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rosebird.egloos.compallaksch@nate.com
 이것은 좀비 이야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일단 이것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이것은 좀비 이야기가 맞습니다. 혹여 서점의 독자들이 책에 두른 띠지를 보고 “아, 좀비는 그저 은유일 뿐이구나” 생각한다면 작가의 잘못입니다. 이 문구는 평소 김중혁이 잘 뽐내는 그림 실력으로 만든 ‘작가의 말’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작가 스스로 내뱉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오그라뜨리는 부분이지요. 마치 이것은 장르소설이 아니라고 머리띠 두르고 변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좀비는 이미 하나의 기호이고 취향의 대상이며 문화적인 코드입니다. 단순히 시대감각에 맞춰 소재만 취합하고 장르로서의 기능은 버린다는 의미라면 좀 삐딱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 11월 출간예정인 박민규의 [더블](박민규, 창비, 2010년 11월). [좀비들], 그리고 [더블]의 작가가 장르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는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일까요?

 책의 외형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뒷표지에는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이라는 질문이 적혀 있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이것은 좀비 로맨스?”라는 발칙한 기대는 접어두시길.(여기서 소중한 사람이란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애드’와 흡사합니다) 겉만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흔한 줄거리도 안 밝히고, 추천사 따위도 없습니다. 표지는 단순하고, 디자이너가 펜툴을 사용하다가 마우스를 미끄러뜨린 듯한 저자 사인(?)만 눈에 띌 뿐이지요. 그러면 이제 책장을 넘길 일만 남았습니다. 작가가 좀비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으니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주인공 채지훈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안테나 감식 일을 하고 있는 남자입니다. 유일한 가족이던 형을 잃었고 그 유품이던 LP들을 정리해 들으며 차에서 생활하는 좀 많이 소통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LP라는 것이 결국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매개가 됩니다. 그 중 스톤플라워라는 가상의 밴드 리더 이안 데이비스의 자서전을 읽기 위해 도서관을 찾고, 또 다른 주인공인 뚱보130을 만납니다. 자서전의 번역자인 홍혜정이 무통신지역인 고리오 마을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직접 찾아가기에 이릅니다. 이 마을은 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 세 사람은 스톤플라워의 음악을 중심으로 모여 친목회를 결성하고 주인공은 이들과의 관계로 인해 점점 변해갑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었다. 스톤플라워의 음악을 이렇게 크게 듣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크게 들어도 좋았다. 스톤플라워의 음악은 가슴을 두드리는 로큰롤이었다.
― p146

 훈훈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고리오 마을은 매년 죽을 사람의 순서를 맞추는 내기, ‘다이토 게임’에 빠져 있고 마을 부근에 정착한 주인공에게는 좀비가 찾아옵니다. 첫문장에서 주인공이 “좀비를 처음 만난 건 안테나 감식반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라고 밝힌 지 무려 100페이지가 지난 후의 일입니다. 사건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많은 전제들을 깔고서야 비로소 본론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보통의 공포소설이었다면 “좀비를 처음 만난 건 안테나 감식반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라고 밝힌 시점에서 이미 긴장감이 형성되고 좀비가 출몰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를 기점으로 모든 일이 시작하고 그것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급물살을 타고 전개됩니다. 독자가 의문을 품기 전에 계속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만 긴장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잠시만 지지부진하면 공포는 마비되기 마련이고, 그 순간부터는 설득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설득하기 위해서는 계속 의문을 던져야만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독자가 품어야 할 의문을 화자나 인물 스스로 뱉어버리게 됩니다. 이 소설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주류 소설은 어떨까요. 장르소설이 결말로 치닫기 위해 일직선으로 향한다면 주류 소설들은 직선 위에 많은 잔가지들을 뻗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좀 더 일상적이거나 섬세한 기술들을 필요로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속에서 작가의 미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스토리’와는 달리 작가가 실제로 말하고 싶어 하는 진짜 목소리에 가깝습니다. 이야기의 큰 줄기 말고도 따로 주제라는 열매를 잔가지들 중 어딘가에 매달아놓고 “나는 이 이야기의 틀을 빌어 사실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열매는 달고 쓰고 맵고 역겹기도 한 사유의 집합체입니다. 꽤 훌륭한 장르소설들의 특징이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있고 어쩌면 더 큰 이야기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확장과 팽창의 성격을 띠는 반면 어떤 주류 소설들은 아주 사소하고 작아지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비들]에서 김중혁은 자신의 미학을 유감없이 잘 발휘하고 있을까요? 물론 그만의 특징은 있습니다. 김중혁은 자잘한 것들을 창조하여 의미를 붙이는 데 재주가 있습니다. 차세대 통신규격 안테나 감식, 충격을 흡수하는 허그쇼크, 뚱보130의 뚱보연표, 죽을 사람을 맞추는 다이토 게임, 베이글 전문가가 별명인 만능요리식탁, 케겔이라는 스포츠(실재하는 ‘케겔’은 질수축 혹은 항문조이기 운동이더군요) 등 작가는 창조자의 권위를 휘두르는 일에 주저함이 없지요. 그리고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에도 나름 의미를 부여합니다. 130킬로그램을 유지하는 몸무게 때문에 불리는 친구 뚱보130, 케겔이라는 스포츠의 일인자이기 때문에 케겔이라 불리는 노인, 이안 데이비스의 팬이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홍이안, 어쩌면 단순한 말장난 때문에 장씨 성을 갖고 있는 장장군 등 김중혁은 위트로 흥한 작가답게 본인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강박증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큽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의 모두가 전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독자나 작가 모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까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마을 이름이 고리오 마을이라고 해서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과 굳이 관련지어 생각해봤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눈물을 다 써버린 상태면 아무리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어요. 충전이 필요한 거죠.”
 “변기처럼 말이죠?”
 “비유가 좀 그렇긴 하지만, 예, 변기처럼요.”
― p183

 “상상이 되지 그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야. 너무 어두워서 어둠속의 그림자도 없고, 어둠속의 어둠도 없고, 그냥 완전하게 어두워. 내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내가 나를 만져도 내가 실재하는지 알 수 없어. 보이지 않으니까 촉감도 없고, 내가 내 손을 만져도 아주 먼 곳의 별을 만지는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드는 거야. 그럴 때 저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와.”
 “밥 먹어라.”
 “누나, 장난치지 마.”
― p238

 그리고 너무나 김중혁답게 이 소설에는 입담이 넘칩니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 입담꾼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그 언어들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는 설명과 사상을 품고 있는 열변의 성격을 더 많이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물들은 소통의 부재를 겪지 않습니다. 유머를 치면 잘 받아 쳐주는 고마운 인물들이 항상 주변에 있고 어눌한 어투와 말더듬이조차 없습니다. 흥분해서 말이 막힐 일도 없을뿐더러 놀라서 헉하는 순간조차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막힘없는 장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부조리연극에서나 가능했지만 김중혁은 너무도 쉽게 그것을 사용합니다. 단 한 명, 말이 없는 인물 ‘제로’가 등장하지만 이 인물은 무기질이나 마찬가지로, 사연을 품고 있다는 점 말고는 특별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좀비가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좀비들도 죽기 전엔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거란 사실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최근 웹툰 작가 강풀이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 좀비들의 생전 모습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 비교하면 이것은 좀 다릅니다. [좀비들]은 바로 ‘남겨진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주인공 채지훈이 죽은 형의 유품에 집착하고 어머니과 형의 죽음 등을 회상하는 장면도 작가가 심어둔 장치 중 하나입니다. 가족들의 미련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기 위해 마을 인물들이 죽은 가족의 시체를 팔고 정착한 것으로 설정한 것도 그렇습니다. 죽은 가족들은 모두 좀비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좀비들을 생산하여 신형무기 스마트 불릿을 개발하는 실험에 사용하는데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좀비들이 생전 흉악한 범죄자였거나 인생의 낙오자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군인들도 아무 망설임 없이 좀비들을 죽일 수 있는 거랍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소설은 좀비의 탄생과 출몰마저 설정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뭔가 그럴싸하게 설명함으로써 납득시키려고는 하는데 거부감이 듭니다. 무엇보다 허점이 보이지요. 밝혀지지 않은 좀비 제조법, 군인들이 신형무기를 개발하려는 목적, 어떻게 부대에서 좀비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을뿐더러 그 많은 시체들을 연구용으로 공수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남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상관없어요. 다만 한번 설명을 시작한 의문은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것을 간과한 게 문제입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설명적일 수 있으며 굳이 납득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작품으로는 스티븐 킹의 중편 [미스트]가 있지만 이 소설 어디에도 설명은 나오지 없습니다. 군인 몇 명이 등장하여 오히려 의문을 증폭시키지만 그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안개 속에 숨어 있는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이형의 괴물들은 어떤 은유도 아니며 주인공은 고립된 환경 속에서 인물들과 갈등을 겪고 온몸으로 저항할 뿐입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추측도 할 수 없이 나아갈 뿐이지요. 그러나 이 소설은 훌륭합니다. 영화가 제작되어 부수적인 장면이 붙었지만 이것은 호오의 문제입니다. 원작의 팬들은 물론 영화의 의도 넘치는 결말을 불편해 합니다.



▲ 위에서부터 [미스트](The Mist, 2007), 그리고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 2004)의 한 장면.

 불편한 이유는 바로 비약 때문입니다. 논리나 사고방식 따위가 그 차례나 단계를 따르지 아니하고 뛰어넘음. [좀비들]이 그렇고 영화판 [미스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물론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도 한때 논란 거리였던 쇠고기 먹는 장면으로 비약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억지 이유를 들이밀 때 이것은 이물질이 되어 다 읽더라도 소화되지 않고 남습니다.

 좀비는 이미 대중 깊숙이 자리 잡은 문화적 코드이지만 그만큼 완숙하게 다루기 어렵기도 합니다. [좀비들]에서의 좀비는 손을 내뻗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스테레오 타입이라 이미지 측면에서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좀비에 열광했던 이미지 중에는 영화판 [나는 전설이다]와 [28일 후] 등에서 아무도 없는 대도시를 홀로 걷는 장면이나 [새벽의 저주]에서 좀비들에게 부여한 속도감, 문학으로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가 그랬듯 고전을 뒤틀고 시대배경에 좀비들을 삽입함으로써 받아들이는 충격 따위가 있겠지요. 예전 자유게시판 댓글로 잠시 우리나라 문학으로 이를 패러디해보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꽤 괜찮은 이미지들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시대와 배경, 인물의 연령과 직업군만 조금만 바꿔 봐도 좀비는 어디든 어울릴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다루는 사람의 역량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 국내 소설을 좀비물로 패러디하는 덧글 놀이. 자유게시판의 게시물을 직접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말하자면 이 소설은 그렇게 매력적인 이미지를 뽑아내지 못했습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인 [세계대전 Z]와 비교할 때 일인칭 시점은 확실히 한계가 드러납니다. 그러면서도 스케일이 그닥 작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눈으로만 보는 세계를 굳이 설명하기 위해 후반부에는 너무 많은 거리를 이동하고 헤맵니다. 시종일관 대화를 지배하는 유머는 각 인물마다 다르게 갖고 있어야 할 무게도 동일선상에 놓습니다.

 친구인 김연수와는 다른 행보를 걷고 있던 이 동갑내기 작가에게 시대감각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유행하는 장르나 코드를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젊은 독자들의 지지를 이끌었던 만큼 ‘좀비’는 분명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입니다. 이 소설로서 김중혁의 첫 장편소설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단편소설로 등단하는 일이 더 많은 주류 작가들에게 있어 첫 장편소설이라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견작가로 불리는 사람조차도 한 권의 장편소설을 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면 김중혁의 시도는 적절한 시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작가 이름과 제목을 보았을 때 이미 그를 아는 독자들이 느낄 관심도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일견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소재를 취합하여 어울리는 소설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볼 때는 조금 과한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1
  • No Profile
    세뇰 10.10.30 04:28 댓글 수정 삭제
    후반에 들어서 내용이 비약한다는 느낌은 저와 같으시군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쓴 건 아무래도 부실해 보여서 조금 창피(...)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2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