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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blog.naver.com/paswonik paxwonik@naver.com)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히로키만의 '오타쿠-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 책에 서술된 바의 독특함이 있다면, 그것은 오타쿠에 대한 '철학적' 혹은 보기 드문 고유한 '비평적-비판적' 시점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의 고유함을 해명할 때, 그리고 그것이 특히나 어떤 저널리즘적 관심사 속에 흔히 놓이곤 할 때, 오히려 우리가 더더욱 그러한 대상에 대한 '비평적' 태도를 취하기 힘들기 때문은 아닐까? 이것은 통상적인 '대중문화 비평'에 대한 세간의 감각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법도 하다. 


 ▲ 월간지. [GQ Korea 지큐 2009.8], [Esquire 에스콰이어 2009.9]

 그런데 사실 이 점은 대중문화를 '비평'하겠다는 야심가(이것은 실로 대단한 '야심'이 아닐 수 없다)들 가운데서도,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독자들 가운데서도 철저히 몰인식되어 있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분석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사회학적-문화론 고찰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GQ나 에스콰이어와 같은 잡지에 실리곤 하는 소녀 댄스그룹과 팬덤현상(오덕질)에 대한 사뭇 진지한 고찰들이다. 예를 들어서 한 평자는 어떤 소녀그룹의 멤버들에 대한 호불호가 어떤 세대론적 함의를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애교삼아, 말미에 사족으로 필자 자신의 제시카에 대한 애정을 피력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평이라면, 사실 조금이라도 냉소적인 자의식이 있는 소비자라면 되는대로 지어낼 수 있는 흔한 것이라서, 더 이상 비평이라고 할 수조차 없지만, 어쨌든 이것들은 '비평'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팔리며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부도덕의 극치라고 말해볼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수행하곤 하는 것은 실로 비평이라기보다는, 혹은 정확히 말해서 하나의 담론이나 사유라기보다는, 상품 카탈로그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반-자본주의적 예리함을 가지고 수행되는 비판적인 문화비평의 전통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러한 문화비평에 수반되는 '비판적 자의식'이 오늘날의 대중문화 비평을 자처하는 상품카탈로그의 바로 그 항목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도르노의 흉내를 낼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는 하나의 아포리아를 발명했다고 의기양양해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이 어째서, 대중문화의 주요요소인 '오타쿠 문화'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근대문학이나 근대미술에 관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비평'이며 속류 저널리즘과 무관한 비평적 관점이 여전히 살아 있는지에 대해 살펴봐야할 것이다. 사실 정작 근대문학이나 근대미술에 대한 비평이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진지 오랜 이 시점에서, 예기치 못한 영역에서 수행된 이러한 '비평'이야말로 놀라운 것이다. 히로키의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놀라야만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동시대의 작품들을 거론하며 그의 오타쿠 취향을 드러내는지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가 오타쿠에 대한 하나의 정확한 비평이 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에 대한 비평적-비판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 디지캐럿. 일본의 캐릭터상품 제작사 주식회사 브로콜리의 캐릭터 기획 상품. 1998년 브로콜리와 동사가 운영하는 캐릭터샵 '게이머즈'의 마스코트 캐릭터로 등장한 이후, 사컷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으로 발전하면서 인기를 모았다. 애니메이션 [Di Gi Charat]는 1999년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되어 2007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아즈마 히로키, 문학동네, 2007년 6월, 221쪽. 이미지 출처 : 디지캐럿 공식 홈페이지

 사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출판된 지 상당히 오래된(대중문화의 시간감각으로 말하자면) 이 시점에서야말로 위와 같은 놀라움이 다시 제기되기에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거론했던 오타쿠라는 하나의 대상이 결코 세대론적인 혹은 저널리즘적인 현상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차를 경유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거론하는 <디지캐럿>이라는 캐릭터 상품은 유행에서 한물 간 것이지만, 그가 그러한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오타쿠에 대해서도 '원리적인 것'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오덕후'나 '오덕'이라는 용어로 오타쿠 문화가 나름 토착화된 한국에 대해서도 더더욱 유효하다. 말하자면 특이하게도 그의 비평은, 오타쿠의 '동시대성'에 집착하는 저널리즘적 관심에 이상할만치 초연하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의 개인적인 배경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의 논의에서 오타쿠에 대한 동조의식이나, 그 취향에 대한 어떤 암시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가령 요새의 대중문화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프로이든 아마추어든 무관하게, 바로 자신의 비평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그 영역에 대한 모종의 '관심'과 '애정'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인색하지 않다. 예컨대 소녀시대에 대한 비평은 바로 제시카라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등가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말도 다 애정이 있어서 하는 거야"라는 담론적 자기정당화가 대중문화 비평이나 대중문화 소비자들 가운데 이루어질 때, 이것은 물론 천박한 자의식에 불과하다. 천박한 대상에 대해 비평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자의식 속에서 진정한 '비평적 관심'이란 사장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게 필연적인 수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자의식 자체는 문단문학의 전통 자체에서부터 도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현상은 예컨대 '근대문학'과 '근대미술'의 비평(한국의 이 영역에서 이뤄진 비평들이 자족적이기는커녕 장식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에서 유래했으며, 그러한 영역에서의 곤궁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말해 근대문학이 망해가고 있는 와중에, 대중문화의 비평도 이미 같이 글러먹을 수 밖에 없다는 기묘한 동조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왜 우리가 근대문학의 치졸한 (비평적) 자의식에 대해 비판하면 비판할수록, 그것의 외부에서 대안을 얻는 것이 더더욱 불가능해지는지에 대한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한 자의식은 비단 근대문학 자체만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자의식이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다른 영역으로 전이되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 [근대문학의 종언](가라타니 고진, 비(도서출판b), 2006년 4월)

 일본의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을 수호하겠다는 비평가의 결연한 자의식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할 때, 그는 진실로 그만의 비평을 다름아닌 '근대문학'의 영역에서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칸트와 맑스를 재독해하겠다는 결의를 수행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그의 테제는 결코 "근대문학에 대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이제 그만 아니메나 장르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말과 동일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히로키의 작업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비평이 '근대문학'에서 시작되든 혹은 '오타쿠 문화'에서 시작되든, 중요한 건 그것이 수행되는 영역 혹은 그 비평에서 다뤄지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취하든 간에 동일하게 유지되어야만 하는 비평적 '태도'일지도 모른다. 혹은 바꿔 말해 우리는 고유한 비평적 욕망에 대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적 욕망은, 그것이 근대문학 혹은 일본 내의 문단문학을 향해 있을 때조차 그것은 결코 근대문학의 욕망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진정한 비평가로 만드는 것이다. '오타쿠'에 대한 히로키의 태도 아니 욕망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히로키 자신이 오타쿠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오타쿠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오타쿠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할 때조차, 그는 결코 오타쿠의 욕망과 동일한 수준에서 발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히로키에 대한 세간의 통념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역으로, 우리나라의 비평은 어떤가? 대표적으로 문학에서의 비평은 어떤가? 혹자는 히로키를 두고 '오타쿠'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거기에 대해서 공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실에서 일급의 소설가나 시인이 동시에 일급의 비평적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거액의 상금이 달린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즐겨 초청되는 것을 볼 때, 역으로 우리나라의 문학현실이야말로 더 '오타쿠'스럽다고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누군가 문학에 대해 뭔가를 발언할 때, 그 혹은 그녀는 동시에 훌륭한 문학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문학의 숭고한 사명을 수호하겠다는 욕망의 어떤 연장선상에 있는 사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인터넷 "덕질"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형적이다. 소녀시대에 대한 비평적 관심은, 그것에 대해 제 아무리 지적인 거리를 둔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것에 대한 상상적 애착과 이미 구분 불가능하다. 동시에 환상문학 커뮤니티에서, 환상문학에 대한 비평적 욕망은 동시에 환상문학의 발전에 대한 이러저러한 제언으로 환원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히로키가 말한 '동물화' 현상은 단순히 오타쿠 문화에 고유한 무언가가 아니라 이미 '전면적'인 것이다. 문단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히로키 자신이 발언하는 지점은, 오타쿠의 욕망과 무관한 지점에서 말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적어도 그는 비쥬얼 노벨의 캐릭터의 모에요소를 분석하는 데, 그리고 그것을 '비평'이라고 믿는 오타쿠처럼, 자신의 지적 역량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을 읽을 때, 그러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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