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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화구의 공포

2009.04.24 23:2604.24

1.
차문을 여니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맡아졌다. 하지만 농도가 짙지 않고 공기 중에 미세하게 떠도는 냄새라 금세 익숙해져 코끝에서 사라졌다. 비교할 대상조차 찾을 수 없는, 정확히 묘사해 낼 수는 없었지만 마치 순간적으로 내가 있는 곳이 지구와는 동떨어진 별세계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기묘한 냄새였다.
마을은 한적했다. 둔덕 아래에 드문드문 현대식으로 지어진 민가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을 전체가 죽어 있는 것처럼 고요한 광경에 나는 다소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여기 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젖은 풀을 밟으며 둔덕을 내려가 마을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갔다. 마을 근처에 있는 화산이 한 달 전에 폭발했다. 특이한 화산분화라고 매스컴에서도 요란하게 다루었다. 울트라불카노식 분화라던가, 화산가스의 압력이 커져서 산이 붕괴하는 분화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형태의 분화라서 지질학과 관련된 사람들이 폭발 이후에 마을을 들락거렸다. 근래 들어 한국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목격하는 화산분화였기 때문에 매스컴의 발길도 무수했다. 반대로 마을 사람들 중에서는 많은 수가 사건 이후 마을을 빠져 나갔다. 폭발은 마그마의 유출은 적었지만, 많은 수의 날아다니는 암석 파편들과 분진을 만들었다. 그것들이 휴화산 가까이 붙어살던 부락 하나를 통째로 죽여 버렸던 것이다. 작은 부락이라 피해자의 수는 적었지만 염연히 스물이 넘는 사람들이 화산폭발로 사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부지원금을 받아 나쁜 기억이 남은 마을을 뒤로 하고 떠났다. 하지만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아직 화산 근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수는 오십 정도였다.
내가 이전까지 인연도 없던 이 마을을 찾은 이유는 형 때문이었다. 화산이 분화하고 보름 가까이 지난 상태에서 우연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던 동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영상 속에서 실종된 형과 놀랄 정도로 닮은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동영상을 올린 사람은 한때 그 마을에 거주했었다는 사람으로, 영상은 화산이 분화하는 장면을 원거리에서 캠코더로 찍어 올린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다급하게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밤의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색 섬광을 뿜어내며 분화하는 화산이 보였다. 촬영한 사람은 마을에 있었고, 동영상에는 촬영하는 사람의 주변에서 다급하게 뛰어 다니는 사람들의 겁먹은 표정이 담겨 있었다. 반면에 몇몇은 이상하게 태연한 태도로 화산분화를 구경하고 있었다. 형도 그 태연한 사람 중의 하나로 나타났다. 당당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종말론이라도 믿는 사람처럼 근엄한 표정을 한 채로. 얼굴이 화산의 붉은 빛으로 드러난 상태에서 나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형이었다. 단순히 유사한 정도가 아니었다. 동영상을 수 없이 돌려보고, 수일간의 시간을 두고 숙고했어도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정신적으로 조금 불안정했다. 실종되기 마지막 몇 년이 최고치였다. 그 이전에는 다소 소극적이기는 했어도 사회적응을 그럭저럭 해 냈지만 연예를 포함해 하던 일에 줄줄이 실패하면서 점차 폐쇄적이고 염세적인 성격이 강화되더니 마지막에는 방에 틀어박혀 부모님이 버는 돈으로 생활하면서 환상 속에서 살았다. 마지막에는 다리마저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비되면서 자살 충동이 자주 나타났다. 그 때 즈음 형은 시에 심취해 있었다. 정신적인 상처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시를 쓰면서 예민한 감수성만을 발달시켰다. 형이 쓴 이백편이 넘는 시는 아직도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현실을 등진 환상의 세계나 차원 바깥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었다. 시를 완성된 순서대로 읽으면 어떠한 경향성이 보였다. 초기의 시는 현실과의 접점이 확실한, 다소 냉소적인 태도로 현실을 모사해 부르는 시였는데, 중기의 시에는 주제와 소재가 점차 현실과는 유리되면서 신화학이나 민속학적인 모티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시는 노골적으로 악의적인 분위기의 시로, 대롱아기, 강령술이나 흑미사, 그 밖의 갖가지 잔인하고 끔찍한 소재가 전면에 등장했다. 말기의 시는 사회적인 면의 실패자로서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혐오하던 형의 악의가 극단적으로 농축되어 나타난 것만 같은 인상을 풍겼다. 정신적으로 피영향성이 큰 나로서는 형의 악의와 염세주의가 텔레파시처럼 나의 정신으로 곧장 파고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에 꼼꼼히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 시기의 시에는 마치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단어들이 있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신이나 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그것들과 관련된 문헌은 단 한 가지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신화를 탐욕적으로 흡수하던 형이 그 특유의 무의식적인 악의를 가미하여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체계 같았다. 말기의 시에 집착적으로 나타나던 모티브를 들자면, 꿈, 환각, 색채, 우주, 그리고 그 이상한 단어들이었다. 아자토스, 니알랏토텝, 요그 소도스, 다곤, 크툴루, 툴차, 히드라, 미고, 과거의 것, 쇼고스.
실종되던 바로 그 해에 형이 시를 쓰던 속도는 그야말로 경이적이었다. 하루에 열편이 넘는 시를 미친 듯이 써 갈겼으니까. 그러다 형은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식사시간이 되면 엄마가 밥과 반찬을 쟁반에 받쳐 형이 있는 방문 앞에 가져다 둔다. 형은 집 안에 틀어박힌 이후 폭식하는 습관이 나타났으므로 길어도 오 분 안에는 밥을 방 안으로 가져가서 먹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날은 세 시간이 지나도 쟁반이 그대로 있었다. 엄마가 방문을 두들기며 형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서둘러 방문을 열려 시도해 보았지만 문이 잠겨 열리지 않았다. 출근한 아빠를 제외하고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어찌어찌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열쇠를 찾아 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불 꺼진 방 안은 기분 나쁜 정적에 싸여 있을 뿐이었다. 불을 켜고 방 안을 구석구석 찾아 다녔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장롱은 내가 열었는데, 문을 열어 텅 비어있는 내부를 확인하기 직전까지 느꼈던 긴장감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형이 쓰던 시가 극히 일부이긴 했지만 가족들에게 공개되어 있던 상황이라 그토록 살벌하고 황량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간이 알 수 없는 상태로 어두운 장롱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 안의 그 어떤 곳에도 형은 없었다. 방금까지 누군가 방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의 체취와 방 벽에 다채로운 물감으로 그려진 이상한 기호만이 실체가 사라진 형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실종신고가 접수되고 이 년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도 형을 찾아내지 못했다.

2.
마을에 큰일이 있어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인적없는 마을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시골마을이라면 사람소리는 몰라도 개 짖는 소리 정도는 들려올 법도 한데, 그런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도 마을 한 가운데서 말이다.
마치 마을 전체가 죽어 있는 것 같았다. 태양은 기분 좋게 따스했다. 무성한 초목은 무심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조그만 곤충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적막함과 고요. 동물이 살지 않는 원시림의 깊은 호수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무거운 대기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느껴졌다.
“누구세요?”
나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사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다보았다. 목소리가 천진한 아이의 것이라는 점이 특히 나를 두렵게 했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시야에 사람이 없어 다시 한 번 놀랐다. 시야의 아래쪽에 거뭇한 것이 보였다. 눈을 아래로 내리니 귀엽게 생긴 남자 아이가 밤색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였는데, 풍기는 분위기에서 이상하게 어른스런 관록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나와 시선이 마주친 것을 확인한 아이가 다시 물어왔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마을에 일이 있어서 왔어요. 어른들을 좀 만나고 싶은데 어디 계신지 아니?”
아이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 등 뒤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등 뒤에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아이를 내려 보았다. 아이는 지푸라기 색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일이 있어서 회관에 모여 있어요. 그런데 가지 않는 게 좋아요. 마을에는 중요한 일이라서 방해받으면 싫어할 거여요. 대신 제가 마을을 안내해 드릴 수 있어요.”
나는 한가하게 돌아다닐 처지가 못 되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차에서 등걸잠이라도 자다가 내일 회사에 정시출근하려면 적어도 여섯 시 이전에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나는 양복 속주머니를 뒤져 형의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에서 극단적으로 음울한 분위기 탓에 추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형이 풀죽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아이에게 보이며 말했다.
“아저씨가 이 사람이랑 아는 사람이거든? 혹시 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니?”
아이는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요. 처음 보는 사람이여요.”
어쩌면 사진에 찍힌 모습과 현재 모습에 차이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진을 찍은 이후로 이 년이 지났으니까. 나야 형을 어릴 때부터 한 집에서 보아온 사람이라 동영상에 잠깐 나타난 모습을 보고도 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이라면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사진이 조금 오래되어서 머리 모양이라던가, 얼굴이 조금 다를 수도 있어. 닮은 사람이라도 괜찮으니까. 이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사람이 없니?”
아이는 다시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자세가 나빠 팔꿈치가 저렸다. 아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모른다는 표시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낭패였다. 동영상을 본 이후 두근거리는 마음에 마을에 오기는 했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기 위해, 내면으로 침잠해 상상 속에서 동영상을 떠올려 보았다. 수없이 반복해서 본 영상이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명료하게 상기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영상 위에 형이 나타났다. 앞모습, 옆모습이 화산의 붉은 불빛을 받아 분명하게 드러났다. 적어도 동영상을 볼 때만은 나는 영상에 비친 사람의 모습이 형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금 확신이 찾아왔다. 여기까지 온 이상 주민들을 충분히 만나 사진을 보이고, 만약 정말로 형이 아니라 단순히 닮은 사람이라 해도 직접 찾아가 얼굴을 보고 말이라도 걸어볼 생각이었다. 나는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어른들을 꼭 만나야 하는데, 회의가 언제 끝나는 지 알 수 있겠니?”
“그냥 그 사진을 제게 주세요. 제가 회관으로 가지고 가서 물어볼게요.”
형의 사진은 집에도 다른 게 많았으므로 나는 아이에게 사진을 건넸다. 아이는 사진을 받아들고는 마을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아이는 걷는 도중에 아직도 따라 오냐는 태도로 나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눈빛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이의 보폭이 짧은데다가 느긋하게 걷는 바람에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마치 마을 전체가 짐승조차 떠나버린 흉가가 된 듯한, 귀기어린 분위기가 내내 나를 괴롭혔다. 가끔씩 나타나는 공터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듯 회색의 화산재가 쌓여 있기도 했다.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었다면 호흡기에 해가 되었겠지만 직경이 미세하고 총량도 적은 분말상태의 것이라 더미지어 쌓여 있는 지금으로써는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뒤를 따라 마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러니까 멀찍이서 보라색을 띠고 있는 외계의 구조물 같은 화산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공기는 점차 확대되었다. 단순히 나의 병적인 상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불안감을 자극하는 음습한 외부요소가 너무나도 많았다. 길가의 집은 담이 낮아 쉽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무생물과 식물뿐이었다. 화산 분화가 마을의 동물들을 남김없이 쓸어가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목본식물도 풍성하고, 사람이 사용하는 일상용품들도 아쉬울 것 없이 공간을 꽉꽉 채우고 있었지만 꼭 고지식물 외에는 생물의 흔적이 없는, 층운으로 싸진 괴괴한 고산지대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람이 낼 법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면 어김없이 바람이 무생물이나 식물을 움직여 낸 소리였다.
이럴 때 회의를 끝낸 마을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앞쪽 길에서 나타난다면 좋을 텐데. 집안 내력인지 나도 형처럼 사람을 꺼리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사람이 그리웠다. 사람이 살지 않는 외계의 행성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귀가 먹먹하고 눈이 어두워졌다. 앞쪽에서 움직이는 아이가 외계의 황야에서 기괴하게 꿈틀대는 괴물 선인장처럼 보였다.
갑자기 아이가 멈췄다. 왼쪽으로 꺾이는 길에서였다. 멍하게 걷고 있던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아이를 따라 발걸음을 멈췄다. 어쩐지 저혈압 상태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눈을 깜빡이니 점차 시야가 밝아졌다. 보이는 것이 명료해졌을 때 이상하게 어둡게 보이는 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이는 왼쪽으로 꺾이는 길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곳에 누군가라도 있는 것일까? 아이는 잠깐이지만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을에서는 이맘때에 용에게 기우제를 지내요. 어른들은 지금 모두 모여서 그 준비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볼게요. 외부인이 들어가면 부정 탄다고 싫어하실 거예요.”
아직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곳은 처음 접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다가 워낙 도시와 동떨어진 산간벽지이다 보니 기우제도 원형 그대로 전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속학과에 있는 친구에게 알려주면 좋아할 것 같군.
“그래 알았다. 정말 고맙다. 부탁할게.”
아이는 내가 혹시 따라올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불안하다는 태도로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담 뒤로 사라졌다. 아이가 사라지자마자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왈칵 불안감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쁜 것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에 나만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나는 아이를 따라 왼쪽 길로 들어섰다. 경고 받은 대로 마을사람들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나 이외의 사람이 이 마을에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왼쪽 길로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목격한 것은 막 모퉁이를 들어선 나를 험악한 눈길로 노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한 것이 방금 전까지는 그토록 사람과 마주치기 원했으면서도 정작 둘의 적대적으로 느껴지는 모습을 보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옷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마을사람인 것으로 보였다. 마치 수문장처럼 회관으로 향하는 길을 지키는 품이었는데,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악의가 그 눈길에 담겨 있었다. 잘못 걸린 것 아닐까? 방금 전까지 둘이서 증오와 울분에 찬 대화를 나누던 것을 아무 연고도 없는 내가 갑작스레 끼어들어 가로막은 느낌이었다.
“형씨는 누구요?”
둘 중에 조금 뚱뚱한 몸집을 가진 청년이 물었다. 말투와 몸짓이 명백하게 악의적인 태도였다. 형을 찾기는커녕 쫓겨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마을회관에 있다고 해서요.”
“누굴 찾는데?”
뚱뚱한 쪽이 다시 물었다. 딴청을 피우던 중키의 나이든 쪽이 고개를 들어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게.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방금 지나간 아이가 대신 물어봐 주겠다고 가지고 갔습니다. 마을회관에는 외지인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요.”
“들어갈 수 없지. 절대 들어오면 안 돼.”
나이든 쪽이 경고했다. 뚱뚱한 쪽이 나이든 쪽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방금 지나간 애면 덕수지? 이덕수.”
“으응, 으응.”
뚱뚱한 쪽이 다시 나를 보았다.
“미안하지만 들여보내 줄 수는 없어요.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바빠서 말이지. 화산이 분화하고 외지인들이 자원봉사다 뭐다 해서 마을을 온통 쑤셔놓는 바람에 재수가 붙어버렸어요. 화왕님이 노해서는 애들도 줄줄이 떨어지고. 그때 화산이 분화한 것도 외지인 때문이지? 무슨 대학에서 나왔다는 새끼들이었는데, 조사다 뭐다 해서, 아유.”
“찾으려는 사람이 정확히 누구요?”
나이든 쪽이 물어왔다. 나는 구색을 맞춰야 할 것 같아 형에 대한 얘기를 적당히 윤색해서 들려주었다. 내 얘기를 들은 나이든 쪽이 말했다.
“그거 안 됐네. 꼭 찾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 대화 이후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공기에 부담스러워진 나는 둘에게 간단히 목례하고 왼쪽 길에서 빠져나와 담벼락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지루해진 마음에 눈도 감아보고, 공상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덕수라는 아이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이 흐릿하게 늘어지고, 소리도 음울하게 변형되면서 곧 어둠이 찾아왔다.

3.
“안녕하세요.”
왼쪽 길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선잠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모든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한 손에 구깃구깃해진 사진을 든 덕수가 왼쪽 길에서 나타났다. 나는 급한 마음에 아이에게 잰 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있더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이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챘다. 그리고 왼쪽 길을 지키고 서 있는 두 사람에게로 갔다. 둘은 각자 다른 곳을 보면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가 발소리를 크게 하며 나타나자 동시에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둘에게 형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람이 제 형입니다. 이곳에 있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닮은 사람이라도 좋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까?”
뚱뚱한 쪽이 먼저 사진을 손에 받아 들고 입을 비죽거리는 뚱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다가 나이든 쪽에게 사진을 건넸다. 나이든 쪽이 사진을 건네받고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저 사람이 여기 있다는 말은 누가 한 거요?”
뚱뚱한 쪽이 물었다.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동영상에서 보았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신뢰감을 잃을 것 같아서 적당히 꾸며내 말했다.
“옛날에 이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사진을 보여주니 본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요.”
뚱뚱한 쪽이 이상하게 위압감을 주는 태도로 말했다. 그 태도를 보고, 나는 혹시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해가 될까 싶어 최대한 모호하게 이야기를 꾸며내야 했다. 분화 이후 마을을 떠난 사람도 수십 명일 테고 대부분이 젊은 층이었으니 그에 맞추어 둘이 떠올리는 인상을 분산시켰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냥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고, 남자였다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분위기가 어쩐지 심문당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둘은 눈을 하늘로 치켜뜨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나는 어쩐지 화가 나는 마음에 강경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있는 사람입니까?”
“없어요.”
뚱뚱한 쪽이 쌀쌀맞게 말했다. 나이든 쪽도 사진을 뚱뚱한 쪽을 통해 건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식은땀이 났다. 그네들 자신은 지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둘의 태도가 갑작스레 적대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에서 낌새를 잡을 수 있었다. 질문 자체가 거부당했다는 느낌이 상상을 넘어선 확신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형을 찾아왔다는 것 이외에는 내세울 당위성 같은 것이 없었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둘에게 목례하고 등을 돌려 터벅터벅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이는 가까이에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뒷짐을 진 채로 담벼락에 기대 있는 품이 쓸쓸해 보였다. 어째서 저 아이는 마을회관에 있지 않은 걸까? 마을에 사람이 없다면 아이들도 마을회관에 있다는 얘기일터인데.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뭐라고 사주고 싶었지만, 이 동네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냥 용돈이라도 쥐어 줘야지 하는 마음에 우울한 표정을 감추며 다가가는데 아이 쪽에서 먼저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속삭이는 듯 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말하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에게 들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어쩐지 소름끼치는 느낌을 받으며 공기만이 존재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 갈 데 없으시면 오늘은 저희 집에서 자고 가세요. 지금 산을 내려가시면 꼼짝없이 길을 잃으실 거예요.”
안 그래도 그 점에 대한 걱정 또한 마음 한편에서 올라오던 터라 나는 나도 모르게 기쁘게 웃었다. 태양은 이미 반 이상이 서산 너머로 사라져 낮은 곳에 떠 있는 구름은 이미 지옥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산은 평지보다 해가 빠르게 지는 법이므로 아이의 말대로 밤의 어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올 것이다. 나는 아이의 제안을 승낙했다. 아이는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마을을 가로질러 나를 안내해 갔다.
첫 대화는 내가 풀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형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마을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물은 것이다.
“그냥, 별 말 없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요.”
아이는 이상하게 들뜬 것 같아 보였다. 아이였지만 조숙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하는 것도 나와 잘 맞았다. 나는 어느새 조금 지나치게 떠벌이고 있었다. 아이도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이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사람 하나 없는 마을에서 아이와 나름대로 정답게 얘기하고 있자니 나도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친구들도 모두 회관에 있는 거니? 너는 어째서 혼자 있지?”
아이는 이 질문에 표 나게 우울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취소하기도 무엇해서 어색한 침묵을 쓰게 씹었다. 아이가 곧 입을 열었다.
“분화 이후에 친했던 친구들이 많이 떠났어요. 지금도 친한 아이들은 있는데. 그냥 그래요.”
아이는 말을 끝내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태도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준만큼 돌려받는다는 마음에서 묻는다는 듯이 예민한 부분에 대해서 공격적인 태도로 물어왔다.
“그런데 형은 왜 찾으세요?”
나는 아이에게 맞는 정서로 적당히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을 들은 아이는 납득한 것도 같다는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비죽였다.
“아까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대학에서 나온 사람들이 분화를 일으켰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지?”
내 새로운 질문에 아이는 무거운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어른들이 하는 소리에요. 분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대학에서 나왔다면서 지질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찾아 온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화산을 조사하고 마을을 떠나고 나서 며칠 후에 분화가 일어났어요. 그냥 그것을 보고 그러는 거죠. 마을 사람들이 사고 이후에  외지인들에게 배타적으로 변한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사고 이후에 인력 면에서 정부지원도 들어왔는데 유지들이 돈만 받고 사람들을 다 쫓아냈죠.”
“저런,”
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것도 민망할 정도로 한참. 아이는 잠시 뒤 고개를 나에게서 돌렸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조금 있으면 저희 집이에요. 이제 길을 두 번만 꺾으면 되요.”
여태까지 이어가던 대화가 아이의 집에 도착하면 단절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앞 뒤 가리지 않고 새 질문을 던졌다. 아이의 이야기가 미묘하게 내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도 거절했다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 마을을 복구한 거니?”
“네. 분화 직후에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곧 복구가 되었죠.”
“대단하구나.”
다시 정적. 어쩐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을 참 잘하는구나. 책을 많이 읽니?”
아이의 기색이 다시 밝아졌다. 순식간에 감정이 바뀌는 천진함이 아이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정서장애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에요. 지금은 분교에서 저 보다 진도가 느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죠.”
간만에 행복한 대화가 이어질 조짐이 보였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아이의 자랑스러워하는 듯 한 태도에 맞춰 고양되었기 때문에 나는 한껏 감정을 부풀려 대답했다.
“우와 대단한데? 선생님이 직접 그러라고 시킨 거니?”
“네. 교직원 수가 줄었거든요. 화산이 분화하던 날에 아이들을 구하려다가 몇 분이 돌아가셨어요. 저기가 저희 집이에요. 동생이랑 엄마가 있는데, 엄마는 밤에 회관에 가실 거예요.”
분위기는 다시 우울해졌다. 슬픈데 상황이 노골적으로 희극적이라는 점에서 웃음이 나왔고 동시에 눈물도 나왔다. 누구라고 했지? 동생? 동생 얘기를 꺼내면 다시 슬퍼질까?
아이가 조금만 손가락으로 평범하게 지은 파란 지붕의 조립식 집을 가리켰다. 저곳이 자기 집이라고 했다. 얹혀서 자는 것도 미안한 마당에 아이의 기분까지 잡치게 한 것 같아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아이의 감정을 호전시킬 만한 말을 찾아 건넸다.
“그런데 근처에 슈퍼 없니?”
“있는데. 주인도 회관에 가셔서 문이 닫혀 있을 거예요.”
아이에게 다시금 매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다행히도 아이의 동생은 우리보다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직 젖살이 많이 붙고 무거운 머리로 위태위태하게 걸어 다니기는 했지만 말도 할 줄 알았고 그 또래 여자아이 특유의 자학적인 쾌활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낯을 가렸다. 현관에 붙어있는 좁은 방의 구석에서 음울한 표정을 한 채로 크레파스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는데, 자기 오빠가 방으로 들어서자 웃음기 있는 얼굴을 해바라기처럼 들다가 나를 보고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시 도화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는 동생에게 다가가 ‘나 왔어.’라고 말하며 친근하게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여동생이 유치가 드문드문 난 입을 벌리며 간지러움에 세상모르고 웃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자리에 앓아누운 것 같았다. 아이의 어머니가 집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인사라도 할 겸 방을 기웃거리다가 이불 위에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에 병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병적으로 야위고 눈곱도 눈가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 한 눈에 보아도 병자임을 알 수 있었다.일단 신세지기로 했으므로 나중에 집 안을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도록 인사라도 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아이가 방문 앞에서 방황하는 나를 보고는 다가와 말했다.
“엄마에요. 몸이 안 좋으세요.”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방 안으로는 눈길도 두지 않았다. 그때 아이의 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발작적으로 일어서며 해소성 기침을 했다. 어머니는 계속 기침하며 손을 더듬어 휴지를 뽑아다 입에 가져다 대었다. 휴지에 거뭇거뭇한 것이 묻어 나왔다. 어머니는 섬세한 손길로 휴지를 접어 곁에 두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물었다. 너덜너덜해진 기도에서 나오는 것 같이, 긁는 것 같고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아, 전 서울에서 온 사람인데, 오늘 이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려고 합니다. 댁의 아이가 친절하게도 저에게 권해서요.”
“제가....”
어머니는 ‘제가’뒤에 무슨 말을 했지만 목소리가 점차 꺼지는 바람에 잘 듣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듣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휴지를 하나 더 뜯어 입에 가져다 대고 거뭇한 것을 한 번 더 뱉어내었다. 그리고 폐에서 쥐어 짜내듯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제가 나가봐야 해서요. 아이들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그럼. 죄송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다시 자리에 쓰러지듯이 드러누웠다. 처음 본 외지인 남자에게 아이들을 맡긴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그만큼 해를 당하지 않을 무슨 사회적인 장치라도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겠지.
“제가 주무실 방 안내해 드릴게요.”
아이는 현관에 붙어있는, 동생이 여전히 자동인형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방의 건너편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어머니가 누워있는 방과 충분히 멀어졌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무슨 병이시니?”
아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의사도 진단명을 모른데요. 처음에는 분진 같은 걸로 폐가 상했다고 생각했다는데, 나중에는 무슨 신경 쪽의 문제라느니 하면서 아예 포기했어요.”
나도 처음 보았을 때는 막연히 호흡기 쪽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아닌 것 같았다. 신경은 폐에도 닿으므로,의학적인 지식은 없지만 막연하게 납득은 갔다. 어쨌든 의사도 모른다고 하니까.
“마을 의사가 그렇게 말한 거니? 마을 밖에 있는 병원에 보인 적은 없니?”
“돈이 없어서요.”
아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괴감이 묻어나는 소리로 말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가족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니 안쓰러웠다.
“괜찮으면 아저씨가 아는 의사를 소개해 줄까? 아저씨 친구가 의사인데, 내가 부탁하면 검사 정도는 공짜로 해줄 거야. 서울에 있는 분이니까 아저씨가 차로 데려다 줄게.”
아이는 어두운 눈으로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래주시면 좋고요.”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직장에 나가야 하니까, 내일은 쉬거든? 괜찮다면 내일 데리고 갈 수도 있고, 아니면 토요일이랑 일요일 아무 때나 좋아. 내일이랑, 주말들. 그때 내가 데리러 올 수 있어. 끝나면 마을까지 데리고 와 주마.”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
“일단 아저씨 명함을 줄게.”
나는 양복 속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명함은 지갑 안에 들어있었다. 동생의 얼굴이 방 안에서 빠져나와 우리를 힐끔거렸다. 우리 둘 다 동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를 보는 눈길에 마치 처음 마주하는 신기한 동물을 보는 것 같이 두려움과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아이가 동생을 보고는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동생이 스케치북을 한 손에 들고 쪼르르 뛰어나와 아이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였다. 딱히 나에게 숨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스케치북에 그려진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크레파스로만 그린 그림이었고, 스케치나 채색방법에서는 어린애다움이 묻어났지만 그려진 형태나 색의 배합에서는 병든 정신이 묻어났다. 분화를 상징하는 듯 한 그림이었다. 화산이 전면에 공격적으로 보이는 붉은색을 띤 채로 그려져 있었고, 그 화구에서 무언가 하얀 것이 나와 있었다. 분화시의 밝은 불꽃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기에는 형태가 조금 이상했다.불꽃처럼 역동적인 것이 아니라 젖은 시체가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다른 각도로 보면 거대한 구더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는 그림을 받아들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스케치북을 다시 동생에게로 건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동생은 스케치북을 받아들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그때 나는 꺼내던 지갑을 떨어뜨렸다. 그림에 정신이 팔려 지갑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지갑은 펼쳐지며 형의 사진을 드러냈다. 하도 여러 번 열어본 부분이라 가죽지갑이 그곳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생은 열려진 지갑을 흥미 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동생에게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무엇을 보니?”
동생은 손가락으로 지갑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진.”
“사진?”
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지갑을 만졌다.사진을 빼서 동생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생의 관심은 단순히 사진 자체에 대한 흥미에서 비롯된 것일 공산이 컸지만, 그래도 조금 더 자세히 보여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화법사..”
동생이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쉬잇!”
아이가 동생에게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사진을 빼서 동생에게 보여 주었다. 동생은 위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동생 쪽으로 내밀었다. 동생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나에게서 사진을 받아 눈앞에 대었다.
“아는 사람이니?”
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동생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 화법사야. 마을 회관에 있어.”
“화법사가 뭐하는 사람이지?”
동생은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린애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느낀 것 같았다. 나도 아이도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생은 사진을 황급히 나에게 건네더니 도망치듯이 방 안으로 들어가 어두운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어쩐지 원망하는 눈빛으로, 동생은 나와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난 마을 회관에 가봐야 할 것 같다.”
내가 현관 쪽으로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이자 아이가 황급히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위험해요! 마을사람들에게 발견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죽을 수도 있다니? 도대체 어째서 숨긴 거니?”
“말할 수 없어요.”
아이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죽을 수도 있다니, 내가 여기서 성급하게 문제를 일으키면 내 몸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의 두 어깨를 쥔 채로 말했다.
“아저씨가 도와줄 수 있을지 몰라. 마을사람들이 너희를 협박하는 거니?”
아이는 힘겨운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언가 할 여유도 없이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상하게 붕 뜬 표정 탓에 미친 것처럼 보이는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짙게 깔린 고적운이 노을의 붉은 빛을 받아 괴기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 하나는 와이셔츠와 양복바지를 입고 있는 중년의 덩치였고, 하나는 경찰 복장을 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들 뒤에, 집 안의 불빛을 받지 않아 거뭇한 덩어리로만 보이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때가 되었어.”
양복바지가 기괴하게 현실과 유리된 억양으로 말했다. 집 안의 누군가에게, 허공을 떠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에게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아이는 서럽게 울던 것을 멈추고는 연약하게 훌쩍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동생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조용했다. 이곳에서는 동생이 있는 방의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내 등 뒤에서 이상하게 하늘하늘한 괴기한 것이 나타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랬다. 자세히 보니 아이의 어머니였다. 하늘색 레이스를 여러 겹 졸속으로 싸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 외에는 몸에 걸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고개를 땅에 파묻고 눈을 감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상할 정도로 깨끗해 보였다. 병자 같던 인상은 어디에 가버렸는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모독적일 정도로 성스러워보였다. 마치 내가 길 한복판에서 발가벗겨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눈을 떴다. 하지만 초점이 흐렸다. 마치 은하수를 걷고 있는 사람처럼 어머니의 몸짓과 표정은 달에 녹아드는 것처럼 가벼웠다. 경찰이 경고하는 것 같은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끔찍하게 느리게 이어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지옥 같던 소란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와 아이, 동생만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 남자들과 아이의 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아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물었다.
“도대체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니? 무언가 범죄 같은 거니?”
방 안에서도 동생이 우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동생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종종걸음으로 뛰어 나왔다. 동생이 뛸 때마다 그 울음소리가 단속적으로 끊겼다. 동생은 두 팔을 약간 들고 안기려는 자세를 취한 채로 고요해진 현관문을 보며 울었다. 아이가 울음 때문에 간간히 끊기는 목소리로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이젠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분노로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아아! 나는 아이의 말을 듣는 와중에 계속해서 그 입을 막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어떻게 그런 짓을! 심지어 다른 아이들에게도! 도대체 그런 거대한 죄악을 저질러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형 같은 폐쇄적인 망상증 환자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손에 넣었나. 무언가가 더 있는 것은 아닐까?

5.
아이들은 둘 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밤이 깊어 자정이 지났지만 아이들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형과 함께 마을회관에서 알 수 없는 공포스러운 행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났다. 마을회관으로 가 볼 것이다.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아이들도 지금 마을회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아이는 그저 형이 이 마을에 나타나 마법적인 볼거리로 사람들을 마을회관에 모이게 한 과정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다양성이라는 개념에 의해 사회적인 테두리 안에서 용인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정말로 불법적인 종교적 사악인지. 사법기관에 대규모의 수사를 의뢰하기 위해서는 일단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관문은 아픈 듯 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사위는 어두웠다. 눈이 이미 충분히 어둠에 적응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풀벌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소리만으로는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 집 주변을 산책하는 척하며 배회했다. 종단의 연회에는 신도라면 전부 참여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혹시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그네들은 광신도들이므로 어떤 변태적인 방식을 사용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기네들의 신을 위해서라면 시체밭에서도 구르는 종자들이니까. 나는 일부러 기지개를 펴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기대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아이가 깨어서 복도에 나와 있었다.
“뭐하세요?”
“회관에 가 봐야겠다. 꼭 필요한 일이야. 네 어머니를 데려온 다음에 차를 타고 마을을 벗어나자꾸나.”
“힘들어요. 우리가 도망치더라도 쫓아 올 거예요.”
나도 그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아직 쓸 만한 해답은 내리지 못했지만. 확실히 종단의 성격이 누구나 고개를 돌릴 정도로 사악한 것이 아닌 이상 완전하게 박멸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반사회적인 종단에 시달림을 받는 것을 구해내겠다는 이유로 내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도 저어되었다. 신도들은 내 얼굴도 알고 어쩌면 내 차의 번호를 알고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하기는 해야 했다. 나는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지금 마을회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회라고 불리는 종단의 최대행사가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아이들이 증언한 것만으로는 누가 봐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일단 회관에 갔다 와 보마.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이는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요.”
“회관은 아까 거기 맞지?”
“네.”마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듯이 고요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두운 곳만을 골라서 움직였다. 감시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면? 길을 잃었다고 우겨야지 뭐.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죽을 수도 있지만. 동네에 개가 없다는 것이 이제는 기쁘게 느껴졌다. 몸을 잔뜩 낮추고 엉덩이로 바닥을 거의 쓸면서 움직이려니 몸이 쑤셨다. 나중에는 아예 네발 달린 동물처럼 두 손과 무릎으로 이동했다. 옷과 손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길 찾기는 의외로 힘들었다. 아침에 딱 한번 걸어본 길이라 밤에, 눈여겨둔 지표들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에서 움직이려니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었다. 들키지 않게 하랴, 길을 생각해 내랴, 움직이는 속도가 굼벵이보다 느린 것 같았다. 앉아서 움직이려니 마을이 아침에 본 마을과는 아예 다른 것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꺼둔 상태라 시간을 볼 수 없어 답답했다. 나는 이제까지 온 경로를 기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타인의 눈에 띠지 않는 표지를 고안해냈다. 마을 사람들이 보더라도 그냥 평범한 낙서라고 생각해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사실은 길을 지시하는 암호였다.
한참 헤매고 써 놓은 암호를 수 없이 지우다 보니 어느새 아침에 왔던 왼쪽으로 꺾이는 길에 도달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들키는 수가 있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흉가처럼 고요했지만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꼬박꼬박 발밑을 확인하며 움직였다. 소리가 들렸다. 연회였다. 온갖 종류의 음색이 종작없이 섞어 생물의 내장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게 생긴 이름 모를 괴물을 연상시켰다. 사람을 도망가도록 만드는 끔찍한 북소리위에 세워진 괴기스러운 건조물과도 같았다. 나는 벽을 따라 집의 건너편으로 가서 담 위에 놓인 벽돌에 총안처럼 나 있는 구멍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곳에 소리만이 담겨 있는 어둠이 있었다. 사람의 존재를 암시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저 칠흑 같은 어둠 안에서 연회가 벌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광경일까. 불을 켜면 무엇이 나올까.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끔찍한 형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내가 사물의 윤곽조차 식멸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다면 내가 저곳에 섞여 들어가더라도 거꾸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주민들 중 일부가 밤에도 잘 보이도록 해주는 야간투시경 같은 것을 끼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결심한 이상 가야했다.
다행히 마을회관에 도착할 때 까지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얼굴에 흙을 바르고 옷도 전부 뒤집어 입는 바람에 피부가 온통 따끔거렸다. 마을회관에 있는 평상의 아래쪽으로 기어들어가고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연회의 소음은 거대하게 확대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을회관의 내부에서 나는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낮게 기어서 마을회관의 현관문, 문풍지가 발라진 목재 미닫이문으로 다가갔다. 확실했다. 마을회관 내부는 비어있었다. 회관 가까이 다가가기 이전에는 크게 들려오던 소음이 이제는 건물에 가로막힌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나는 미닫이문의 설주부분에 손을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건물 안은 공복인 위장처럼 덩그러니 비어있었다. 무저갱의 바닥과도 같은 먼 곳에서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기괴하게 변형된 인간의 목소리가 무의식의 깊은 부분을 자극하는 음률을 노래 부르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배신당한 마음에 화가 나서 잠시 동안 몸을 숨기는 것을 잊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낮추고 마루 아래로 들어가려하는데 눈앞에서 불빛이 보였다. 미약한 빛이었지만 암순응을 한 상태에서 본 마당이라 한참동안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불빛이 비춘 방향을 기억하기 위해 머리를 고정하고 몸만 움직여 마루 밑으로 들어갔다. 단단한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측두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눈앞에서 섬광탄이 터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눈물이 나는 것을 참으며 머리의 위치를 새처럼 고정한 채로 얼마 있으니 잔상이 가시고 다시 거대하게 느껴지는 어둠이 나타났다. 방향은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확인 차 주변을 둘러본 후에 기억해둔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가니 부스럭거리는 수풀이 나타났다. 삭막하게 느껴지는 건조한 바람이 숲 안쪽에서부터 풀과 나뭇잎을 바스락거리며 불어왔다. 한 순간 연회의 광란적인 소음이 스피커를 바로 앞에 가져다 댄 것처럼 확대되었다. 음습한 노랫소리. 내가 만약 이 소음이 인간이 내는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일찌감치 공포로 미쳐버렸으리라.
붉은 용, 슈브 니구라스, 머리가 없는 하얀색 히드라.
아버지 다곤.
화왕.
순간적으로 내가 깊은 심해의 거대한 괴물들 사이에서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환각이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하게 뛰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끔찍한 환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애썼다. 행복한 상상을 떠올릴 때 마다 괴물들의 거대한 입이 나타나 삼켜버렸다. 그 감정에서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증오였다. 나를 해하려는 자들에 대한, 강하게 농축된 증오. 증오가 암덩이처럼 뱃속에 들어찼다. 덕분에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공포심은 상당히 사그라졌다. 한 순간 이대로 쓰러져 잠들어버리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한 순간의 충동적인 판단이 어떤 결과를 일궈낼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나는 있는 정신력을 죄다 끌어 모아 근육의 긴장으로 인해 기계인형처럼 변해버린 몸에 다시 스위치를 넣었다.
얼마 들어가니 공터가 나타났다. 악몽처럼 한순간에 떠오른 공포스러운 광경에 나는 차마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기괴하게도 사위는 어두웠지만 화산이 놓인 곳의 천정점에 해당하는 하늘은 암청색으로 희미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화산의 외곽선이 거인의 종기처럼 검게 부풀어 올라 어둠 속에서 외계의 이질적인 지형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공터는 곳곳에서 타오르는 횃불로 시시각각 인상을 바꾸며 끔찍스러운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등을 돌린 채로 이상한 무늬가 양각된 제단 같은 구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섬세한 기술로 조각된 제단의 그림들은 횃불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림자를 드리우며 움직였다. 공터의 곳곳에서 불과 관련된 상징들과 장치들이 보였다. 굉장히 독특하고 독창적이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상징적인 면이 잘 정제된 모습을 보였다. 온갖 기괴한 생물들이 재질을 알 수 없는 조상들로 만들어져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악한 인상이었고, 마치 제단이 위치한 공터의 중심으로 그 악의와 통증을 집중시키고 있는 듯 한 배치였다. 제단은 그 무시무시한 무대장치들 중에서 제일로 흉악스럽고 악마적인 종교적 고안물이었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응축시켜 만든 듯 한 제단의 모양은 그야말로 범인의 능력을 뛰어넘은 무언가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 같았다. 제단에 양각된 것들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연대순으로 배열된 일종의 서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함을 무기로 삼는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그들 곁에서 공포에 전율하는 새우만한 인간들. 화산. 하얀 벌레.
제단은 그 육중한 무게감과 위압적인 모습으로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인간들을 공포로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단 위에 흥건한 붉은 액체 위에는 아이들의 잘린 머리가 다섯 개 놓여 있었다. 흐릿해진 아이들의 눈에서 나는 무언가 빨려 들어가는 듯 한 이상한 느낌을 느껴야 했다. 아이들의 얼굴 표정은 공포에 질려있다기보다는 거대한 공포를 접한 이후 백치가 되어버린 모습과 같았다. 그 아이들이 목이 잘리기 직전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차마 거기까지는, 나조차도 알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말하기를 ‘아이들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다.’ 이 광경은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가장 극악한 형태로 구현해 놓은 것에 해당했다. 횃불의 빛이 아이들의 얼빠진 눈을 핥고 지나갈 때 마다 나는 그 눈 안에서 무언가 하얗게 고물거리는 징그러운 것을 본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의 머리가 놓인 제단 뒤에 계단처럼 올라온 기다란 부분이 있었다. 그곳이 제단에서 가장 높은 부분이었다. 그 위에 하얀 나신으로 가로누인 여자는, 다름 아닌 아이들의 어머니였다. 제단 뒤의 어둠 속에서 누덕누덕한 성직자의 복색을 한 인간이 사악한 규칙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승들이 입는 검은색 복장과 비슷했지만 그것은 형태만이 유사할 뿐 의상이 상징하는 바는 근본부터 흉악한 쪽으로 어긋나 있었다. 성직자의 복색을 한 인간의 얼굴은 일찍부터 횃불 아래에 드러나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해보려 애썼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 극악한 종교적 범죄에 중심인물로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저 인물은 바로 나의 형이었다. 형은 아이 어머니의 나신 위에 이상하게 생긴 성물들을 늘어놓고 밤에게 공양하는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화왕의 임재 제사였다.
형은 마치 태초의 광란을 악의적인 목적을 위해 일정한 규칙에 맞추어 다듬어내는 지휘자와도 같았다. 형은 공터의 마을사람들이 정확한 발원지를 알 수 없는 숲 속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음률에 맞춰 춤추는 동안 계속해서 잊힌 언어로 구성된 주문을 읊었다. 넋을 놓고 얼마간 보고 있었을까, 제사의 양상이 일변했다. 음률과 춤, 주문이 계속되는 동안 성직자의 복색을 한 일군의 인간들이 제단의 앞에서 의식이 살아있는 산 사람을 태웠다. 그것은 신에게 구운 제물을 공양하는 번제였다. 날카로운 인간의 비명소리가 숲을 가르는 동안 그것을 악마적인 일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나 혼자만인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미치광이였다. 아니, 나 또한 저들과는 다른 형태의 미치광이일지도 몰랐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내 정신이 이상하게 변조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태워진 제물이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공터의 팔방에 뿌려졌다. 횃불 속에서 타오르는 마취작용을 가진 마전과 식물의 향기가 모든 것을 몽환적인 안개로 덮어 발랐다. 시야가 뿌연 꿈같은 상태에서 제단의 잘린 머리들이 살아나 입을 열었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다. 마치 화자가 인간이 발성하는 것과는 다른 기관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다섯 개의 머리가 모두 움직여 서로 다른 대역의 음성을 내고 있었다. 공터의 인간들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찾아 온 듯 모든 것이 벌떼처럼 경련했다. 신탁이었다. 형이 고대의 짐승이 발하는 모독적인 언어를 트랜스 상태에서 번역했다. 인간의 멸망과 무지의 공포. 이기적인 악의에 대해서. 모두 죽여라! 모두 죽여라! 그러면 행복하게 되리라.
내 뒤편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몇몇 남자들이 횃불을 들고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무거운 성물상자를 공터로 날라 오던 중 나를 목격한 것이다. 나는 약에 취한 상태에서 시야를 바쁘게 움직이느라 머리가 고통스러웠다. 곧 감각의 이상 때문에 귀를 찢는 듯이 느껴지는, 묵직한 방망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왼쪽 귀에서 들려왔다. 남자 하나가 몽둥이로 내 머리를 깨부수려 하다가 실패한 것이다. 내 인간성을 송두리째 말살하는 살벌한 저주와 욕설이 퍼부어졌다. 종교에 미친 이들이 성전을 모독한 나를 어떻게 취급할지는 뻔했다. 나는 피하려 했지만 남자들은 나를 반원형으로 둘러싸며 막무가내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나마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딱 한곳이었다. 나는 제사가 집행되는 공터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형을 불렀다. 형도 나를 보았다. 발광하는 듯 한 붉은 눈이 나를 태울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형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사장에 해당하는 형이 한쪽 손에 들고 있던 홀로 나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저놈도 불에 태워라! 불경스러운 것을 불길로 정화하고 성전을 다시 성별해야 한다!”
공터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나를 죽이기 위해 덤벼들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발악할 목적으로 제단을 향해 곧장 뛰어갔다. 나를 보고 있던 형의 눈이 점차 공포로 물들었다. 나는 그 표정에 모든 것을 걸고는 그대로 제단을 발칵 뒤집어엎었다. 말하던 머리들이 내 손에 내쳐지며 공포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무저갱 안의 거대한 아비돈이 나타나더라도 그 비명을 들으면 공포심으로 곧장 죽어버리리라.
제단은 무거웠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나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했다. 비록 힘이 팔의 근육에 한꺼번에 몰리는 시간은 잠깐이기는 했지만 제단을 통째로 엎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6.
제단이 무너지자 제사장을 비롯한 공터의 신도들이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발광하기 시작했다. 제단 뒤쪽에서 귀신 같이 하얀 것이 슬금슬금 나타나서 나는 기겁하며 뒤로 넘어졌다. 자세히 보니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 눈에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허둥지둥 바닥에서 옷가지들을 주워 입더니 명료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야만 해요!!”
나도 바라는 바였다. 제단에 왼쪽 다리가 깔린 형은 뇌출혈이 일어난 사람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며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마치 검은 거미처럼 버둥거리는 형의 모습이 한순간 안쓰럽게 느껴졌다. 형처럼 유약하고 섬세한 신경을 지닌 인간이 이런 사악한 광기를 가지게 되기까지의 정경이 검은 우주처럼 거대하고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아이의 엄마가 연기 같은 옷을 펄럭거리며 달려 나갔다. 나또한 벼룩이 튀듯이 그 뒤를 쫓았다. 화산이 거대하고 포악한 사투르누스처럼 울고 있었다. 화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들끓는 용암에서 기어 나온 혼돈이. 화산이 마그마를 뿜으며 분화하기 시작했다. 시뻘겋게 빛나는 용암이 눈물처럼 화산의 사면을 타고 무서운 기세로 흘러내렸다. 화산 안에서 무언가가 나오려 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고 용암만이 중심 화구에서 울컥대며 뿜어져 나왔다. 마치 무언가에 밀려나오는 것처럼. 모든 과정이 인간이 지각하는 것과는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도저히 지구의 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하고 거대한 소리가 모든 사물에 부딪쳤다.
나는 아이의 엄마를 앞세워, 꺼져가는 촛불처럼 경련하는 무수한 인간들을 지나쳐 공터를 벗어났다. 그 짧은 시간,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우주적인 규모를 가지고 있는 신의 실체가 보였다. 거대한 하얀색 구더기였다. 거대한 하얀색 구더기가 화구 안에서 짜내는 듯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사방이 화염이었다. 구더기는 이상하게 골격이 있는 듯 한 몸을 뻗어 천정점과 수직이 되게 위치했다. 마치 기괴하게 발광하는 하늘에 입 맞추는 듯 한 광경이었다.
모든 것이 곡선으로 뒤틀리고 구더기도 인간도 꿈틀거리며 기괴한 춤을 추었다.모든 정경이 수풀과 어둠으로 가려지기 직전에 나는 하늘로 뻗은 구더기의 주변에서 선회하며 날아다니는 기괴한 발광체들을 본 것 같았다.
아이들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집 밖에 나와 있었다.동생 쪽은 벌써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타나자 둘 다 울며 달려와 품에 안겼다. 나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모두가 동의했다.
아이의 엄마는 동생이 화구에서 기어 나온 것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둔덕까지 가서 차에 올라탔다. 이미 멀찍하니 떨어진 화산은 마치 별세계의 지옥처럼 변해 있었다.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광경 같았다. 자연이 발광하며 자신이 배태하고 있는 혐오스러운 것을 뱉어내는 것 같았다. 구더기가 녹아내리고 있었다.구더기는 바깥부터 기분 나쁘게 하얀 점성이 있는 액체로 변해 화산의 사면을 흘러내렸다. 너무나 시각적으로 역겹게 느껴지는 광경에 나는 계속해서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차에 시동을 걸고 달아났다. 구더기의 환영에 홀린 인간들이 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내지르는 비통한 비명소리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죽음과는 우주만한 크기로 벌어진 끔찍한 일이 신도들의 몸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가 되어 지르는 비명은 듣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정신을 미치게 만들 만한 수준이었다. 우리는 신도들의, 이 세상을 떠나 외우주의 나선형 지옥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듯 한 비명에 감정이 이입되지 않도록 고래고래 무언가를 노래 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차원처럼 변화된 마을에서 나는 아직까지 내 귓가를 망령처럼 맴도는 변질된 혈육의 단말마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신이여, 외부 우주에 들어찬 창조주여, 제발 저희에게 자비를!!”
우리는 마을을 벗어났다. 마치 지옥으로 변한, 이제는 옛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행성을 탈출하는 피난민과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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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모두 가상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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