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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항해술

어슐러 K. 르 귄, 김지현 옮김, 황금가지, 2010년 7월


pena (pena12@naver.com)



 작법서라는 면에서 봤을 때, 칼럼에 가까운 아이작 아시모프의 책을 제외하고 4종은 모두 지극히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측면에서 글쓰기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러한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한마디로 말해 이미 데뷔했지만 뜨지는 못한 작가 또는 데뷔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을 위한 책들이다.

 나는 글쓰기를 자기표현이나 정신 치료법, 혹은 영적인 모험으로 논하지 않으려 한다. 글쓰기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글쓰기란 처음도 마지막도 예술이고, 기술이며, 제작이다. 무언가를 잘 만드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 일이고, 온전한 정신을 찾는 일이고, 영혼을 따르는 일이다. 무언가를 잘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에는 당신의 일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럴 가치가 있다.
― pp. 11~12

 르귄은 위와 같이 말하면서 잘 훈련된 예술가로서 작가의 작업을 논한다. 또한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환경에 의하여, 또는 자기 의지에 의하여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믿었지만). 작가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자질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씩은 문필가나 소설가의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 재능은 더욱 갈고 닦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책을 쓴다는 것부터가 시간 낭비일 것이다.
― p. 18

 나는 지금 간단한 두 가지 명제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의 중심부에 접근하려 한다. 첫째, 좋은 글을 쓰려면 기본을( 어휘력, 문법, 그리고 문체의 요소들을) 잘 익히고 연장통의 세 번째 층에 올바른 연장들을 마련해 둬야 한다. 둘째,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 pp. 172~173

 딘 쿤츠의 경우 책 제목에서부터 그냥 소설을 쓰는 방법이 아닌 ‘베스트셀러’를 쓰는 방법이라고 할 정도로 직업적이고 전투적으로 접근한다. 심지어 딘 쿤츠는 글 쓰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태도마저 못마땅해한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 생활이란 주제에서 더 자세하게 말하겠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책 또한 글쓰기를 일상의 행복이나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을 법한 취미,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한 방편 등으로 보지는 않는다. 작가란 직업에 대해 가장 유머러스하고도 얄밉게 잘난 체 떠드는 것이 아시모프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요점을 파악할 수 없거나 쓰고 쓰고 또 썼는데도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고 거절 편지만 잔뜩 쌓인다면 당신은 작가가 될 재목이 아니니 외과의나 대법원장이나 미합중국대통령처럼 약간 열등한 직업으로 만족하라나.


 2. 이야기와 플롯

 ‘내 글이 플롯이 좋다고 하던데 난 그냥 쓴 것뿐이라 딱히 비결은 없는 듯, 다만 이야기를 하라면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라는 태도로 말하는 아시모프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사람이 가장 다양하고 대립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이 영역이다.

 아시모프는 플롯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플롯은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윤곽을 잡는 일이다. (중략)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이해해야 하는 사실은 플롯이 곧 소설은 아니라는 점이다. 해골이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플롯은 작가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해골이 고생물학자에게 실마리가 되어 오랜 옛날에 멸종된 동물들의 생김새를 추측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생물학자는 해골에다 내장기관이나 근육, 피부 같은 걸 채워 넣고 붙여주어야 한다. 상당히 숙련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아닌 사람에게 햄릿의 플롯을 줘본들, 그 사람이 햄릿은커녕 읽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낼 리 만무하다.
― pp. 124~125

 딘 쿤츠는 플롯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아래와 같은 발언은 다분히 누군가를 의식하고 한 것으로 보인다.

 가끔 플롯이 모두 등장인물의 행동에 맡겨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평론가나 작가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미리 마련된 줄거리는 어떤 것이든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작가들이 소망하는 것은 오로지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얘기 줄거리를 잡아주는 거라고 한다. 어딘가 아리송한 이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보다 ‘자연스러운’ 줄거리가 얻어진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말이다.
― p. 39

 딘 쿤츠의 책은 스티븐 킹의 책이 나오기 거의 20년 전에 나온 것이고, 그가 이 책을 썼을 때에 스티븐 킹은 신인작가였으므로 정말로 이 발언이 스티븐 킹을 겨냥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스티븐 킹이 플롯에 대해 하는 말을 보면 위의 말과 대조되어 웃음이 난다.

 그렇다면 플롯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대답은―――적어도 내 대답은―――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플롯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첫째, 우리의 '삶' 속에도 (설령 합리적인 예방책이나 신중한 계획 등을 포함시키더라도) 플롯 따위는 별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둘째, 플롯은 진정한 창조의 자연스러움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소설 창작이란 어떤 이야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신념이다. 작가가 할 일은 그 이야기가 성장해갈 장소를 만들어주는( 그리고 물론 그것을 받아 적는) 것뿐이다. (후략)
 (전략)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의 유물이다.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연장통 속의 연장들을 사용하여 각각의 유물을 최대한 온전하게 발굴하는 것이다. (후략)
 (전략) 그런데 플롯은 너무 큰 연장이다. 작가에게는 착암기와 같다고 해도 좋겠다. (중략) 착암기는 너무 투박하고 기계적이며 파괴적이다. 플롯은 좋은 작가들의 마지막 수단이고 얼간이들의 첫 번째 선택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플롯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게 마련이다.
― pp. 199~200

 그럴듯한 어떤 상황만 있으면 플롯 따위는 의미를 잃고 만다. 그래도 나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가장 흥미진진한 상황들은 대개 '만약'으로 시작되는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후략)  
 그러나 스토리와 플롯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스토리는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반면, 플롯은 교활한 것이므로 가둬놓아야 마땅하다.
― pp. 207~208

 스티븐 킹과 딘 쿤츠는 이렇듯 플롯의 실용성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 이것은 딘 쿤츠가 작가가 이야기와 그 외 요소를 모두 통제하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스티븐 킹은 이야기 그 자체를 자유롭게 잘 살리는 것이 곧 통제이자 솜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을 법한 어슐러 르귄과 스티븐 킹은 이야기의 이러한 자연발생설(?) 관점을 함께한다. 가정 환경과 성별, 세대, 쓰는 글의 장르와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이렇게 비슷한 말을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아래는 [글쓰기의 항해술]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건과 플롯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스토리는 꽤 초라하다. 그리고 사건도 플롯도 없는데 훌륭한 스토리들이 종종 있다. 내 생각에, 플롯이란 사건들을 보통 연쇄적인 인과관계로 탄탄하게 연결함으로써 스토리를 말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플롯은 멋진 장치다. 하지만 스토리보다 우위를 점하지는 않으며 필수적이지도 않다. 사건에 관해서라면, 스토리는 움직여야만 하며 무언가가 일어나야만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건이라고 해도 그저 도착하지 않은 편지나 말하지 못한 생각이나 여름날의 경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격렬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면, 그건 오히려 스토리가 사실상 전혀 없다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 pp. 149~150

 플롯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일곱 개, 열두 개, 서른 개라는 각각 다른 설이 있다). 반면, 스토리의 수에는 제약이 없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서로 만날 때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컨트리 가수 윌리 넬슨이 노래를 어디에서 따오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공기가 멜로디로 가득 차 있어서 그저 손만 뻗으면 됩니다."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당신은 그저 손을 뻗으면 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글을 쓰기 전에 탄탄하고 정교한 플롯을 먼저 짜야만 한다는 관념에서 여러분을 풀어주고자 함이다. 플롯이 당신이 즐겨 쓰는 방식이라면야 물론 그렇게 쓰면 된다. 하지만 당신이 플롯을 즐기지 않고 계획에 약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세상은 스토리로 가득하다. (중략) 인물 한두 명이나 대화 한 토막이나 상황이나 장소만 있으면 그 안에서 스토리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글을 쓰기 전에 대체적인 방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만 가늠해 보면, 나머지는 글을 쓰는 동안 저절로 해답이 나온다. 나는 '글쓰기의 항해술'이라는 내 표현이 마음에 드는데, 사실 스토리의 배란 마법의 배다. 배가 자기 경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륜을 잡은 사람의 의무란 배가 자기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일뿐이다.
― pp. 150~151

 내 안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내 목적이며, 나는 그 수단이다. 내가 나 자신을, 자아를, 견해를, 정신적인 잡동사니를 치운다면,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을 찾고 이야기의 움직임을 따른다면, 이야기는 스스로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한 모든 것은, 당신의 이야기가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놔두기 위한 준비사항이다.
― p 189

 특히 마지막 부분은 스티븐 킹이 이야기를 잘 쓰기 위해서는 연장통의 연장을 잘 갈아둬야 한다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그럼에도 스티븐 킹이 스토리와 플롯 중에서 스토리의 손을 확실히 들어준 반면, 르귄은 좀 더 조심스럽다.

 클라이맥스는 여러 종류의 기쁨 중 하나다. 플롯은 여러 종류의 스토리 중 하나다. 강력하고 균형 잡힌 플롯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대대손손 쓸 수 있다. 플롯은 초심자 작가에게 매우 귀중한 서사 형식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가장 진지한 현대 소설들은 플롯으로 환원될 수 없거니와, 치명적인 손해를 보지 않는 한 작품 자체 언어 외의 다른 방식으로 바꿔 말할 수 없다. 스토리는 플롯에 있지 않고 말하기에 있다. 움직이는 것은 말하기다. (후략)
 변화는 이러한 모든 스토리의 보편적인 원천이다. 스토리는 무언가 움직이고, 무언가 일어나고, 무언가가 누군가가 변하는 것이다.
― pp. 184~185

 오슨 스콧 카드는 플롯과 스토리에 대하여 논하거나 논쟁하지는 않지만, 소설의 구조를 환경 이야기, 착상 이야기, 인물 이야기, 사건 이야기라는 4가지 구조로 정리하고, 각 구조에 따라 이야기가 시작하고 끝나는 점이 따로 있음을 논함으로써 플롯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한다.

 이야기꾼이 환경에 가장 신경을 쓰고, 세계를 탐험하고 발견하는 것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다면 환경 이야기 구조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점은 이방인이 도착하는 지점이며 그가 떠나거나 혹은 떠나지 않기로 결정할 때 끝난다. 전에는 몰랐던 정보를 인물들이 이야기의 진행 과정 속에서 발견해가는 것을 착상 이야기 구조라고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시작하고 의문이 풀리면서 끝난다. 인물 이야기는 인물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공동체 안에서 인물이 겪는 역할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요 인물이 현재의 자기 역할에 아주 불행해 하고 안달하거나 화가 나서 변화를 시도할 때 이야기가 시작하고, 새로운 역할에 정착하거나 투쟁을 포기하고 과거의 역할에 안착할 때 끝난다.

 사건 이야기에서는 무질서나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시작해서 새 질서가 성립되는 것, 또는 옛 질서가 회복되는 것, 또는 질서가 파괴되고 세계가 혼돈 속으로 몰락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야기는 세계가 무질서해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 질서를 확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행동을 하는 인물이 투쟁에 얽히게 되는 것에서 시작하며, 화자가 아니라 초점인물이 세계 상황에 대해 우리를 안내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조그만 것으로 시작해서, 차츰차츰 시야를 전 세계로 넓혀나가라. 만약 당신이 독자에게 먼저 주인공을 알게 하고 관심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세계를 구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독자가 큰 그림을 알게 될 시간은 매우 많은 것이다.
― p. 155

 그러나 5권의 책 모두 ‘문학적’인 기법이나 언어의 고양, 언어의 성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모험이 아닌 ‘이야기’를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같다.
 스티븐 킹 책의 한국판 제목은 밑의 발췌문에서 나왔는데, 이 문단이야말로 그 사실을 잘 설명하는 글이다.

 언어도 날마다 넥타이를 매고 정장 구두를 신을 필요는 없다. 소설의 목표는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독자를 따뜻이 맞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좋은 말솜씨도 역시 유혹의 일부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토록 많은 남녀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곧장 침대로 직행하겠는가?
― p.16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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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ㅁㄴ 10.10.30 16:58 댓글 수정 삭제
    이야기꾼이 환경에 가장 신경을 쓰고... <-이 부분은 혹시 박스 안에 들어가야할 내용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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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0.10.30 18:49 댓글 수정 삭제
    글자 그대로 발췌한 부분만 박스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요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박스에 넣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