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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매시슨, 최필원 옮긺, 현대문학, 2020년 3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계속 리처드 ‘매드슨’으로 표기해서 이쪽이 더 익숙하지만 출판사의 뜻을 존중하여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매시슨’으로 소개하는 리처드 매시슨은 공포,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유명 작가다. 그의 대표작 『나는 전설이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SF이며 좀비가 나오는 공포소설인 동시에 인간의 실존과 고독을 다룬 뛰어난 소설로 여러 비평가와 장르 팬덤에서 명작으로 뽑는 이른바 올타임 베스트작품이다.

그런데 사실 매시슨은 단편을 더 많이 썼고 단편에 능한 작가인데 장편 위주로만 소개되었고 단편집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펭귄 클래식에서 나온 걸작선이 번역 출간되어 다행이다. 수록 작품수도 많을뿐더러 매시슨의 작가 활동시기 거의 전부에 걸쳐 골고루 뽑아 실었기에 이 한 권이면 충분하다.

리뷰에서 주관적 감상인 재미를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재미없는 단편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뛰어난 단편집이다. 그 이유를 찾자면 대부분 수록작이 짧으면서 호기심을 끄는 도입부와 기복이 뚜렷한 전개에 인상적인 결말까지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페이지 터너라고 불리는, 지루함을 느낄 틈 없이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읽게 되는 단편들이다.

매시슨 단편의 특징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이 중대한 국면으로 확장되는 진행방식이 주로 쓰이며, 이 사건은 보통 주인공 혼자 또는 주인공과 소수의 주변인물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아 극한의 스릴을 주고 쉽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또한 분량도 짧고 간결하며 시각적 이미지가 풍부한 문장이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등 여러모로 영상이나 연극으로 만들기에 최적이다. 실제로 매시슨은 인기 드라마 시리즈 〈환상특급〉에 참여했고 그 외에도 여러 장편 및 단편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영상화가 재미와 성공의 척도가 된 현대의 장르소설 작가라면 전공서적처럼 읽어야 할 책이다.

재미있게 읽은 단편을 골라 소개한다.



사냥감
움직이는 살인 인형과 여성의 사투를 그린 단편. 영상으로 만들기 딱 좋은 분량과 내용이다. 영화 〈사탄의 인형〉과 유사한데 원작은 아닌 것 같다. 찾아보니 1969년작이라 1988년 개봉한 영화보다 먼저이고, 〈Amelia〉라는 제목의 TV단막극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니 아마 영화는 핵심 아이디어만 따온 것 같다.

피의 아들
흡혈귀가 되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 장르를 넘나드는 매시슨의 장기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이 짧으면서 롤러코스터같이 극적으로 장르가 뒤바뀌어 단숨에 끝까지 읽게 만든다. 이 정도면 스티븐 킹의 선배님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사막 카페
사막에 있는 외딴 카페를 지나가다 우연히 방문한 부부에게 닥친 사건. 좁은 장소에서 적은 등장인물만으로 극도의 긴장을 유발하고 흥미진진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매시슨의 다른 많은 단편이 그렇듯 영상이나 연극으로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버튼, 버튼
갑자기 부부의 집에 배달된 버튼. 이 버튼을 누르면 그들이 모르는 누군가가 죽는 대신에 거액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부부는 욕심과 의심 속에서 도덕적 갈등을 겪게 된다.
매시슨의 단편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단편. 순간의 욕심이 부른 비극이라는 점에서 고전 명작 단편 「원숭이 손」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고, 단순하지만 활용하기 좋은 아이디어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프레더릭 브라운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 버튼이라는 소재로 작가 열 명이 쓴다면 열 가지 다른 소설이 나올 것 같다.

태양에서 세 번째
멸망의 위기에 처한 세상을 탈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제목을 보고 초반만 읽어도 반전과 결말을 쉽게 눈치챌 수 있어 아쉬운 단편. ‘사실은 지구였다’, 혹은 ‘사실은 지구가 아니었다’ 클리셰가 만연한 지금이라서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처음 발표한 당시에는 신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드라마 〈환상특급〉으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최후의 날
잔잔하게 지구종말을 맞는 이야기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가장 유명하지만 이 단편도 그에 못잖게 침착하고 조용하게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브래드버리와 마찬가지로 원인이나 과정은 그려지지 않고 그저 필름이 끝나듯 혹은 페이지가 끝나고 책이 덮이듯 그렇게 세상은 멸망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어느 날 주인공은 자신이 로봇임을 알아차리고 평범해 보이던 세상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전체적으로 필립 K. 딕을 연상시키는 내용인데 결말만은 매시슨답게 암시만 남기는 게 아니라 좀 더 명확하게 세상의 진실을 제시한다. 딕이라면 끝까지 모호하게 처리했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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