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k682639189_1.jpg

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민경욱 옮김, 하빌리스, 2020년 4월

 

‘기억’은 어디까지 저장될 수 있을까.

중요한 삶의 단면을 조금이라도 오래 보존하려는 마음은 인간의 오랜 욕망이다. 인류는 문자의 발명 이전부터 자신의 기억을 그림으로 남겼다. 사실적이던 그림 중 일부는 뼈대가 남아 문자가 되었고 문자의 발명은 기억을 기록하는 시대를 열었다. 기술이 첨단으로 발전한 지금, 우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누르고, 동영상을 녹화하기 위해 캠코더를 켜고, 스마트폰의 저장 용량을 늘린다. 영상, 이미지, 그리고 여전히 글. 고대의 벽화에서 시작되어 종이를 거친 기억의 저장소는 소형화-대용량을 위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정교하고 안전한 저장장치가 발명될 때마다 우리는 낙관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한편 우려한다.

먼 미래에 한 사람의 생전 기억을 ‘모두’ 담는 메모리가 등장한다면 어떨까. 우선 그것은 매우 편리하다. 어떤 기술의 등장은 삶의 질을 높인다. 인생을 저장하는 메모리가 발명된 시대의 인류는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메모리가 모종의 사유로 분실, 유실, 또는 실종된다면? 애써 붙잡지 않은 우리의 기억 전체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소형화된 스마트폰에 정보의 대부분을 저장하는 지금, 그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은 실제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인터넷 친구와 연결될 수 없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전화번호조차도 외우지 않은 한 알아낼 수 없다. 디지털 기억은 전기 공급이 끊기는 순간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용량이 나날이 늘어가는 저장장치가 분명 요긴한 물건일 테다.

메모리(Memory)의 발전은 문자 그대로 기억의 연장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최근 문학과 콘텐츠의 장에서는 ‘기억’에 관한 갖가지 방법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김초엽은 단편소설 「관내분실」에서 추모를 위해 사후에 저장되는 망자의 생전 데이터(‘마인드 데이터’)를 등장시켰으며, 이경희의 장편 『테세우스의 배』는 기억 데이터의 소실과 유지에 따라 분화할 미래의 ‘인간성’을 섬세하게 다루었다. 기술과 기억, 또는 기술과 감정의 관계는 미래를 향한 작가와 독자의 상상력을 극한으로 자극한다.

그러므로 비교적 최근 출간된 장편, 기억과 메모리의 상관관계를 옴니버스 형태로 풀어낸 고바야시 야스미의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기술 발전과 SF 문학의 풍조로 보아 등장이 예고된 것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의 제목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어는 ‘분리’이다. 작가는 소설 안에서 인간의 기억을 ‘탈부착’할 수 있는 미래를 그린다. 메모리로 간편히 휴대할 수 있는 ‘장기기억장치’에는 소유자의 탄생부터 죽음까지가 저장된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의아할 정도로 불필요한 기술인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이 장기기억장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상황을 설정한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인류는 장기 기억 능력을 모두 상실한다’. 이것이 『분리된 기억의 세계』를 만드는 첫 번째 세계관이다.

 

 

1. 당신은 나를 기억할 수 없지만

 

고바야시 야스미는 호러, SF, 동화적 상상을 횡단하는 일본의 장르 작가다. 그의 전작(『앨리스 죽이기』를 비롯한 ‘죽이기’ 시리즈와 『인외 서커스』 등의 소설)에서 공포와 스릴러, 추리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과는 달리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차분하고 폭넓은 상상으로 독자의 고정관념을 깬다. 작가는 처음부터 범지구적인 장기 기억 능력의 소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계의 위기는 한 명의 소녀가 느끼는 이질감에서 출발한다. 소녀는 이전과 달라진 세상에서 기묘하게 비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다중 인격 장애’로 인식한다. 유키 리노의 이러한 오해는 독자가 ‘기억 상실’ 세계관으로 급하게 진입하는 것을 유보한다. 동시에 작가는 소녀의 독백에서 간단한 의문을 발생시키며 독자들이 소설에 빠르게 집중하도록 한다. ‘지금 유키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유키는 몇 가지 검증 과정을 거쳐 자신에게 기억 장애가 발생했음을 깨닫는다. 거실에서 치매인 줄 알고 좌절하는 엄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아빠의 상황을 받아들인 유키는 침착하게 행동한다. 그녀는 SNS에 인류를 향한 당부의 말을 남긴다. “아마도 인류에게 기억 장애가 생긴 듯합니다. 모든 기억이 10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제1부에서 등장한 유키는 이후 미래 사회에서 기억 상실 시대 초기의 ‘제1 행동자’로 불린다. 유키의 가족을 중심으로 묘사되는 기억 상실은 ‘전 인류의 기억’이 소멸된 것 치고는 생각보다 혼란스럽지 않다. 그들에게 기억은 단 10분간 지속되지만, 온라인 소통망, 원자로의 자동화 장치 등 인간이 발전시킨 기술로 인해 세계는 대재앙과 멸망을 피한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1부에서는 ‘기술’로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물론 유키와 사람들이 종이에 메모를 남기는 장면에서는 아날로그 기록의 장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거대한 소통망이 구축되지 않았다면, 원자로에 자동화 시스템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유키의 엄마처럼 자신이 치매라고만 생각하며 스스로 고립되었을 것이고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머지 않아 사고가 일어났을 것이다. 고바야시 야스미는 단번에 모든 인류에게서 장기 기억 능력이 사라진 미래를 가정하며 제1부와 제2부의 시간 공백 안에서 기술의 쓸모를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기억을 일평생 보관하는 ‘메모리’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막간’이라는 소주제의 짤막한 글은 대혼란 이후의 세상을 요약한다. 원인 불명의 사건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퍼진 ‘공간의 상전이’는 우주에 사는 모든 생물의 기억을 지워나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발명한 메모리는 아주 작은 크기다. 1센티 남짓의 반도체에 인류는 자신의 삶을 의탁한다. 거대한 우주 규모의 재난에서 사람들을 구한 건 눈에도 잘 띄지 않는 크기의 물건이다.

 

 

2.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막간 이후에 서술되는 제2부의 분위기는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 1부에서 유키 리노의 주변과 그녀의 아버지 유키 조지의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위기가 사실적으로 드러났다면, 2부는 현실인지 가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 남겨진 한 남자는 단편적으로 ‘누군가’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최초의 대규모 기억 상실 이후로 한참이 지나 있다. 장기 기억 능력이 ‘사라진’ 세대에서 장기 기억 능력이 없는 채 태어나는 세대로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소켓 안에 넣은 소형 메모리에 기억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몸의 다양한 부위에 설치할 수 있는 ‘소켓’에서 메모리가 빠지면 육체는 십 분 안에 모든 기억을 잃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가족이 누구인지, 집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메모리의 분실로 육체와 기억은 손쉽게 분리될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메모리를 바꿔 끼운다면 몸과 ‘영혼’을 바꾸어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탈부착이 가능한 기억은 무한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신비한 공간에 남겨진 남자는 자신이 기억하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다. 소개팅을 약속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벌어진 작은 충돌, 쌍둥이 자매에게 발생한 의료 사고부터 입시 비리와 살인의 음모, 위기의 순간에서 가족을 구하려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남자가 떠올리는 초반의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며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 전혀 없다. 미래를 사는 ‘그들’의 인생은 메모리와 육체, 자아와 신체의 분리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분화한다. 그러나 파편적이고도 개인적으로 보이던 ‘남자의 머릿속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접점이 없을 듯한 인물들을 한 방향으로 그러모으며 작가는 결국 이 모든 사건과 기억을 아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새로운 ‘직업’을 제시한다.

2부에서 발화자로 기능하는 남자는 서로 다른 이들의 기억 조각을 자신도 모르게 지니고 있다. 그는 각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 그의 직업은 ‘무당’이었다. ‘무당’은 본래 자신의 몸으로 귀신을 부르거나 혼령을 다루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단순히 비현실적인 대상을 다루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중개하며 ‘원한’과 ‘슬픔’을 해결한다. 미래의 무당도 마찬가지다.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공간에서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무당’의 역할을 한다. 그는 남의 기억을 독자에게 전달하며 서서히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다. 그는 신체를 빌려주고 죽은 사람의 메모리를 자신의 소켓에 꽂았던 ‘무당’이다. 죽은 이의 메모리를 꽂아 유족과 대화하는 것이 미래 무당의 일이다. 남자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남자가 무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은 이후, 소설은 더 나아가 그가 선 공간이 환각인지 실제인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남자의 시야는 왜곡되고 조작된다. 진화와 전생, 현생과 윤회를 교차하며 작가는 완전히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지운다. 혼란에 빠진 남자의 앞에 다시 등장하는 건 제1 행동자인 유키 리노다. "당신은 진짜입니까?"라고 묻는 남자에게 그녀가 발화하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구별할 의미가 없죠”. 육체와 정신, 전생과 현생, 과거와 미래, 사실과 거짓, 나와 당신. 이 책의 끝에는 분리될 수 없는 것들만이 남는다.

 

 

맺으며

 

뚜렷한 기준이 지워지고 진리가 불분명해지는 지금, 고바야시 야스미는 영원히 붙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정신과 몸을 개별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기술 발전을 매개로 영혼을 분리할 수 있다는 신선한 발상은 독자가 소설의 도입에 빨려 들어가도록 한다. 이야기에 완전히 집중한 독자는 작가가 형성한 세계 안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미래의 사람들을 만난다. 이 소설의 끝은 초반에 제시된 명확한 ‘분리’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이것’과 ‘저것’의 구분 자체가 모호해지는 결말은 ‘분리된 기억의 세계’라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세 단어에서 파생되는 ‘생존극’ 이상의 이야기 층위를 보여준다. 제1 생존자인 유키 리노가 필사적으로 얻어낸 표면적인 ‘생존’ 아래에서 더 깊은 철학으로 설계된 미래가 탄생한다.

『분리된 기억의 세계』 이후 국내에 번역 소개된 고바야시 야스미의 유작 『미래로부터의 탈출』 또한 기억과 망각에 관한 소설이다. 그가 더 많은 작품을 썼다면 '기억'을 주제로 한 소설이 다수 출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앨리스 죽이기』의 후속으로 잘 알려진 ‘메르헨 죽이기 시리즈(メルヘン殺しシリーズ)’부터 생전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에서 ‘기억’과 ‘환상’은 서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큰 축이었다. 그의 과감하고도 다채로운 세계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하나의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었으리라. 이 소설 안에서 보이는 건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설계한 미래다. 기억이 십 분마다 사라지는 세상, 윤회와 현생의 메모리 사이에도 한 발 나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듯, 작가는 담담히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됩니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7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7.15
소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 이상하고 놀라운 이야기들 2022.07.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6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6.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5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5.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4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4.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3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3.15
비소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닿지 못한 사실들 앞에서 2022.03.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2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2.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1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1.15
소설 『분리된 기억의 세계』 - 십 분마다 설계되는 당신의 미래에서 2022.01.14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2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2.16
소설 『금성 탐험대』 - 오래된 미래, 오지 않은 미래 2021.12.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1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1.15
소설 『시선으로부터』 - 사랑의 계보 2021.11.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0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0.15
소설 『시녀 이야기』 - 여성 디스토피아의 오래된 표본 2021.10.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9월 이달의 거울 픽 2021.09.15
소설 『ㅁㅇㅇㅅ』 - 그래도 SF는 어렵다고 말하는 그대에게 2021.09.15
소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인간의 의미 2021.08.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8월 이달의 거울 픽 2021.08.14
Prev 1 2 3 4 5 6 7 8 9 10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