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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스 사이버펑크

초여명 편집부, 초여명, 2000년 2월


senyor (http://blog.naver.com/garleng garleng@naver.com)



1. 들어가는 글

이 책은 원래 TRPG(Table-talk Role Playing Game)를 위해서 나온 보조 자료이다. 미국의 TSR 사가 자사의 중세 배경 워 게임이었던 ‘체인 메일’을 기본으로 해서 각 플레이어가 움직이는 게임 토큰에 ‘인격과 개성’과 ‘경험을 통한 성장’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고 거기에 마법과 다양한 괴물들로 대표되는 하이 판타지 적 요소가 도입된 배경 세계 설정을 덧씌워서 만든 던전스 앤 드래곤즈(Dungeons & Dragons)를 통해 TRPG라는 게임 형태가 최초로 확립되었고, 그 이후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럽과 일본으로 퍼지면서 저마다 다른 규칙과 지향점을 가진 수많은 시스템들을 낳았다. 그 중 미국의 스티브 잭슨 게임즈 사가 만든 시스템이 겁스(GURPS, Generic Universal Role Playing System)였다.


겁스는 ‘지구의 중세 유럽과 비슷하되 마법과 괴물들이 존재하는 환상적인 세계에서의 모험과 영광’을 주제로 하는 던전스 앤 드래곤즈나, ‘뱀파이어나 워울프와 같은 괴물들이 어둡고 음울한 세계 속에서 인간들 틈에 섞여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한 괴물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성을 탐구한다’는 주제를 가진 월드 오브 다크니스(The world of darkness)와는 달리 어떤 배경, 어떤 장르, 어떤 주제 하에서도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핵심 규칙을 우선 제시하고는 다양한 보조 자료들을 통해서 그를 지원한다는 독특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이 책 [겁스 사이버펑크]는 겁스라는 시스템을 통해 게임을 하면서,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를 비롯한 다양한 사이버펑크 SF작품들에서 묘사되는 ‘회색의 미래 도시와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진 가상공간’, ‘빈곤하고 퇴폐적인 하류 사회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상류 사회’, 그러한 것들 사이에서 흐르는 불온하고 반항적이며 투쟁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그리고 그 세계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이야기 거리가 있을 수 있는 지를 다양하게 제시해 보이고 있다. 이 책은 비록 게임을 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써 씌어진 것이지만, 사이버펑크 장르의 정의에서 시작하여 [뉴로맨서]를 시작으로 해서 80년대까지 꾸준히 나온 다양한 사이버펑크 작품들에서 다뤄진 주제 의식들이나 인물 유형, 갈등 양상, 각종 소도구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다루고 있기에 TRPG를 할 생각이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사이버펑크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개론서라는 느낌으로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2. 작품에 대해

서문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대한 정의, 겁스라는 TRPG 시스템에 대한 간략한 설명(자세한 설명은 핵심 규칙에 나와 있다), 그리고 사이버펑크 장르가 TRPG라는 게임 형태에 있어 어떻게 적용되야 할지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 [겁스 사이버펑크] 룰북 원서 목차(이미지 발췌 Amazon.com).

캐릭터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인물상의 면면들을 제시하고(건달, 경찰, 기술자, 네트러너, 브로커, 용병, 자객 등) 그런 인물들이 가질 수 있는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장단점들과 기능에 대해 다루고 있다. 대부분은 핵심 규칙에서 이미 다뤄진 내용이지만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서 그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그리고 사이버펑크 세계에 알맞은 새로운 장단점(신체의 면역 체계가 기계를 거부해서 인공 기관을 이식하지 못한다거나, 걸핏하면 인공 눈을 빼서 검사하는 버릇이 있다거나)과 기능들에 대한 소개도 충실하다. 사이버펑크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 등의 픽션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인물상이 망라되어 있다(깁슨의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는 네트러너에 해당되고 그의 파트너인 스트리트 사무라이 몰리는 경호원에 해당한다는 식으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국가’가 쇠퇴하고 민족의 개념이 희미해진 자리에 다국적 거대 기업이 진정한 권력으로 군림하는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부와 지위, 명성이 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게임 환경 상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 지 등에 대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는 챕터.

사이버웨어 굳이 사이버펑크만이 아니라, 사이버펑크를 포함한 SF 장르에 대해 일반적인 독자들이 외계인, 로봇과 더불어 가장 자주 연상하는 것들 중 하나인 인공 신체 기관(인공 눈, 인공 팔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챕터이다. 팔, 다리, 눈 등 겉으로 드러나는 기관을 바이오닉, 수중에서도 호흡할 수 있게 해 주는 인공 폐 등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관을 임플랜트로 구분해서 다양한 예시를 들고 있다.

기술과 장비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기술이 어느 정도나 발달되어 있으며 어떤 종류의 장비들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이버펑크만이 아니라 SF장르 전반에서 흔히 등장하는 레이저 병기, 가우스 바늘총, 생화학 장비 등 무기만이 아니라 통신 및 기록 장비, 센서 및 과학 장비, 개인용 차량 등에 대해 60여 페이지를 할애하여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이버펑크 픽션에서 자주 나오는, ‘인간의 정신을 롬에 복사한 물품’인 브레인 테이프와 클론, 두뇌 이식 기술 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 [겁스 사이버펑크] 룰북 원서 ‘캐릭터’ 부분(이미지 발췌 Amazon.com).

네트러닝 이 책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사이버펑크 픽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 ‘사이버 스페이스’에 관한 챕터이다.

물론 사이버펑크 물이라고 해서 꼭 네트가 중심이 되는 건 아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제한된 수명의 인격체인 레플리컨트와 탈주한 레플리컨트를 잡아들이는 특수 경찰을 통해 인간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조명하고 있고, 영화 [토탈 리콜]은 가상의 기억을 심는 기술을 통해 기억과 망각, 그리고 자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이버펑크는 투쟁으로 정의되는 장르이지 컴퓨터로 정의되는 장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이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공각기동대]를 비롯해 선구자적인 몇몇 작품들이 ‘오직 그러한 배경 하에서만 있을 수 있는 투쟁’을 제시해 보임으로써 네트워크는 사이버펑크 장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챕터에서는 네트의 개념과 구조, 배경 세계의 기술 발달 정도에 따른 네트의 적용 방식에 대한 조언을 시작으로 컴퓨터의 종류, 사용, 프로그램 저장, 가상 현실 게임, 해킹,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만남과 전투(다른 사용자나 해커, 혹은 보안 프로그램과의), 네트의 지도, A.I, 해킹 프로그램과 보안 프로그램의 종류, 보호된 정보에 대한 ‘오프라인’으로부터의 접근 요령 등을 다루고 있다.


▲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 그리고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1995).

고속 인터넷이 표준화되어 있고 테라바이트 단위의 저장 매체가 시판되고 있는 21세기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 낡은 설정들도 있지만 이 책이 나온 당시에는 놀라운 내용들이었고, 실제로 출판사인 스티븐 잭슨 게임즈는 ‘컴퓨터 통신 네트워크 및 해킹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 CIA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했다. 해킹을 통한 사이버 범죄를 비롯해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해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예시를 비롯해서 게임에 도입할 수 있는 시나리오 소스에 대한 아이디어들도 제공하고 있다.

배경 세계 네트러닝 챕터와 더불어,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챕터이다. 캐릭터 챕터, 사이버웨어 챕터, 기술과 장비 챕터가 각각 사이버펑크 세계의 인물들, 인공 신체, 존재하는 기술과 그를 통해 만들어진 물품들(무기부터 약물까지)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 성격에 가깝고 네트러닝 챕터는 네트의 개념과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거기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개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챕터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이버펑크 세계란 어떤 곳이며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시나리오 소스들이 있는지에 대해 총체적으로 짚어 보이고 있다.

[뉴로맨서], [Burning Chrome], [아이도루], 혹은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는가] 등의 사이버펑크 작품에서 흔히 제시된 모습들인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된 환경오염, 수백 킬로미터 단위로 어지럽게 뻗어나간 인구 과밀 구역, 클론의 정체성 혼란, 폭력적인 수단으로 대기업의 환경 파괴에 저항하는 에코 테러리즘, 화려한 인기 스타와 그에게 열광하는 대중 등의 면면을 의학, 교통, 전기, 경제, 식량, 정치, 사회 등의 분야 별로 제시하는 형태로 사이버펑크의 세계상을 보여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여지가 있도록―――그리고 게임을 하면서 그러한 상상을 구체화시키고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다양한 화두를 던져준다. 클론에 대해서만 해도, 그가 법적으로 ‘정상인’ 내지 ‘자연적 인간’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가 아니면 재산이나 실험 대상 정도의 지위를 갖는가? 법적 지위가 없는 클론을 죽이는 것은 살인인가? 자기 자신의 클론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인가? 등의 이제는 진부해진, 그러나 ‘질문’만 진부해졌을 뿐 여전히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을 독자에게 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게임 세계가 보다 더 풍성해질 수 있으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와 [아이도루], 그리고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그 외에도 사이버펑크 세계의 정치 체제를 다루고 있는 대목에서 ‘민주주의라고 해서 자유롭고 억압 없는 사회가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모든 것을 투표로 결정한다 해도 매우 억압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투표 결과를 조작하지 않는다 해도 암울하고 희망 없는 사이버펑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유권자가 투표를 포기할 수 있으며, 유권자의 10%만이 투표를 한다면 전체 인구의 5.1%만으로도 다수를 만들 수 있다’고 적혀 있는 부분이나 사회상을 다루고 있는 대목에서 ‘인공 팔 등의 사이버웨어를 두고서 그것은 세상이 전부 망가졌기 때문에 인간도 자신을 망가뜨려야 거기에 대처할 수 있다는 불안 심리가 반영된 자기 파괴일 수 있으며, 기계와 생체가 공존하는 사이보그의 육체는 그가 속한 사이버펑크 세계의 숱한 모순과 갈등을 비유적으로 나타나는 걸로 볼 수 있다’고 적힌 부분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결코 가볍게 넘기기 힘든 울림을 가지고 있다.

캠페인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이 챕터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게임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 게임 참가자들 간의 조율, 각 참가자들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의 구성, 사이버펑크 특유의 ‘투쟁’적인 면모 중 어떤 것을 부각시킬 것인가(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경제적 투쟁이냐 세계를 보다 ‘합당한’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자들 간의 정치적 투쟁이냐 등) 등.


3. 나오는 글

21세기 현재, SF의 하부 문학 장르로써의 사이버펑크는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고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는 Cyber와 Punk로 나눠볼 수 있는데, Cyber에 해당하는 ‘과학 기술’은 당시의 사이버펑크 픽션에서 묘사된 종류의 기술 상당 부분이 이미 실현되면서―――가상현실과 같은 일부 개념은 향후 최소 수십 년 간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특유의 경이감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Punk에 해당하는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은 히피 문화의 몰락과 동구권의 해체, 신자유주의의 득세 등을 거치면서 힘을 잃어버리고 급진적인 혁명과 변혁의 기운이 전 세계적으로 활력을 잃어버림과 함께 사그러 들었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는 오직 ‘사이버펑크이기에 표현 가능한 것들’을 이미 대부분 소모해 버렸다는 것이 팬덤에서의 통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은 영미권과 유럽에서만 유효하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수십 년 간 수탈당하다가 너무 갑작스럽게 해방되었고, 6ㆍ25 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유럽이 수백 년에 걸쳐 이뤄 온 변화를 50년 만에 이뤄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 그리고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후유증이 어떤 상흔을 남길 지에 대해 제대로 고찰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이했다. 외부의 지원에 힙입어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진보는 이뤘지만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 버렸고, 한국인의 정신은 아직도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부조화가 아직도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기술과 인간이 상호 작용하면서도 그 양상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으며 육체와 정신이 균형 잡혀 있지 못한 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한 사이버펑크 세계와 기묘하게 닮아 있다. 물론 현실은 사이버펑크 픽션에서 흔히 다뤄지는 것처럼 일본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도 않고, 기업이 정부를 집어 삼키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부분―――‘괴리’와 ‘투쟁’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사이버펑크 세계는 현재의 한국과 닮아 있다. 그리고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사이버펑크 작품을 읽는다는 게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단순한 게임의 보조 자료가 아니라 장르 자체에 대한 개론서에 가까운 이 책은, 그러한 맥락에서 아직까지도 한국의 SF 팬에게 있어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추신. 배경 세계 챕터의, 사이버펑크 세계에서의 기업에 대한 언급은 특기할 만 하다. “……물론 기업의 목적은 정부와 다릅니다. 정부는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돌봐야 합니다. 기업은 주식 및 채권 소유자, 고객, 납품 업체, 직원, 경영진 등 기업의 성공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이익만을 보장하면 됩니다. 물론, 사회 전체가 여기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경쟁자, 너무 가난해서 기업의 고객도 무엇도 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기업 사회의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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