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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solathy@naver.com
 한 여자가 커피를 타고 있다. 긴 스틱 모양의 커피믹스 포장지의 끝을 잘라 잔속에 내용물을 떨어뜨리다말고 주문을 외운다.
 “내 맘대로 돼라.”
 스틱 끝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움켜쥐면서 설탕의 양을 조절하는 여자. 여자의 주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마도 여자가 관심을 보이고 있을 그 남자의 곁을 배회하는 또 다른 여인을 발견하고는, 여자는 또다시 커피믹스를 들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운다. 내 맘대로 돼라! 그러고 나서 벌어지는 일련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사건을 바라보며, 여자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내 맘대로 되는 게 또 있네!”
 커피 한잔에 들어가는 설탕의 양을 간편하게 조절할 수 있는 커피믹스라는 콘셉트로 출시된 한 인스턴트 커피믹스 제품의 광고가 전파를 탄 지도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해당 회사 제품의 광고에는 한 때 “내 맘대로 돼라”를 외쳤던 작은 얼굴에 유독 눈이 큰 여자, 이나영이 나와서 특유의 가볍지 않으면서도 발랄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여전히 회사 사무실이나 학교 상담실 같은 곳에 비치되어 있는 커피 또한 대개는 이나영이 광고했던 그 스틱형 커피믹스 제품이다. 한잔 마시면 또 한잔 마시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고 맛있기에, 특별히 설탕량을 조절하려 하는 사람도 드물다. 사실, 그 조절이라는 게 쉽지 않기도 하다.
 아무리 광고를 흉내 내어 커피믹스 스틱의 끝부분을 부여잡고 주문을 외워도 늘 설탕 조절에 실패한다. 혹시 커피믹스 포장지에 고감도 얼굴 인식 센서라도 부착되어 있어서 ‘당신은 이나영 만큼 예쁘지가 않잖아.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에게 설탕량을 조절할 권리 따위는 없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설탕 조절은 어렵다. 설탕이 들어있을 부분을 손끝으로 꼭 쥐어도, 어디에 틈이 있는지 설탕은 한동안 주르르륵 샌다. 완전히 포장지가 텅 비도록 빠져나가는가하면, 그래도 일부는 남아주기도 한다. 눈곱만큼. 이미 조절하고자하는 양을 초과해서 빠져나간 주제에 염치는 있는지 파리똥만큼 남은 설탕이 포장지 속에서 배시시 웃는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또 막상 스틱 끄트머리를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해도, 대개 스틱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순수한 설탕이 아닌, 커피, 프림, 설탕의 절묘한 혼합물이다. 이쯤 되면 자신이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설탕의 양을 조절하려 했는지, 아니면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전체 커피믹스의 양을 조절하려 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가치관에 혼돈을 느끼게 된다. 분명 출시될 때에는 커피, 프림, 설탕이 차례로 예쁘게 층을 이룬 상태였을 텐데,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 된 걸까. 운반 과정에서 혼합되었을지도 모르고, 진열된 상품을 누군가가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간혹 제조되던 시점의 그 가지런한 층을 비교적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커피믹스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뽑기’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구매에 앞서, 포장된 제품을 일일이 다 뜯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쯤 되면 체념한 듯 중얼거리게 된다. “내 맘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어? 쳇!” 조금은 슬픈 이야기이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없다. 커피믹스 속 설탕 하나 제대로 조절하는 것도 힘들고, 그나마 조절할만한 여지 ――― 커피, 프림 설탕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살아있는 ――― 가 있는 제품을 고르는 것도 그야말로 우연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지불하고 구입하는 것인데도, 전혀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그렇다. ‘내 삶’이라는 것 자체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가 않는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마음대로 움직여 볼’ 여지를 지닌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욱 많다. 자신의 출생 자체도, 태어나서 접하게 될 환경도, 그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은 그저 탄생의 제비뽑기에, 자연의 복권 추첨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태어난다. 태어나는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무엇 하나도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의 출생 시기, 출생 환경, 부모, 부모의 사회적 지위, 인종, 성별, 외모, 지능……. 그저 생명은 세상 속으로 던져진다. 그 자신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태로. 그렇기에 우리는 늘 말한다.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언제나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교육의 근원은 자연과 인간과 사물이다. 우리의 능력과 기관의 내적 성장은 자연의 교육이고, 이 성장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인간의 교육이다. 그리고 우리가 환경의 경험에 의해 얻는 것은 사물의 교육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 종류의 스승에 의해서 교육된다. 그 스승들의 가르침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 제자는 나쁜 교육을 받게 되고 정서의 안정을 가지지 못한다. 스승들의 가르침이 일치할 때에만, 제자는 자기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일관된 인생을 보낼 수 있다. 그러한 사람만이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교육 중에서 자연의 교육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도 사물의 교육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좌우할 수 있지만 아무튼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의 교육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아직 그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한 어린이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이 완전히 선도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루소, [에밀(개정3판)], 육문사, 2006. P. 36~37.


 루소가 말하는 교육이란 타고난 소질을 의미하고, 사물이란 환경을, 인간은 노력을 의미한다. 갈수록 인간의 지능이나 적성은 물론이고, 성격까지도 유전에 의해 타고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에, 이러한 루소의 이야기에도 제법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인간은 노력이라는 것을 늘 강조하지만, 노력이라는 것도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가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발레리나의 꿈을 품은 산골의 어린 소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학교 교사가 어떻게든 소녀의 장래희망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도록 애쓴다는 이야기가 훨씬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누구는 자연과 사물과 인간이 일치한다. 누구는 빌리 엘리어트처럼 사물이 다른 것과 어긋나지만, 그 사물을 극복해내고 자신의 꿈을 펼친다. 누구는 자연과 인간이 부재한 상태에서 사물의 힘으로 성공을 거머쥔다. 그리고 자연도 사물도 없이 그저 인간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보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또한 무엇 하나 일치하지 않는 사람 역시 존재한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정말 불공평한 곳, 그곳이 바로 세상이다.
 그런데 이 불공평한 자연의 복권추첨은 불평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의 복권추첨으로 발생한 불공평한 부분이 불평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불공평한 복권추첨을 이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에밀]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세 가지 교사에 대해 언급했던 루소는, 그 보다 앞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다음과 같이 ‘불평등’에 대해 구분하였다.

 [나는 인류 속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을 생각한다. 그 하나를 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 부른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연령이나 건강이나 체력의 차이와 정신, 또는 영혼의 질의 차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의존하여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정해지든가 정당화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은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갖가지 특권,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부유하다든가 존경을 받고 있다든가, 권력이 있다든가, 나아가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킨다는 특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고독한산책자의몽상(2판)], 동서문화사, 2007. P. 32.


 루소가 제시한 불평등 가운데 특히 사회적 · 정치적 불평등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소수의 힘없는 이들을 억눌러 다수의 욕구를 채우고, 또 상대적으로 소수의 특권계층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권력 없는 사람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힘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힘을 자손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때때로 그들은 특권층 진입을 꿈꾸는 이들에게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서 비교적 시기적으로 가까운 조선시대의 예를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좁고 인재가 드물게 나서 예부터 걱정거리였다. 더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인재 등용의 길이 더 좁아져서 대대로 명망 있는 집 자식이 아니면 좋은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바위 구멍과 띠풀 지붕 밑에 사는 선비는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억울하게도 등용되지 못한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하고, 비록 덕이 훌륭해도 과거를 보지 않으면 재상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하늘은 재주를 고르게 주는데 이것을 명문의 집과 과거로써 제한하니 인재가 늘 모자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서고금에 첩이 낳은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만이 천한 어미를 가진 자손이나 두 번 시집 간 자의 자손을 벼슬길에 끼지 못하게 한다.]
 ――― 허균, {유재론(遺才論)}, [제7차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상)], 교육인적자원부, 2002,  P.220~221.


 허균 역시 여성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 조선시대 지배층이 작성한 문헌 중에서 그나마 남녀평등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박지원의 {광문자전} 정도가 있다 ――― 어찌되었든 전체 인재의 50%는 여성이다. 그런 여성을 제외해버리는 조선시대의 인재 발탁 범위는 전체의 50%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50% 중에서 20%가 양반가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 중 서자를 제외하면 고작해야 10%만이 남고, 거기서 어머니가 재가하면 과거를 볼 수 없기에, 조선시대에 발탁 가능한 인재는 단지 5%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시험이 있었기에 마치 조선사회가 대단히 담백한 능력중심 사회였던 듯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과거시험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신분 조건에 따라, 환경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필터링이 되었던 것이다. 당신 자신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사농공상의 제4위에 해당하는 한낱 장사치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뼛속 깊은 곳까지 천하디 천한 사람입니다. ‘사’에 속하거나, 혹은 그래도 사농공상의 제 2위 ――― 김동인 소설 {감자}의 주인공 복녀의 집안처럼 ――― 에 해당하는 ‘농’에 속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거쳐야 할 필터가 있다. 당신이 비록 사대부가, 혹은 천하의 근본인 농가의 자손이라 하나, 당신은 한낱 아둔한 계집에 불가합니다. 그만 꺼져주시겠습니까. 양반의 아들이라고 해서 모두 무사통과는 아니다. 또 어머니의 신분을 본다. 당신 어머니는 사대부가의 여인이 아니로군요. 서얼은 반편이오니 그만 안녕히 가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거름체가 있다. 인종을, 성별을, 외모를, 나이를, 종교를, 출신 지역을, 출신 학교를, 신체 조건을, 부모의 소득수준을, 조상을 근거로 사람을 거르고 또 걸러낸다. 당장 현재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학은 어떻게든 지원자의 출신 고교를 근거로 등급을 매기고 싶어 하며, 기업은 입사희망자를 끊임없이 필터링한다. 종교를 근거로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사람을 가르고는 같은 종교를 지닌 이를 끌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 없는 면접관은 종교 있는 입사 지원자를 탈락시키기도 한다.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도 늘 선별되거나 혹은 격리된다. 그 아이가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 부모의 직업이나 소득 수준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서, ‘내 아이가 어울려도 좋은 아이’와 ‘내 아이가 절대로 어울려 다녀서는 안 되는 쓰레기 같은 아이’로 나누어진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의 주인공 코니 역시 이러한 각종 필터링 장치에 걸러지고 남은 찌꺼기, ‘잉여 인간’에 해당된다. 유색인종이기에, 여성이기에, 가난하기에. 게다가 코니는 아동학대로 빨간 줄까지 그어진 상태이다. 그런 코니가 상대적으로 더 힘이 있는 존재에 의해 정신병자라는 낙인까지 받았으니, 그야말로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 속에 발목 잡힌 존재가 되어버린 셈이다. 정말 코니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코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신병자’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난 미치지 않았어요!”라고 외친들, 과연 누가 그 말을 믿어주겠는가.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에 속박당하고 있는 코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기 삶을 주도할 권리라는 것은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이전부터 코니에게는 멀기만 한 것이었지만, 정신병원의 환자복을 입는 그 순간부터는 ‘애초에 그런 권리 따위 가당치도 않은’ 존재로 전락해버린다. 삶을 주도할 권리는커녕,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당하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늙어갈 권리조차 모조리 박탈당해 버린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이러한 ‘잉여 인간’ 코니를 중심으로 세 가지 세상의 모습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코니의 세상이다. 이것은 현재 작품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을,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과 비슷한 점이 많은 세상이다. 사람의 인종, 성별, 소득격차, 생활수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재단된다.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있고, 그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조금이나마 잘 사는 백인들을 따라 잡는 데 성공한 유색인종들은 자본과 인간차별의 논리에 동조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닮은 이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정하려 든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등에 업고 여성을 억압한다. 또한 자본이 부여한 권력, 혹은 권력과 결탁한 자본에 편승한 과학기술은 그 윤리를 망각하고 만다. 필요하다면, 아니 부와 힘을 가진 존재들이 필요로 한다면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이들을 도구 삼아 연구하기도 한다. 그렇게 더럽혀진 윤리의식은 환경에까지 그 손을 뻗는다.
 두 번째는 루시엔테의 세상이다. 코니의 입장에서 루시엔테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며, 과연 그 머나먼 어느 날 실제로 도래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세상이다. 이곳에는 출생이라는 것을 선택할 수 없기에, 출생에 따른 차별이란 없다. 코니의 세계에서 엿볼 수 있던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제 역시 보이지 않기에, 그 누구도 여성의 삶과 노동력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들지 않는다. 특권계층이라 부를만한 누군가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 누군가를 위해 타인을 도구삼아 조작하려드는 비윤리적인 과학기술도 보이지 않는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존속을 위해 환경을 보듬는 일에도 모두들 기꺼이 동참한다. 억압이란 없다. 경쟁도 다툼도 없다. 개개인의 고유한 개성은 당연히 존중받아 마땅한 세상. 루시엔테가 살아가는 이러한 세상을, 코니는 동경한다.
 세 번째는 길디나의 세상이다. 루시엔테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이 곳 역시 코니의 입장에서는 그저 멀기만 한 미래이다. 과연 현실로 도래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러나 루시엔테의 세상과는 다르다. 루시엔테의 세상이 코니가 꿈꾸는 유토피아라면, 길디나의 세상은 코니의 디스토피아다. 현재보다 현재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어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배 부른 자들은 그 자신들의 배에 더욱 기름칠을 하기 위해 인간성을, 그리고 환경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 파괴의 결과를 감당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늘 배부른 자들에게 착취당해왔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더욱 더 무겁게 여성의 목을 죄어, 여성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오로지 남성의 소유물로서 생명활동을 이어갈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날의 사회는 코니의 세상을 닮았다. 그렇다면 내일의 사회는 어떠할 것인가. 미래는 루시엔테의 세상을 닮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길디나의 세상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둘 모두의 특성이 뒤섞여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둘 중 어느 것과도 비슷한 구석이 없는 또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유동성이란 물보다도 큰 법이기에, 그 누구도 미래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의 미래는 현재로 이어진다. 그런 현재는 미래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과거가 된다. 과거 속에 이미 현재가 담겨 있고, 현재에는 과거가 묻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속에 이미 미래가 담겨 있고, 미래에는 현재가 묻어 있다. 어느 한 순간의 우연으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버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대개 미래는 현재에서 이어져 간다. 그렇다면 미래를 추측해 낼 토대가 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지금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신분과 그 권력이지만 앞으로는 경제력이 세상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 별바람, 게임 [그녀의 기사단 : Gloria in exelsis deo] 中 제롬


 과거에는 신분과 권력이 세상을 움직였다. 대체로 높은 신분의 권력자는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지니고 있었지만, 반대로 가난한 임금 또한 존재 했다. 그 신분과 권력이 자본을 동반했든 하지 않았든, 한 때에는 그것이 세상을 틀어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본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자본이 권력가 결탁하는가 하면, 자본이 나서서 주체적으로 신분을 만들고 권력을 만들기도 한다. 자본이 세상의 노른자위로 흘러들어가면서, 돈이 곧 권력이 되었고, 권력이 돈을 낳게 되었다. 혈통에 따른 신분이 아닌, 자본에 따른 신분이 생성되었다. ‘돈이란 있으면 편하지만 없으면 그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응답한 이들이 대체로 수십억을 보유한 이들이었다는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돈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다.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차이는 존재할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마치 돈이 제일인 세상이 도래한 듯하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극도로 청렴한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이 둘이 함께 한다. 특히, 부를 가진 자가 권력을 지니지 않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의 내면보다는 그 사람이 무심히 벗어던진 옷 안쪽의 상표가, 그 사람이 내린 차의 가격이 그 사람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는 상황에서, 가진 자는 어떻게든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자신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시선 속에서 기묘한 권력이 탄생한다.
 종종 이러한 힘을 지닌 이들은, 윤리를 집어 던진 과학기술과 손을 잡기도 한다. 생명이 생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가 하면, 환경이 파괴되든 말든 과학기술이라는 칼날을 마구잡이식으로 내지른다. 한쪽에서는 환경단체의 회원들이 화장품 회사들을 상대로 “동물 실험 반대! 동물 실험 화장품 불매!”라고 목청 높여 외치고 있지만, 세상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는 생명이 다른 생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행한다. 병에 걸린 사람들을 방치하며 관찰하는 비치료관찰실험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잔혹한 생체 실험에 이르기까지. 그렇기에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유행할 때면 혹시나 이것도 누군가가 벌이는 실험이 아닐까하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만큼 복제와 변이, 생화학기술은 진보했고, 또한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삶을 위협하고 있다. 언제 지금 숨 쉬는 공기와 눈앞에 차려진 식탁까지 침투할지 모른다. 혹은 이미 침투했을지도 모른다.
 자본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그것을 지니지 못한 이들을 얼마든지 쉽게 억압할 수 있다. 사회제도를 이용하기도 하고, 과학기술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좋은 자본과 권력을 오래도록 유지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다른 개체에게 전이시키고자 한다. 다른 개체, 바로 자손이다.
 이제는 한물갔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갈등론을 옹호하는 이들은 말한다. 모든 사회제도가 특정 계층을 위한 것이라고. 심지어 교육까지도. 보울스와 긴티스는 학교교육에 대해 ‘사회적 불평등이 반영되어 이를 대생산하는 조직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경쟁은 필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경쟁이라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아니, 경쟁이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쟁이 사실은 경쟁이 아닐 때가 있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다거나, 혹은 그 성과를 바라보는 기준 잣대가 다를 때.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노력을 덜 기울여도 경쟁에서 승리하고,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노력을 더 기울여도 경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때 솜방망이 처분을 받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때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잘못까지 죄다 뒤집어 쓴 채 과중한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경쟁이라는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시스템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불공정한 결과를 나오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고 승계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이다.
 대학에서 교양수업을 열심히 들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미국 사회과학 역사상 두 번째로 거대한 규모로 진행된 연구에 대해서도 기억할 것이다. 미국 내 6개의 주요 인종 및 소수민족 집단 사이의 학교 간, 지역 간에 존재하는 교육 기회와 효과의 불균등 현상 및 원인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된 이 연구는 1966년, [콜맨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본래 기능론자였던 콜맨은 ‘학교 교육이 사회적 평등을 위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한다’는 가설을 증명하고자 실험을 계획하지만, 결과는 거꾸로 나온다. 학생이 본래 타고난 가정배경이야말로 그 학생의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인이고, 그렇기에 학교는 사회적 평등을 이끌어내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학생의 학업성취가 훗날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결정한다고는 하지만, 그 학업성취라는 것이 가정배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사회적 평등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학교교육은 성취요인을 가장한 귀속요인이며, 그러한 학교교육을 토대로 한 선발과 경쟁의 제도는 꼭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기존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용인하도록 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갈등론자들의 의견에도 일부 수긍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세상’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언론에서는 공정사회라는 단어를 자주 올리지만, 어쩐지 그 공정사회라는 것이 먼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공정사회,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몇 달 전, 고위 공직자 자녀들의 공무원 특채 문제로 수많은 청년들이 울분을 토했다. 취업을 위해 경쟁하고 또 경쟁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누군가는 ‘누구누구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그 경쟁을 거치지 않고 성과를 얻어 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누군가’를 합격시키기 위해 지원 자격을 그 ‘누군가’의 기준에 맞게 수정하기까지 했다니, 분노를 터트리지 않는 사람이 더욱 이상하게 여겨질 만 한 일이다.
 사람에게 ‘스펙’이라는 단어를 적용한다는 것이 대단히 비인간적으로 느껴지지만, 아무튼 모두가 소망할만한 사회적 지위는 한정되어있기에, 해당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스펙’이라는 것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그 ‘스펙’이라는 것 중에는, 본인의 노력만으로는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카노이의 교육 수익률 곡선을 떠올려보자. 학교가 발달하기 전에는 초등교육이라는 것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초등교육을 받고, 그것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적 · 경제적 지위를 모두 누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류층사람들이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상류층 사람들이 누리는 그 지위를 얻기 위해서. 그러자 상류층 사람들은 중등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중류에 이어 하류계층 사람들까지도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초등교육은 더는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오로지 상류층이 누리던 중등교육만이 가치를 지닌다. 이에 중류층과 하류층이 차례대로 중등교육을 받기 시작하면, 중등교육의 메리트 역시 추락한다. 상류층은 한발 앞서 고등교육을 받고, 고등교육을 통해 높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획득한다. 한국사회는 전체 고등학교 졸업자의 80%이상이 대학진학을 한다. 즉, 고등교육이 이미 대중화된 사회라는 뜻이다. 잘 사는 이들은 그렇기에 대학원을 노리고 해외 유명 대학으로의 유학을 시도한다. 아직까지 이쪽은 어지간히 잘 사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발을 들이기 어려운 영역이기에. 그리고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이들은 이러한 대학원파, 유학파들을 선발하여 그 높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부여한다. 고등교육이 대중화된 사회에서의 4년제 대학 졸업자는 대학원이나 유학이라는 ‘혼자의 노력으로 획득하기 어려운 스펙’을 지니지 못한, 그저 널리고 널린 평범한 돌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코니의 세상을 닮은 오늘날의 세상이 앞으로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쩐지 길디나의 세상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루시엔테의 세상이 파격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반면, 길디나의 세상은 현재의 모순이 더욱 심화-발전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길디나의 세상으로 접속한 이후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코니의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코니와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니는 독자로 하여금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운동’으로 분류될 만큼 강력하고 거창한 투쟁이 아니다. 사회의 가장 그늘진 곳에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투쟁이다. 미래를 바꾸는 것은 개개인이 보이는 작은 투쟁에서부터 비롯되기에. 그 작은 손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모여 그늘진 곳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세상을 바꾸어갈 수 있기에.
 갈등론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사회에는 분명 모순이 많다. 그리고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지닌 이들은,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도 하고, 그들만의 계층유지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람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기댈 곳은 교육이기에.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은 또한 높은 수준의 학식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대단히 논리적인 말로 대중을 움직인다. 벌써 10여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한때 의약분업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던 적이 있다. 이 당시에 의료보험체계를 바꾸자는 주장이 일었다. “감기처럼 작은 질병에 적용되던 보험 혜택을 줄이고 가능하면 암이나 기타 큰 질병에 그 보험 혜택을 더 늘리도록 하자.” 이러한 주장에 반발한 이들은 다름 아닌 ‘동네 의사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병은 키우면 안 된다. 초기에 잡아야 한다. 작은 질병에 대한 보험 혜택을 줄이면 비용 때문에 진료를 미루게 될 것이고, 이것은 진료시기를 놓치게 만들어서 결국 국민 건강을 위협할 것이다.” 이들의 반박은 분명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의료보험체계를 바꾸자고 주장했던 이들도 결국 수긍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네 의사들’의 반박 이면에는 그들의 손익이 숨어있었다. 작은 질병에 대한 보험 혜택을 줄이면 병원에 가지 않고 ‘감기 정도는 참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고, 이것이 동네 의사들의 수익에 타격을 주리라 예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중을 움직이는 그들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이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 그람시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지식인을 길러내기 위해 기댈 수 있는 곳은 교육뿐이라는 것이다. 비록 교육이 기존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하더라도. 작품 속의 코니 역시 자신이 속한 계층 내에서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비록 커뮤니티칼리지였다고는 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들 가운데에서는 상대적으로 지식인(?)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병원에서의 억압 속에서 유일하게 코니 만이 비교적 이성적으로 대처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상에 완전하게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나 있을까. 사람의 뇌에 조작을 가해서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차단해버리지 않는 이상, 인간은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다. 비록 온 몸이 묶여있다고 해도. 커피믹스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세상의 입김은 개개인의 의식 속으로 완전히 침투할 수 없다. 물론, 문화나 사회적 인식, 윤리, 도덕이라는 이름의 판단기준을 인식 속으로 스며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사고능력을 완전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현 체제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교육이지만, 그러한 교육의 그늘 아래에서 자란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현 사회의 부정적 측면과 모순을 지적하고 개혁과 변화를 부르짖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불공평하고 또 불평등하다. 자신의 출생 시기, 출생 환경, 부모, 부모의 사회적 지위, 인종, 성별, 외모, 지능 등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 채 태어나지만, 그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근거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게 되는 곳이 바로 세상이다. 누구인들 좀 더 사회적 · 경제적 지위가 높은 환경에서, 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 인종과 성별에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지능까지 겸비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구인들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시대가 아닌,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고 싶지 않겠는가.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불합리한 차별을 경험한다. 심지어는 경쟁이 사실은 경쟁이 아닌 사회 체제 앞에서 힘겨운 노력이 결코 보상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서기도 한다. 사회체제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소수가 다수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시에 그 휘둘리는 다수 사이에 끼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한다. 모순이 차고 넘치는 세상. 분노하게도 하고 한숨짓게도 하는 세상인 동시에, 결국 체념하게 만들기도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말 그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체념하기 보다는 나서서 먼저 소리칠 수 있어야 한다. 기침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불합리한 시험제도를 바꾸고자 교과부 장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노량진녀처럼 네티즌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굳이 꼭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다.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수정하고자 한다면, 작은 콜록거림이라도 괜찮다. 아주 작고 힘없는 외침이라도 얼마든지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 물결을 증폭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파이너가 이야기 했듯이,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고 그렇기에 현재에는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비록 현재를 토대로 예측한 미래가 현재의 모순이 더욱 심화된 암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매 순간순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변화의 물결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모순이 적은 미래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계층이나 환경, 부모, 부모의 사회적 지위, 인종, 성별, 외모, 지능과 같은 것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낮은 스펙도 아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회적 모순을 바꾸어내고자 하는 용기, 그것이 없다는 점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체제 안에서 어떻게든 성공하느냐, 혹은 그 체제의 모순을 깨뜨리느냐. 그 어느 쪽도 시도하지 않은 채, 그저 앉아서 입으로만 한탄하는 나약함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모순 덩어리를 흔들리게 할 용기 있는 파도. 코니와 같이 작은 손바닥이 수없이 일으키는 잔 바람결에 거대한 사회체제도 움직이는, 그런 미래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지금 당장은 그 모순 많은 체제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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