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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기 독자우수단편 우수작을 선정합니다. 우수작으로 2차례 이상 선정되시거나 최종 우수작으로 선정되신 분께는 거울 필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3분기 우수작 후보작은 7월 후보작인 박낙타 님의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 scholasty 님의 「흰 뼈와 베어링」, 8월 후보작인 감동란 님의 「수태고지」, 라그린네 님의 「채굴」, 9월 후보작인 홍대입구3번출구 님의 「구멍」 5편이었습니다. 심사단은 5편 중에서 라그린네 님의 「채굴」을 3분기 우수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A
3분기는 우수 후보작이 5편이나 되어 심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작품들이 주제의식의 날카로움과 서사의 몰입도를 고루 갖추고 있어 읽는 즐거움도 많았습니다. <수태고지>는 장애인이자 미혼모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켜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고난과 차별적 시선을 조명하는 작품이었습니다. 허나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이 부자연스러웠고 인물들이 필요 이상으로 교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소설의 매력을 반감시켰습니다. <구멍>은 제목으로 쓰이기도 한 ‘구멍’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아버지의 부재, 삶의 허무감 등을 견뎌내며 성장해 나가는 현대 소설로 읽혔습니다. 구멍이라는 메타포가 과하게 반복되어 아쉬웠습니다. 더하여 청소 노동자에 대해 과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장면들이 언뜻 있어 선택을 망설여지게 했습니다.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는 이렇다 할 단점이 보이지 않는 빼어난 수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초부터 범람하고 있는 ‘어반 판타지’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이 경쟁력에서 발목을 잡았습니다. <흰 뼈와 베어링>, <채굴>은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보기 드문, 소재의 난이도가 높은 하드 SF를 지향하는 작품들이란 점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심사위원단은 마지막까지 두 작품 중에서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흰 뼈와 베어링>, <채굴>은 각기 서로 다른 일장일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흰 뼈와 베어링>은 주제의식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분량에 비해 너무 많은 장치가 들어간 탓에 서사가 밀도를 견디지 못하고 부분부분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채굴>은 막힘없이 읽히는 서사를 보유하고 있지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부분이 희미해 자칫하면 독자는 이 이야기를 읽고 허무맹랑함을 느낄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트코인 채굴과 행성 채굴을 메타포로 삼은 이 작품은 행성을 채굴하는 이들이 실은 외계인이며, 그들이 채굴 중인 행성이 바로 멸망한 ‘지구’라는 서술 트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술 트릭은 작품의 절정부에서 반전 요소처럼 필요한 만큼 선명하게 드러나야 함에도 <채굴>은 독자와 추리 게임을 하듯 단서를 무척 제한적으로만 제시합니다.
너무 선명한 작품과 너무 희미한 작품 가운데 제가 <채굴>을 선택한 이유는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거울의 독자우수단편 심사를 보면서 깨달은 점은 좋은 기량을 가진 작가라고 해서 꼭 좋은 작품을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은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공간이 아니라, 독자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저부터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라그린네>님에게 축하를 보내드립니다.

B
매월 분기 우수작 후보작을 선정할 때마다 이번 분기 우수작을 결정하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을만큼 이번 분기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많은 분기였습니다. 후보작이 한 달에 두 편이 되는 일이 연속으로 두 번이나 나타났다는 것도 드문 일이었지요. 이렇게 모인 다섯 작품 중에 분기 우수작을 선정하는 것은 그래서 특히 의견이 모이기 쉽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구멍>은 다섯 작품 중에 가장 장르성이 약한 작품입니다. 비장르 작품도 거울에 종종 게시되고 있기 때문에 장르 작품이 아니라고 해서 우수작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예시가 될 것 같습니다. 주인공과 일치된 서술 방식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고, 대사의 압축성도 적절해서 여러 번 작가가 숙고해서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다만 인물에 대해서 외부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이야기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공익 근무자임에도 실상 청소노동자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마땅히 굴욕적으로 느껴야 할 상황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물의 왜곡된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한 것이라면, 정말 그 상황이 굴욕적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수태고지>는 장애와 임신에 대해서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잘 정돈된 작품입니다만,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인물의 묘사가 전형성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소수자 집단을 그려낼 때는 특정 집단을 그리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질 수 있겠지만, 자칫 집단 전체를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결말까지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길로 간다는 것도 조금 아쉽습니다.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는 늘 고르게 우수한 작품을 공개해 주시는 박작가님의 작품답게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인간이었던 사람이 개로 변하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인간이 되고자 하고 누군가는 그대로 개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는 전개가 재미있네요. 다만, 마지막의 선택까지 이르는 길이 평이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과 인간이 되길 거부하는 사이의 갈등이 조금 더 부각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흰 뼈와 베어링>은 인간처럼 성장 가능한 안드로이드 ‘레미’를 둘러싼 가족 사이의 갈등을 그려냅니다만, 마지막의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돌연 나타난 ‘슬로우 조’의 이야기가 글의 초반에도 제시되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글에서 화자로 어떤 인물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글의 뉘앙스가 많이 달라질 수 있지요. 화자인 주인공이 그토록 현동을 싫어하는 이유를 좀 더 상세하게 그려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내에 대한 불만이 현동에 대한 불만이 된 것인지, 현동이 레미이기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것인지, 자신의 아이라고 해도 반항하는 초등학생 아들과의 사이에서는 갈등이 생기기 쉽지만, 현동과 화자와의 관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려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채굴>은 글에서 현재 문제가 되는 코인 채굴을 바로 연상시킬 수 있는, 사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나 기후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오직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목적으로 코인 채굴을 위해서 전기를 소비하고 있는 현재의 실태와 소설 속 채굴업자의 실태는 전혀 다르지 않지요. 행성의 비밀이 발견되었을 때 그 사실을 덮어버리는 장면은 문화재를 발굴해도 재산권이 침해된다고 생각해 그 사실을 덮고 건축을 진행하는 사태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이 행성에서 발견된 것의 진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영영 밝혀지지 않겠지요. 마지막의 결말은 그래서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무엇보다 독자를 사로잡는 재미가 있고, 글의 도입부에서 중반 이후까지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전개하는 속도감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결말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섯 작품 중에서 이 작품을 고릅니다. 엔딩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 보시면 더 좋은 작품으로 개작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C
심사평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3분기 독자우수단편 후보작들은 전반적으로 완결성이 크게 높지 않았으며 저마다의 장단점을 평균으로 냈을 때 돋보이거나 떨어지는 작품이 없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싶습니다. scholasty 작가의 ‘흰 뼈와 베어링’, 그리고 라그린네 작가의 ‘채굴’을 두고 고민하던 중 ‘채굴’을 추천하였습니다만, 두 작품의 진행과 구성의 완성도는 거의 같습니다. ‘흰 뼈와 베어링’은 문장이 매끄럽고 짜임새 있지만, 배경이나 인물, 상황 설정에 있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반대로 ‘채굴’은 미래 우주 채굴에 관한 작가 나름의 구체적인 상상력이 돋보였지만, 문장의 짜임과 인과성에서 부족함이 보였습니다.
두 소설 모두 미래의 기술을 다루는 SF이기에 소설 내부에서 묘사된 기술력이 얼마나 그럴듯한지를 주로 보았습니다. '채굴'은 미래의 우주에서 채굴을 직업으로 삼는 서술자가 경매로 낙찰받은 행성에서 비밀스러운 발견을 하며 이어지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미래의 우주 산업 전반과 돈을 위해 행성을 채굴하는 주인공의 상황, 기술적인 용어들이 상당한 구체성을 띠고 있습니다. ‘흰 뼈와 베어링’ 역시 가파르게 감소하는 출생률의 앞에서 ‘순수’ 한국인 로봇을 만들어낸다는 발상은 기발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휴머노이드를 학교에 보내는 것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30년 동안이나 주요 기능이 억제되어야 하는 비효율적인 휴머노이드를 생산할 필요가 있는가.’처럼 이야기의 근간을 흔들 만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저는 이 소설이 내부에서 발생하는 주요 질문에 명확히 답하고 있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채굴'에서도 여러 한계가 보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보완되어야 할 점은 결말입니다. 저는 ‘우주의 비밀은 없었다’라는 결말의 유효성을 의심합니다. 서사 내부의 모든 비밀이 반드시 밝혀질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이야기의 진행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크게 끌었던 행성의 비밀이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독자로서 우주의 비밀을 돈과 재물이 이기는 결론은 미완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해석되고 발견되기를 기대하며 이야기를 따라오던 독자에게는 허무한 마무리입니다. ‘비밀은 없었다’라는 결말 또한 소설 전체를 의미 없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결말까지 도달하는 과정 안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말에서 보이는 아쉬움은 오히려 전반부의 미스터리가 증폭하던 기대감이 컸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우주의 비밀'을 설정하기 힘들다면 노인 개인의 바람이나 소원 등이 행성의 내부에서 실제로 발견되는 것은 어떨까요. 우주와 행성이라는 신비한 미지의 공간을 십분 활용하여 수수께끼의 노인에게 '진짜 비밀'을 만들어준다면 이야기의 끝을 견고하고도 개연성 있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가로 문장의 정교함을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거 불법 아닌가요?"/"불법은 아니야. 합법이 아닌 거지."와 같이 간단히 읽고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없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들이 있습니다. 추후 내용 수정이 이루어진다면, 문법과 표현법까지 두루 함께 다듬어본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소설에 여러 심사위원의 표가 고루 분산되었던 만큼 타 후보작들에게도 오래 눈길을 주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라그린네 작가님께는 충분한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만 ‘채굴’은 엇비슷한 완성도의 다섯 소설 중 선택된 한 작품이므로 더욱 이야기를 개연성 있고 섬세하게 쓰는 훈련에 정진하시길 독려합니다.

D
행성 채굴에 나선 팀이 고대 유적을 발견하면서 생긴 일을 다룬 작품입니다. 장르적인 재미와 현실의 씁쓸함을 잘 챙긴 작품입니다. 문체 역시 잘 다듬어져 있으며 대사의 품질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결말 역시 핍진적 허무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말할 것 없이 좋은 작품입니다.

E
단순한 플롯 안에 상당히 깊이있는 SF적 주제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하게 갈무리되어 있는 부분이 특징적입니다. SF에서 수없이 반복한 본질적 질문이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와 결합해서 스러지고 마는 부분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다음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읽는 소설은 아쉽게도 여기서 끝나버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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