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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1999년, 매미를 위하여

2009.02.27 22:1302.27

1999년, 매미를 위하여






『 내 이름은 매미. 내 얘기 한 번 들어볼래?

피-오스 피오-스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 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 피오-스 피오-스-쒸-이-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 』




잠든 아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부자리는 아이의 험한 잠버릇으로 어지럽혀 있었다. 아이는 손으로 더듬더듬 베개를 찾더니 자신의 귀를 막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시 방안에 정적이 찾아왔고 아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아이의 그런 수고에 아랑곳없이 매미 떼가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매애애애애-.

「아, 씨-!!」

아이는 신경질적인 발차기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까치집인 머리를 벅벅 긁어대더니 곧 눈도 못 뜬 채로 아이는 엄마를 찾으려 자신의 옆을 더듬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잔뜩 헝클어져 주름진 이부자락밖에 없었다.

「엄마?」

좁은 집 안에 엄마가 있을 만한 곳은 부엌과 화장실밖에 없다.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에 아이는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에서 물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기 주먹만큼 열려 있는 문고리를 잡자, 차가운 쇠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끄럽지 못한 이음새 덕에 끼이익 소음과 함께 문이 덜덜 거리며 열렸다. 깜깜한 화장실 내부에 들어서자 차가운 물이 아이의 발을 적셨다. 사물의 분간보다 비릿한 피 냄새가 먼저 다가왔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더 빈번하고 빠르게 들려왔다. 아이는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알아차렸다. 터질 듯 울려대는 심장을 토해낼 듯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아이는 벽을 더듬어 가까스로 전구를 켜는 스위치를 눌렀다. 갑작스레 찾아온 밝음은 사방에 음습하게 깔린 붉은색을 알렸다. 아이는 그 광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아이의 엄마가 물이 가득 채워진 빨간 고무 다라이에 손목을 넣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떼 묻은 네모난 흰색 타일은 핏물에 절은 채 몇 개는 조각조각 깨져 있었다. 노란빛을 내던 전구가 불안하게 깜박이며 흔들렸다.




* * *




L'an mil neuf cens nonante neuf sept mois,

Du ciel viendra un grand Roy d'effrayeur,

Resusciter le grand Roy d'Angolmois,

Avant apres, Mars regner par boheur.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그 전후 기간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하에 지배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中>







아주 평화로운 날, 1999년 2월. 김 군은 같이 어울려 노는 패거리들과 먹고 마시고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투박한 모양새의 건물옥상에 신문지를 깔고 남녀 구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 중 나이 어린 몇이 술과 안주거리를 갖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말이 갖고 오겠다는 것이지, 실상은 떼로 몰려가 사람 협박해서 뜯어낸 돈으로 사오는 것이었다. 최고 고참격인 김 군과 명진,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여자애만 남아있었다. 화장 짙은 여자애는 손바닥만 한 미니스커트 때문에 속옷이 보임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명진이 느물거리는 모양새로 저속한 말을 날려도 여자애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예사 계집애가 아니구나. 김 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신문지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김 군은 내년이면 20살이 된다. 그 때가 되면 이 지긋지긋한 패거리들과도 찢어지게 될 것이다. 엊그제 집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데 벌써 삼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엄마가 죽고 김 군은 엄마랑 이혼하고 새 살림 차린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깨끗한 새 가정에 적응하지 못한 김 군은 항상 겉돌았다. 학교에서도 공부는 안하고 싸움만 일으키는 김 군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에 불려가 피해자 부모와 선생님께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해야 했던 새어머니의 눈초리가 곱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아버지와 대판 싸우던 끝에 김 군은 결국 집안을 한차례 더 뒤집어엎고서야 집에서 나왔다.

인터넷 채팅에서 가출 친구들을 모았다. 그리고선 pc방, 오락실, 당구장등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처음엔 순진한 중고등학생들의 코 묻은 돈을 빼앗는 것부터 시작해서 도둑질, 원조 교제 등 안 해본 게 없었다. 아는 형의 소개로 호스트바에도 한 번 가봤지만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나왔다. 첫 날 30만원이나 번 것을 보면 가장 짭짤한 일거리였지만 김 군은 생각지도 못한 아줌마들의 게걸스런 변태 행각을 견뎌낼 수 없었다. 내년부터는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있겠지만 과연 시급2700원 정도에 만족할 수 있을지 김 군 자신도 믿음이 안 갔다.

잠깐 눕는다는 게 얕은 잠을 잤던 모양이다. 때 아닌 물방울의 기습에 뺨을 얻어맞은 김 군이 눈을 떴다. 비?

-짝!

「이 갈보가!」

「갈보는 너겠지. 이 병신아.」

이건 또 웬 싸우는 소리인가 싶어 김 군이 몸을 반쯤 일으키자 명진이 여자애를 일방적으로 폭행하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여자애는 독기서린 눈으로 끝까지 욕을 날려주었다. 흥분한 명진은 여자애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다. 김 군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한숨을 내쉬던 김 군이 명진의 팔을 붙잡자 명진이 다른 쪽 주먹으로 김 군을 때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김 군이 혀로 피가 맺힌 입술을 핥더니 곧 명진의 등짝을 발로 찍었다. 꼴사납게 엎어진 명진은 이성을 잃고 김 군에게 달려들었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왜? 너도 저년이랑 하고 싶냐?」

「뭐라는 거야, 이 개새끼가.」

주먹을 치고받던 둘은 점점 옥상 난간 쪽으로 밀려났다. 덩치로 보나 힘으로 보나 우세한 건 명진 쪽이었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옅은 빗줄기로 변해 바닥이 미끄러웠다. 김 군이 명진에게 크게 한방 맞고 옥상 난간에 부딪쳤다. 부실한 옥상 난간이 크게 신음했다. 그 때 뒤에서 보고 있던 여자애가 명진의 뒤통수에 대고 자신이 신고 있던 하이힐을 내리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휘청하던 명진은 충혈이 된 눈동자를 다시 여자애 쪽으로 굴렸다. 산발인 머리에다가 코피를 뚝뚝 흘리고 있던 여자애는 자신의 회심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당황했는지 절뚝거리는 걸음새로 도망가려 했다. 스산한 기운의 명진이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꺼냈다. 명진이 도망가는 여자애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것과 김 군이 몸을 날려 명진을 밀어낸 것은 동시였다. 여자애는 머리가 몇 가닥 뽑힌 채로 옆으로 쓰러졌고 명진은 옆의 난간 쪽으로 밀려나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했다.

퍽-

「꺄아아아아아아」

뭔가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렸지만 김 군은 현 상황이 제대로 파악이 안 되었다. 여자애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김 군은 난간을 짚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났다. 아래를 내려다보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4층이니깐 팔다리나 몇 개 부러지고 말았을 거다. 덩치도 있는데 설마 여기서 죽을까. 명진이 그 새끼 죽으려면 63빌딩쯤은 돼야 할 거다, 김 군은 깨질 듯 한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 엎어져 있었으나 깜깜한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확인하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된다. 김 군은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에 계단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명진아.」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달도 구름에 가려져 아무런 빛도 없는 그 곳에 명진의 커다란 육신이 엎어져 있었다. 김 군이 조심스레 다가서자 가로등이 위태롭게 점멸했다. 젖은 아스팔트 바닥이 가로등 빛에 붉게 물들었다. 그것이 단순한 빛의 놀음인지 진짜 피 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붉은색, 물, 점멸하는 등…… 김 군의 입에서 얼빠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다, 실제론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숨넘어가는 소리만 꺽꺽 지르던 김 군은 뒷걸음질 쳤다. 아스팔트를 물들이고 있는 그 지도가 자신의 발을 묶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도망가야 한다. 뇌에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을 돌렸다. 신경세포 하나하나까지 살아나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 같았다. 빗길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물과 마찰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빗줄기가 또렷해지자 발밑의 소음이 더 커졌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애 쓰지만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비를 먹어 축축해진 아스팔트가 느린 발목을 붙잡았다. 그에 따라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은 더 이상 달릴 기력이 없어 보였다.

어느 빌라 주차장에 안착해 그대로 뻗었다. 숨이 조금씩 잦아들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던 머리가 둔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지금쯤 술 사러 갔던 놈들이 명진을 발견했을 거다. 신고라도 할 걸. 응급차라도 불러주는 거였는데…… 당시 머릿속을 장악하던 어떤 기억 때문에 제대로 된 상태확인도 못해보고 꼴사납게 도망쳤지. 만약 죽었다면, 죽었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러나 이내 부정한다. 그럴 리 없어, 를 반복적으로 외던 김 군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다.

주위 상황을 인식하고 나니, 안 그래도 비에 젖어있던 김 군은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올라와 뼛속까지 아렸다. 절로 이빨이 딱딱 부딪힌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등을 기댔다.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다리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까의 기억이, 또 그보다 더 오래전의 기억이 번갈아가며 의식의 수면위로 떠올랐다. 양 팔에 서로 붙들던 손에 잔뜩 더 힘이 들어갔다.


* * *


누군가 약하게 신발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발견한 모양인지 발걸음에 망설임이 서린다. 뒷목이 뻐근하다. 꼬리뼈엔 감각이 없다. 다리가 심하게 저려왔다. 아파서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위에서 음식물 쓰레기통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음식물 투하하는 소리, 시끄럽게 비닐을 터는 동작, 그리고 도망간다. 제길, 가지 말라고. 김 군이 급히 입을 열었다.

「엄마.」

그 말을 인식하는 동시에 급속도로 귀에 열이 올랐다. 모르겠다. 왜 그 말이 튀어나갔는지. 헛나간 말을 다시 주워 삼킬 수도 없고, 차라리 그냥 지나갔으면, 하고 김 군은 바랐다. 그러나 그 말을 똑똑히 들은 것인지 여자가 그 자리에서 못이 박힌 듯 꼿꼿이 서 있다. 그리곤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해볼래?」


밥이다. 제대로 된 밥, 뜨끈한 아침식사. 그것도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된장찌개에 계란 프라이, 시래깃국.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아침식사를 챙겨먹어 본 게 몇 년 만이던가. 물론 김 군은 감회에 젖을 새도 없이 마구 입안으로 열심히 음식물을 나르는 중이었다. 반대로 여자는 젓가락만 빤 채, 계속 김 군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밥 더 줄까?」

아직도 여자의 눈 안에선 두려움, 망설임 같은 것이 보이지만 밥을 퍼주는 손길은 따뜻했다. 이번에도 김 군이 미련스럽게 밥을 입 안에 처넣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도 안심한 듯 천천히 숟갈을 움직였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좋은 소파다. 김 군은 생각했다. 좋은 소파다. 김 군은 앉아있는 상태였다. 좋은 소파다. 여자도 앉아있다. 좋은 소파다. 몇 분째, 말없이 두 사람은 앉아있는 상태였다. 좋은 소파다. 김 군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좋은 소파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좋은…… 씨발, 이젠 그만하자.

「잘 먹었습-」

「갈 데는 있니?」

김 군이 말하기 무섭게 여자가 받아쳤다. 여자의 메마른 시선이 김 군을 훑었다. 그 눈빛에 약간 긴장한 김 군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연다.

「너 내 아들 할 생각 없니?」

김 군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여자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내 아들 할 생각 없냐고. 김 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친 여자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김 군이 현관으로 향해, 신발장을 열었다. 이 집은 신발장에서도 향기가 난다. 김 군은 그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자신의 해묵은 나이키 운동화를 꺼냈다. 사실 이 신발은 2년 전 길 가던 중학생의 것이었다. 김 군이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는 그 때, 등 뒤에서 여자의 절박한 음성이 들렸다.

「그냥 엄마라고 부르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니?」

그 안엔 약간 원망과 분노의 기색이 엿보였다. 아, 똥 밟았다. 김 군은 싸늘하게 비웃으려 뒤돌아섰다.

「내가 왜 그래야-」

드르르르르.

내가 왜 그래야하는데요, 아줌마, 라고 말하려던 참이던 김 군은 핸드폰 진동에 크게 놀라 뒷걸음쳤다. 몇 달 전, ‘돈 많은 누나’가 사줬던 핸드폰이다. 삐삐면 된다고 김 군이 사양하는 것을 그럼 갖다버리던지, 하고 짜증내는 모습에 엉겁결에 획득한 것이었다. 김 군이 가지고 있는 가장 고가의 물건이기도 했다.

드르르르.

「안 받니?」

여자의 물음에 김 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을까. 김 군은 힘없이 현관바닥에 주저앉았다.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바닥을 접하면서 시끄러운 굉음을 냈다. 분명 패거리 중 한 명일 것이다. 어젠 다들 경황이 없었을 테지만, 지금쯤 모두들 김 군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뻔했다. 갈 데가 없다. 소년원밖에.

드르르륵.

「할 게요, 엄마」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요즘 대세는 서태지인데, 저게 대체 언제 적 노래야. 김 군은 여자의 촌스러운 노래를 비웃었다. 모든 게 최신식인 이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비싼 메이커건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힌 것 같았다. 이름 있는 메이커를 둘러도 여자에겐 ‘행색’이나 ‘몰골’이라는 단어가 적합했다. 절망적이군, 김 군이 중얼거리자 여자가 뭐라고 했냐고 물어본다. 아무것도 아닌데요. 김 군의 비소에도 여자는 아랑곳 않고 촌스러운 옛 노래를 부르며 김 군의 방을 안내했다.

「앞으로 우리 영호가 머물 곳이야」

닭살이 돋는다. 우리 영호가 뭐야, 대체. 김 군은 부담스러운 애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가 ‘우리 영호’라고 부를 때마다 기묘한 위화감 같은 것이 가슴을 쳤다.

「영호야, 어때?」

여자가 안내해준 방은 모든 준비가 갖춰진 완벽한 아기 방이었다. 핑크색 구름 모양의 벽지엔 한글의 모음과 자음이 적힌 포스터와 기린 모양의 유아용 키재기가 걸려 있었다. 그 안엔 아기 침대나 보행기, 유아용 소아변기부터 갖가지 인형, 장난감, 로봇, 자동차 등의 아기자기한 소품들까지 없는 게 없다. 신생아부터 미취학 아동까지 위탁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여자가 천장에 달린 모빌의 스위치를 누르자 정신 사나운 멜로디가 들렸다. 멜로디는 ‘엘리제를 위하여’이다. 김 군은 이 노래하면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게 여자는 그 멜로디에 맞춰 지휘하는 동작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열정적인 자세만큼은, 지금 이 순간 마에스트로나 다름이 없었다. 환장하겠군. 김 군이 허탈하게나마 웃자, 여자의 지휘에 더 힘이 들어갔다. 알레그레토.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처음 보는 아빠란 사람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은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깨끗한 새 집이었지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새 엄마가 생겼어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예쁘고 젊은 엄마였어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도 포근하겠지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었어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엄마는 통화 중이었어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어머 싫다 내가 이 나이에 애를 떠맡아야겠니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애들은 질색이야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내가 싫대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딱풀 투성이의 내 손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카네이션 대신 흰 국화꽃을 내밀었지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그럼 나도 싫다 엄마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기상. 영호야, 일어나서 아침밥 먹자」

이불이 붕 뜬다. 춥다. 김 군의 머리가 베개 밑으로 파고든다. 여자의 매서운 손바닥이 사정없이 김 군의 엉덩이 두 짝을 내려친다. 김 군이 좋아서 트위스트를 춘다. 어제 김 군은 끝까지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겠다는 정신 나간 여자를 쫒아내고,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이딴 정신 나간 방에서 자니깐 꿈도 지랄같이 꾸지. 김 군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속어를 연신 내뱉는다. 씨발, 씨발, 씨발. 여자가 김 군을 억지로 일으키며 어르고 달랜다.

「우리 아가, 일어나서 맘마먹자. 착하지?」

김 군의 눈이 마침내 뜨인다. 여자가 친절하게 김 군의 눈곱을 떼어준다. 부은 눈의 김 군이 발을 구르며 화장실로 향한다.




콸콸콸.

대체 이 미친 연극을 언제까지 할 건데, 김 군이 거울 속 자신에게 말을 건다. 거울 속 김 군이 말한다.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 여기 나가면 당장 어디서 지낼 건데? 김 군이 까치집인 제 머리를 벅벅 긁는다. 아, 돌겠네. 거울 속의 김 군이 위로한다. 참아, 그냥 가만히 앉아서 저 미친 여자 이용해먹기만 하면 되는 걸. 그리고 이런 호강을 언제 또 누려봐, 안 그래?

수도꼭지를 잠갔다.




「우리 영호한텐 너무 작네.」

5, 6세용 슈퍼맨 티셔츠를 김 군의 몸 위에 대보던 여자가 말했다. 김 군은 이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굳게 다문 김 군의 입술을 여자가 손으로 꼬집는다. 오리 주둥이가 된 채 여자의 손에 농락당하던 입술은 김 군의 뿌리침으로 원상태로 복귀했다. 무슨 짓이야. 김 군의 원성에도 여자는 굴하지 않는다.

「아유, 요 귀여운 것. 엄마랑 백화점가서 꼬까옷 입자.」

말을 말자. 김 군은 피로했다.




1층부터 10층까지 온갖 매장을 휩쓸며 비싼 메이커 옷을 사들였다. 옷 뿐 아니라 이제 김 군에게 신발이며 시계며 없는 게 없었다. 김 군은 납득했다. 예전에 돈 많은 누나 비위 맞추던 것처럼 하면 된다고. 돈 많은 엄마한테도 어려울 게 없다. 사실 그 동안에 이보다 더러운 짓도 많이 해왔잖아. 역할놀이 쯤 아무것도 아냐. 여자가 김 군 앞으로 손을 내민다. 김 군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여자의 손을 잡는다.





「영호야, 아, 해봐.」

김 군이 도리도리 고개를 필사적으로 내젓는다. 우리 영호는 목 운동도 잘하지. 어서 아, 해. 빨간 토마토케첩이 묻은 햄이 달려든다. 김 군이 입을 꽉 다문 채 벗어나려 애쓰지만, 무식하게 김 군의 양 볼을 제압하고 있는 여자의 악력은 대단했다. 이미 김 군의 입 주위는 케첩 범벅이다. 억지로 한 유아용 턱받이가 흘러내렸다. 편식은 나쁜 거야.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쑤셔대는 쇠 젓가락에 앞니가 부딪혔다. 순간적인 고통을 참지 못하고 김 군의 입이 열렸다. 그 틈을 노린 햄이 김 군의 처절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입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끝내 폭발해버렸다. 김 군이 뿌리치자, 여자가 들고 있던 젓가락이 날아간다. 김 군은 내친김에 잘 차려놓은 아침상도 엎어버렸다. 상을 엎으면서 보글보글 끓던 김치찌개가 여자의 다리를 덮쳤다.

「욱-」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리 위로 엎어진 냄비를 옆으로 치운다. 김 군이 놀라서 다가왔다. 엄마는 괜찮아. 헛소리를 내뱉는 여자를 안아들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치마를 벗기고 다리에 찬물을 뿌려댔다. 잔뜩 빨개진 다리엔 얼룩덜룩 상처가 나 있다. 김 군은 어쩔 줄 모른다. 허둥대는 김 군을 보고 여자가 단호하게 말한다.

「엄마는 괜찮으니깐, 영호는 나가 있어.」




김 군은 봤다. 가출한 애들 중엔 부모한테 매 맞아서 나온 애가 꽤 있었다. 그런 류의 흉터라면 진력나도록 많이 봤다. 분명 여자의 다리는 맞아서 생긴 흉터들로 가득했다. 김 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불쌍해.

-벌컥

「영호야, 또 자? 얼른 씻어.」

방문이 열리고 여자가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은 여자의 얼굴에 김 군은 도리어 화가 났다. 자신을 일으키려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자, 여자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엄마가 씻겨줄까?」

「도대체 왜 이래? 아줌마, 바보야? 진짜로 미치기라도 한 거야?」

속사포처럼 쏟아지더니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꺼내져 나왔다. 연이어 아줌마 같이 불쌍한 여자만 보며 화가 끓어, 라고 소리치려던 김 군이 말을 멈추었다. 여자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등 밀어줄게. 화내지마, 영호야. 엄마, 무서워.」

왜 그러고 살아, 이 못난 아줌마야.




결국 김 군의 머리는 여자 차지가 되고 말았다. 여자의 손놀림은 어설프지만 아주 열성적으로 머리를 감겼다. 김 군은 이마뿐 아니라 눈과 귀에도 샴푸 거품이 두껍게 도포되어 있었다. 머리가 쥐어뜯기는 아픔을 견디며 김 군이 입을 떼었다.

「엄마, 남편은 어디 있어?」

여자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곧 강한 세기로 움직여댔다. 아주 두피를 뜯어내는 구나. 여자가 말이 없다.

「뭐야. 그럼 내가 그 남편까지 아빠라고 불러야 돼? 씨발.」

김 군이 일어나려 발버둥치자, 여자가 김 군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진정시켰다.

「아니, 아빠는 필요 없어. 영호야. 굳이 애쓰지 않아도 돼.」

여자의 어조는 차분했다.

「맞지 마.」

「…….」

여자가 작게 웃는다. 여자가 샤워기를 틀자, 얼음물에 비견될 정도의 찬 물이 강력한 수압으로 김 군의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다. 김 군이 너무 좋아서 삼바를 춘다.




여자는 무릎베개로 김 군을 눕히고 사정없이 귀지를 공략했다. 김 군은 즐거움에 비명을 올렸다. 여자는 김 군의 손톱, 발톱까지 다 깎아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모두 반창고를 붙여 줬다. 김 군은 점점 고통에 익숙해졌다. 다음에 여자는 김 군의 얼굴에 오이를 덕지덕지 붙여줬다. -남자가 뭘 이런 걸 해. 김 군의 불만에 여자가 말한다. -앞으로는 남자들도 가꾸는 시대가 올 거야. 그러니깐 잔말 말고 붙이고 있어.

「근데, 오이가 이렇게 두꺼워도 되는 거야?」

여자는 자기가 불리할 때면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은 미용실이야.





어차피 가게 될 거, 제 발로 가자는 마음에 김 군이 먼저 집을 나섰다. 미용실에서 무슨 머리를 하건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만은 피해줬으면 좋겠다. 1층까지 다 내려와서, 여자는 지갑을 깜박한 것을 알아챘다. 지갑을 가져오겠다며 여자가 다시 계단을 올랐다. 김 군이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아래 계단에서 두 명의 중년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503호 얘기 들었어?」

여자의 집이 503호이다. 김 군의 눈길이 아래쪽을 향한다.

「아, 그 음침하고 기운 없는 여편네 사는 곳?」

「그래, 근데 그 남편이 S그룹 사장이라지.」

「아니, 무슨 수로 그런 남편을 꿰찼대?」

「내 말이. 나이도 있으면서 여태껏 자식도 없더니만.」

「세상에, 남자가 너무 아깝다. 그나저나 그 양반 연봉이 얼마래?」

「글쎄, 못해도 오천은 되지 않을까?」

그 순간, 김 군이 계단 손잡이를 걷어찼다. 시끄러운 쇠 울림이 징-하고 유쾌하지 못한 여운을 남긴다. 김 군은 두 사람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입을 열었다.

「여기가 아줌마들 안방이야? 아까부터 거 엄청 시끄럽네.」

「뭐?」

「귀 먹었어? 냄새나니까 그 입 닫으라고.」

파마를 한 중년 여성이 기가 막힌 듯 김 군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뭐, 이딴 경우 없는 자식이 다 있어? 너 뭐하는 놈이야?」

김 군이 다가서자 삿대질하던 파마 여성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 그 여자가 숨겨둔 자식이다, 왜.」

김 군이 씹어뱉듯 위협조로 말하자, 두 중년 여성이 꼬리를 말고 뒷걸음질 쳤다. -어이구, 별꼴이네. 저런 깡패 같은 놈을 봤나. 김 군은 그 둘을 내버려두고 빌라 현관을 지나쳤다. 곧이어 여자가 내려오자, 둘은 눈치를 보며 흩어진다.





새천년 뷰티 살롱. 간판 이름 한번 극악이네. 김 군이 자리에 앉자 화장이 두꺼운 원장이 무슨 머리를 할 지 묻는다. -최대한 단정하게요. 대답은 언제나 여자 쪽이다.

「원래 이런 건 아들이 아니라 딸하고 오는 거야.」

김 군의 옹알이를 듣는 체도 안하고 여자는 잡지를 본다. 그리곤 또 촌스러운 예전 노래를 부른다. 김 군의 머리를 매만지던 원장이 묻는다.

「어머, 어머님이세요? 어머니가 굉장히 동안이시다. 뒤에서 보면 다들 연인인 줄 알겠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여자가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떤다. 밖에 나가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라, 김 군은 자기도 모르게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니? 김 군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여자가 머리 감겨주는 일이나 손톱 깎아주는 일 등은 어색해도 집안일엔 능통했다. 여자는 요리고 청소고 빨래고, 무엇이든 척척 해내었다. 이제 김 군의 옷에선 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고 바지는 항상 날이 선 상태였다.

-위이이잉

청소기를 돌리던 여자가 쓰레기통에 처박혀있던 김 군의 핸드폰을 주워든다. 이윽고 여자가 김 군을 불렀다. -이거 네 거 아냐? 그러나 핸드폰을 건네받은 김 군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다. -간수 좀 잘 해. 혹시 고장 났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켜봐. 여자가 계속 주시하고 있자, 마지못해 김 군이 핸드폰 전원을 켰다. 핸드폰에 불이 들어오면서 문자 메시지 115건, 부재중 전화 79통이 뜬다.

『너 지금 어디야』

『야, 지금 난리 났어. 명진이 이 새끼, 일어나자마자 너 잡아오라고 난리치고 있다.』

『살아있긴 하냐? 앞으로도 가능한 한 눈에 띄지 마. 명진이 애들 풀었어.』

『잡히면 너 진짜 죽는다.』

문자를 차례차례 확인해보던 김 군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죽지 않았다. 죽이지 않았다. 명진이한테 화풀이로 몇 대 흠씬 두들겨 맞으면 된 거다. 분명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김 군이 여자가 들고 있던 청소기를 낚아챈다. 그리곤 쾌재를 부르며 청소기를 파트너삼아 왈츠를 춘다. 영문을 모르겠던 여자가 핸드폰을 주워든다. 드르르르륵. 새로 수신한 문자 1건. ok.

『요즘은 왜 이렇게 연락이 뜸 해? 얼굴 보기 힘드네. 용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여자는 잠시 핸드폰 액정 화면을 노려보다가 변기 속에 핸드폰을 빠뜨렸다. 그리고 김 군을 부른다. -실수로 빠뜨렸네. 엄마가 나중에 새로 사줄게. 여자의 미안하다는 표정을 보던 김 군이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됐어. 필요 없어. 어차피 나랑 어울리지도 않는 물건이었는걸.」

게다가 김 군은 핸드폰이 물에 빠진 것에 대해 기묘한 안정감마저 느끼고 있는 터였다.





마트에서 시식을 하러 돌아다니던 여자와 김 군은 이번에도 식거리만 쓸데없이 많이 샀다. -됐어, 내가 들래. 여자가 무거운 짐을 들려는 걸 김 군이 만류하며 짐을 뺏었다. 여자가 웃으며 김 군의 엉덩이를 두들긴다. 김 군이 질겁하며 도망친다. 여자가 그 뒤를 맹렬하게 추격한다.

「다음엔 또 어디갈래? 백화점?」

「그건 어제도 갔잖아.」

김 군이 입을 삐죽인다.

「그럼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김 군이 한참을 망설이다 말한다.

「놀이공원.」

놀이공원? 하고 반문하던 여자의 눈이 커진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그래, 가자. 꼭 가자.」

여자의 말에 김 군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그러면 다음 주쯤이 괜찮을라나……




빌라 앞에 다다르자 누군가가 주차장에서 튀어나왔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각진 턱과는 반대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남자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분명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가 들고 있던 가벼운 장바구니가 떨어졌다. 그 안의 내용물이 빠져나와, 형편없이 바닥을 구른다. -여, 여보. 남자가 다짜고짜 여자의 손목을 잡는다. 반사적으로 김 군이 그 사이를 가로막는다. 남자의 눈빛이 더 사나워졌다. 익숙한 폭력의 냄새. 시원한 박하 향의 남자에게서 그러한 종류의 냄새가 났다. 남자가 김 군의 멱살을 잡자 여자가 혼비백산한 채 말한다.

「여보, 들어가서 얘기해. 내가 다 설명할게. 응? 여긴 보는 눈도 많잖아.」

마지막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애써 화를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가 마지못해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여자가 떨어뜨린 장바구니를 수습하던 김 군을 향해 남자가 일갈한다.

「쥐방울만한 새끼, 어딜 내빼려고. 너도 따라와.」

그 말에 김 군 역시 장바구니 따위는 내팽개친 채 험악한 기세로 계단을 밟았다. 여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남자가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간다. 여자와 김 군이 뒤따라 들어가기 무섭게, 집안에 화분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남자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있었다. 여자는 김 군의 손을 끌고 가 억지로 방 안에 밀어 넣었다.

「1부터 100까지 세고 있어. 우리 영호, 착하지?」

여자의 음색이 몹시 떨렸다. 엄마 문 열어. 김 군이 문고리를 열려고 하자, 여자가 막는다.

「네가 나오면 상황은 더 악화 될 뿐이야. 제발, 엄마 말 좀 들어라. 응?」

그 말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김 군의 손에도 힘이 풀렸다.

「엄마가 널 지켜줄게.」


1, 2, 언제부터야? 5, 6, 7, 여보, 그게 무슨 말이야. 8, 9, 10, 11, 새파랗게 어린놈이랑 놀아난 게 언제부터였냐고!? 와장창 쨍그랑 16, 17, 18, 19, 여보, 그게 아니야. 나 저 애 키우고 싶어. 21, 23, 우리 아들로…… 25, 26, 27, 28, 이젠 정말 별의별 미친 소리를 다 듣는 군. 31, 32,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37, 38, 39, 아냐, 여보. 42, 43영호 올해로 19살 되는 앤데 우리가 입양하자. 48, 49, 50 영호, 걔, 착한 애야. 53, 54, 55, 56, 57, 58, 나 이제 발작도 안 해. 62, 63, 와장창, 너 지금 내 앞에서 시위 하냐? 65, 애새끼 못 낳는 게 네 년 탓이지, 내 탓이야? 67, 68,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70, 71, 어떻게 그래, 나한테? 73, 잊었어? 네가 내 새끼 죽였잖아! 75, 76, 이번만큼은 나도 못 뺏겨! 아니, 안 뺏겨! 78, 와장창 79, 팔다리도 안 붙은 게 무슨 생명이야! 쨍그랑 쨍그랑 81, 82, 83,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85, 86, 나도 지은 죄가 있어서 매번 쓸데없이 유아용품 사들이는 거 다 눈감아줬어 89, 90, 것도 한 두 번이여야지. 91, 쨍그랑 툭하면 네 발작하는 거 꼴도 보기 싫어서 집 나갔다. 93, 94 그런데 내 집에 남자를 끌어들여? 우당탕퉁탕 95, 누군 뼈 빠지게 일해 돈 벌고 있는데, 짝, 96, 퍽, 이제 보니 내 씨가 맞는지도 확실치 않네. 퍽퍽퍽 97, 98, 난, 퍽, 99,그, 퍽, 런, 퍽, 줄, 퍽, 도, 퍽, 모, 퍽, 르, 퍽, 고, 퍽, …100





「그만해, 이 미친놈아!!」

김 군이 달려든다. 식칼을 앞세우고. 남자가 뒤돌아보지만 이내 가슴이 뚫린다.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피가 튀는 순간 김 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중심을 잃고 김 군의 앞으로 넘어진다. 남자의 붉게 충혈이 된 눈동자와 마주친다. 김 군은 자신의 몸 위로 엎어진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여자가 다가선다. 남자의 엎어진 몸이 경련한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남자의 입이 뻐끔거린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 여자와 김 군은 그런 남자를 망연자실 보고만 있다. 남자의 고개가 꺾인다. 여자가 처연한 얼굴로 일어나 떨어진 식칼을 곧추 잡는다. 김 군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경련하는 남자를 주시한다. 여자가 엎어진 남자의 몸 위로 체중을 실어 꽂는다. 푹, 푹, 푹. 김 군이 으으, 하고 소리를 낸다. 푹, 김 군이 우는 줄도 모르고 여자는 남자를 식칼로 마구 난자하는데 열중한다. 푹, 푹, 김 군이 피 묻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다. 푹, 푹, 푹, 푹, 푹. 엄마, 제발, 그만해요. 무서워요. 엄마, 엄마. 김 군의 부름에 여자가 잠시 칼질을 멈추고 바라본다. 잠시만, 이것만 처리하고 안아줄게, 푹, 푸욱.




김 군이 자기 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동안, 여자 혼자서 시체 처리를 도맡았다. 20L짜리 가정용 쓰레기봉투가 6개가 나왔다. 그것을 냉장고와 벽장 속에 나눠 집어넣었다. 바닥청소가 말끔히 끝날 때까지도 김 군은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여자가 김 군의 방에 들어온다. 이불을 칭칭 감고 있는 김 군을 바라보던 여자가 옆에 눕는다. 뒤에서 끌어안자 김 군이 흠칫 놀란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아주 평온한 어느 6월의 마지막 밤. 불 꺼진 거실의 유일한 조명인, TV에서는 지구 종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느 종교 집단의 광기 어린 모습을 바라보며 여자와 김 군은 무료하게 전병을 씹고 있었다. 여전히 TV를 가만히 주시하던 김 군이 말을 걸었다.

「종말론 말이야. 그딴 거 개나 줘 버려, 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대로라면 다 같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여자의 손이 김 군의 머리를 마구 헤집는다. 여름이 시작되고, 시체 썩는 냄새가 요즘 들어 더 심해졌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선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암묵적인 약속인 양. 거실에선 TV소리와 오도독, 전병을 씹는 소리만 들렸다.




자고 일어나보니 손톱에 투명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다. 김 군이 아세톤을 찾자, 여자가 그런 거 없다고 말한다. -손끝에도 묻었단 말이야. 지저분하게 이게 뭐야. 김 군의 불평이 들리는지 마는지 여자는 여전히 부지런하게 아침상을 차렸다. 김 군이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수저를 놓았다. 얼핏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벌써 7월 1일이다.

「수산물 도매 시장 가서 굴 좀 가져와.」

식사 중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뭐 하러, 거기까지 가. 그냥 요 앞 마트에서 사지. 김 군의 대꾸에 여자가 단호하게 말한다. -안 돼, 이미 주문해둔 거라 직접 가서 가져와야 해. 여자의 말에 김 군은 묵묵히 밥을 먹는다. 고기 썩는 냄새보다야 굴 비린내가 낫겠지. 후루룩, 국물을 마시고 김 군이 일어난다.

「잘 먹었습니다.」


여자가 버스를 잘못 가르쳐주는 바람에, 40분 거리를 장장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게다가, 여자가 적어준 상호를 찾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어서 시장바닥을 온통 들쑤시고 다녔다. 아무리 물어봐도 그런 상호는 없었다.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자 여자가 받는다. -그럼 그냥 와. 여자의 말에 김 군이 시장바닥에서 길길이 날뛴다. 그런데 여자는 오히려 웃는 반응이다. 여자가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보였지만 잔뜩 약이 오른 김 군은 수화기를 거세게 내려놓았다.




-다녀왔습니다.

김 군이 집에 들어섰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딘가 다르다. 집안은 평소처럼 깨끗했지만 황량함이 감돌았다. 기묘한 이질감에 김 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 군은 급박하게 집안 내부를 돌아다니며 여자를 찾았다. 보이지 않는다. 불안감을 머금고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여자의 발이었다. 기운 없이 매달려 있는 몸. 여자의 얼굴은 머리카락이 덮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혀를 빼물고 옷걸이에 묶인 벨트에 자신의 체중을 간신히 의지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와 여자의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다용도실과 이어진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여자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조금만 있으면 죽은 동물의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방문 앞에서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던 김 군의 발치에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종이를 주워들자 두 장이었다. 하나는 그냥 쪽지였고 다른 하나는 유서라고 적혀 있었다.



『 저의 남편은 오래전부터 절 상습적으로 폭행해왔습니다.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습니다만 남편은 과중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언제부턴가 모두 집에서 풀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에 대한 마음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한 동안은 바보같이 그런 남편을 받아주었습니다. 비록 남편이 저에게 심한 폭행을 가했지만, 집 밖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고 누구보다 끔찍이 절 위해주는 남편이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제 몸이 아이를 갖기 힘든 몸이었다는 것이 저에게 가장 큰 짐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전, 계속된 시도 끝에 정말 기적처럼 아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이를 가졌음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남편의 구타로, 어이없이 저의 목숨과도 같은 귀한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말로는 죄를 뉘우친다 말하지만, 저는 제 새끼를 죽인 남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남편의 모든 것이 가증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이 어떤 건지, 너무나 뼈저리게 새겼습니다. 전 그 때의 충격으로 우울증이나 발작 등을 앓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그런 저를 보고 넌덜머리가 난다며 자주 집을 비웠고, 저는 그 와중에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던 저는 남편과 큰 말싸움을 했고, 역시나 이성을 잃게 된 남편에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로 떠드는 남편의 모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선 안 되지만 순간 이성을 잃게 된 전 구타하고 돌아서는 남편의 등 뒤를 향해 식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모두가 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유서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유서엔 김 군에 대해 아무런 언급조차 나와 있지 않았다. 김 군이 쪽지를 펴들었다.



『너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 너는 여기 애초에 온 적도 없었던 거야. 이 집에서 네 흔적은 모두 없애버렸으니깐 너도 칠칠맞게 흔적 남기지 말고 가. 김영호, 넌 오늘부로 내 아들이 아냐. 여기서의 일은 모두 잊어.』

김 군은 이번에도 반항하고 싶었다. 여자는 그게 가능할까. 그러고 한참을 방안을 서성이던 김 군이 결국 유서는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고 쪽지는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집에는 정말 김 군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모두 치웠을 터였다. 어디에도 자신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집을 떠나기 전 김 군은 여자에게 큰 절을 올렸다.




* * *




김 군은 사실 놀이동산이 처음이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놀러오는 작은 규모의 유원지라 야간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놀이기구도 8가지뿐이었다. 그렇지만 화려한 불빛 조명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김 군의 눈에 커다란 인형 몇이 들어왔다. 인형의 머리 뒤쪽엔 운전대와 동전입구가 있었다. 500원만 넣으면 탈 수 있다. 잠시 주머니를 뒤적이자 마침 잔돈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김 군은 커다란 강아지 인형 앞으로 다가가 500원을 주입했다. 김 군이 올라타자 곧 인형이 산만한 멜로디를 울리며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왜 하필 이 노래야, 씨발.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니나니나 니 고릴라다

김 군은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 저 사람 좀 봐.」

「쉿, 쳐다보지 마. 눈 마주칠라.」

김 군의 울음에 동조해주는 건 시끄러운 매미뿐이었다.





『내 이름은 매미. 내 얘기 한 번 들어볼래?

피-오스 피오-스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 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 피오-스 피오-스-쒸-이-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루루피오-스 피오-스-쒸-이-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빌 쒸르빌!추올스 추올스 추올스 추루루루루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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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1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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