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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좀비(Zombie)의 기원은, 아프리카의 원시 신앙을 기반으로 해서 근대에 백인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기독교가 융합되어 형성된 종교인 부두(Voodoo)교의 사제 오운간이 주술로써 사역한다고 전해지는 걸어 다니는 시체다. 정확히는 오운간들 사이에서 전래되는 특수한 비약(가설일 뿐이지만, 복어가 가지고 있는 신경성 독인 테트로도톡신이 포함된다고 한다)을 통해 사람을 가사 상태로 빠뜨리고, 그 사람을 죽은 것으로 오인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면 그 이후 몰래 다시 파내서는 해독제를 먹여 가사 상태에서 깨운 뒤, 자신의 뜻대로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희생자는 비약에 포함된 독과 산소 부족을 비롯한 매장 기간 동안의 쇼크로 인해 명료한 의식을 갖지 못한 채 오운간의 단순한 명령에 복종하게 되며, 이러한 희생자는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무보수로 혹사당한다고 한다.

의학적으로는 마약 중독으로 인한 심신 상실 상태에 가깝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마치 죽은 자가 되살아난 것 같기에, 그러한 공포심을 통해 서구화의 물결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오운간들의 심리전에도 이용되었다. 아이티에서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이렇게 되살아난 이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곤 했고,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외부에 알려져서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지 로메로 감독을 비롯한 미국의 영화 제작자들이 그에서 소재를 따와서는 ‘죽었는데도 움직이고, 이성과 의지가 없으며, 인육을 탐하는 괴물’로서의 좀비 이미지를 창조했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도 좀비 영화가 흥행하면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좀비라는 존재는 서브 컬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대부분은 썩어 들어가는 시체들이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와 사람들을 습격해 그 고기를 먹는다는 자극적인 영상과 잔혹한 묘사에 의존하는 수준 낮은 작품이었지만, ‘한때 사랑했고, 죽은 이후로는 추억으로 남겨져야 할 자가 괴물로 소생해 주변 사람들을 위협한다’는 점과 좀비 특유의 ‘무의지, 무의식, 무지성’적 면모에 초점을 맞추는 등의 시도를 통해 명작으로 거듭난 영화도 많았다.

죽은 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의 폐해를 비관적으로 통찰한 <시체들의 새벽>, 단순히 끔찍한 괴물로만 보이던 좀비들이 자본가와 권력자들로 대표되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축이 되는 <랜드 오브 데드>, 좀비의 대표적인 공포인 전염성과 맹목적 폭력성을 극대화한 <28일 후>가 그에 해당된다.

그런가 하면 80년대를 풍미한 크리처 호러 물에 좀비의 존재를 끌어 들여, 돌연변이를 일으킨 쥐떼나 하수구의 거대 악어를 대신하는 새로운 ‘괴물’로 만들어 액션 활극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한 시도가 가장 성공을 거둔 경우가, 1996년 말 일본의 비디오 게임 회사 캡콤이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내놓은 호러 어드벤처 게임 <바이오 해저드>였다(영화화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초기 바이오 해저드는 좀비 학살 액션 게임이 아니라 음산한 분위기를 즐기면서 추리와 퍼즐 풀기를 통해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어드벤처 물이었고 액션은 최소한의 선에서 그쳤다).

시리즈의 히트와 함께, 하나의 고유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시들해지던 좀비물은 동 아시아 권에서 다시 인기를 모으며 부활했고 그에 민감하게 반응한 헐리웃은 발달된 CG기술을 앞세워 새로운 좀비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체의 연계 효과를 통해 게임, 애니메이션, 소설 등에서 좀비라는 존재가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매력적인 미소녀 좀비가 사랑하는 이의 손에 의해 두 번째의, ‘진정한 죽음’을 맞고자 하는 <스테이시>가 개봉했고, 뱀파이어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과학적 해석을 시도해 주목받았던 리처드 매드슨의 장편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좀비물로 바뀌어 3번째로 영화화되었고, 전 세계를 무대로 대규모의 좀비 출몰 사태가 발생했다는 배경의 전쟁 소설 <세계대전 Z>가 나왔고, 영문학 고전 <오만과 편견>을 좀비물로 재해석한 작품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가 나왔으며, 좀비들이 적으로 등장하는 FPS 게임 <레프트 포 데드>도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0년, <펭귄 뉴스>로 문단의 주목을 받은 한국의 젊은 작가 김중혁에 의해 이 책, <좀비들>이 씌어졌다.


2. 작품에 관해

주인공은 휴대 전화 회사의 안테나 수신 감도를 체크하는 게 직업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죽고, 그 후 함께 살던 형마저 죽은 뒤 혼자 남은 주인공은 형의 유품인 50여 장의 LP들을 들으면서 차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게 유일한 낙이던 그는 어느 날, 휴대 전화 전파가 전혀 잡히지 않는 곳인 이상한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일견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다른 평범한 좀비물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지루하고 낙이 없는 일상을 보내던 주인공, 사소한 계기로 인연이 이어져 만난 사람, 그 사람의 딸, 그를 통해 만난 다른 사람, 그런 사람들과 일상을 공유하면서 점차 고독을 떨치고 행복을 되찾기 시작하고, 그런 가운데 돌연히 좀비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개는 다른 좀비물과는 꽤나 다른 궤적을 가지고 있다. 보통 좀비물은 군사 연구소에서 병기로 개발된 바이러스가 유출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설정을 깔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에서 좀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그들을 만들어 낸 자들의 통제 하에 있으며 좀비들을 만들어낸 자들은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까 두려워할지는 몰라도―――작중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유추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좀비들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의 좀비들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괴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애잔하고 측은한 대상에 가깝다.

실제로 주인공과 홍이안, 뚱보 130은 좀비들을 두려워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좀비들의 습격으로 잡아먹히거나, 혹은 부상을 입고서 좀비로 변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보다는 좀비들로 인해 끊임없이 상기하게 되는 자신의 과거, 친족의 죽음, 그리고 고리오 마을 사람들, 군인들 때문에 고통 받는다. 이 소설은 활극과는 거리가 멀다. 주인공이 야구 방망이로 집에 숨어 들어온 좀비를 격퇴하는 장면도 있고, 군인들이 좀비들을 쏘아 죽이고 전자 그물로 포획하는 장면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느린 호흡으로, 사색적이고 성찰적으로 좀비라는 대상을 다룬다.

장르 문학은 대체로 무언가 문제나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으나, 순수 문학은 ‘왜, 그리고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작품의 문장이나 구성은 좀비라는 장르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 기조는 여전히 순문학의 논리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경과에 따라 다양한 각도를 오가며 사건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진 3인칭 시점으로 씌어져 있으면서도, 내내 주인공에게 초점이 맞춰진 단선적이고 직렬적인 구성도 그러한 인상을 강화시킨다.

일반적인 좀비물이라고 하기에는 ‘이야기’로서 갖는 이질성 외에, 작품 내적으로 내내 핵심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키워드는 지나간 것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착이다. 작품 초반, 주인공은 고리오 마을 사람들이 죽음을 두고 벌이는 일종의 도박인 다이토 파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알고는 이 마을의 전통 같은 것에 불과하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홍혜정에게 실망하고는 지독한 환멸을 느끼며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고리오 마을에서 백년, 이백년을 산다고 해도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도대체 뭘 알아야 하는 것일까. 죽음이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죽음은 삶의 연장전일 뿐이라는 것을? 그런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모든 걸 이해했다. 이해하고 또 이해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이해하는 것과 겪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

죽음과 삶을 다룬 많은 예술 작품은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죽은 자는 죽은 그대로 놔둬라.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그 메시지들은 저마다 양상과 맥락은 다를망정, 결과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명확하다. ‘죽음을 받아 들여라.’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몇 번이고 변주되면서 수없이 반복해서 이야기되어 왔다. 그것은 대체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심오한 경구라 해도 그 안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 설득력이 없어지는 법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죽음과 삶의 문제와 같은 심각하고 중요한 테제에 직면한 인간 앞에서는 빛이 바래고 만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역시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며 인간성의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김중혁은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담담하게 그것을 진술하고 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 오래지 않아 잊힐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최소한 자신 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쉽게 내던져 버릴 게 아니라고. 이 소설에서 김중혁은, 필연적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자신이 그것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싯귀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과거는 필요 없다, 앞만 보며 나간다’는 식의 일면적이고 단선적인 주제를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만을 보더라도, 이 작품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3. 나오는 글

해방 이후 한국 문단이 리얼리즘에 천착한 나머지,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날의 관점에 얽매여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점차 고루하고 폐쇄적으로 변해간다는 지적은 비단 공포, 판타지, SF, 추리 등 문단 외곽에 위치한 장르 영역의 작가들만이 아니라 내부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나왔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 박민규, 김영하, 윤이형 등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이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 간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시도를 반복하며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혀 왔고, 그러한 실험적 시도들은 이 작품 <좀비들>에 이르러서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는 결과물로 응축되었다고 할 만 하다.

장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그렇게 접근성이 높지 않다. 활극적인 요소도 별로 없고, 전체적으로 낮고 차분한 톤이 계속 유지되는 문장은 지루함을 느끼게 되기 쉽다. 작중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을 도미노에 비유하는 것처럼 사건 1이 사건2의 발단이 되고, 사건2가 사건3으로 이어지게 되는 식의 단선적인 구성도 그에 한 몫 한다. 소설 후반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좀비들의 근원이라거나 고리오 마을의 정체, 다이토 파티라는 기괴한 게임이 성립되는 동인 등이 드러나는데, 소설 중간 중간에 자연스럽게 독자가 추론할 수 있을 만한 재료들이 던져 지는 식이 아니라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다소 억지스럽게 작품 내부의 설정들을 합리화시킨다는 인상도 지우기 힘들다.

그러나 좀비들을 단순한 괴물로서 손쉽게 타자화시켜 버리거나 사회적인 주제 의식과 결부시키는 대신 ‘인간과 서로 한없이 닮아가는, 그러나 결코 인간은 좀비가 되지 않고 좀비 역시 끝내 인간은 되지 않는’ 존재, 곧 사라질 것이되 결코 떠나 버리지는 않는 존재들이라는 해석은 분명 참신한 것이며 문학적으로도 설득력 있게 잘 형상화되어 있다. 이 소설은, 썩 훌륭한 좀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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