되어 있으므로 고대중세 부분을 보면 되긴 하지만, 이 책들도 방대한 분량을 다루느라 겉핥기인 면이 많다. 일상적인 사료를 자세히 살펴서 소설처럼 재구성한 책들은(치즈와 구더기, 고양이 대학살, 마틴 기어스의 귀향 등) 읽기 쉽고 재미있고 문화적인 충격을 주지만 중세의 윤곽을 그려내기에는 지엽적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범용하면서도 나름대로 충실한 중세사 서적을 몇 권 소개하는 동시에 추천하고자 한다. 개설서보다는 높은 수준이지만 대상 독자가 전문가가 아닌 책을 기준으로 골라서 가장 보편적으로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책들이다.




서양 중세 문명
개정판 | 현대의 지성 65

자크 르 고프 지음,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년 11월

쟈크 르 고프는 프랑스 사람으로, 유명한 역사학자이며 특히 중세사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다. 위에 조금씩 예로 들었던 책 중 [연옥의 탄생]이 이 사람의 책이다. 쟈크 르 고프는 1960년대 프랑스에서 등장한 아날 학파라는 새로운 역사학의 물결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특이하게도 중세가 19세기까지 계속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또한 빠르게 변해가는 정치적 역사와는 무관하게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망탈리테(mantalite, mantality: 일상적 삶에 대한 태도 또는 집합 무의식, 의식구조)를 중시하여 사실과 사건보다는 관념과 물질생활도 빠뜨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특이하게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라고 해서, 5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정치적 사건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그리고 2부가 본편인데, 이 섹션의 제목이 {중세 문명}이다.
이 섹션은 5~9세기를 다룬 부분과 10~13세기를 다룬 부분으로 다시 둘로 나뉜다. 5~9세기는 로마가 멸망한 이후 중세사회가 기틀을 잡고 ‘전형적인 중세사회’가 되어가는 시기이므로 고중세(古中世)라고 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어둠 속의 빛들}이란 제목으로, 로마인이 아닌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오고, 로마가 멸망하여 경비체계가 흐트러지고, 그래서 도둑이나 비적들이 난무하고, 그 와중에 교회와 게르만 귀족들이 세력을 굳혀가면서 민중의 수호자로 나서는 과정을 담고 있다.
10~13세기는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바로 그 시대로, 중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10~13세기를 다시 넷으로 나누어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첫 번째인 {공간과 시간의 구조}에서 쟈크 르 고프는 중세 사람들의 저승관, 시간관, 우주관, 유동성 등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물질 생활}에서는 말 그대로 물질 생활을 다루고 있다. 중세인이 농촌에서는 어떤 기술을 써서 농사를 지었고, 동력원은 주로 무엇이었으며, 교통수단은 무엇이었고, 교역을 하기 위해서 어떤 체계를 발전시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고 없이 닥치는 여러 재난과 전염병 앞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등이 담겨 있다. 경제사회사 부분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기독교 사회}이다. 중세는 기독교가 완전히 지배한 시대로, 기독교의 교리와 교회의 존재가 중세인의 삶을 여러 면에서 제한하거나 발전시켰다. 그래서 이 부분은 기독교와 교회 자체에 대한 장이 아니라, 기독교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형성된 중세인의 윤리 문제와, 교회가 계급투쟁, 여자와 이단과 소외집단들에 미치는 영향 등을 다룬다. 교황이 황제보다 더 권위가 컸던 것은 바로 교회가 이렇듯 여러 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가 {망탈리테․감수성․태도}이다. 이전에는 역사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영역인 동시에 독자는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앞에서 기독교가 중세인들에게 미쳤던 막대한 영향에 대해서 얘기한 다음이라 더욱 대조가 되는 사실이지만, 중세인들은 그러면서도 미신적이고 이교적인 사고를 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변질되는 모습과 비슷하게도, 중세인들도 기적이나 신적 개입에 의존했고, 권위에 의존했고, 미를 추구했으며, 점점 세속화해서 사치나 놀이에 많은 힘을 쏟았다. 궁정식 사랑도 르네상스가 아닌 중세에 이미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세 위계도 날이 갈수록 단순한 중세인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이분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장은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14~15세기를 다루고 있다. 보통의 역사에서 르네상스기로 분류하는 부분인데, 이 시기도 중세로 다룰 수 있다, 연속하는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만을 하기 위해 짧게 할애한 장인 듯, 설득력이 별로 없다. 이제까지 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갑자기 비약하는 이 책의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서양 중세 문명은 아주 쉽게 읽을 책은 아니다. 그러나 2부는 꽤 큰 가치가 있고, 중세사 전문가가 쓴 것이니만큼 믿을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처음 번역되었고, 2008년에 개정판이 나온 이 분야의 고전이기도 하다.





중세의 빛과 그림자
그림과 함께 떠나는 중세 여행 | 원제 Glanz und Elend des Mittelalters

페르디난트 자입트 지음, 차용구 옮김, 까치글방, 2000년 4월

쟈크 르 고프가 프랑스의 서양 중세사 전문가라면, 페르디난트 자입트는 독일의 서양 중세사 전문가이있다. 이 사람의 역사관 또한 정치적 사건뿐만이 아니라 중세인들의 삶과 가치관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쟈크 르 고프의 책처럼 이분하여 역사적 사건의 전개와 문명을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다 균형 있게 시기에 맞추어서 역사적 사건과 그에 관련된 사실들을 다룬 한 장, 그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다룬 한 장을 병렬로 배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세의 기틀을 잡은 사람들에 대해서 첫 번째로 다루고,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난 사회의 특징에 대해서 두 번째 장에서 다룬다. 세 번째 장과 네 번째 장은 {농업혁명}과 {종교적, 정신적, 세속적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농업, 경제,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섯 번째 장과 여섯 번째 장의 제목은 {권력과 공간} 그리고 {위기와 혁명}이다. 여기에서 다시 정치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사건의 전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권력에 대해서 다룰 때에는 그 사이의 균형과 투쟁에 대해서, 위기에 대해서 다룰 때에는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중세인들의 노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마지막 일곱번째 장은 {일상생활, 신앙 그리고 미신}이라는 제목으로 생활 양식, 신앙, 기사와 여성, 마녀 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그림과 사진 자료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림과 함께 떠나는 중세 여행”이라고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 적어도 네 페이지에 하나씩은 그림이나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의 종류가 꽤나 다양하다. 가장 작은 컷은 중세의 동전이나 인장들을 찍은 사진이고, 각 장과 장 사이에는 전면 사진으로 여러 곳의 풍경을 담고 있다. 교회나 궁전의 조각상은 물론이고, 도시 전경을 찍은 사진과, 성의 구조도, 내부도, 세력 지도 등이 간간히 섞여 있다. 물론 그 당시에 그려진 풍속화 등도 빠지지 않는다. 이 그림과 사진들은 본문 내용의 눈요깃거리로 아무 설명 없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밑에 조그만 글씨로 설명이 자잘하게 적혀 있으므로 본문에서 하지 못한 말을 하는 곳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책이 꽤나 두꺼운 편인데, 그림과 사진들을 보면서 그 밑의 설명부터 주루룩 읽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서양 중세 문명에 비해서 개설서라는 측면에 보다 충실하고, 보다 읽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부록으로 뒤에 중세사 연표가 있다.
아쉬운 것은 현재 대표적 인터넷 서점이나 쇼핑몰에서 구할 수 없고, 오프라인 서점이나 도서관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세에 살기
원제 Vivre au Moyen Age | 동문선 현대신서 43

다이엔 오웬 휴즈, 디디에 레트, 마리 테레즈 로르생, 미레유 뱅상 카시, 미셸 뷔르 , 미셸 파스투로, 베르트랑 갈리마르 플라비니, 앙드레 시갈, 앙드레 카스틀로 , 자크 르 고프, 자크 베르제, 장 미셸 멜, 장 베르동, 장 클로드 슈미트, 제롬 바셰, 콜레트 본, 클로드 고바르, 프랑수아즈 오트랑 지음, 최애리 옮김, 동문선, 2000년 7월

이 책에도 쟈크 르 고프라는 이름이 떡하니 있는데, 사실 이 책은 여러 사람이 한 꼭지씩 맡아서 쓴 형식의 책이다. 원래는 프랑스의 역사 잡지에 특집으로 여러 편의 글이 실렸고, 그것을 문고본 형식으로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라 한다.
중세에 살기의 원제는 Vivre au Moyen Age인데, 중세의 삶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서양 사람들은 중세에 어떻게 살았을까”가 맞는 뜻인 것 같은데 이미 나와 있는 책의 제목을 따서 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중세에 살기로 낙찰되었다고 한다. 즉 이 글의 제목에 가장 어울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 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하나도 나와 있지 않다. 중세인의 삶을 사랑과 가족/ 신앙과 성직자/ 돈/ 폭력/ 여가/ 도락이라는 6개의 테마로 나누고 각 테마당 2~5개의 글이 딸려 있다. 위의 두 책이 취했던 목차와는 사뭇 다르다.
각각의 글 또한 잡지에 실렸던 글이라는 것을 반영하는지, 꽤 흥미진진하게 보이는 제목들로 하나의 테마에 대해 다룬 글들이다. 예를 들어 {비밀스러울 것도 신비스러울 것도 없는 성전 기사단}(신앙과 성직자), {고리대금업자의 저주받은 삶}(돈), {사형은 공공연한 구경거리}(폭력) 등이다.
중간중간에 중세의 우화시에 대한 글이 3편 있는데, 그것이 이 책의 별미이다. 각각의 글은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글을 썼으며, 특별히 어렵지 않고 쉽게 풀어쓴 편이다. 분량도 적다.
다만 이 책은 한 권만으로 중세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점이 흠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중세사와 중세사회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추고 나서야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즐길 수 있다. 이 책이 일상생활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한 각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를 모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쉽게 쓴 글이지만 실제로는 웬만한 교양이 되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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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11.01.01 02:12 댓글 수정 삭제
    pena님 리뷰의 매력 중 하나는 뭐래도 천연덕스럽게 슬쩍 넣는 촌철살인 문구들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