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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녀와 비밀의 책

2010.10.29 22:4910.29





felias@naver.com
 0. 시작

 처음,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까만 표지의 테두리를 장식한, 아름답게 빛나는 덩굴무늬가 무척 우아해보였기 때문이다.

 책 날개의 작가 프로필을 읽고서는 조금 당황했다. 스스로를 작가이자 시인이며 이따금 비평가라고 밝히지만, 모든 작가와 시인과 비평가가 현관에 마법주문을 걸어놓고 커다란 검은 솥에 책을 넣고 끓이며 가끔 자신이 사이렌(몸의 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새인)이 된다고 말하진 않는다.

 본격적으로 책장을 넘기며 나는 난관에 부딪쳤다. 나는 이런 문장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때 그런 적이 있긴 했지만.

 “소년의 얼굴은 겨울 태양처럼 빛났고, 몸집은 강변에 피어난 갈대처럼 호리호리했다. 한때는 흰색이었을 누더기 실크 드레스와 낡은 외투를 입은 소녀 앞에 선 소년은 향기나는 검지로 소녀의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소녀는 놀라면서도 소년의 손길을 참아냈는데, 그것은 그동안 소녀가 늘 외로움과 슬픔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1권, p.10)

 지금의 나에게는 벅차지 않을까 하고 조금 걱정하며 읽는데, 놀라운 전환이 일어났고, 그 뒤부터는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화려한 수식어구에 밀려 포기하기에는 정말 아까운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찾은 보석 같은 발견들을 모두 적기에는 능력상으로도 지면상으로도 벅찬 일이지만, 이 훌륭한 이야기를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기에 글을 쓴다.


 1. 이야기 속 이야기

 소녀의 두 눈은 비밀스러운 글자로 뒤덮여 있어 마치 검은 반점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그녀를 두려워했으므로 소녀는 술탄의 정원에서 홀로 지냈다. 어느 날 만난 소년을 위해 소녀는 자신의 두 눈에 새겨진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왕자와 기러기 이야기로 시작한 소녀의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보았음직한 왕자의 모험기이다. 궁 안에서만 지내던 철부지 왕자가 실수로 마녀의 숲에 들어가 기러기의 모습을 한 마녀의 딸을 죽인다. 마녀는 크게 노하고, 왕자는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며 흉한 얼굴의 마녀에게 간청한다. 마녀는 자신의 딸을 되살리게 할 주문을 위해 괴물의 가죽을 구해오라고 한다. (화려한 수식어를 빼고 내용만 말하자니 이야기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 본문은 훨씬 아름답고 세밀하게 짜여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왕자가 자신의 피와 땀이 섞여 들어간 밀가루 반죽을 섞는 동안 마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어느 동화에서도 마녀가 화자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자신의 밭에서 귀중한 채소를 훔쳐간 벌로 네 아이를 내놓으라고 하던지(라푼젤), 네 딸은 물레가시에 찔려 죽을 거라는 저주를 퍼붓는 경우가 아니라면(잠자는 숲속의 공주).

 마녀가 자신의 부족들을 정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왕자의 아버지-왕-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글이 흔한 동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흥미로움을 느꼈다. 그 뒤로 쭉 읽어나가면서 동화의 단순한 선―악, 미―추,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의 도식이 마법처럼 깨어져 갔다. 그것은 마녀와 마녀의 이야기, 혹은 소녀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스스로 입을 열어 자신들의 품속에 둔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꼭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그들의 이야기가 귀중한 별빛처럼 쏟아져 나오는 동안 내가 아는 동화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는 끊임없이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이 들어있는 러시아의 마뜨료쉬까 인형처럼.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은 어딘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도 들지만, 작가가 이야기의 굵은 뼈대를 튼튼하게 잡아 당신을 안내하므로 홀로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아름다운 동화, 그 저편에

 왕자와 기러기 이야기는 마녀의 이야기와 함께 1권의 중심 이야기이다. 흉한 얼굴에 갈고리 같은 손가락을 가진 마녀에게도 그녀가 사랑한 초원이 있었고 그녀가 눈이 빛나는 남자와 함께 행복한 사냥꾼 부부로써 있던 그녀의 부족이 있었다.

 “어느 날 네 아버지의 군대가…….
입 벌어질 것 없다, 애송이. 네놈이 내 땅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가 네놈의 정체를 몰랐을 것 같으냐?”
(1권, p.29)

 평화롭다 믿었던 왕자의 세계에, 마녀 나이프의 세계가 포개진다. 정복자가 오기 전에 부족의 딸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던 신비로운 이야기. 부족의 따뜻한 보금자리 대신 캄캄한 지하 감옥 속에서 나이프는 할머니에게서 온 세상을 태동하게 한 길고 부드러운 갈기를 가진 암말과 그가 스스로를 물어 내린 구멍-별-의 이야기, 그 암말의 갈기에서 빛을 안고 내려와 처음 그 힘을 지상의 온갖 것에 주고 죽음을 맞이한 아름다운 일곱 보석자매의 이야기, 그 힘을 처음 받은 그녀의 첫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왕자의 세계는 곧 독자의 세계이기에, 참담한 심정으로 마녀를 위한 빵을 만드는 왕자와는 상관없이 나는 마녀의 이야기에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마치 소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소년처럼. 마녀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입을 타고 전해져 내려오는 초원의 신화가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살아 움직였다. 암말과 피와 빛에 대한 이야기는 원시적이면서도 생명력이 넘쳐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신화와도 달라 그 자체로 빛이 났다.

 그리고 그 신비한 힘을 사용하여 자신의 아이를 기러기로 만들어야만 했던 나이프가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풀을 다스리는 마녀로서 살아가며 복수를 다짐하는 마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이내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어린아이를 통통하게 찌워 잡아먹으려고 입맛을 다시는 마녀와는 분명 다르니까.

 이처럼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를 바꾸고 변형하여 이어 이야기한다. 뒤따라 많은 것들이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된다. 왕자는 더러운 누더기를 입고 가는 마을마다 냉대를 당하며, 왕자의 허식을 따르다 허망하게 괴물에게 죽은 왕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그 미의 기준이 다른 이와는 무척이나 다르더라도)과의 약속을 위해 왕자와 칼부림 한 번 없이 스스로 자신의 가죽을 벗겨주는 괴물이 나오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동화를 써내려가면서도 “흥, 그게 다가 아냐”라며 콧방귀를 뀌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달변은 갈수록 감탄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모험을 떠난 왕자의 마지막 행보가- 그 어떤 동화의 결말과도 같지 않기에, 그리고 결코 나오지 않을 결말이기에- 끝나고 나면, 혀를 내두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3. 행동하는 여성

 1권이 철부지 왕자의 성장기와 함께 한 동화의 반전이었다면, 2권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1권이 스토리에 더 중점을 두고 읽는다면 2권에서는 스토리보다 등장인물의 행동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2권은 다행이도 1권보다 이야기 고리가 깔끔하고, 1권에 나왔던 마녀의 세계관이나 몇몇 등장인물 등이 이어지기 때문에 보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소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스노라는 창백한 고아소녀에게 말하는 그물 짜는 여인, 혹은 갈림길의 성 시그리드라 불리는 여인의 이야기로 이어져간다. 여기서는 여인들에 주목해서 보기로 하자. 아름다운 여자가 항상 왕자와 결혼하는지 하지 않는지, 평범한 여자가 평범하게 살아가는지 아닌지는 이 책이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콕 찝어 특히 괴물인 여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1권에서 탑 속에 갇혀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마가딘은 사악한 마법사의 실험으로 괴물로 변한 자신의 하체로 때문에 그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간신히 탑을 빠져나와 항구로 향했을 지라도 괴물 여성에게 사람들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토모모는 물 속에 비친 그림자가 여우 모습이라는 이유로 도외시되었다. 들끓는 바다의 성 시그리드는 유방이 세 개였다. 괴물인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들은 그들이 가진 힘을 적절히 사용하는 법을 알았고, 스스로 모여 자유라는 이름의 해적이 되었다. (해적이라니!) 마가딘은 그녀의 배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나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듯 아무도 이 배를 원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돛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돛대에 유령선원들을 올려 보내 바람 대신 달빛으로 돛을 움직인다고 하더군요. 누가 뭐래도 이 배는 내 것 입니다. 나는 내 몸처럼 이 배를 속속들이 알고,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아요. 나는 이제 더는 처녀가 아니며 그 딱한 처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나는 처녀성을 피와 바닷물에 던져 버렸어요. 이젠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고 나 또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2권, p.329)

 칼리프에게 속아 가짜 파페스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사악한 마법사에게 속아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여자, 라그닐드는 그녀 자신의 의지로 대군을 이끌고 종교 도시 알라누르로 온다. 진짜 파페스가 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녀들이 괴물인가? 그녀들은 괴물이다. 특별한 괴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노와 그물짜는 여인은 그네들을 동경했고, 매번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소년을 혼내는 술탄의 딸, 디나르자드마저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눈물 흘렸다.

 그녀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반대로 권력과 황금과 여자에 눈이 먼 왕과 멍청한 왕자 혹은 연인이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들은 매우 권위적이거나 그 자신이 목적이기에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 왜 왕이 계모와 결혼할 수 밖에 없는지,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왜 평화로운지를 알려준다. 왕이라는 지위 때문인지, 그러한 자들만이 왕이 되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4. 변화하는 청자

 이쯤 읽었으면 대충 알겠지만, 모든 동화는 아니지만(난 [종이봉투 공주] 같은 훌륭한 동화를 알고 있으니까) 대부분의 동화는 남성적이고 남자들을 치켜세워주기를 좋아한다. 남자들은 덕분에 환상을 가지고, 용감해 보이기 위해 애쓰며, 혈기를 참지 못해 길을 떠나고는 멍청하게 마법에 걸리거나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년은 왕자일지라도 그런 용기와 현명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검은 반점의 소녀를 처음 만난 소년도 마찬가지다. 그는 목도리 도마뱀처럼 용기를 애써 내세우고, 제 딴에는 음식을 한아름 품에 안고 숨긴다고 숨겨서 방을 빠져 나오지만, 매번 그를 찾는 누나에게 걸려 끌려가고 만다.
 하지만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다! 소년은 늑대와 동굴의 정기를 받은 듯이 행동했고, 레안데르 왕자를 동경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누나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하고, 그가 소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누나를 설득하려 애쓴다. 그 대가로 그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왕자의 신분에!) 마굿간에서 일을 하기도 하지만, 요령껏 누나의 눈을 피해 소녀를 찾아온다. 소년은 왕자였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아이였지만 소년이 변화한 것은 누구보다 훌륭하게 소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이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동화의 다른 면을 본 소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은 나는 나이가 들었다. 이 책을 읽을 사람들 역시 소년 보다는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오래전 읽었던 동화의 고정된 틀이 현재의 내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그래서 내 주위의 어떤 괴물을 힘들게 하거나―――내 스스로가 힘들어 하고 있다면, 이 책을 접하고 조금은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면 기쁘겠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접하지 못한 게 아쉽다. 내가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여자아이였더라면 장래희망에 해적, 이라고 꾹꾹 눌러서 적어볼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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