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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비단길 밟기

2008.11.28 23:2211.28




정원사 (askalai@gmail.com)



얼마 전에 KBS에서 준비한 다큐멘터리 [누들 로드]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전작인 [차마고도]가 워낙 훌륭했던지라 기대가 크다. 그런데 찻잎길에 이어 국수길이라. 어느 것이나 오랜 옛날부터 이어지는 문명 교류의 역사를 밟는 길. 아무리 새로운 길들이 속속 조명된다고 해도 무역을 통한 문명 교류의 길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비단길 아니겠는가.

   실크로드, 혹은 중앙아시아의 모래 속에 묻힌 오아시스 도시들의 이야기에는 아련한 향기 같은 것이 있다. 잘 몰랐을 때도 그랬고, 조금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렇다. 하나의 나라나 지역으로서보다 비단 교역의 ‘길’로 더 잘 알려진 곳. 그만큼 부침이 심했던 역사. 생산물이 적은 척박한 환경인 탓에 교역로가 끊기면 급속도로 사그러들었지만, 번성했던 시기에는 어디보다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문명……. 비단길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세계는 광대하고 깊다.  



▲ 둔황(敦煌, Dunhuang)에서 발견된, 실크로드의 교역을 그린 그림. 실크로드는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한 수만 갈래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 그물 모양의 범세계적 교통로다.

   비단길은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지만 이 분야 연구에는 아직도 공백이 많고, 한국에는 더구나 자료가 적다. 지금 서점에서 찾을 수 있는 ‘실크로드’ 관련 책의 대다수는 기행문과 여행기다. 하여, 혹시라도 책을 찾는 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필자가 재미있게 읽은 책 몇 권을 정리해보았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출판사, 2000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 실크로드 유물이 상당량 전시되어 있음을 아는지? 이 유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집한 것도 아니고, 화려한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한 것도 아니다. 아니, 약탈한 물건이 맞긴 한데 우리 손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오타니 원정대가 일본에 가져가지 않고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바람에 우리 손에 남은 유물이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바로 그 시대에 이 지역에서 벌어진 발견과 약탈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막에 뛰어든 학자들에게는 탐구심과 더불어 공명심, 경쟁심이 크게 작용했다. 스벤 헤딘, 스타인, 르콕, 펠리오, 랭던, 오타니 등이 행한 일은 지금 와서는 도저히 좋게 포장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그럴 만한 면이 있었다는 점도 감안은 해야 할 것이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탐사자들―――‘악마들’ 자신들만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이른바 수집가라는 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많은 유물이 흘러나가고 있는지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어린 시절 필자는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에 열광했었다. 그런데 학자로 나오면서도 오지에 들어가, 위험한 원주민들의 공격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보물(그것도 꼭 황금빛으로 번쩍이는)을 들고 나오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이전 세기 실크로드의 약탈자들 그대로다. 그 모습에 열광하는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저자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보이려 노력했으나 그 자신이 속한 문명에 대해 변명하고 있으며, 일정한 편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이 남는다. 이런 한계점은 역자의 뛰어난 서문과 주석이 훌륭히 보완해주고 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면, 혹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물음은 언제나 헛된 것이다. 사람이 과거를 묻고 알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이다. 물론 과거의 일 자체가 재미로 다가올 수는 있지만 말이다. 지식의 가치는 편견을 떨치고 시야를 넓히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일단 재미있게 읽고, 그 다음에 현재의 우리의 모습, 그리고 저들의 모습을 생각케 하는 좋은 책이다.





황하에서 천산까지
김호동, 사계절출판사, 2002년 5월

   한편 중앙아시아사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학자 김호동이 쓴 에세이 [황하에서 천산까지]는 또 다른 실크로드를 보여준다.

   “우리는 곧잘 강한 자와 강한 민족의 역사에 매료된다. 위인과 영웅의 생애를 즐겨 읽는 것은 어쩌면 우리 내면에 ‘권력에의 의지’가 꿈틀거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지배했던 파라오나 시저 혹은 징기스칸을 읽고 싶어한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는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약하고 짓눌려 온 민족들의 비가를 들려 주고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려 했던 신앙의 자취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을 듣고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단지 오늘날의 중국을 더 깊이 이해한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이 시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참된 마음의 넓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저자 서문 중에서

   글은 담담한 어조로 회족, 몽골족, 위구르족과 티벳인들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지금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열광적인 어조도 아니고 과장스럽지도 않은 담담함.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사람살이의 눈물을 보는 건 필자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란 결코 선하게 태어난 생물이 아니며 생명이란 그저 화학반응의 일종, 사회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고 살아가는 치열한 경쟁터일 뿐이라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하는 오만을 비웃다가도, 문득 마음 한구석이 싸해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맞닿뜨린다. 어째서 사람의 사람다움은 행복과 풍요 속에서가 아니라 절절한 고난과 아픔 속에서 빛을 발하는지.

   그러나 저자도 그렇고 나도 또한, 그들 중국의 소수민족이 언제나 마음아픈 약자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으며 지금의 강자들 또한 한맺힌 시간을 보냈음을 안다. 또 짓밟히고 헐벗은 자들이라 하여 늘 그렇게 아름답고 꿋꿋하지 못함 또한 안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작은 목소리의 주인들을 알고 싶은 것은, 사람다움이란 것의 답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믿고 싶은 가냘픈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을 비난하는 만큼 우리 안의 곪은 상처를 들여다보려고는 하지 않는 우리 나라에서 더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역사공부를 배부른 자들의 소일거리쯤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도.





실크로드 이야기
Life Along the Silk Road

수잔 휫필드, 김석희 옮김, 이산, 2001년 7월

   시간을 더 거슬러올라가 보자.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는 실크로드의 최고 번성기인 서기 750년부터 1000년(중국사에 대응시키면 당나라 시대)까지를 다루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다. 저자는 당시 자료를 가지고 상인/병사/목부/공주/승려/기생/비구니/과부/관리/화가라는 열 사람의 생애로 재구성했다. 교양 역사서와 역사 소설 양쪽의 장점을 다 취한 셈이다. 각 주인공의 인생사와 더불어 역사적인 흐름도 같이 서술되기는 하지만, 전체 흐름은 먼저 파악하고 읽는 쪽이 낫다. 개인적으로는 각 직업에 걸맞는 세부 서술이 가장 즐거웠다. 카라반의 여행준비, 요새 파견 병사들의 쓰레기 처리법, 8세기에 유행한 방중술 교본, 승방에서 돈 버는 법 등의 재미있는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어쩌다보니 비단길의 역사적인 흐름 전체를 다루기보다는 살짝 비껴간(혹은 ‘감성적인’) 책만 이야기했다. 비단길을 제대로 걸어보려면 정수일 선생의 역작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출판사, 2001년 11월)나 [씰크로드학](창작과비평사, 2001년 11월)을 잡아보는 것이 좋다. 중앙아시아 전체의 통사를 파악하려면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세, 김호동 옮김, 사계절출판사, 1998년 9월)도 읽어보면 좋다. 다만 위에 거론한 세 권 다 몹시 두껍고 학술적이라는 점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다시 재미 쪽으로 전환해서, 실크로드에 중점을 두지는 않았지만 마르코 폴로 이전 고대의 동서양 교류를 다룬 [로마에서 중국까지](장노엘 로베르, 조성애 옮김, 이산, 1998년 2월)도 흥미진진한 역사서다. 또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집 [누란]과 [돈황]은 도서관이나 중고책으로라도 찾을 수 있으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학술서도 교양서도 아닌 역사소설이지만 당시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소설 자체가 무척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혹시 [실크로드의 악마들]을 읽고 당시 탐험의 역사에 흥미를 느낀다면 스벤 헤딘의 [티베트 원정기](윤준ㆍ이현숙 옮김, 학고재, 2006년 5월)도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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